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올라가는 건 스스로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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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화. 올라가는 건 스스로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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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화. 올라가는 건 스스로 할게
2022.11.13.
기르골의 입꼬리가 장난스레 올라갔다.
순순히 대답해주지 않겠구나. 그 미소를 보자마자 라틸은 그가 이 상황을 즐거워하고 있단 걸 알아차렸다.
수상한 신호를 보내고. 거기에 낚여 찾아오고.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보고. 그 과정 자체를 즐기는 듯했다.
“말해줘.”
라틸이 요구하자 기르골은 머리카락을 놓아주면서 놀려댔다.
“우리 제자님이 날로 먹으려 드네.”
“내가 직접 맞춰보란 소리야?”
기르골이 라틸의 머리카락을 또 한 가닥 꼬고서 아프지 않게 잡아당기며 놀았다.
라틸은 그의 동공을 유심히 살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칼라인이 물으려다 만 기르골 후궁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르골은 후궁이 되겠다고 나설 위인은 아니었다.
후궁이 되어 얻을 정치적인 욕심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후궁이 될 만큼 자신에게 마음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하긴. 이런 거로 치면 자신을 사랑해서 후궁이 된 사람은 하나도 없긴 하지만.
클라인이 구출 사건 이후 꽤 이쪽을 호감 어린 눈으로 보고 있긴 하지만, 올 때는 그냥 하이신스가 보내서 온 게 아니던가.
‘내 마음을 착각한 것도 있고.’
칼라인은 도미스와 연인이기도 했지만 후궁으로 온 건 호위 목적이 큰 것 같고.
그러면 뭘까. 하지만 8이라고 하면 딱 후궁들 얘기처럼만 여겨졌다.
정식 후궁인 클라인, 라나문, 게스타, 타시르, 칼라인, 자이신 여섯 명에 국서 자리를 노리고 왔지만, 하렘에 머물고 있는 므라딤까지 하면 총 일곱 명을 모은 거니까.
아니, 그렇지만 저 성격에 후궁 제안은 역시 아닌 거 같은데…….
라틸이 우물거리자 기르골은 라틸의 머리카락을 한쪽 옆에서 땋기 시작했다.
뭘 어쨌든 혼자 잘 노는 뱀파이어 같았다.
기르골이 라틸의 머리카락을 반 정도 다 땋은 후에야 라틸은 ‘에라 모르겠다, 아니면 아닌 거지’라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칼라인의 질문을 입에 담았다.
“혹시…… 내 후궁 하고 싶어서 그래? 여덟 번째 후궁?”
기르골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바람에 라틸은 얼굴에 화끈 열이 올라왔다.
역시 이건 무리였나?
젠장. 이건 다 칼라인 때문이다. 칼라인이 말하기 전에는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민망한 기분이 채 다 빠져나가기도 전에 기르골이 라틸의 턱을 잡고 슬며시 들어올렸다.
얼결에 턱이 올라가자 기르골의 붉은 눈동자가 바로 정면에 들어왔다.
자신이 틀린 답, 그것도 아주 민망하게 틀린 답을 말한 데서 오는 부끄러움 탓에 눈동자가 반사적으로 옆으로 돌아갈 뻔했으나, 그래도 라틸은 기르골을 계속 빤히 쳐다보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기르골이 머리를 약간 기울이더니 라틸에게 허스키하게 속삭였다.
“입을 맞출 거야, 아가씨.”
갑자기? 라틸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기르골을 보았다. 기르골과 자신이 입을 맞추고 뭐고 할 사이던가 싶은 마음이 불쑥 치솟았다.
아니, 사이도 사이지만 상황도 좀 그랬다. 후궁이 되고 싶어서 손으로 8자를 표시했냐는 질문에 답은 하지도 않았는데 다짜고짜 입을 맞출 거라니?
기르골은 라틸은 반쯤 내리깐 눈으로 바라보며 속삭였다.
“싫으면 지금 말해.”
‘당연히’까지 생각한 라틸은 기르골의 입술을 보자 뒷말을 잊었다. ‘당연히 해야지’라고 하려 했던건지 ‘당연히 싫어’라고 하려 했던건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기르골은 정말로 입술이 예뻤다. 사실 예쁜 건 입술만이 아니지만.
라틸은 자신이 기르골과 키스하면 안 될 이유를 찾아보았다. 첫째. 위험해서. 둘째. 둘째부터 없다.
그러면 기르골과 키스해도 될 이유는 뭘까. 첫째. 잘생겨서. 둘째. 섹시해서. 셋째. 아름다워서.
좋다. 키스해도 될 이유가 두 개나 더 많다. 이건 키스해도 된단 신호다.
판단을 내린 라틸이 두 팔을 뻗어 기르골을 감싸자, 기르골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음에 드나 확인해 봐, 아가씨.”
그의 입술이 곧장 라틸의 입과 겹쳐졌다.
입술이 포개어지자마자 라틸은 깜짝 놀랐다. 그의 송곳니가 몹시 긴 탓이다.
그의 이에 혀를 가져다 댔다가 베일까 잠시 주춤하는 사이, 기르골은 완전히 잡아먹듯 라틸의 입안으로 파고들어 갔다.
키스는 그래도 많이 해 봤다 자부했던 라틸이지만 수천 년인지 수만 년인지 모를 경험치 앞에서는 별수 없었다.
키스라기보다는 잡아먹는 거나 다름없을 정도로 돌진해오는 기르골의 입맞춤 아래에서 라틸은 눈이 어질어질해지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와 입술을 맞대는 것뿐인데도 발끝에 힘이 들어가면서 자꾸만 그를 꽉 자신에게로 붙여 끌어안게 되었다.
“맛있네.”
기르골이 한껏 라틸의 입술과 숨결을 가지고 놀다가 잠시 떨어진 틈에 속삭이는 말에 라틸은 머리끝이 다 쭈뼛거렸다.
“맛있어, 제자님.”
라틸의 몸이 뒤로 넘어가면서 창문에 등이 완전히 달라붙고 말았다.
기르골은 라틸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어 살짝 잡아당기며 한껏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피부에 닿자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누가 뱀파이어 아니랄까 봐 칼라인처럼 목덜미에 집착하는 꼴이 딱 그 종족이었다.
라틸은 목덜미가 탐이 난다는 듯 연신 그쪽에 입을 맞추는 기르골에게 매달리다가, 두 사람의 무게에 창문에 벌컥 열리면서 허리가 뒤로 확 젖혀지자 그제야 제정신을 차렸다.
“그만.”
라틸이 이마를 잡고 밀어내자 기르골은 아쉽다는 듯 떨어지면서도 끝까지 라틸을 지켜보았다.
라틸은 한 손을 뒤로 빼 창문을 닫으면서 기르골을 훔쳐보았다.
기르골은 여전히 달뜬 표정으로 라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잔뜩 흥분했다는 건 바지를 벗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니, 어쩌다가 갑자기 키스하게 된 거지? 8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러 온 건데?
라틸은 커다랗게 부푼 기르골을 보자마자 퍼뜩 제정신이 들어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급하게 일어나느라 꽃화분 하나를 걷어차 버렸지만, 기르골은 그래도 라틸을 뜨거운 눈길로 바라보기만 했다.
그 꽃화분이 옆 화분을 넘어뜨리고 그 옆 화분이 그 옆 화분을 넘어뜨리고 그 옆 화분이 옆 화분을 넘어뜨리면서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 꽃화분 스물두 개가 박살 났을 때는 눈에서 열기가 좀 떨어졌지만.
“미안. 일부러 걷어찬 건 아니야.”
라틸이 당황해서 사과하자 기르골은 쓰러진 꽃화분을 안아 들더니 꽃잎을 하나 뜯어내 내밀었다.
“줄까, 제자님?”
“……아니. 너 많이 먹어.”
라틸은 자신만큼 부푼 기르골의 입술을, 그리고 보기 남사스러운 그 부분을 보자 이 자리에 있기 민망해서 황급히 까치발을 들고 화분 사이사이를 껑충거리며 달아났다.
그러다 문을 열기 직전.
눈 깜짝할 사이 라틸의 앞에 나타난 기르골이 문고리를 잡은 라틸의 손 위에 손을 올리고서 속삭였다.
“난 무리한 요구는 안 해, 제자님. 내가 집중할 수 있는 자리를 줘.”
“그게 후궁 자리야? ……네가 그걸로도 만족한다고?”
“그럼. 나도 인간 귀족들 세상을 아주 잘 모르진 않거든. 당장 내가 국서가 되지 못하는 건 알아. 후궁 타이틀만 달아주면 알아서 하나하나 다 죽이고 위로 올라갈게.”
기르골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나 잘해. 그런 거.”
‘잘하면 안 되거든, 미친 뱀파이어야.’
키스는 쉽게 허락이 떨어졌지만, 후궁으로 들이는 건 쉽게 허락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기르골을 후궁으로 들여앉혀 두면 그가 당장 카리센에 갈 일은 확실히 없지만…… 또다른 대적자인 라나문과는 코앞에서 살게 된다.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그게 아니더라도, 기르골이 본인 말마따나 후궁 자리부터 시작해 하나하나 궁중 암투로 후궁들을 다 죽여버리면?
라틸은 후궁들이 치고받고 싸우길 원했지만 하나가 다른 후궁들을 죄다 죽여버리길 바라진 않았다.
기르골을 하렘에 들이는 건 개싸움 판에 호랑이를 풀어놓는 꼴이 되지 않을까? 물론 다른 후궁들이 개란 건 아니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호랑이가 꼬리에 리본을 달고 덩치 큰 고양이 시늉을 한다 한들 절대로 속으면 안 된다. 상대는 호랑이였다.
라틸이 대답하지 않고 바라보자 기르골이 손가락을 뻗더니 라틸의 입술 가운데를 툭 가볍게 누르며 말했다.
“잘 생각해 봐, 제자님.”
* * *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절대 안 됩니다.”
기르골의 거처를 떠나 본궁으로 돌아가는 길. 서넛은 기르골이 절대로 훔쳐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거리가 떨어지자 초조하게 라틸을 만류했다.
아무래도 문 앞에서 나눈 대화다 보니 들어버린 것 같았다.
라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서넛 경은 달리 좋은 방법이 생각납니까?”
“그야…… 그건…….”
“기르골이 아이니에게 가버리면 그게 더 최악이잖아요.”
“…….”
“우리에겐 참 다행인 게, 아직 아이니 황후는 대적자로서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기르골이 그쪽에 붙지만 않으면 이전 대적자들보단 약할 겁니다.”
도미스의 기억 속에서 안야 역시 별달리 무술을 익히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안야는 강해졌고 도미스를 이겼다.
물론 그쪽은 도미스도 어릴 때부터 무술을 익히진 않았지만.
하여튼 그런 걸 보면, 대적자는 기본적인 재능이 장착되어 있어서 일단 스승에게 잘 배우기만 하면 솜씨가 훌쩍훌쩍 느는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기르골은 몇 세대에 걸쳐 대적자들을 훈련시켜 온 만큼 경험도 출중할 터. 절대로 두 사람이 붙지 않게 막아야 했다.
“기르골이 아이니 황후에게 가는 걸 막는다 해도, 폐하. 이쪽엔 라나문도 있습니다.”
서넛의 걱정에 라틸은 후우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죠. 그게 문젭니다.”
일단 당장은 기르골이나 라나문이 서로에게 별 관심이 없기는 한데…….
“기르골은 라나문 존재를 알고, 라나문도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알죠.”
“예.”
“라나문이 기르골에 대해서도 압니까, 서넛 경?”
“잘 모르겠습니다.”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하렘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것도 알아봐야겠습니다.”
* * *
그 시각.
라나문 곁에는 타시르가 와 있었다.
그는 막 라나문에게, 그가 대적자의 역할을 하겠다면 자신이 서포트 해주겠다는 제안을 한 터였다.
라나문은 타시르의 제안에 바로 대답하는 대신 다리를 꼬고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런 비슷한 제안을 한 이들이 많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자들은 라나문이 자기 선에서 다 돌려보내거나 가문 쪽으로 돌려서 그쪽에 얘기하라고 했다.
하지만 타시르는 같은 후궁인 데다 실제로 그에게 이런저런 도움이 될 개인 능력도 빼어났다.
그렇다 보니 라나문 역시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대적자로서 무언가를 할 마음이 아직 없긴 하지만, 로드 쪽이 라나문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죽이러 올 수도 있는 상황 아닌가. 완전히 그 부분에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떻습니까, 라나문 님?”
타시르가 살갑게 미소 지으며 바라보자, 라나문은 그 가느다란 눈매를 살피다가 물었다.
“나와 한배를 타게 된다면. 대가로 뭘 내놓을 거지?”
“제 사랑을 드리지요.”
“쓸모없는 건 받지 않는다.”
“저도 몸은 좀…….”
라나문의 이마에 혈관이 파랗게 올라오자, 타시르는 낄낄 농담하기를 멈추고 물었다.
“그래, 뭘 원하십니까 우리 욕심 많은 도련님은?”
“국서 자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