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적의 적
(290/367)
290화. 적의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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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화. 적의 적
2022.12.07.
이게 무슨 소리래? 갑자기 눈이 건조해진 라틸은 눈두덩이를 누르면서 엄마를 보았다.
“무슨 소리예요?”
“네가 위험에 처했을 때. 칼라인이 두말없이 널 도왔잖니.”
“아, 그때…….”
그렇지. 그러고 보니 칼라인이, 선황후가 자기를 국서로 지지해주겠다 약조했는데 공수표를 잡은 게 아닌가 싶다며 농담조로 털어놓았다.
약속을 지킬 생각이시구나! 라틸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공수표는 아니었네.
“칼라인은 뭐. 잘 지내고 있어요.”
국서를 정할 때 다른 사람들 의견에 휘둘릴 생각은 없었지만, 칼라인을 엄마가 도와주는 건 좋은 일이었다.
아무래도 타시르나 칼라인은 평민 출신이다 보니, 귀족들 사이에서 자리 잡기가 힘들었다. 선황후의 지지는 칼라인에게는 유일한 약점을 극복할 기회였다.
셰이트는 라틸을 바라보다 단호하게 말했다.
“라틸. 네가 가장 힘들 때 도와준 사람을 잊으면 안 돼. 칼라인은 앞일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널 위해 궁전을 뛰쳐나갔단 걸 잊지 말렴.”
“알았어요…….”
황제가 된 뒤로 라틸에게 본격적인 잔소리를 퍼부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라틸은 간만에 듣는 잔소리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걱정이 밀려왔다.
앞으로 계속 이런 잔소리 하시는 건 아니겠지?
* * *
한편, 펌크슈를 쫓아 방에서 나온 서넛은 치밀하게 굴었다.
그는 일부러 펌크슈를 바로 붙잡지 않고, 그가 라틸 근처에서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펌크슈는 제 형을 만날 생각에 곧장 하렘으로 가고 있었는데, 간만에 형 볼 생각에 기분이 좋은지 발걸음이 아주 가벼웠다.
‘형제간에 사이가 좋군.’
서넛은 그 뒷모습을 날카롭게 주시하며 30점의 점수를 매겼다.
‘사이가 좋으니 굳이 형 자리를 노리진 않겠지.’
나머지 70점은 직접 보고 판단해야 한다.
서넛은 뱀파이어의 은신술로 천천히 뒤를 따라가다가, 주위에 사람이 완전히 사라지자 일부러 발소리를 내면서 걸었다.
그 소리를 들은 펌크슈가 힐긋 뒤를 돌아보더니, 서넛의 얼굴을 알아보고 꾸벅 인사했다.
“서넛 경이죠? 최연소 근위기사단장이신.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정말 존경하는 분이세요!”
붙임성이 좋고 밝은 성격. 마이너스 20점.
서넛은 아까 준 30점에서 20점을 쑥 깎아버렸다.
현재 하렘에는 이렇게 햇살 같은 성격이 없었다.
따지자면 대신관이 상냥하고 순수한 성격이긴 하지만, 그는 근육과 운동에 미쳐 있다 보니 이런 밝은 이미지랑은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이니까. 매끈하고 온순한 곰 같다고 해야 할까.
“서넛 경?”
펌크슈가 서넛의 차가운 눈빛을 알아차리고 조금 기가 죽자, 서넛은 얼른 미소를 띠고서 손으로 길을 가리켰다.
“나도 저쪽에 가는 길이니 같이 가지.”
“네!”
신이 난 펌크슈는 얼른 서넛의 옆으로 붙었다.
서넛은 또 10점을 깎았다. 사람에게 잘 붙는단 건 황제에게도 잘 붙을 수 있단 거니까.
이제 펌크슈는 서넛의 마음속에서 0점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제일 중요한 절차가 있지 않은가.
서넛은 펌크슈가 기사단 일이라거나, 기사 서임이라거나, 틀라 황자와의 싸움 등에 관해 이것저것 묻는 데로 선선히 대답해주며 걸어가다가, 청년이 잠시 한숨을 돌리자 자연스럽게 물었다.
“나이가 몇이지?”
“라나문 형님보다 두 살밖에 안 어립니다.”
“그렇군. 두 살이나 어린가.”
“예?”
말은 ‘두 살이나’라고 일부러 표현했으나, 서넛도 ‘두 살 밖에’라는 표현이 옳다고 여겼기에 다시 10점을 감점했다.
벌써 –10점이었다.
서넛은 아트락시 공작가 삼남 중 라나문을 제외하곤 모두 미혼인 걸 떠올리고서 가장 중요한 걸 물었다. 나이 이야기는 이 질문을 하기 위한 밑거름이었다.
“귀족들은 빨리 약혼하거나 혼인하니, 그 나이면 약혼녀가 있겠지?”
“아니요.”
다시 40점이 내려가 –50점이 되자, 서넛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라틸은 ‘어머니를 모시고 와라’라는 명령만 시종장에게 내렸는데. 굳이 자기 차남에게 이 일을 시킨 아트락시 공작의 의도가 더욱 의심스러워지고 있었다. 시종장은 노골적으로 아트락시 공작가를 미니까.
“마음에 둔 여자는?”
청년은 ‘왜 자꾸 저런 질문을 하시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웃하며 대답했다.
“달리 없어요. 그냥 나중에 부모님이 정해준 영애와-.”
-50점 감점. 합계 –100점. 위험 경보.
청년은 서넛의 표정이 고블린만큼 험악해지자 입을 다물었다. 말실수를 한 걸까. 짐작 가는 바는 없었지만, 괜히 눈치를 보게 되었다.
이에 하렘에 도착하자마자 청년은 “저, 저는 이제 우리 형님한테 가보겠습니다.” 하고 꾸벅 인사하고서 얼른 달아났다.
펌크슈가 가버리자, 서넛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저 청년 자체는 황제에게 별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뒤에 선 아트락시 공작은 음흉하게 웃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자는 차가운 성품인 첫째가 영 좋은 성과를 못 낸다 싶자, 아예 성격이 정반대인 둘째까지 들이밀려는 게 분명했다.
‘절대로 안 되지.’
* * *
“어머니를 원래 사용하시던 방에 모셔다드려라.”
“네, 폐하.”
이야기가 끝나고 방 밖으로 나오자, 근위기사 몇 명이 얼른 선황후의 옆으로 다가갔다.
라틸은 그중 하나를 끌어다가 어머니가 듣지 못하도록 작게 속삭였다.
“혹시 누가 어머니를 무시하거나 모욕하지 않나 잘 살피고. 어머니께 예의 없이 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름 적어서 가져와.”
“네? 네, 폐하.”
근위기사는 당황한 눈치였으나 순순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턱으로 길을 가리켰다.
“가봐.”
“예.”
근위기사들이 선황후를 모시고 물러나자, 라틸은 주위를 두리번거려 서넛을 찾았다.
아까 슬그머니 나가기에 화장실이라도 가는 줄 알았더니. 대체 어딜 갔기에 아직도 안 오는 거야?
계속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자니, 마침내 서넛이 빠른 걸음으로 밖과 이어진 복도 저편에서 다가왔다.
“어디 갔다 왔습니까?”
“펌크슈를 보고 왔습니다.”
“왜요?”
“아트락시 공작이 혹시 못된 생각을 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요.”
못된 생각? 라틸이 알아듣지 못하고 쳐다보자, 서넛은 사심이 섞이지 않은 척 덤덤하게 대답했다.
“혹시 둘째도 후궁으로 밀어 넣으려나 염려됐습니다.”
“아아.”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을까. 라틸은 서넛을 신기하게 쳐다보다 웃었다.
“보내려 해도 안 받을 테니 괜한 걱정 할 필요 없습니다.”
그 말에 서넛의 표정에 약간 밝은 빛이 돌았다.
“정말이십니까?”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 메이시 쇼버가 기다리고 있을 방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펌크슈는 어릴 때 틀라랑 머리채를 잡고 싸운 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그게 눈에 선한데 후궁으로 들이다니. 웃기죠.”
“소꿉친구끼리 결혼도 하지 않습니까.”
“아니, 라나문이 있는데 굳이 동생까지. 필요 없습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봅니다.”
“그러니까요. 아니 왜 갑자기 그런 이상한 생각을 했데?”
서넛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실제로도 그는 만족하고 있었다. 나중에야 자신은 라틸의 후궁도 은밀한 연애 상대도 아니란 게 떠올라 표정이 굳었지만.
“그런데 펌크슈가 들어오는 걸 왜 그렇게 걱정하는 겁니까? 들어와도 거절하겠지만, 라나문이 기분 나쁠 일이지 서넛 경한텐 별문제 될 거 아니잖아요.”
그러다가 라틸이 아무렇지 않게 던진 질문에 서넛은 바짝 굳고 말았다.
라틸은 별생각 없이 물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힐긋 옆을 보았다.
서넛이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서넛 경?”
라틸이 재차 부르자, 서넛은 주저하다가 억지로 웃었다.
“형제가 둘 다 폐하께 매달리면 번거로울 거 아닙니까.”
형제라고 하니 이미 하이신스와 클라인 형제가 떠올라서, 라틸은 머쓱하게 웃었다.
“그렇죠.”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메이시 쇼버가 있는 대기실 앞에 도착했다.
라틸이 지시하자, 대기실 앞에 서 있던 경비병이 문을 열어 주었다.
라틸은 안으로 들어갔다.
선황후와 달리 메이시는 궁전이 익숙하지 않은 듯 어색하게 쭈뼛거리고 있다가, 라틸이 들어오자 얼른 몸을 일으키며 활짝 웃었다.
“이렇게 뵙다니, 영광입니다 폐하.”
메이시는 아낙차와 머리카락 색이며 눈 색, 전체적인 분위기가 흡사한 여자였다.
이 때문에 처음 메이시를 보았을 때, 라틸은 본능적으로 그녀가 꺼려졌다.
충성 서약을 받은 지금도 사실 메이시를 보면 흠칫흠칫하게 되긴 했다.
그녀의 독특한 분홍색 머리카락이나 파란 바다 거품 같은 눈동자는 몹시 아름다웠지만, 아낙차를 닮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메이시는 아낙차와 성격도 닮은 점이 있었다.
그녀도 아낙차처럼 야심이 많았고 영리했다.
차이가 있다면, 아낙차는 황족이 되고 싶어 했고, 메이시는 권력을 쥐고 싶어 한단 정도였다.
“언제 불러주실까, 매일매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불러주시면 도움이 되고 싶어서 공부도 많이 하고 있었어요.”
메이시는 벗어둔 모자를 두 손으로 꼭 잡고서 라틸을 향해 열렬히 눈을 빛냈다. 그 눈동자에는 무엇이든 당장 해내고 싶은 열정이 가득했다.
라틸은 소파에 앉으며 메이시에게도 앉으라 손짓했다.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요, 폐하?”
“아낙차 관련해서 물어볼 게 있는데.”
“아아……. 예.”
조금 힘이 빠지는지 메이시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제 자신을 불러서 일을 시켜줄 거라 여겼는데. 또 집안일부터 묻자 시무룩한 눈치였다.
“혹시 아낙차 관련해서 수상한 일이 없었느냐?”
“예. 실종된 언니가 어디로 갔나 걱정은 하시지만, 별다른 일은 없습니다.”
“아낙차가 찾아오진 않았고?”
“네.”
아낙차는 틀라에게 갔고, 둘은 한동안 함께 지내다가 기르골이 등장하자 같이 탈출했다고 했다.
라틸은 그 둘이 붙어 있을 거라 여겼다. 틀라가 레안을 공격했다면, 아낙차도 어딘가에 있을 거다.
그리고 두 사람을 숨겨줄 만한 곳이 있다면, 아낙차의 친정뿐이었다.
“몰래 다녀가진 않았을까?”
“아니요.”
하지만 메이시는 영 어리둥절한 태도였다. 거짓말을 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메이시는 이제 와 실종된 언니의 행방을 묻는 라틸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평소와 달랐던 일이라거나. 잘 생각해 봐.”
그래도 라틸이 재차 묻자, 메이시는 눈살을 구기고서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아.” 하고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
“생각났느냐?”
“이상한 것까진 아닌데…….”
“말해봐.”
“몇 주 전에, 부모님께서 제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마차를 타고 왕복 열흘은 걸리는 먼 심부름이었죠.”
“혹시 그사이에 아낙차가 다녀가거나, 숨어들어왔을 수는 없을까?”
“글쎄요……. 제가 돌아왔을 땐 아버지뿐이어서요. 그건 아닐 거 같습니다.”
“아버지뿐이었다고?”
“네. 제가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카리센에 있는 먼 친척 집 결혼식에 가시고 없었거든요.”
‘카리센?’
“친척이 누구지?”
“다가 공작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라틸은 흠칫했다.
‘다가 공작?’
“메이시.”
“네, 폐하.”
“네 어머니가 간 게 결혼식, 확실해?”
“네?”
“장례식 아니고. 정말 결혼식이었어?”
“네? 네.”
라틸은 미간을 찡그렸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했지. 혹시 공통적으로 라틸을 싫어하는 아낙차와 다가 공작이 손을 잡을 가능성은……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