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6화. 두 가지 진실을 각기 다른 사람에게 (286/367)


286화. 두 가지 진실을 각기 다른 사람에게
2022.11.23.



‘아니, 라나문은 제 발로 나한테 온 거였으면서 그렇게 억지로 끌려온 사람처럼 굴었던 거야?’

공작부인이 돌아간 뒤. 라틸은 업무를 보다가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그냥…… 좀 웃겼다. 라나문이 작정하고 속였다면 몰라도 그냥 혼자서 오해한 거니까.


‘하지만 늘 오만하고 도도하고 거만한 얼굴로 있었잖아. 후궁 노릇 따위 질색이란 표정으로. 당연히 공작이 억지로 보낸 줄 알았지.’

라틸이 혼자서 웃다가 혼자서 정색하길 반복하자 그 모습이 이상해 보였을까. 회의실로 이동하는 도중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오늘 몸이 안 좋으시거든 일정을 뒤로 미룰까요?”

“아니. 괜찮습니다.”

라틸은 웃으면서 둘러댔다. 정말이었다. 몸이 안 좋지 않았다.

게다가 라나문이 제 발로 후궁이 되었다는 소식은 라틸에게도 전혀 나쁘지 않았다.

라틸이 라나문에게 다가갈 때 늘 마음에 걸리던 일 중 하나가 그가 억지로 여기 왔다는 점이었는데. 애초에 그게 오해였다니까.


‘그럼 좀 더 적극적으로 구애해봐도 되는 건가? 좀 난도가 낮아지겠지?’

“사블레 후작.”

“네, 폐하. 역시 돌아가시려는 건가요?”

“아니. 라나문한테…… 오늘 저녁 같이 먹자고, 먹지 말고 기다리라고 전해줘요.”

라틸이 두 번이나 연달아 라나문을 찾아갈 거라 하자, 노골적일 정도로 라나문을 지지하는 시종장이 눈을 빛냈다.


“정말이십니까?”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아트락시 공작부인이 알려준 ‘라나문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떠올렸다.

* * *

우리 라나문은요, 좋아하는 여자 타입이 없답니다, 폐하.

사람들 만나기 귀찮다고 공작가 장남이 사교계도 팽개쳤는데, 좋아하는 여자가 있을 리가요.

아, 물론 좋아하는 남자도 없지요. 라나문은 좋아하는 사람이 아예 없답니다.

음식 중에서는 버섯이랑 새우를 좋아하고, 일하는 건 싫어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책 읽는 건 좋아해요.

그리고…… 걔가 또 뭘 좋아하더라. 죄송합니다, 폐하. 라나문이 싫어하는 건 100가지라도 들 수 있는데, 좋아하는 게 잘 생각이 안 나네요.

* * *

라틸은 저녁 식사를 하기 1시간 30분 전, 업무를 보다 말고 다시 시종을 보내서 새우 요리와 버섯 요리를 준비해 라나문에게 가져가라 시켰다.

그러고서 다시 업무에 몰두하다가, 슬슬 출발해야 제시간에 도착하겠다 싶을 즈음 집무실을 나섰다.

라나문의 방으로 들어가 보니, 그는 몇 시간 전에 보았을 때처럼 잔뜩 차려진 음식을 앞에 두고 조각처럼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라틸이 들어서자 느긋하게 몸을 일으키고서 희미하게 웃는데, 라틸은 그게 자신이 두 번이나 연달아 와서 웃는 건지, 아니면 새우와 버섯을 보내서 웃는 건지, 그도 아니면 아트락시 공작부인이 자신에게 다녀가는 길에 아들을 찾아가 무언가 언질을 준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라나문의 기분이 좋아 보여서, 라틸은 덩달아 웃고서 맞은편으로 걸어가 의자를 빼내 앉았다.

라틸이 앉자 라나문도 따라 앉았다.

테이블을 사이에 둔 라틸이 라나문을 힐긋 보자, 라나문은 음식을 덮어둔 뚜껑을 하나하나 벗기면서 물었다.


“웬일로 하루에 두 번이나 절 찾아오십니까?”

공교롭게도 라나문이 벗긴 뚜껑은 라틸이 특별히 가져다주라 지시한 새우 요리였다.

양념에 볶은 새우 요리에서 달큼한 향이 강하게 올라오자, 라나문은 잠시 그 요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라틸 쪽으로 시선을 올렸다.

라틸은 자신의 배려를 숨기지 않고 알려주었다.


“공작부인에게 물어보니 네가 이런 걸 좋아한다더라. 그래서 준비하라 했으니 많이 먹어.”

어차피 자신이 공작부인을 부른 소식은 라나문에게도 들어갈 테니, 굳이 숨길 필요 없었다.

라나문은 다른 접시에서는 매큼해 보이는 버섯 요리가 나타나자,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라틸은 식사하는 내내 도수가 낮은 와인을 마시면서 라나문을 살폈다.

새우와 버섯 요리를 너무 좋아해서인가. 처음 접시 뚜껑을 벗겼을 때처럼 또 웃진 않았지만, 라나문은 라틸이 준비해 둔 음식만 건드리고 다른 음식은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


‘잘 먹는다더니. 정말로 좋아하나 보네.’

그래도 그렇지 다른 건 하나도 안 먹고 저 두 개만 먹으면 좀 물리지 않나?

나중에는 지켜보는 라틸이 걱정될 정도였지만, 라나문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서 라틸이 준비해 둔 요리만 꾸역꾸역 먹었다.

‘평소에 새우 요리랑 버섯 요리가 잘 안 나오나? 가져다 달라고 하면 바로 가져다줄 텐데?’

나중에는 하렘에서 일하는 요리사들이 라나문에게 이상한 걸 먹이는 게 아닌가 좀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러다가 커다란 접시가 완전히 다 비자, 라틸은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짝짝 쳤다.

라나문은 그제야 포크를 내려놓고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면서 힐긋 라틸을 보았다.

만족스러운 음식을 먹어서일까? 막 들어왔을 때보다는 눈빛이 좀 풀어진 것도 같았다.

게다가 라틸을 빤히 쳐다보는데, 라틸이 무언가 말을 해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 표정을 보자, 라틸은 아트락시 공작부인이 ‘라나문은 자존심이 강해서 찬양받는 걸 좋아한답니다.’라고 말한 걸 떠올렸다.

그러고서 주의점으로 덧붙인 말이 뭐더라? 절대로 칭찬이 아니라 찬양을 해야 한다 했나? 칭찬하면 아부인가 싶어 미심쩍게 쳐다본다 했지.


‘아. 혹시 그래서 지금 날 쳐다보는 건가? 혹시 잘 먹는다거나, 이런 세세한 것도 찬양받고 싶어 하나?’

좀 귀찮긴 하지만 라틸은 미래의 대적자에게 투자를 한단 마음가짐으로, 활짝 웃으면서 그를 찬양해주었다.


“넌 새우를 먹는 모습조차 아름답구나, 라나문. 새우 껍질을 까는 네 손가락은 예술에 가깝더라.”

하지만 라틸을 향해 기대감 어린 눈길을 보내던 라나문은, 막상 라틸이 그의 손가락을 칭찬해주자 떨떠름한 표정을 할 뿐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고서 몸을 일으켰다.


“라나문?”

왜 저러나 싶어 쳐다보자, 그가 배와 가슴 사이에 손을 올리며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속이 좀…….”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 거야?”

“……그런 거 같습니다.”

순순히 인정한 라나문의 안색이 급격히 나빠지자, 라틸은 얼른 그를 소파에 데려가 앉히고서 종을 흔들어 카르둔을 불렀다.


“카르둔. 네 주인이 과식했나 보다. 의사를 불러와.”

“네, 네!”

대신관이 자리를 비운 데다 이런 일로 대신관을 부르기도 애매한지라, 카르둔은 얼른 밖으로 뛰어나갔다.

라틸은 식은땀까지 흘리는 라나문을 보다가 혀를 찼다.


“아니, 미련스럽게 뭘 다 먹어. 배가 부르면 그만 먹어야지. 너 의외로 식탐이 있구나?”

그 말에 라나문은 손수건을 꽉 쥐고서 라틸을 원망스레 쳐다보았다.


“뭐야. 음식엔 아무것도 안 탔어. 네가 많이 먹어서 그래.”

그 시선에 라틸이 얼른 발뺌하자, 라나문은 고운 인상을 더 찡그리더니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 * *



‘어제 라나문은 왜 그렇게 눈으로 화를 낸 거지? 진짜로 내가 음식에 뭘 탔다고 생각하나? 좀 말로 해주면 좋을 텐데.’

다음날. 라틸이 오전 업무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면서 어제저녁 라나문의 그 냉랭해진 태도를 다시 짚어볼 무렵, 레안에게 갔던 대신관과 게스타가 돌아왔다.

그들과 함께 갔던 시종은 두 사람이 돌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일의 경과를 라틸에게 보고했다.


“레안 황자님은 대신관님께서 말끔하게 치료해서, 어제 오후에 이미 깨끗하게 나았다고 합니다. 레안 황자님은 대신관님께 사례로 대접하고 싶다 하셨지만, 두 분은 거절하고 별장을 나오셔서 게스타 님의 저택으로 갔습니다.”

“대신관도? 거기로 갔다고?”

“네. 게스타 님이 초대하셔서요. 아침까지 그곳에서 함께 드시고 나왔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몰랐을 때라면 순둥순둥한 후궁 둘이서 잘 지내고 왔네, 할 텐데. 게스타가 흑마법사라는 걸 들은 라틸은 ‘괜찮나?’ 조금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게스타는 흑마법사인 거지 난폭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어쨌든 잘 지낼 것 같기도 했다.


“둘이 쉬고 왔다니 다행이군.”

“네. 지금은 두 분 다 거처로 돌아가셨습니다.”

시종장이 뒤에서 물었다.


“게스타 님과 대신관님을 이쪽으로 부를까요, 폐하?”

라틸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제 다 나았다니까. 내가 레안을 보러 가 봐야죠.”

 

 
 

* * *

오후 일정을 일찍 끝낸 라틸은 편안한 의상으로 갈아입은 다음 마차에 올라탔다.

하루를 미뤘고, 이제 더 미룰 수는 없다. 아예 안 보는 방법도 생각해 보긴 했지만 여전히 황자 신분인 동복형제가 암습을 당해서 중태에 빠졌던 일이었다.

카리센과 사이가 험악해진 요즈음 내부에서까지 좋지 못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건 좋지 않으니, 가서 얼굴이라도 한 번 비추는 게 나았다.

하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긴 여전해서, 별장으로 이동하는 마차 안에서 라틸은 창문에 팔을 괴고 내내 초조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치료를 받아서 다 나았다니 얼굴을 보고 약한 마음이 들진 않겠지만, 볼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몰려오며 배가 살짝 아파왔다.


‘칼라인이라도 데리고 나올걸.’

라틸은 이마에 손을 얹고서 눈을 질끈 감은 채 마차의 흔들림이 멎기를 기다렸다.


“도착했습니다, 폐하.”

그러다가 마차가 완전히 멎자 라틸은 천천히 마차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직도 긴장감에 배가 살며시 아팠지만 그런 내색을 하고 싶지 않아서 표정을 단단히 관리했다.

라틸이 마차에서 내려서자 미리 나와 있던 별장 관리인이 황급히 다가와 허리 숙여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폐하.”

“레안 황자는?”

라틸은 일부러 오빠를 남처럼 부르며 물었다.


“대신관님께서 큰 상처를 신성력으로 치료하고 나면 체력이 많이 떨어지니 꼭 휴식이 중요하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침실에 계속 누워 계십니다.”

“그럼 그쪽으로 가지.”

천천히 걷는다고 걸었는데도 정문 안으로 들어가 긴 복도와 계단을 지나자 바로 레안의 문이 앞에 나타났다.


“황자님.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관리인이 안쪽으로 소리를 내자, 들어오란 표시로 종이 울렸다.

라틸은 쾅 소리가 나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커다란 침대에 이불을 다 덮고 누워 있는 레안이 보였다.

치료가 끝났으니 다 나았을 텐데도 아직 놀랐는지. 레안의 얼굴에는 창백한 빛이 남아 있었다.


“몸은?”

라틸이 덤덤하게 물으며 다가가자 곁에서 레안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 주던 시종이 일어나 옆으로 물러섰다.

라틸은 그자에게 나가라 손짓하고서, 시종이 앉아 있던 의자를 끌어다 거기에 앉았다.

문이 닫히자 레안은 희멀겋게 웃었다.


“오긴 왔구나. 이젠 내 얼굴도 안 보려는 줄 알았다.”

“오는 게 내 이미지에 도움이 될 거 같아서 왔어. 이런 건 오빠가 더 잘하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지?”

레안의 입꼬리가 가볍게 올라갔다.


“알지.”

라틸은 아까 한 질문을 다시 던졌다.


“몸은?”

“괜찮아.”

레안은 대답하고서 상체를 일으키더니 침대 등받이에 대고 앉았다.


“상처는 다 나았다. 네 후궁 덕에.”

“범인이 누구인지는 짐작이 가? 사람이 아니란 말은 들었는데.”

“좀비는 아니었다. 뱀파이어……도 아닌 거 같았어. 식시귀 같았는데.”

라틸은 일부러 무시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빠가 뱀파이어와 식시귀를 구분한다고?”

좀비야 그렇다 쳐도, 뱀파이어와 식시귀는 둘 다 가만히 있으면 사람과 비슷한 모양새가 아니던가.

그러나 라틸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레안은 표정이 더 묘해졌다.

그 모습이 퍽 이상해 보여서 라틸이 빤히 보자 레안은 ‘이 말을 해도 되나’라는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지? 눈살을 찡그리고서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레안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 털어놓았다.


“실은 찾아온 사람. 틀라였다.”

 

* * *



“폐하께서 별장으로 가셨다고?”

“네, 대신관님. 레안 황자님이 괜찮은가 그래도 친히 한번 보고 싶으시다며 가셨답니다.”

자신의 방에 도착한 대신관이 말끔하게 씻을 동안 시종인 구벨은 간단한 먹을거리와 음료수를 챙겨 왔다.

그러고는 대신관이 욕실에서 나와 옷을 갈아입는 사이, 테이블에 음식을 차리면서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최근에 ‘그 사건’ 때문에 사이가 나쁘셨지만 그래도 동복 남매니까요. 역시 좀 걱정되시는 게 아닐까요?”

구벨은 그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듯 고개까지 주억거렸다.

옷을 다 갈아입은 자이신은 테이블 앞에 앉으면서 “글쎄.” 하고 중얼거렸다.


“대신관님은 다르게 생각하십니까?”

“폐하는 호불호가 강한 편이라.”

“그래도 핏줄인걸요.”

구벨은 대신관의 앞에 놓인 빈 잔에 음료수를 따라주더니, 또 뭔가 가져올 게 생각난 듯 “잠시만요.” 하고서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게 되자 대신관은 소매를 걷고 포크를 잡으려다가, 생각난 게 있어 자신이 벗어둔 옷가지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입고 다녀온 옷은 구벨이 나중에 빨래하는 하인들에게 보낼 예정이라 바구니에 잘 담겨 있었다.

그는 그 옷가지 사이에 손을 넣어서 중요한 쪽지를 꺼냈다.

대신관은 치료가 끝난 후, 레안이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할 때 눈 깜짝할 사이 쥐여준 쪽지를 어두운 얼굴로 펼쳤다.

쪽지를 펼치자 반듯한 글씨가 나타났다.

당시에 내용을 보았을 때도 놀랐지만 다시 보아도 새삼 놀라운 내용이었다.

-황제가 로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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