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1/8짜리 사랑
(287/367)
287화. 1/8짜리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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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화. 1/8짜리 사랑
2022.11.27.
라틸은 레안을 빤히 보다가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믿기지 않는 소리.”
“근데 믿으라고?”
레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라틸은 입술을 씹으면서 레안의 옷에 달린 프릴을 노려보았다.
칼라인이 틀라 이야기를 자세히 안 해 주었긴 하지만, 그가 가짜 로드로 있었으리란 건 짐작한다. 하지만 그가 지금은 어디에 있는진 라틸도 몰랐다. 그러니 레안의 말을 아주 ‘말도 안 돼’라고 부정할 수는 없었다.
‘레안이 거짓말하는 걸까.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왜 나한테 이걸 얘기해주지? 자기를 지키려고? 틀라가 자기를 노리니까?’
“내 생각엔, 라틸. 틀라가 아직 황위를 포기 못 한 거 같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널 상처 주기 위해서라면 날 공격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건 그래.”
라틸이 차가운 목소리로 단호하게 인정하자, 레안은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틀라는 내가 계승 2순위기 때문에 없애려 한 거 같다.”
라틸에게 아이가 생긴다면 그 아이의 계승 순위가 레안보다 더 높아지겠지만, 타리움 법에 따르면 아이가 없는 지금 두 번째 계승 순위는 레안이 맞았다.
당시 틀라와 싸울 때는 레안이 황위를 포기하고 라틸을 밀었지만, 라틸이 아예 없는 상태를 가정한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게 되니까.
인상을 찡그린 라틸은 허공을 손톱으로 긁었다. 범인이 정말 틀라라면…… 정말 황위 때문에 레안을 공격했나?
“라틸.”
“왜.”
“넌 내 동생이다. 네가 이해할 수 없다 해도, 너는 내 동생이야.”
“고맙네. 근데 웬만하면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애정을 줄래?”
어쨌건 이 정도면 볼일은 끝났다 싶어서 라틸은 몸을 돌렸다.
그러나 세 발자국 걸어갔을 무렵, 레안이 다시 중얼거렸다.
“우린 평범한 가족이 아니니까.”
라틸이 돌아보자, 레안이 사이가 좋은 시절처럼, 좋은 사람인 것처럼 라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보자 라틸은 오히려 더욱 울화가 치밀어 성큼성큼 다가가 레안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장난해?”
레안이 미동도 하지 않자 라틸은 헛웃음을 뱉으며 멱살을 놓았다.
“라틸. 타리움 국민을 지키고 싶을 뿐이야. 널 사랑하지만,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를 아니까. 그리고 난. 너도 그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아, 예. 그래서. 로드 동생은 창밖으로 뛰어내려 죽기라도 하라고?”
“필요하다면.”
“레안!”
라틸이 버럭 소리 지르자, 레안은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며 덤덤하게 물었다.
“라틸. 네 존재가 사람들에게 해가 된단 걸 알아도 혼자서만 살아남고 싶어? 네 국민을 지켜야 한단 생각은? 안 해?”
“지킬 거야. 나도. 내 국민도. 방법을 찾으면 돼. 그러면 되잖아?”
“그래도 네 존재만으로 사람들에게 해가 된다면? 그런 방법이 없다면?”
“안 되게 찾을 거라니까? 왜 자꾸 나쁜 가정만 하는데? 할 만큼 다 해봐야지 될지 안 될지 아는 건데, 왜 무조건 나쁜 방향만 보는데?”
“할 만큼 다 해보고 나서 피해가 크면? 너 하나 때문에 피해 볼 우리 국민은?”
다시 돌아서는 라틸을 레안이 붙잡았다. 라틸은 레안의 팔을 뿌리치고 그를 노려보았다.
“라틸. 날 풀어줘.”
“헛소리.”
돌아서려는 라틸을 레안이 또 붙잡았고, 라틸은 이번에는 정말로 화가 나서 힘주어 그를 뿌리쳤다.
하지만 레안을 뿌리치자마자 난 ‘뿌득’ 하는 소리에 라틸은 반사적으로 손을 떼야 했다.
서넛의 보검조차 부러뜨릴 만큼 강해진 힘이 순간 통제가 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레안은 팔이 부러졌는데도 신음을 하기는커녕 표정조차 변하지 않고 라틸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 독한 모습에 말문이 막힌 라틸이 조금 힘이 빠져서 “뭐야.” 하고 묻자, 레안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내가 알아볼게. 알아보게 해줘.”
“뭐를.”
“네가 안 죽고 사태를 해결할 방법이 있는지.”
“……찾아도 내가 찾아. 난 오빠 못 믿어.”
문으로 빠르게 걸어간 라틸이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 나가자, 순식간에 방 안이 조용해졌다.
방 안으로 들어오던 시종은 레안의 팔이 비틀려 있는 걸 보자 기겁해 달려갔다.
“저, 전하. 팔이!”
“소란 피우지 마라. 괜찮다.”
“팔이 꺾였는데 괜찮긴요!”
시종은 레안의 팔을 두려워 보다가 울먹이며 눈가를 닦았다.
“폐하께선 아직도 전하를 미워하십니까?”
“밉겠지.”
레안은 쓸쓸히 웃고서 부러진 부위가 시뻘겋게 변한 팔을 내려다보았다.
“아마도 평생 밉겠지.”
* * *
복도를 빠르게 걸어 나가 마차에 탄 라틸은, 문을 닫기 전 부하에게 지시했다.
“쇼버 후작의 둘째 딸인 메이시를 불러와라.”
“예.”
마차 문이 닫히자 천천히 마차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아직 평화로웠으나, 라틸은 그 평화로운 경치를 보면서도 마음이 어지러웠다.
틀라와 싸울 당시, 의외로 아낙차의 친정인 쇼버 후작가에서는 중립에 가까운 태도를 고수했다.
쇼버 후작가의 직계 중엔 중앙관직에 나와 있는 사람도 없었고 그들의 영지는 수도에서 먼 곳에 있는 데다, 후작의 후계자인 차녀 메이시가 라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둥 여러 가지 조건이 합쳐진 덕이었다.
이에 라틸은 일이 끝난 뒤에도 그들을 처단하지 않았다. 중앙 권력에는 원래 가까이 있지도 않았기에 쫓아낼 것도 없었고.
하지만 만약 틀라가 또다시 황위를 노린다면 맨땅에서 시작할 리는 없다.
지난번에는 쇼버 후작이 제자리를 지켰지만, 과연 이번에도 그럴까?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쇼버 후작의 도움을 받으려 들지도 모를 터. 메이시를 불러서 이상한 움직임이 없나 물어봐야 했다.
“도착했습니다, 폐하.”
처리해야 할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마차가 멈추자 라틸은 집무실로 가는 대신 내려서 하렘으로 걸어갔다.
칼라인에게 가서 레안과 틀라 이야기를 해볼 셈이었다.
황제의 업무는 하나둘이 아니기에 무엇이든 일단 뒤로 미루면 며칠간 까먹고 잊는 일이 많으니, 이참에 바로바로 해결할 계획으로.
칼라인의 방으로 가자, 마침 칼라인의 용병 시종이 방문을 닫고 나오다가 라틸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눈이 마주치자 라틸은 손가락으로 문 안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칼라인 있느냐?”
그런데 웬일인지, 칼라인의 시종이 라틸을 보자 눈이 갑자기 촉촉해졌다.
왜 저러나 싶어 라틸은 흠칫했다.
칼라인의 시종은 뱀파이어서일까. 모든 시종들 중에서, 유일하게 칼라인이 황제의 총애를 얻건 말건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저렇게 쳐다보니 의아했다. 평소에는 맨날 기분 나쁘단 얼굴을 하고 있지 않나?
시종이 너무 그윽한 눈을 하자, 라틸은 부담스러워 뒤로 반보 물러나며 물었다.
“칼라인 없느냐?”
그 말에 눈물만 뚝뚝 흘리던 시종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로드.”
로드라고.
‘아. 칼라인이 내가 로드란 이야기를 이제 해줬나 보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변화가 저렇게 클 수가. 저게 뱀파이어들이 자기들 로드와 사람을 대하는 방식 차이인가?
라틸은 어색하게 웃었다.
‘로드’라고 부르면서 저렇게 눈물을 글썽이는 상대에게 무어라 대답해주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나 그걸 본 칼라인의 시종이 무어라 더 말하려는 순간.
문이 열리더니, 칼라인이 나타나 시종을 옆으로 밀어내고서 라틸에게 손을 뻗었다.
“오시지요 주인.”
칼라인이 나오자마자 시종이 눈을 내리깔았으므로, 라틸은 그를 힐긋대며 방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칼라인은 기분이 상했는지 문을 단단히 닫고서도 문 너머를 슬쩍 노려보았다.
라틸은 고개를 기웃하며 칼라인의 표정을 살폈다. 칼라인의 대응이 어쩐지 좀 질투하는 것처럼 보였다.
문을 닫고서도 연신 문밖을 쳐다보는 모습이, 마치 바짝 털을 세우고 남을 경계하는 늑대 같았다.
라틸은 그 모습을 쳐다보다 물었다.
“네 시종도 뱀파이어지? 나랑 전생에 아는 사이였어? 많이 슬퍼하는 얼굴이던데.”
“내가 어찌 압니까.”
목소리 딱딱해진 거 봐. 진짜 질투하나? 라틸은 슬그머니 칼라인을 다시 보았다.
칼라인이 도미스와 사랑하는 사이였고 자신이 도미스의 환생인 건 알지만, 도미스와 자신의 성격이 많이 달라서일까. 칼라인이 자신을 계기로 질투한다는 게 어색하게 여겨졌다.
라틸은 멀뚱히 선 채 칼라인이 문을 아예 걸어 잠그는 걸 보다가,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전생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전생 기억을 조금 더 찾았어.”
칼라인이 다시 문고리를 풀었다.
라틸은 그 모습을 빤히 보다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것만큼은 확실히 해둬야겠더라, 칼라인.”
문고리에서 손을 뗀 칼라인이 조금 긴장한 얼굴로 라틸을 보았다.
라틸은 그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쓸면서 말했다.
“넌 네 얼굴에 감사해.”
물론 마지막 꿈에서 도미스는 기르골한테 더 화가 나서 그렇지, 칼라인에게도 화가 나 있긴 했다. 안야를 아프게 하려고 일부러 그녀 앞에서는 칼라인을 챙겼지만.
칼라인은 가볍게 웃고서 부정하지 않았다.
“압니다. 주인은 전에도 늘 그렇게 말했습니다.”
“얼굴이 좋다고?”
끄덕인 칼라인이 갑자기 허리를 숙이는 바람에 라틸과 그의 얼굴 사이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갑자기 민망해진 거리감에 라틸은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눈동자를 굴리고서 게걸음으로 옆으로 이동했다.
칼라인은 그제야 허리를 펴면서 말했다.
“카리센에서 망아지네 시종이랑 호위가 도착했다 합니다.”
“혹시 그 망아지가 클라인이야?”
“사람보단 그쪽에 가깝지요.”
단단히 찍혔구나. 라틸은 그 농담에 웃음을 터트리다가, 자신이 이럴 때가 아니란 걸 깨닫고서 정색했다.
“아. 또 까먹을 뻔했네. 내가 지금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라틸은 턱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앉아봐. 해 줄 이야기가 있어.”
칼라인이 소파에 앉자, 라틸은 그 맞은편에 편안하게 앉아 레안에게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칼라인은 차분하게 들었다. 충분히 이야기를 다 마친 라틸은 그에게 물었다.
“틀라가 지금 어딨는지 알아?”
“모릅니다. 쓸모, 죄송합니다. 필요가 없어서요.”
“알아둬야 하는 거 아냐?”
“……틀라 황자를 데려다 둔 곳에 기르골이 나타났습니다.”
“기르골이?”
“틀라 황자가 로드인 줄 알고 죽이러 왔지요.”
그 말에 라틸은 조금 섬뜩해져서 물었다.
“죽이려 했어?”
그럼 칼라인이 틀라를 가짜 로드로 세워두지 않았다면…… ‘사디’를 거치지 않고 자신과 기르골이 만났다면, 기르골은 자신을 죽이려 했을 거란 뜻일까?
칼라인은 덤덤히 대답했다.
“네. 그때 틀라가 가짜인 걸 안 거 같은데. 이후 화풀이하면서 돌아다니느라 성안이 다 뒤집히고, 틀라 황자와 아낙차 후궁은 탈출했습니다.”
“그럼 틀라랑 아낙차는 같이 있겠네.”
“아마도요.”
“그럼 쇼버 후작이 둘을 도울 확률이 더 높아지네. 손자뿐만 아니라 자식까지 있으니까.”
“……아마도요.”
라틸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틀라와 레안에 대한 생각을 이어나가려 했으나, 아까 스치듯 나온 기르골 이름에 쉬이 집중되지 않았다.
라틸은 초조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칼라인에게 결국 다시 묻고 말았다.
“근데 기르골이 진짜로 틀라를 죽이려 했어?”
자신이 묻고서도 왜 이런 걸 묻는지 이해가 안 가긴 했다. 죽이려 했으니 틀라 행방을 잃어버렸겠지. 맞겠지.
기르골은 이미 라틸에게 헤움 황자를 죽이라고 데려온 적도 있지 않던가.
칼라인의 빤한 시선에, 라틸은 헛기침하며 카펫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사실 기르골이 음. 내 후궁이 되고 싶다고 해. 그러면 얌전히 있겠대.”
칼라인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거짓말입니다.”
“뭐가. 후궁 되고 싶다는 거, 아니면 얌전히 있겠단 거.”
“둘 다요.”
“……아니, 진짜 그랬어. 후궁 시켜주면 대적자한테 안 가고 가만히 있겠대.”
잠시 생각해보던 라틸은 말을 조금 정정했다.
“아. 안에서 얌전히 있겠단 말은 안 한 거 같아.”
다 죽일 거라 했지.
“기르골은 파괴적으로 사랑하는 뱀파이어입니다, 주인. 그런 자가 1/8로 나누어진 사랑을 받으면서 자기가 기르는 꽃처럼 온순하게 있을 리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