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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화. 라나문 VS 서넛 (291/367)


291화. 라나문 VS 서넛
2022.12.11.



 
아낙차는 한 손에는 노트를, 한 손에는 커다란 국자를 들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노트에는 그녀가 여우 가면의 지하성에서 머물 때 흑마법서에서 암기한 내용이 그대로 실려 있었다.

아낙차는 모든 준비를 철저히 했다.

틀라가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여우 가면을 의심할 때부터 시작했고,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졌을 때는 완전히 본격적으로 두 모자에게 필요한 내용을 위주로 흑마법서를 외웠다.

그리고 지하성을 탈출한 뒤 종이와 펜을 쥘 수 있게 되자마자 외운 걸 모조리 다 적어 들고 다녔다.

이 노트는 쇼버 후작가에 머물 때, 임시로 적은 것들을 제대로 옮겨 적으며 다시 한번 내용을 다듬은 것이었다.

그때. 방 한쪽에 난 벽난로로 검은 재가 부스스 떨어진다 싶더니, 그 위로 틀라가 나타났다.


“다녀왔어?”

아낙차는 커다란 솥에 담은 여러 약물을 제조하려면 계속 국자를 저어야 했기에, 아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서 물었다.

틀라는 벽난로 밖으로 나와 옷에 묻은 검댕을 털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어머니. 레안을 죽이지 못했어요.”

열심히 국자를 젓던 아낙차의 손이 멈칫했다.

틀라는 눈치를 살피며 거울 앞으로 가 얼굴에 묻은 검댕을 손등으로 지웠다.

아낙차는 다시 국자를 저으며 뼈 있는 말을 했다.


“레안은 검술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지. 못 죽인 걸까 안 죽인 걸까.”

“……찌르긴 했어요. 하지만…….”

“…….”

“형제잖아요. 죽일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

틀라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아낙차는 한숨을 내쉬고서 아들을 쳐다보았다.

틀라는 심약한 편이 아니었으나 혈육에는 조금 물렀다. 아낙차는 그게 답답했다.


“네가 그런 자세로 나오니 라틸에게 패배한 거다. 훨씬 월등한데도. 정신 차려. 네가 그렇게 나와봤자 그 남매가 널 신경이나 쓸 것 같니?”

그게 말처럼 잘 될 리가 없다. 사람 마음이 다 그렇듯이. 틀라는 한숨을 내쉬고 갈색 1인용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어머니는요? 연구는 잘 돼 가요?”

“길어도 몇 년 안에는 다가 공작을 우리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어.”

아낙차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녀는 실제로도 자신 있었다.

처음 해보는 것인 데다, 응용까지 하려다 보니 실패했을 뿐. 그녀는 시간이 지나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니 황후가 우리에게 다시 다가 공작을 맡길까요?”

“맡겨야지. 어쩌겠어. 지금 공작은 제대로 식사하는 시늉조차 못 내는걸. 당장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서 식사 자리를 피하겠지만, 몇 년씩 그러면 다들 이상하다고 생각할걸. 선택권이 없을 거다.”

뿌듯하게 웃은 아낙차는 팔이 아픈지 노트를 내려놓고 다른 손으로 국자를 바꿔 잡으며 덧붙였다.


“다른 흑마법사를 구할 수 없다면.”

 

* * *

메이시가 황궁에 관심이 많은 듯해 며칠 머물다 가라고 보내준 후.

라틸은 집무실로 돌아가는 대신 회랑을 이리저리 어지럽게 오가며 연신 고개를 좌우로 기우뚱거렸다.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에, 서넛은 뒤를 따라다니다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고개를 자꾸 그러시니 이구아나 같아서 쳐다보게 됩니다.”

라틸이 입을 네모나게 만들고서 쳐다보자, 서넛은 빙그레 웃으면서 옆으로 와 섰다.


“고민이 있으면 제가 상담해 드릴까요?”

“이구아나 말할 줄 압니까?”

“아니요.”

“그러면 상담 못 할 텐데.”

라틸이 째려보고 돌아서자, 서넛은 다시 옆으로 와 서면서 달래는 말을 냈다.


“폐하는 위대한 황제이시고 마음이 넓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말과 달리 눈은 그저 재밌단 투로 웃고만 있어서, 라틸은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지만 이구아나 소리를 들었다고 진짜로 화가 나는 건 아니었던지라, 라틸은 솔직하게 자신이 생각하던 걸 털어놓았다.


“아낙차랑 틀라가 다가 공작이랑 손잡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서넛은 장난기를 거두고 놀라 물었다.


“그럼 위험한 거 아닙니까?”

적과 적이 손을 잡다니. 좋지 않았다.

그러나 라틸은 씩 웃으면서 부정했다.


“아뇨.”

서넛은 라틸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라틸은 길게 설명하는 대신 어딘가를 쳐다보며 만족한 고양이처럼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칼라인한테 가야겠습니다. 심장이 두근거리네요.”

“심장이요?”

“내가 심장 두근거릴 땐 승리가 아른아른할 땝니다.”

“!”

 

* * *

라틸이 메이시, 서넛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펌크슈는 라나문을 찾아가 간만에 형 얼굴을 보고, 여전히 형이 얼음 같은 것도 보고, 자신이 선황후를 직접 모시고 왔단 자랑도 하다가 신이 나 말했다.


“선황후 폐하께서 형을 지지해주면 좋겠다. 그러면 폐하도 형을 더 중하게 보실 텐데. 그렇지?”

“글쎄.”

눈치라고는 어디 팔아먹었는지 모르는 그 황제가 과연. 라나문은 속으로 중얼거렸으나, 동생에게 아내나 다름없는 황제 흉을 볼 수는 없으니 입을 그냥 다물어 버렸다.

라나문이 말하다 그만두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기에, 펌크슈는 형이 대답을 피해버리자, 계속해서 이 이야기를 하는 대신 바로 화제를 돌렸다.


“아 맞다. 형. 나 여기 서넛 경이랑 같이 걸어왔어.”

“서넛?”

“최연소 근위기사단장 서넛 경. 멀리서 봐도 멋진데 실제로 보니까 더 멋지더라!”

“글쎄.”

펌크슈는 ‘엄마 형이 계속 글쎄! 하고 대답해!’ 외치고 싶어졌다. 그러면 공작부인이 와서 그래도 한 소리 해줄 텐데.

하지만 라나문이 저렇게 대답하는 것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기에, 펌크슈는 다시 또 신이 나서 서넛을 칭찬했다.

평소 존경하던 기사를 만난 게 좋은지, 얘기를 계속할수록 라나문의 냉랭한 표정이 점점 더 온도를 떨구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펌크슈는 갑자기 표정을 확 바꾸면서 중얼거렸다.


“그런데 서넛 경은 이상한 질문을 많이 하더라, 형.”

“이상한 질문?”

“좋아하는 여자가 있냐던가, 약혼을 했냐던가, 뭐 그런 거 있잖아. 그러다가 내가 난 그냥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결혼할 거라 했더니 표정이 갑자기 무서워져서……. 내가 뭐 말실수한 거야?”

펌크슈는 말하다 보니 자신이 말실수를 했나 걱정되는 듯 시무룩해졌다.

그러나 라나문은 펌크슈의 말을 듣자마자, 전에 서넛과 라틸이 사이좋게 연무장에서 놀던 게 떠올라 기분이 나빠졌다.

친한 사이라면 펌크슈의 결혼 이야기가 궁금할 수도 있겠지만, 서넛은 아트락시 가문과 가깝게 지내지 않는다.

그런데 펌크슈에게 갑자기 결혼 관련된 질문을 퍼부었다고?

라나문은 서넛이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빠르게 알아챘다. 아트락시 공작이 차남까지 황제에게 보내려는 건 아닌가,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불쾌하군.”

“어? 아니, 그 정도로 불쾌하진 않았어 형.”

“근위기사단장이 뭐라고 감히 폐하의 집안일에 왈가왈부하는 거지?”

“어? 아니, 내 결혼 물어본 건데 형.”

펌크슈는 라나문의 머릿속에서 벌어진 일을 모르기에 어리둥절해서 형을 보았다. 하지만 라나문은 이미 판단을 내리고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형? 어디가?”

“질투 많은 기사.”

“어?”

“넌 그만 돌아가도록 해라.”

“나, 나, 방금 왔는데?”

“돌아가. 가서 아버지한테 말씀드리고. 꿈 깨시라고.”

“어?”

펌크슈는 눈이 커다래졌다.


“갑자기? 그런 말 하면 아버지가 내 머리를 때릴 거야 형!”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으실 거다. 내가 전하라 했다 하고.”

“!”

동생에게 돌아가라 지시한 라나문은 곧장 자신의 시종인 카르둔을 찾아다 물었다.


“폐하께서 지금 어디 계시지?”

카르둔은 라나문이 황제에게 간다는 줄 알고 기뻐서 대답했다.


“안 그래도 언제 말씀드려야 하나 했습니다. 지금 그 용병한테 가 계십니다, 도련님. 얼른 가서 끼어드시지요. 대적자로서의 사명 같은 게 떠올랐다고 하면 들어오라 하시지 않을까요?”

라나문이 정말로 그쪽으로 걸어가자, 카르둔은 신이 나서 따라갔다.

공신의 장남이자 유력한 대적자인 라나문을 두고, 감히 용병 따위가 황제와 좋은 시간을 보내다니. 생각만으로도 질색이었던 터라 아주 잘 됐다 싶었다.

그러나 칼라인의 방 앞에 찾아간 라나문은 문을 두드려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대번에 문 앞에 대기 중인 서넛을 찾아가 물었다.


“잠시 얘기 좀 하지.”

카르둔은 당황해서 그의 도련님을 보았다.


“도련님? 그쪽 아니고 저쪽…….”

하지만 라나문은 건조한 시선으로 정확히 서넛을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그 시선을 받다가, 서넛은 힐긋 뒤돌아 문 쪽을 한 번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 * *

서넛을 데리고 멀지 않은 정원으로 간 라나문은 주위에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서넛도 무심한 눈길로 라나문을 보았으나, 아무래도 라나문이 대적자인 걸 알고 있다 보니 무심한 척 굴기가 어려웠다.

둘만 있게 되면 서넛은 라나문을 지금이라도 죽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충동이 자꾸 솟았다.


“무슨 일로 절 부르신 겁니까.”

서넛의 덤덤한 질문에 라나문은 팔짱을 끼고서 불쾌하다는 듯 그를 보며 물었다.


“내 동생에게 이런저런 개인적인 질문을 해댔던데.”

서넛의 한쪽 입꼬리가 픽 올라갔다.


“그거 때문에 오셨습니까. 형제가 꼭 코알라 같습니다. 그런 소소한 걸 얘기하고 듣고 따지러 오고.”

“코알라?”

“아트락시 가문에선 결혼 얘기는 대외비입니까? 나눌 화제가 없으니 물어본 것뿐입니다.”

“그래?”

“예.”

“그런 것치곤 구구절절 변명이 좀 긴데.”

“!”

서넛과 라나문의 시선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부딪쳤다.

잠시 침묵 후.

라나문이 서넛의 위협적인 눈길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를 사랑하나?”

 

 
서넛은 미동도 하지 않았으나 순간적으로 눈동자가 떨렸다.

고작 펌크슈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고 바로 유추해 낸 것도 놀랍지만, 유추하자마자 찾아와 물어보다니.

늘 정적인 라나문 같지 않은 반응에 서넛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라나문은 개의치 않고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계속 이어갔다.


“하긴. 상관없지. 내 동생이 폐하의 후궁이 되건 말건, 그건 내 일이고 동생 일이고 폐하 일이지. 경이 상관할 바가 아니니까.”

이해하는 척 말하지만 철저하게 서넛 쪽으로 경계선을 긋는 말에, 어쩌면 그 말이 사실이기에, 서넛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냥 후궁이 해도 얄미울 말을 대적자가 하고 있으니 더욱 열불이 났다.

그러나 여기서 라나문을 죽이기라도 한다면 누가 범인인지 모두가 알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라나문을 따라나섰으니까.

서넛은 숨을 천천히 고르면서, 라나문이 고상하게 돌아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라나문이 몇 걸음 걸어갔을 즈음. 서넛은 빠르게 다가가 그의 옆에 서서, 걸음을 맞추어 걸으며 장난치는 말투로 조롱했다.


“하긴. 맞습니다. 형제들끼리 폐하 총애를 두고 다투건, 태어난 아이가 조카인지 자식인지 헷갈리건. 제가 상관할 일은 아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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