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5화. 날 사랑해 봐 (285/367)


285화. 날 사랑해 봐
2022.11.20.



 


“괜찮으냐?”

아니, 중태라니 안 괜찮겠구나. 라틸은 놀라서 묻다가 자기가 뻔한 질문을 한 걸 알고 입을 다물었다.

서넛이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듯 라틸을 보았다.

라틸은 잠시 생각하다가 지시했다.


“서넛 경. 자이신에게 가서 레안을 살필 수 있나 한 번 물어봐 줘요.”

“폐하께서는…….”

“지금 가봐야 아픈 모습만 보겠죠. 내일쯤 가보겠습니다. 아픈 거 보고 마음 약해지고 싶지 않으니까요.”

동복 형제가 다쳤다고 하니 마음이 좋진 않지만, 일단 지금 충격 정도로는 안야가 죽은 걸 본 도미스만큼 놀라진 않았다. 불편한 마음과 별개로 당장 각성할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가서 다친 모습을 보면 갑자기 마음이 움직일 수도 있기에, 라틸은 사람을 치료하는 일에 있어서는 최고인 대신관에게 이 일을 부탁하기로 했다.


“그리고 만약 대신관이 괜찮다고 하면-.”

‘치료가 끝나자마자 대신관은 데리고 와라’라고 말하려던 라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문득 서넛과 레안이 오랜 친구란 사실이 생각나서였다.


‘서넛에게 따라갔다 와 달라 해도 될까?’

라틸이 말을 하다 멈추고 자신을 보자, 서넛이 의아해서 라틸을 보았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라틸은 입술만 우물거렸다. 서넛에게 ‘넌 오빠랑 친구라 널 지금 오빠에게 보내기가 좀 그래’라고 말하면, 자신이 꼭 서넛을 의심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을까 싶어 솔직하게 말하기도 애매했다.

그렇다고 흔쾌히 목소리도 나가지 않아서 연신 서넛의 눈동자만 보고 있으려니, 서넛은 점점 더 의아한 표정으로 변해갔다.

라틸은 주저하다가 역시 대신관은 다른 사람과 보내기로 하고서 말을 바꿨다.


“서넛 경. 대신관이 레안한테 다녀와 주겠다고 하거든…… 게스타랑 같이 갔다오라 해요.”

“게스타 님이요?”

여기서 왜 게스타 이름이 나오는지 모르겠다는 듯 서넛이 미간을 찌푸렸다.

라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게스타요.”

대신관만 혼자 보내자니 조금 불안한 감이 있다. 만약 레안을 공격한 사람이 레안이 자신의 동복오빠란 이유만으로 공격했다면, 대신관도 노릴지 모르니까.

하지만 서넛을 같이 보내자니 서넛이 레안에게 동정심을 품을까 염려되고, 칼라인을 보내자니, 서넛이 굳이 자신을 두고 칼라인을 보내는 이유를 찾다가 자기 속내를 짐작할 것 같다.

그래서 고르고 고른 게 흑마법사이니 강할 게 틀림없고, 그 별궁 근처에 자기 저택이 있는 게스타였다.


“게스타 집이 그 근처니까. 갔다가 자기 집에도 들렀다 오면 좋죠.”

게다가 게스타는 완전히 로드 편이니, 레안이 혹시 헛소리를 해도 넘어가지 않을 테고.

말하고 나니 딱 적당해서, 라틸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요.”

서넛은 그래도 영 의아한 눈치였지만, 라틸의 지시대로 먼저 하렘 쪽을 향해 뛰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다가 라틸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병사에게 물었다.


“범인은?”

“사람이 아닌 것 같다 합니다.”

“뭐?”

라틸은 입을 벌리고 병사를 보다가, 서넛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빨리 가서 그 말도 전해라. 얼른!”

“예.”

‘범인이 사람이 아니라면 오히려 게스타가 가는 게 더 적절하겠지.’

 

* * *

서넛을 먼저 보내고 천천히 라나문의 방으로 걸어가고 있자니, 문득 라틸은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라나문에게 갈 때 유독 일이 많이 터지는 거 같은데?’

이전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넘겠을 텐데. 도미스의 꿈을 보고 나니 좀 찝찝한 구석이 있다.

도미스와 안야가 꼭 그랬다. 도미스 양모의 말을 들어보니 그래도 그 둘 역시 어릴 때 사이가 좋은 시절이 있긴 한 것 같은데. 결국 운명은 떠밀듯 둘을 갈라놓았다.

나중에는 본인들도 외쳐대지 않았는가. 왜 자꾸 계속 내 눈앞에 나타나는 거냐고.

자신과 아이니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나, 괜찮게 여겨졌던 첫 단추와 달리 점점 일이 터질수록 멀어지는 건 같았다. 사건이 터질수록 자꾸 서로를 적대하게 되고.

라나문과는 부딪힐 일 자체가 많이 없어서인가. 마치 운명이 만나지 말라고 가로막는 것 같다.


‘우연 같진 않아. 역시 라나문 마음을 빨리 잡던가 해야겠어.’

라나문에게로 향하는 발걸음이 좀 더 바빠졌다.

* * *

손님들이 사용하는 궁전 길옆을 지나가며 잠시 주춤하긴 했으나, 라틸은 앞만 보고 걸어가 곧장 라나문의 방 앞까지 왔다.

라틸이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경비병이 얼른 문을 열어주어서, 라틸은 짧고 빠르게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 안으로 들어섰다.

문 두 개를 지나 방 안으로 들어가자, 라나문이 뚜껑을 덮어둔 음식을 앞에 둔 채 조각상처럼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라틸이 온다는 말을 듣고 갈아입은 건지, 평소 격식 없이 입는 의상보다는 좀 더 차려입고 있었다. 라틸은 다시 심호흡을 하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여느 때 늘 그렇듯 그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시선을 이쪽으로 돌리자, 라나문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쟤가 나를 사랑하게 만들어야 해. 쟤가 나를 사랑하게 만들어야 해. 라틸은 속으로 되뇌면서 입가에 방긋 미소를 만들고 라나문 쪽으로 다가가 앉았다.

괜히 초조한 마음을 누르느라 입술이 조금 떨렸다. 지금까지 자신을 유혹해야 하는 건 후궁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입장에 자신이 놓여서인가. 갑자기 자신감이 조금 사라졌다.

칼라인이나 기르골을 상대할 때는 전생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고, 게스타는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 호감을 보였지만 라나문은…….

라나문은 솔직히 라틸이 황녀로 있을 때는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은 도도하고 거만한 청년이 아니던가. 물론 라틸에게만 안 비춘 것도 아니지만.

황제란 지위를 빼고 본다면 나는 라나문이 사랑할 만한 사람일까, 잠시 생각하던 라틸은 그가 고개를 기우뚱하는 걸 보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황제인 게 제일 큰 장점인데 그걸 왜 빼.’

“폐하?”

라틸이 자꾸 그를 쳐다보기만 하자 라나문이 의아한 목소리로 묻더니,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라틸을 살폈다.


“오늘따라 분위기가 다르십니다?”

‘그야 이전에는 그냥 내 후궁을 챙기러 온 거고. 지금은 날 죽일지도 모를 운명을 타고난 사람을 유혹하러 온 거니까.’

유혹이란 건 어떻게 해야 하나. 라틸은 주저하다가 오빠 이름을 팔아먹기로 했다.


“오는 도중에 슬픈 소식을 들었다.”

그쪽도 라틸의 이름을 여기저기 많이 팔아먹었으니 괜찮을 거라고, 라틸은 죄책감 없이 납득했다.


“슬픈 소식이요?”

“레안 황자. 내 동복오빠가 암습을 당해 다쳤다더라.”

라나문이 놀란 듯 눈썹을 치켜떴다.


“그쪽으로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자이신한테 가 달라 부탁했어. 나는 내일쯤 가볼 생각이다.”

“…….”

라나문이 눈썹을 내리고서 라틸을 살폈다. 비정하다고 생각할지, 아니면 안 됐다고 생각할지 알 수 없어서, 라틸은 더욱 울적한 표정을 꾸며냈다.

이럴 때 상대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왜 그 속마음은 하등 쓸모없는 그 조랭이떡 왕자 속마음만 읽어주는 건지. 그놈의 조랭이떡 속마음 들춰봐야 뭐 한다고.


“라나문.”

“네, 폐하.”

“날 좀 위로해줘.”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도 라틸은 착실하게 표정 관리를 했다.

라틸은 예전에 시녀들이 ‘자기밖에 모르던 오만한 인간이 갑자기 약한 모습을 보이니까 마음이 설레더라’라고 수군거리던 걸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게 진짜 통할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통하기를 바라며 라틸은 슬픈 표정을 쥐어 짜내 라나문을 보았다.


 


“…….”

“…….”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상대는 표정에 변화가 거의 일어나지 않다 보니, 라나문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움직였는지, 의외라 여겼는지, 마음이 조금이라도 흔들리긴 한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위로하는 척이라도 해라 라나문아.’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도 라틸이 계속 슬픈 표정을 유지하자, 라나문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차갑게 말했다.


“레안 황자는 폐하를 뒤통수쳤습니다. 그런 데 하나하나 반응하지 마시지요.”

설마 저걸 위로라고 한 건 아니겠지. 라틸은 ‘설마? 설마?’ 했으나, 라나문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라틸은 그 태도에 슬픈 표정 꾸며내는 걸 그만두고서 라나문을 황당해 쳐다보았다. 라나문은 재차 덤덤하게 대답했다.


“폐하를 배신하면 제게도 배신자입니다. 저는 배신자를 동정하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그분을 마음 아파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같이 마음 아파할 수는 없습니다.”

말을 마친 라나문은 음식 뚜껑을 하나씩 다 열더니, 몇 종류의 접시 위치를 바꾸기 시작했다.

다 바꾼 다음 보니 라틸의 앞에는 흐늘흐늘하고 넘기기 좋은 부드러운 음식들이 놓여 있었고, 라나문의 앞에는 단단하고 열심히 씹어야 하는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라틸의 앞에 놓여 있는 음식 중 조금 단단해 보이는 건 위에 완두콩을 잔뜩 뿌린 음식뿐.


“이건?”

“입맛이 없는데 드시면 체할 수도 있으니 부드러운 음식 위주로 드십시오.”

라틸은 라나문의 배려 사이에 함정처럼 놓인 완두콩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일단 넘어가 주기로 하고서 웃었다.


“그래. 그러자.”

하지만 식사를 하면서도 라틸은 연신 라나문을 힐긋거렸다. 머리도 팽팽 굴러갔다.

시녀들이 속삭이던 ‘평소에 강한 모습만 보이던 사람이 약한 모습을 보이면 두근거려’는 라나문에게 통하지 않을 걸까?

왜? 라나문이 약한 모습을 싫어해서? 아니면 평소에 충분히 강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아니면 애초에 그 전제 자체가 말이 안 됐나?


‘와. 유혹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다니.’

이래서 라나문이 책을 읽고서 연구하고 있었구나. 새삼 라틸은 그의 노력을 그저 웃고 넘긴 자신이 뒤늦게 너무하다 싶어졌다.

결국 식사를 하는 내내 헛발질을 한 라틸은 세상에서 라나문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을 사람에게 도움을 받기로 했다.

* * *



“라나문이 어떤 여자를 좋아하냐고요?”

라틸의 전갈을 받고 급히 궁전으로 온 아트락시 공작부인은 황제의 질문을 받자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틸은 인자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런 사심이 없는 듯 설명했다.


“짐은 라나문과 가까워지고 싶거든.”

아트락시 공작부인은 잠시 고개를 기웃하다가 대단한 농담을 들은 것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하지만 폐하. 그건 라나문이 고민할 일이지, 폐하께서 고민할 일이 아닌걸요. 가만히 계셔도 라나문은 폐하의 마음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일 텐데요?”

“그렇지.”

안다.


“하지만 짐은 라나문이 짐이 황제이기 때문이 아니라, 짐을 진심으로 사랑해주었으면 좋겠어.”

그래야 로드란 걸 알아도 안 죽이려 들 테니까.

라틸은 실용적인 속마음을 로맨틱한 표정으로 덮고서 아트락시 공작부인을 향해 맑게 웃어 보였다.

누구라도 제 자식과 진심으로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데, 싫진 않을 거라 생각하고서.

라틸의 계산처럼 아트락시 공작부인은 의외란 표정을 하면서도 좀 기분이 좋아 보였다.


“폐하께서 라나문을 이렇게 지극히 생각해 주시다니.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폐하께서 원하시니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무엇이든 돕겠습니다.”

“고맙군. 라나문은 아트락시 공작 때문에 원치 않게 후궁이 되어서 그런가. 아픈 가시처럼 짐을 신경 쓰이게 해.”

라틸은 씁쓸한 척 말하고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가, 아트락시 공작부인의 모호한 표정을 보고 커피잔을 도로 내렸다.

라틸과 눈이 마주치자 공작부인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라나문이…… 억지로 후궁이 됐다고, 그렇게 말하던가요 폐하?”

“아니. 그런 말을 한 건 아닌데.”

성격상 당연히 아트락시 공작이 밀어서 온 줄 알았다. 라틸의 말에 공작부인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지? 멀뚱히 보고 있자니, 그녀가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하지만 그런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남편이 떠민 게 아니라, 라나문이 제 발로 폐하께 간 거니까요.”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