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9화. 예전에 약속한 일 (289/367)


289화. 예전에 약속한 일
2022.12.04.


라틸은 심장이 조마조마해서 자이신을 잡은 손에 얼결에 힘을 주었다.

자이신이 알고 있었다고? 모르는 줄 알았는데. 안다면 대체 언제부터?

자이신의 이전 모습이, 강에 띄운 하얀 종이 돛단배처럼 줄지어 머릿속을 지나갔다.


‘자꾸 내 방 근처에서 이상한 기운? 불편한 기운? 부정한 기운? 뭐라 했더라. 하여튼 그런 게 나온다고 했지. 그래서 알았나? 그도 아니면 귀걸이? 귀걸이 사건 때?’

몇 가지 사건이 바로 떠오르는 걸 보니, 언제든 자이신이 의심해도 될 상황이긴 했구나.

라틸은 정자 위에 올라와서도 자이신의 손을 놓아주지 않고 잡고 있었다.

그가 당장에라도 꽉 이어진 손을 뿌리쳐버릴까 봐 신경 쓰였다.


[아니, 레안 황자가 거짓말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자이신의 다음 생각을 들으니, 다행스럽게도 아직 확신하는 건 아닌 눈치였다.

그러나 안도하기보다 왈칵 화가 먼저 났다.


‘레안? 와, 진짜 이 인간이? 레안이라고? 레안이 자이신한테 저 말을 한 거였어?’

자이신이 스스로 정체를 유추해냈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발설한 사람이 레안이라니. 기르골에 이어 대신관에게까지 동생이 로드라 말하다니.

머리에 열이 올라서 표정이 자꾸 험악해지려 한다. 라틸은 속내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대신관의 뒤로 가 그를 끌어안았다.


“자이신. 네가 오빠를 구해 줬다지? 고맙다. 방금 막 오빠 상태를 보고 왔거든. 아주 멀쩡하던데.”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인걸요.”

“그 일을 너 외엔 아무도 못 하잖아?”

손가락이 자이신의 옷자락을 간절하게 움켜쥐었다. 라틸은 그의 등에 이마를 댄 채 속으로 숫자를 1부터 100까지 세었다. 어떻게든 이 분노를 감추어야 했다.


“폐하.”

자이신은 라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고서 가볍게 팔을 주물렀다.


“아직 오빠한테 화가 안 풀렸는데. 그래도 한 명뿐인 동복 형제라. 걱정이 되네.”

라틸은 자이신이 자신의 손만큼 따뜻하길 바라보며, 일부러 레안을 좋아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자이신의 동정심을 자극할 셈이었다. 레안이 라틸에 대해 뒤에서 무슨 말을 하고 다니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폐하.”

다행히 자이신에게 통한 모양이다. 그가 곤혹스러운 듯 작게 신음했다.

라틸은 안도하다가, 슬그머니 자이신의 허리에서 손을 떼고 그에게 속삭였다.


“사실 널 이용한 거 같다, 자이신.”

그 난데없는 말에 자이신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용이요?”

“다친 모습을 보면 오빠를 용서할까 봐. 널 먼저 보내서 치료하게 했잖아.”

별거 아닌 일을 언급한 이유는, 레안이 자신을 이미 배신한 사람이란 걸 자이신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레안의 말을 다 믿지 말라고.

자이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라틸은 그 눈을 보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다가 인공적으로 조성된 호수를 가리키며 밝게 말했다.


“오빠가 다 나았으니 다행이지. 오빠가 갑자기 죽으면 난 충격 받아서 제대로 일하지도 못했을 거야. 그러면 내 소원을 이룰 수 없잖아?”

“폐하의…… 소원이요?”

“응. 내 국민들이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게 하고 싶어. 그게 내 소원이다. 당연히 이룰 거고.”

순수한 포부와 꿈으로 가득 차 어린아이처럼 웃은 라틸은 머쓱한 척 “아 부끄럽다.” 하고 팔을 싹싹 비비며 정면을 보았다.

자이신의 반응을 샅샅이 다 살피고 싶었으나 그건 어색할 것 같아서, 굳이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에게 붙박인 자이신의 시선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폐하. 레안 님이 뒤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면 속상하실 텐데.]

그리고 자이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저렇게 무해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분이 과연 로드일까? 레안 님이 뭘 잘못 안 게 아닐까?]

자이신이 볼 수 없는 쪽 라틸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우선 자이신이 레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진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까 처음 생각한 것처럼, 자이신은 라틸에게서 특수한 몇 가지 징후를 보았다.

이런 점들을 떠올리다 보면 자이신은 최종적으로 레안의 말이 옳다는 결론을 내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라틸은 더욱 확실하게 자이신을 여기에 붙들어두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자이신.”

“네, 폐하.”

“이럴 땐 뒤에 서는 게 아니라, 옆에 나란히 서는 거야.”

라틸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자이신이 쭈뼛거리면서도 옆으로 다가왔다.

라틸은 일부러 곁눈질하는 척 그를 보다가, 자이신과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으면서 그의 손등을 스치듯 건드렸다.

자이신은 미모사처럼 손가락을 움츠렸다가, 라틸이 손을 잡지 않고 떼자 이번에는 자신이 라틸의 손을 와락 움켜잡았다.

너무 세게 잡았다 싶은지 바로 손을 놓기는 했으나, 어쨌든 적의 배후를 취조하는 손짓과는 전혀 달랐다.

이번에는 자이신이 눈치 못 채게 옆을 보니, 긴장으로 자이신의 어깨가 축 내려가 있었다.


[폐하 손. 말랑해.]

게다가 대체 누구 손을 잡았던 건지, 굳은살이 잔뜩 박인 라틸의 손을 그는 말랑하다고 생각한다.

라틸은 저도 모르게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이 말랑하다고?

말랑한 건 레안의 손이었다. 아이니의 손이나. 라틸은 고생하며 크진 않았으나 어릴 때부터 검을 잡고 말을 타고 활을 쏘았기에 손이 거칠었다.

유모가 필사적으로 관리해 준 덕에 손등만 보면 깨끗한 귀족 손 같았지만.

어쨌든 이쯤이면 분위기가 환기되었다 싶자, 라틸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로 하고서 슬그머니 화제를 35도 돌렸다.


“나랑 라나문이랑 카리센 황후가 대적자의 검을 뽑은 건 너도 알지?”

“예. 소문이 자자하니까요. 다들 흥분해 있고요.”

“셋 중에 누가 대적자 같아?”

[대적자라니. 폐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라틸이 신경 쓰이는지, 자이신이 계속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라틸은 일부러 유달리 반짝반짝한 표정을 하고 웃기만 했다.

이 표정은 라틸이 약한 척 순수한 척을 할 때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틀라가 궁전을 점거하고 있을 때 주변국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해 사용했고, 아낙차와 틀라를 잡아넣고 유폐와 사형이란 판결을 내리기 전에도 사용했다.

라틸의 측근들은 라틸의 이 표정이 꾸며낸 표정이란 걸 이제 알아버렸으나, 대신관은 라틸이 정무를 볼 때 곁에 없으니 알 리가 없었다.


[폐하는 아무것도 모르고 저렇게 맑게 웃고 계시고…….]

속으로 웃음이 나올 뻔했으나 지금은 자신의 목숨과 미래, 멀게 보면 대신관의 목숨까지 달린 일이었다.

라틸은 진지하게 계속 연기했다.


“나는 말이다, 자이신.”

“네, 폐하.”

“라나문이 대적자 같아.”

“라나문 님이요?”

“라나문이 카리센에 있을 때, 어느 성기사단 단장이 접근해왔대. 라나문이 제일 대적자 같았다고. 단백? 단백이라던가? 이름이 그랬는데. 아마 맞을 거야. 옆 대륙풍 이름이었거든.”

단백이 확실한 이름인 걸 알면서도, 라틸은 헷갈리는 척 중얼거리다가 방금 퍼뜩 생각난 척 “아.” 하고 자이신에게 물었다.


“자이신. 내가 알아보니 대대로 대신관들은 로드와 대적자 싸움에 참여하지 않았다면서? 이유가 무엇이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

“그래? 뭐 지시가 있던 것도 아니고?”

“네. 하지만…….”

[모두가 나서지 않았다면 이유가 있던 게 아닐까.]

자이신이 라틸이 의도한 바로 생각해주기 시작한다.

라틸은 속으로 ‘그래!’하고 외치면서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한번 이유를 찾아봐야겠다.]

자신을 향하던 자이신의 의심을 레안과 다른 방향으로 돌려둔 라틸은, 그를 데리고 일부러 화원을 세 바퀴 더 산책하면서 연신 마음을 떠보았다.

마음을 읽는 능력은 주로 쓸데없을 때 발휘되었는데. 오늘은 이렇게 딱 맞을 때 발휘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오늘 자이신의 속내를 못 읽었다면 그가 나에 대해 아는 줄도 모르고 바보 같이 지냈겠지.’

그리고 레안. 이 망할 오빠 같으니라고. 기르골에 이어 자이신에게까지 자신이 로드라 말하고 다니면서 뭐? 로드가 죽지 않고서도 살아갈 방법이 없나 찾아보겠다고?

순 거짓말일 것이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을 무렵. 타리움의 끝과 끝으로부터 손님 두 사람이 도착했다.

하나는 라틸의 엄마였고, 다른 하나는 아낙차의 여동생이지만 라틸에게 충성을 맹세한 메이시 쇼버였다.

심지어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누구를 먼저 만나시겠습니까, 폐하?”

사실 추궁하고 싶은 점도 있고 엄마 얼굴을 볼 자신이 없기도 해 당장 만나고 싶은 건 메이시 쪽이었으나, 라틸은 엄마를 먼저 보기로 했다.


“어머니부터 볼게요. 메이시 양에게 다과를 가져다주고 쉬고 있으라 해요.”

“예, 폐하.”

아낙차가 완전히 실종된 지금 메이시는 쇼버 후작가의 후계자였지만, 쇼버 후작가는 중앙 관직에서 일하지 않아 명예만 가지고 있을 뿐 실권은 없었다.

그런 메이시를 먼저 보겠다며 먼 거리에서 온 어머니를 기다리라고 하면, 라틸의 의도와 상관없이 사교계 사람들은 ‘황제가 일부러 어머니를 모욕했다. 아직 화가 덜 풀렸다’면서 입방아를 찧어댈 것이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라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사교계 방식으로 어머니를 교묘히 괴롭힐지 모르니, 어머니가 궁전에서 다시 제자리를 잡기 전까지 라틸은 이런 점을 세심하게 신경 써야 했다.


“그래도 선황후폐하가 신경 쓰이시는가 봅니다.”

“어떻게 안 쓰이겠습니까.”

“잘 적응하실 겁니다. 강인한 분이시니까요.”

서넛의 말이 맞았으나, 어머니는 처음부터 강인한 게 아니라 강인하게 변해야 했던 거였다. 라틸은 어릴 때 본 어머니의 눈물을 떠올리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황제의 왕홀을 든 모습을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젠 누구도 엄마를 무시할 수 없다고 알려주고 싶었는데.


“…….”

서넛은 라틸의 표정이 흐려지는 하늘처럼 어두워지자 더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어느새 어머니가 대기 중인 방 앞에 도착했다.

라틸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서 병사에게 방문을 열라 지시했다.

문 앞에 서 있던 병사가 커다란 문을 양옆으로 열자, 소파에 단정하게 앉은 뒷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곁에 선…….


‘라나문 동생 아닌가? 그 이름이…… 호박 같았는데.’

라틸이 후궁 서약식에서 본 라나문의 동생 중 하나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뜨자, 어머니의 곁에 서 있던 라나문 동생이 얼른 인사하며 말했다.


“아트락시 공작가의 차남 펌크슈입니다, 폐하.”

‘아, 그래. 펌킨.’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괜히 갑갑하던 차에 상대가 바로 자신을 소개하자, 라틸은 속이 시원해져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아는 척을 했다.


“네가 어머니를 모시고 왔구나. 잘했다.”

“감사합니다.”

펌크슈가 쑥스러워하며 인사하자, 라틸은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라나문이랑 성격이 하나도 안 닮았네.


“온 김에 라나문 좀 보고 가거라.”

“예.”

라틸이 고개를 끄덕이자, 펌크슈가 얼른 밖으로 나갔다.

서넛은 펌크슈와 라틸 쪽을 번갈아 보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다가 얼른 그 뒤를 쫓아 나갔다.

저 청년은 별생각이 없는 것 같지만, 아트락시 공작은 머리를 비상하게 굴리는 자였다.

라나문이 라틸에게 큰 총애를 받지 못하자 일부러 차남을 자연스레 떠미는 건 아닌가 살펴봐야 했다.

이런 서넛의 속내를 모르는 라틸은,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고서 천천히 엄마의 맞은편으로 가 앉았다.

하지만 걱정한 게 민망할 만큼, 엄마와 마주 보고 대화하는 건 아무렇지 않았다.

이따금 ‘가짜 황제’ 사건이 떠올라 혼자 울컥하긴 했으나, 그러면서도 라틸은 엄마가 마르진 않았는지, 손이 거칠어진 건 아닌지, 혹시 제대로 못 자거나 못 먹은 건 아닌지 자꾸 눈으로 살피게 되었다.

그러다가 엄마도 같은 행동을 하는 걸 보자, 라틸은 괜히 서러워져서 속으로 ‘나는 황제다’를 백 번 외쳤다.

다행히 엄마의 다음 질문이 눈물을 쏙 들어가게 해주었다.


“엄마가 지지하는 최고 사위 칼라인과는 잘 지내고 있니?”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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