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누가 봐도 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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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화. 누가 봐도 범인
2022.11.30.
아니, 왜 기르골이나 칼라인이나 자꾸 므라딤도 합산해서 계산하지? 므라딤은 후궁이 될지 말지 아직 안 정했는데.
“하지만 그렇게 안 하면 기르골이 아이니에게 갈지도 몰라. 그러면 더 위험해지잖아? 넌 기르골 못 이긴다며.”
라틸이 정곡을 찌르자 칼라인이 흠칫했다.
서넛도 이 이야기를 하면 자존심 상해하더니. 못 이기는 건 맞지만 인정하긴 싫은가 보다.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강하다고 큰소리치며 사는 뱀파이어들이니, 자기보다 더 강한 뱀파이어가 있단 게 자존심 상하는 걸까?
“자존심 다 떠나서. 이길 수 있어?”
칼라인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 기르골은 몇 세대에 걸쳐 항상 로드를 배신한 배반자입니다.”
그의 손길이 라틸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더니, 약하게 근육을 주물러주었다. 마치 긴장과 짜증을 풀어주려는 것처럼. 그 차가운 손길에 라틸은 간지러워서 몸을 움찔했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아무리 달콤하게 굴어도, 그는 늘 독이었습니다. 잊으면 안 됩니다.”
“나도 알아. 기르골이랑 말하고 있으면, 얘가 언제 정신이 나가려나, 계속 확인하게 돼. 제정신 아닌 거? 알아. 진짜.”
‘내가 어떻게 모르겠어. 볼 때마다 애가 꽃 뜯어먹고 있는데.’
“하지만 어떡해. 내 품에 두면 독이지만, 밖으로 나가면 창이잖아.”
최악을 가정해도 어차피, 안에서 썩어들어 가느냐 밖에서 찔러 들어오느냐의 차이 아닌가.
칼라인이 라틸을 보고 라틸도 같이 그를 보았다.
사실 라틸도 기르골을 후궁으로 받아들일지 말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그를 손안에 넣고 주무를 자신도 없었다.
그러나 서넛과 칼라인 모두 반대표를 던지다 보니, 이상하게 자신이 자꾸 찬성 쪽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칼라인의 걱정스러운 시선에 라틸은 괜찮다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순간. 희미하게 ‘지직 지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지?’
의아해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니, 칼라인이 서 있는 부근에서 평소의 목소리와는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수천 년 묵은 요망한 이무기가 주인 옆에서 꼬리 치는 꼴은 절대로 못 봅니다.]
칼라인의 속마음이었다.
라틸은 “칼라인…….” 하고 중얼거리며 그의 단정한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칼라인. 위험해서 반대하는 거 확실해? 그냥 옆에 오는 게 싫은 거 아니야?’
* * *
속마음이 전처럼 마구 들려올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상대가 좀 예민해지면 잘 들리게 된 거 같다.
라틸은 이 틈에 기르골의 머릿속을 좀 보기로 했다. 기르골처럼 미친 뱀파이어는 속마음이 잘 들릴지 안 들릴지 모르겠지만, 일단 시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런데 손님용 궁전으로 가 보니, 조랭이떡 왕자가 낚싯대를 챙겨서 소풍 가고 있는 게 아닌가.
‘넌 좀 방에 틀어박혀 있어라. 오기 싫어서 와 놓고 너무 노는 거 아냐?’
자기 시종과 웃으면서 야무지게 챙긴 도시락 바구니까지 보자, 라틸은 학자들을 저 왕자에게 우르르 보내서 공부시키고 싶은 충동이 솟았다.
이쪽은 바쁘게 움직이는데. 오기 싫다고 징징거려 놓고서는, 아주 제대로 즐기며 노는 게 눈꼴 시렸다.
그러고 있자니 왕자도 지나가다가 라틸을 발견하고서 마지못해 인사했다.
라틸은 왕자의 질색하는 표정을 보자 ‘이러면 치사한데’ 싶으면서도 결국 먼저 왕자에게 시비를 걸고 말았다.
“어디 좋은 데 가나 봐?”
“공부 좀 하다가…… 산책을 좀…….”
그러나 대놓고 시비를 거는데도 왕자는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전에 라틸이 투덜대면 재밌으니 관심 끌지 말라고 해서일까. 눈빛은 여전히 건방진 데다 반항심으로 가득했으나, 태도만큼은 고분고분 대답했다.
“볼 때마다 노는 거 같은데. 공부하긴 하는 건가?”
“항상 하고 있습니다. 가끔 쉴 때 폐하가 오시는 거고요.”
“그래.”
그 태도가 계속되자, 라틸은 ‘역시 내가 쪼잔하게 굴었어. 이러지 말자.’ 생각하고서 웃고 지나쳐갔다.
[우연인 척 나랑 자꾸 만나는 거 같은데, 저 황제.]
하지만 뒤에서 들려온 조랭이 왕자의 속마음에, 라틸은 발끈해서 돌아보고 말았다.
마침 왕자도 걸어가면서 뒤돌아서 라틸 쪽을 힐긋대다가, 라틸과 눈이 마주치자 낯빛이 해쓱해졌다.
[젠장. 저 황제, 날 계속 보고 있잖아.]
황당하지만 무시하자, 생각하고서 라틸은 돌아섰다.
[후궁을 저렇게 많이 두는 황제라니. 분명 색욕에 빠진 변태겠지. 내가 튕기니까 나한테 호기심을 가진 게 분명해. 조심해야겠어.]
하지만 조용히 지나간 왕자는 겉으로 표시하지 못하는 불만을 속으로 드러내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했다.
‘저 조랭이가?’
화를 참지 못한 라틸이 돌아보자, 왕자는 발걸음을 빨리해서 달아나듯 사라졌다.
구시렁거리는 속마음이 멀어지자, 라틸은 “후!” 하고 바람을 크게 뱉고서 손부채질을 했다.
하지만 조랭이떡처럼 생긴 게 저런 오해를 하고 있단 걸 알자, 기분이 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서넛 경.”
“네, 폐하.”
“성격 나쁘기로 유명한 학자 열 명 정도 구할 수 있습니까?”
“있을 겁니다.”
“저 왕자한테 붙여줘요. 명색이 공부하러 와 놓고 너무 노네.”
“네?”
“나는 못 노는데. 화나잖아요. 다른 생각 못 하게 굴리라 해요.”
서넛이 떨떠름하게 “네.” 하고 대답하는 사이로 ‘왜 저러시지?’라는 속마음이 들려왔다.
그래도 라틸은 화풀이를 하고 나자 좀 뿌듯해져서 기르골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기르골은 자리 비워서 없었다.
‘있으란 애는 없고. 없으란 애는 있고.’
고개를 저은 라틸은 다시 본궁 쪽으로 돌아섰다.
* * *
그렇게 걸어가다 보니, 멀찍이 화원이 보였다.
멈춰선 라틸은 기르골의 방 안을 가득 채운 꽃 화분이 떠올랐다. 그 꽃을 화원에서 가져왔다고 했나?
생각이 거기로 닿자, 라틸은 시간을 확인하고서 이번에는 그쪽으로 걸어가 보았다.
“서넛 경. 시종장에게 내가 30분쯤 있다가 갈 거라고 전해요.”
“화원을 구경하려 하십니까?”
“네. 좀 조용히 생각하면서 걷고 싶습니다.”
서넛이 물러나자, 라틸은 혼자 화원 안으로 들어섰다.
타리움 황궁에 있는 화원은, 라틸이 타리움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아도 정말로 아름다웠다.
그곳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나뭇가지들이 꼭 하늘을 헤엄치는 것처럼 보였다.
길은 반짝거리는 노란색의 넓은 돌로 깔려 있었고, 그 양옆으로는 화사한 계절 꽃들이 구름처럼 피어 있었다.
쭉 걸어가다 보면 작은 인공 호수가 있고, 그 중앙에 배 모양의 정자가 있어서, 그 정자에 서 있으면 꼭 꽃으로 가득 찬 화원을 배를 타고 구경하는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실제로 어느 별궁은 꽃이 피는 부분만 땅이고, 화원을 거닐려면 배를 타고 가야 하도록 전부 물을 채워둔 곳도 있긴 했다.
배 위에 앉아서 꽃가지를 향해 손을 뻗으면 레안이 노를 젓다가 조심하라 당부하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라틸은 좀 마음이 아파왔다.
화원으로 끌리듯 들어간 라틸은 노란 길을 따라 걷다가 꽃을 향해 손을 뻗으며 먹먹한 기분에 잠겼다.
하지만 그 먹먹한 기분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어느 새끼가!” 하는 소리에 싹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분위기가 깨진 라틸은 소리가 난 쪽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누가 황궁에서 저런 쌍욕을……?
호기심이 일어 다가가 보니, 그곳에는 전지가위를 든 정원사가 씩씩거리면서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슬금슬금 그쪽으로 더 다가가자, 탐스러운 꽃들 사이에 땜통처럼 쑥 뽑힌 부분들이 보였다.
정원사는 그곳을 보며 화를 내고 있었다.
“어느 새끼야. 어느 새끼가 맨날 꽃을 뽑아가! 채워두면 뽑아가고 심어두면 뽑아가고 좀 자라면 뽑아가고! 어느 새끼냐고!”
보조는 그 뒤에서 손부채질을 해주면서 정원사를 달래고 있었지만 그리 효과는 없어 보였다.
“진정하세요. 누가 듣겠어요. 네?”
“듣고 찔리는 새끼가 범인이야! 들으라 해!”
범인은 아니지만 범인을 아는 라틸은 알아서 찔려 움찔했다. 기르골이구나.
“그래도…….”
다행히 더 찔리기 전. 정원사를 달래던 보조가 쩔쩔매다가 라틸을 발견하고는 헉 소리를 내며 “폐하!”하고 외쳤다.
“폐하?”
그제야 정원사도 라틸의 존재를 눈치채고서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그 사색이 된 표정을 본 라틸은 어색하게 웃고서 일어나라 손짓했다.
“일어나라. 괜찮아. 화낼 수도 있지.”
“죄송합니다.”
라틸은 큼큼 헛기침을 하다가 모르는 척 물어보았다.
“누가 꽃을 뽑아가나 봐?”
꽃이 저 꼴이 되어 있는데, 여기서 그냥 관심 없이 가면 이상해 보일까 봐 찔리는 마음을 누르고 물어본 것이었다.
라틸의 질문에 정원사는 한껏 억울한 표정을 짓고서 바로 하소연했다.
“예, 폐하. 여기, 여기, 여기 쑹덩쑹덩 다 없어진 거 좀 보십시오. 어느 도둑이 자꾸 꽃을 훔쳐 가니, 아무리 가꿔도 화원 꼴이 말이 아닙니다.”
“경비병에게 말해 봤느냐?”
“말했습니다. 근데 그 도둑놈이 어찌나 발이 빠른지, 경비병을 새워도 꽃을 다 가져가 버려요. 경비병을 세워두면 놀리듯이 더 가져갑니다.”
보조도 정원사가 분노하는 걸 말리긴 했지만 화나긴 마찬가지인지, 눈치를 보다가 얼른 말을 더했다.
“전에는 심지어 경비병 귀에 꽃도 꽂아두고 갔어요, 폐하. 경비병은 범인 머리카락도 못 봤는데요.”
“아.”
기르골이네. 모든 정황이 기르골을 가리키고 있네.
“그렇군.”
라틸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리는 사이, 정원사는 매섭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제가 볼 땐 윌랑에서 온 자식들 중 하납니다. 그놈들이 오고 나서부터 이렇거든요.”
“음.”
정답이네.
정원사를 가엾게 보던 라틸은 힘내라고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안 혼내시나, 싶어 정원사가 눈치를 보았으나, 라틸은 혼내지 않고 그를 위로했다.
“자네가 고생이 많군. 수고한다.”
정원사는 어리둥절해 보였으나, 안 혼났으니 다행이라 여겨지는 듯 안도해서 인사했다.
라틸은 얼른 그들 사이를 지나갔다.
확실히. 안쪽으로 들어가며 보니, 꽃들이 너무 여기저기 비어 있었다.
입구 부근에는 꽃들이 멀쩡해서 바로 눈치채지 못했는데. 안쪽은 누가 봐도 부분 부분 황량했다.
입구 부근에 꽃을 남겨둔 게 그나마 마지막 남은 배려였나 싶을 정도로.
‘온실도 만만치 않겠군.’
라틸은 고개를 젓고서 길을 계속 걸어갔다.
‘기르골한테 꽃 뽑지 말라 해야 하나. 꽃 뽑지 말라고 하면 사람 머리를 뽑는 거 아냐?’
그렇게 걸어가고 있자니, 이번에는 호수에 있는 배 모양 정자에 다른 사람이 보였다.
깔끔히 신관복을 차려입고 선 자이신이었다. 그는 정자 가장 끄트머리에 뒷짐을 지고 서서, 심각한 표정으로 호수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웬일로 운동을 안 하고 있지?’
“자이신?”
라틸이 부르자, 그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라틸은 활짝 웃고서 재차 “자이신!” 하고 불렀다.
안 그래도 여러모로 도움도 받은 터라 오늘 저녁이나 내일 저녁쯤엔 그에게 가 볼 생각이었는데, 여기서 만나다니.
라틸은 웃으면서 자이신 쪽으로 다가갔다.
라틸이 계단을 올라오자, 자이신이 손을 뻗어서 라틸을 잡아주었다.
그 순간. 자이신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폐하는…… 왜 로드시지?]
어쩐지 서글프게 들리는 그 속마음에, 라틸은 계단을 올라가다가 멈칫했다.
심장 박동이 갑자기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라틸은 마른침을 삼키고 자이신의 소 같은 눈을 올려다봤다.
‘방금 쟤가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