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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화. 꼭 라나문에게 갈 때만 (284/367)


284화. 꼭 라나문에게 갈 때만
2022.11.16.


라나문의 말에 잠시 놀랐던 타시르는 눈썹을 치켜들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국서 자리요?”

마치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단 태도였다.

기분이 나쁠 만 한데도 라나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주 당연하고 당당한 요구를 한 것처럼 태연한 태도여서, 잘 휩쓸리는 사람은 ‘그렇지. 라나문 님이 당연히 국서가 돼야지’ 하고 넙죽 수긍하고 말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타시르는 어물쩍어물쩍 넘어가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래.”

라나문이 다시 한번 지그시 당연한 듯 이야기했고, 타시르의 시종 히얼란은 속으로 욕을 했다. 아주 바가지를 씌우려 하는구나.

타시르가 그를 서포트하면 그 자체로도 이익인데, 서포트하게 해주는 것까지 대가를 받아먹으려 하다니.

히얼란의 눈동자가 옆으로 실룩 돌아갔다. 제 주인만큼 오만한 라나문의 시종 카르둔은 이 상황이 전혀 의아하게 여겨지지 않는 듯 턱을 치켜들고 있었다.

히얼란은 주저하다가 자신도 라나문의 시종만큼 턱을 치켜들었다.

카르둔이 ‘왜 날 따라 하냐’는 눈빛을 불만스레 보냈지만, 히얼란은 목에 힘을 주고서 턱을 빳빳하게 들고 절대로 내리지 않았다.

라나문이 공신 가문의 아들이자 공작의 장남이며 대귀족인 건 맞지만, 어쨌든 지금은 같은 후궁 아닌가.

후궁들 사이에 후궁들의 기 싸움이 있다면, 시종들 사이에서도 시종들의 기 싸움이 있는 법이다.

히얼란은 자신이 카르둔에게 기가 죽어 쭈뼛거리면 타시르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고 세뇌하듯 생각했다.

타시르는 힐긋 그 모습을 보고는 입꼬리를 빙그레 올렸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히얼란을 실망스럽게 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그러지요. 뭐 어렵다고.”

히얼란의 어깨가 실망감에 축 내려갔다.


‘소단주님……!’

 

* * *



“아니, 왜 굳이 그런 약속을 하시는 겁니까.”

라나문의 방에서 나와 돌아가는 길. 히얼란은 참지 못하고 타시르에게 볼멘소리를 뱉었다.

히얼란은 시종이긴 하지만 앙제스 상단에 고용되어 있다가 타시르의 밑으로 오게 된 것이기에 처음부터 주종관계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다른 시종들보다는 좀 더 의사 표현이 확실했다.


“뭐 어때.”

그러나 서운한 속마음을 알아주지도 않고서 타시르는 그저 시원스럽게 웃기만 했다.

이쪽은 그의 소단주가 다른 후궁 밑에서 뱃사공 노릇이나 하게 되는 건 아닌가 싶어 마음이 아파 죽겠는데.


“소단주님이 라나문 님 밑으로 들어가 버리면 폐하 총애를 두고 다툴 수도 없잖아요. 소단주님은 평생 폐하랑 살아야 하는데, 폐하가 다른 사내와 가까워지게 밀어두고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실 거예요?”

더 잔소리할 말이 남았지만,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더니 마침 길쭉한 산책로를 따라 황제가 걸어오고 있었다.

히얼란은 입을 다물었다.

양옆으로 길쭉한 수풀이 난 외길인지라, 황제 역시 곧 이쪽을 발견하고는 웃으면서 걸어왔다.

하지만 타시르가 스스로 후궁으로서 경쟁하길 내팽개친 거나 다름없다고 여겨서, 히얼란은 시무룩 인사만 올리고 아무런 기대도 없이 제 신발만 내려다보았다.


“타시르. 얼굴이 좀 수척해진 거 같은데?”

황제가 타시르에게 살갑게 말을 걸어도 히얼란은 여전히 무거운 눈길로 제 신발만 쳐다보았다.


“폐하께서 절 보러 안 오시니 밤에 잠을 못 자서 그러지요.”

하지만 앞에서 들려온 비음 섞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히얼란은 소름이 쫙 돋으면서 자석에 끌린 것처럼 눈동자가 휙 올라왔다.

저 목소리가 우리 소단주님 목에서 나온 소리인가? 라나문이 국서가 되도록 도와주기로 약속한 지 5분도 안 된 우리 소단주님 목에서?


“하하 거짓말.”

황제가 웃어대자 타시르는 능구렁이처럼 자연스럽게 이동해 황제의 팔에 자신의 팔을 감더니, 꿀 같은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속닥거렸다.


“폐하께서 제가 제대로 자는지 못 자는지 확인도 안 하셨으면서. 어떻게 이게 거짓말인지 아신답니까?”

 

 


“그런가? 그러네.”

“여기 제 허리 좀 만져 보십시오. 살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 여기서?”

“뭐 어떻습니까.”

황제한테 뱀처럼 착 감겨서는 여우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대는 그의 소단주를 멍하게 바라보다가, 히얼란은 소단주의 깊은 뜻을 깨달았다.


‘사기꾼!’

 

* * *

라나문에게 가는 길에 타시르를 만난 라틸은 얼결에 그의 방으로 따라가서 식사까지 같이한 다음, 회의 시간이 다가오는 걸 깨닫고 본궁으로 돌아갔다.


“라나문에게 가려 하신 거 아니십니까.”

서넛의 지적에 라틸은 머쓱하게 웃었다.


“어쩌다 보니.”

타시르는 사람 정신을 쏙 빼놓는 데 선수였다. 그와 한두 마디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휩쓸려 있었다.


“요즘은 타시르도 잘 못 챙겼으니까요.”

“폐하께선 의외로 후궁들을 하나하나 신경 쓰는 것 같습니다.”

“무슨 목적으로 모였든 법적으로 내 사람들이니까요.”

라틸을 위해 태어났어도 법적으로는 라틸의 사람이 될 수 없는 서넛의 표정이 굳었으나, 라틸은 정면을 보느라 그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서넛은 일부러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척 손을 올려 자신의 표정을 가렸다.


“그렇습니까.”

“그리고 타시르 밑에 있는 암살자들. 어디까지 범위가 퍼져 있는지 물어보고, 다른 나라들이 우리 측 편을 들지 카리센 편을 들지도 확인해보라 해야겠습니다.”

 

* * *

타리움의 수도는 며칠간 햇볕이 따뜻했으나, 수도로부터 서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키셀라는 이틀 내내 비가 멈추지 않았다.

가까스로 비가 멈추었을 때는 도시 전체가 완전히 물기에 축 젖어서, 사방에 습기가 가득했다.

완전히 비가 멎자 황제의 칙사로 키셀라에 내려오게 된 아트락시 공작의 차남 펌크슈는 입고 있던 우비를 벗어 종자에게 건넸다.


“여기서 신전까지는 얼마나 더 가야 하지?”

펌크슈가 키셀라의 영주가 보내준 심부름꾼에게 묻자, 심부름꾼은 거리를 계산해 보고서 대답했다.


“한 시간 정도 걸립니다, 펌크슈 경.”

펌크슈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서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면 옷을 갈아입고 가지.”

그가 이번에 받은 지시는 신전에서 감시받으며 지내고 있는 황제의 친모 선황후인 셰이트를 찾아가 ‘호위 병력을 더 늘여서 그곳에 머무를지 궁전에 돌아올지’를 묻는 일이었다.

사실 이 일은 황제가 직접 펌크슈에게 지시한 건 아니었으나, 시종장과 아트락시 공작을 거쳐서 그에게 떨어지게 된 임무였다.

펌크슈는 흐뭇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면서 ‘임무를 마치면 꼭 네가 폐하께 결과를 보고해라’ 말하던 아버지를 떠올리자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으나, 어쨌든 이 일은 경험이 미숙한 그에게 맡겨진 첫 임무였다.

게다가 상대할 사람이 선대 황후이다 보니, 펌크슈는 제대로 격식을 갖추어 황후에게 찾아가고 싶었다.

근처 마을에 간 펌크슈는 먼저 몸을 깨끗이 씻은 다음, 미리 가져온 깔끔한 기사 제복으로 갈아입고서 다시 신전으로 출발했다.

신전은 주위에 지형지물이 없는 너른 들판 한가운데에 있어서, 이틀이나 내린 비를 맞고서도 오히려 풍경이 좋아졌을 뿐 축축하고 음침한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신전 안으로 들어가자 깔끔하고 고상해야 할 공간 여기저기에 황제가 보낸 호위들이 서 있어서 어딘가 딱딱하고 무서운 분위기를 풍겼다.

선황후 셰이트는 신전의 가장 중앙. 하얗고 너른 단상이 햇살을 정면으로 받아 뽀얗게 빛나는 그 지점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펌크슈는 선황후가 기도를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그녀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린 다음 황제의 명을 전했다.


“카리센의 다가 공작과 아이니 황후가 쓰러진 하이신스 황제를 인질로 삼고 어두운 힘을 이용해 타리움을 공격하려 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사태가 위급하게 돌아갈 수도 있으니, 선황후 폐하께서 궁전으로 돌아오길 바라십니다.”

“황제가?”

“예. 정 돌아오기 싫으시거든 호위 병력을 이쪽으로 더 보내겠다 하셨습니다.”

말을 마친 펌크슈는 이미 빼곡한 경비병들을 보고서, 여기서 사람을 더 늘리는 건 힘들 거라 생각했다.

안 그래도 저 사람들 틈에서 생활하면 매일 감시받는 기분이 들 텐데. 물론 감시가 맞겠지만. 그래도 어떻게 여기서 숫자를 더 늘린단 말인가.

예상대로 선황후는 한숨을 내쉬는가 싶더니 바로 대답했다.


“정말로 위급할 때라면 병력을 나누는 것도 비효율적이겠지. ……그쪽으로 돌아가겠다.”

 

* * *

신전에 보낸 칙사 쪽에서 전서구가 먼저 도착했다.

선황후가 환궁을 결정했다는 소식이었다.

어제 이런저런 일로 라나문에게 가지 못했던 라틸은, 아침 업무가 끝나고 라나문과 점심을 먹으러 가기 전 이 소식을 전해 받고 입맛이 뚝 떨어졌다.


“괜찮으십니까?”

라틸의 표정이 좋지 않자, 서넛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라틸은 종이를 서랍 안에 넣고 일어서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엄마가 보고 싶은데. 한편으론 엄마를 보는 게 긴장됩니다.”

“폐하.”

“엄마가 막판에 날 위해 행동해준 건 맞지만…… 어쨌든 그 전엔 오빠와 손을 잡고서 그 사건을 벌인 건 맞으니까요.”

“폐하.”

서넛이 걱정스럽게 바라보자, 라틸은 ‘후’ 소리를 내며 한숨을 크게 뱉은 다음 어깨를 떨구고 억지로 웃었다.


“그래도 뭐. 보다 보면 나아지겠죠. 어쩌면 그편이 앙금을 털기엔 더 나을 수도 있고. 평생 안 볼 거 아니니까요.”

서넛은 라틸이 업무를 보느라 벗어 두었던 재킷을 들어 어깨에 덮어주었다.

라틸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렘으로 걸어갔으나, 초조한 마음이 가시지 않자 평소에는 되도록 피하려 하는 화제를 꺼냈다.


“레안은 어떻게 지낸답니까?”

‘아주 특별한 일’이 없거든 그에 관련된 이야기는 전하지 말라 해서 보고가 올라오진 않지만, 주위에 감시자들을 쭉 깔아 두었으니 계속 감시 보고서가 올라오고 있긴 할 터였다. 그걸 묻는 것이다.

서넛은 레안에 대해서 늘 점검하고 있었던 듯 바로 대답했다.


“조용하게 지내고 있다 합니다.”

“달리 행동하거나 그런 건 없고요?”

“몇 달 전쯤인가. 폐하께서 무사하신지 물어본 적은 있습니다.”

기르골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나니 신경이 쓰이긴 했나 봐? 라틸은 몇 달 전 이야기를 듣자마자 싸늘하게 코웃음 쳤다.

‘사디’란 이름으로 기르골을 만날 때, 오빠가 그 이야기를 기르골에게 했단 말을 듣고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던가.


“허튼 생각 하지 않나 계속 잘 감시해요.”

“그쪽으론 호위를 늘리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날 공격할 만한 사람이라면 내가 오빠를 유폐시켜 놨단 걸 알 텐데. 굳이 오빠를 공격하진 않겠죠.”

라틸의 말에 서넛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틸은 서넛이 예전에 레안과 친한 친구였단 걸 떠올리고서 괜히 서넛의 반응을 살폈다.

겉으로 보기엔 별 반응이 없었으나, 그래도 뒤늦게라도 동정심이 드는 건 아닐까 괜히 신경이 쓰였다.

그래도 서넛이 별다른 변화가 없어 보이자 라틸은 안심해서 하렘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라나문에게 사람을 보내 함께 식사하잔 말은 전했기에, 라틸은 산책하듯 천천히 걷는 대신 빠른 걸음으로 라나문의 거처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바쁘게 걷는 뒤로 누군가 다급히 뛰어오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자 경비병 하나가 헐레벌떡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라틸이 바라보자, 가까이 온 경비병이 황급히 무릎을 꿇고 보고했다.


“폐하. 레안 황자님이 암살자 습격을 받아 중태에 빠지셨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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