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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화. 그거 무슨 뜻이었어? (282/367)


282화. 그거 무슨 뜻이었어?
2022.11.09.



 
아침 식사를 하는 내내 라틸은 꿈에서 본 장면을 떠올리다가 깨달았다.


‘칼라인이 대적자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드를 만든 거. 지난번 도미스 때 있었던 그 실수를 이용한 거구나.’

지난번에는 실수로 세웠던 가짜 로드를, 이번에는 고의적으로 만든 것이다. 그때 경험을 이용해서.

이 생각을 하자 라틸은 자신의 전생인 도미스의 고생이 떠올랐고, 칼라인이 도미스를 ‘제때’ 발견했더라면 그녀가 동생 안야처럼 클레렌드 대공의 후계자로 후에라도 풍족히 살았으리란 게 떠올랐다.

도미스가 처음 칼라인을 만났을 때는 이미 양부에게 구박을 당하며 자랐고 도끼로 죽을 뻔하기까지 했으나, 그래도 그때라도 수렁에서 건져 올렸더라면…….

새삼 자신을 바로 발견하고 찾아온 서넛이 고마워져서, 라틸은 샐러드를 씹다 말고 옆을 보았다.

식사 도중 들어온 서넛은 대각선 뒤에 서서 라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시선이 마주치자 씩 장난스럽게 웃는다.

라틸은 손을 뻗어 그의 등을 토닥였다.


“날 바로 발견해서 고맙습니다.”

안 말하려고 속인 건 화나지만, 그래도.

서넛은 무표정한 얼굴로 눈으로만 웃는 채 라틸을 보고 있다가, 입꼬리까지 당겨 웃었다.


“갑자기 그런 이야기는 왜 하십니까?”

“칼라인은 처음에 엉뚱한 사람을 로드라 알았잖습니까.”

라틸이 전생 기억을 떠올린단 걸 모르는 서넛은 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그게 생각나신 겁니까?”

라틸은 꿈이나 전생, 도미스 이야기를 하는 대신 샐러드를 입에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 갑자기 그 생각이 나면서 속이 막 뒤집어집니다.”

서넛은 다시 웃음을 터트리더니,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말했다.


“칼라인 님한테 들었는데, 당시 대적자랑 로드가 한 집에서 계속 산 것 때문에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 것 같다 했습니다.”

“확실합니까? 관련이 있는 겁니까?”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렇게 추측해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샐러드를 마저 입에 넣고 씹었다.


‘그럼 내가 아이니나 라나문이랑 있을 때도 감지하기 어려워지는 건가? 하지만 서넛은 라나문이 대적자인 줄 몰랐잖아. 라나문을 보기 전에 결혼식에서 아이니를 봤을 때도 몰랐고. 이미 내가 로드란 걸 아는 상태라 다른 쪽은 자세히 안 봐서 그런가? ……아니야, 나이트가 대적자를 알아본다면 진즉에 찾아다녔겠지. ……기분은 나쁘지만 알아볼 정도는 아닌 건가?’

이후 식사를 끝낸 라틸은 집무실로 간 다음 시종장을 불러 따로 지시했다.


“사블레 후작. 엄마가 있는 신전에 사람을 보내서, 분위기가 흉흉하니 이쪽으로 와서 보호받는 게 나을지, 신전에 사람을 더 보내는 게 나을지 정하라고 해요.”

시종장은 라틸의 지시에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아직 보기 불편하지 않으실지…….”

“평생 안 보고 살 수는 없잖아요.”

“…….”

“그래도…… 막판에 엄마가 날 감쌌으니까.”

그리고 라틸이 엄마를 보호하려는 건, 엄마와 싸우고 말고와 관계없는 점이었다.

라틸이 아직 엄마에게 화가 안 풀렸다고 해서 라틸이 엄마를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라틸은 화가 풀리기 전이라도 엄마를 보호해야 했다. 자신이 각성하지 않기 위해서.

* * *

저녁까지 업무를 본 라틸은 비서들의 얼굴에 피로감이 가득 몰려오자, 시계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종장이 라틸을 따라오며 물었다.


“저녁 식사는 하렘에서 드시겠습니까? 라나문 님과 두 분이서 대화도 나누어보고 그러셔야지요. 두 분이 운명의 한 쌍이 아닙니까.”

“운명 얘기하려면 아이니도 끼워줘, 사블레 후작.”

시종장의 표정이 우울해지자 라틸은 웃으면서 농담이라 말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그도 얼른 돌아가 쉬라 했다.

그러고는 윌랑에서 온 손님들이 머무는 궁전을 향해 걸어갔다.

기르골에게 가기 위해서였다.

기르골은 자신이 로드인데도 사람들을 모아 놓고 대적자가 있는 나라를 나쁜 나라라고 몰아간 걸 다 지켜보았다.

거기서 끼어들진 않았지만, 보면서 이상한 수신호도 보냈다.

손으로 8자를 만들어 보였지.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보아야 했다.


“윌랑 왕자에게 가시려는 겁니까?”

이를 모르는 서넛은 라틸은 뒤따라오며 물었다.


“아니. 기르골한테 갑니다.”

라틸의 대답에 서넛이 움찔했다.

라틸은 기르골은 대적자들의 스승이고 서넛은 뱀파이어 나이트란 걸 떠올리고 얼른 눈으로 걸어온 길을 가리켰다.


“서넛 경도 가서 쉬어요. 나 혼자 가도 됩니다.”

기르골에겐 여럿이 가봤자 오히려 더 복잡해지기만 하고.

그러나 서넛은 돌아서는 대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같이 가겠습니다. 어차피 얼굴도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얼굴? 아. 서넛 경, 아직 기르골 얼굴 못 봤던가?”

“얘기만 들었습니다. 그때 윌랑 왕자 사절단 사이에 있었다고요. 하지만 당시엔 피인어들 쪽을 보느라…….”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구나. 그래. 얼굴은 봐 둬야지. 라틸은 그에게 돌아가라 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계속 걸어갔다.

서넛도 기르골 얼굴을 알아야 나중에 대치를 해도 피하든지 부딪치든지 하겠지. 물론 웬만하면 안 부딪쳐야 하겠지만.


“서넛 경은 약하니까 보자마자 싸우고 하면 안 됩니다.”

“전 약하지 않습니다.”

“칼라인보다 약하잖아요.”

“칼라인 님은 예외입니다.”

“기르골보다 약하잖아요.”

“그자도 예외입니다.”

“전에 나한테도 졌잖아요.”

“폐하는 예외입니다.”

“게스타랑 싸우면 누가 이깁니까?”

“싸워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그럼 대신관이랑 싸우면 누가 이깁니까?”

“힘이 상극이라…….”

라틸이 입을 네모나게 벌리고 쳐다보자, 서넛은 부끄러운지 시선을 피했다.


“서넛 경.”

“네.”

“약해.”

“!”

서넛은 시무룩 어깨를 떨어뜨렸고 라틸은 그의 등을 톡톡 두드리고서 다시 길을 따라갔다.

그런데 손님들이 사용하는 궁전에 가 보니, 윌랑 사절단이 쓰는 입구 부근에 또 윌랑 왕자가 나와 있는 게 아닌가.

저 왕자도 주로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인 모양이다.

왕자는 자기 부하들과 심각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라틸이 근처로 오자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보다가 대번에 표정을 구겼다.

그자가 자신을 유별나게 싫어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컨디션이 또 갑자기 좋아져서인지, 라틸은 오랜만에 속마음을 들을 수 있었다.


[젠장. 저 황제는 왜 하필.]

억지로 표정을 펴고 웃긴 하지만 속으로는 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속마음이 대번에 다 들리는 상태는 아닌지, 옆에서 같이 꾸벅꾸벅 인사하는 그의 부하들 속마음은 들리지 않았다.


‘처음이랑 비슷한 정도인가?’

처음 속마음을 읽게 되었을 때 딱 이랬다. 몇몇의 속마음만, 그것도 드문드문 읽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이 그런 상태 같았다.

어쨌든 저 왕자도 참. 하필 속마음이 들리는 이때에 저렇게 속으로 욕을 하다니.

너무 노골적인 싫어함에 라틸은 화도 안 나서 헛웃음을 지었다.

그걸 본 윌랑 왕자는 움찔하더니 잔뜩 경계하며 생각했다.


[왜 날 보면서 웃는 거야? 젠장. 진짜 나한테 관심 있나.]

‘절대 아니다, 이 헛똑똑이야.’

[기르골은 핑계고 나한테 관심 있는 거 같은데. 제기랄. 저 황제는 포악한 성격이라던데. 저 폭군, 내가 싫다고 하며 날 붙잡아서 강제로 후궁으로 삼으려 할지도 몰라. 막 묶어놓고. 으!]

‘저 왕자는 내 후궁들 얼굴을 못 봤나. 조랭이떡처럼 생긴 게 뭐라는 거야?’

“폐하?”

라틸이 이마에 힘줄이 난 채 윌랑 왕자를 보며 웃고 있자, 서넛이 옆에서 의아한 듯 불렀다.


“아. 아닙니다. 어디서 조랭이떡이…….”

“예?”

“아닙니다.”

라틸은 빙그레 웃고서, 고슴도치처럼 삐죽삐죽 가시를 세운 채 이쪽을 경계하는 왕자에게 인자한 척 웃으며 협박했다.


“그렇게 짐을 뜨거운 눈빛으로 쳐다보면 오해하게 되는데, 왕자. 영원히 짐 옆에서 유학 생활 하고 싶은가 봐? 짐이 근무할 때 옆에 묶어 놔 주랴? 공부되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럼 옆으로 비켜서도록.”

왕자가 얼른 제 부하들을 챙겨 옆으로 쪼르륵 비켜서자, 라틸은 서넛을 데리고 그사이를 위풍당당하게 지나갔다.

서넛은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겠는지 고개를 기웃했으나 열심히 라틸을 따라 걸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 라틸은 기르골이 사용하는 방 앞에 도착했다.

기르골의 방문 앞에 서자 저절로 아까의 가벼운 마음이 올라가며 좀 손가락이 곱아들었다.

라틸은 초조하게 방문 앞에서 손가락을 우물거리다가 손을 살짝 말고 문을 노크했다.

사실 기르골이라면 이미 이 앞에 누군가 왔다는 걸 알겠지만. 그래도.


“기르골.”

문을 두드리고 이름을 불렀으나 안에서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라틸은 문고리를 돌렸다.

천천히 문을 열자 기르골보다 먼저 방 안을 빼곡히 채운 꽃화분들이 보였다.

기르골은 그 사이에서 물뿌리개를 들고 돌아다니며 화분마다 물을 주고 있었다.


 
그 광경에 많이 놀란 걸까. 뒤에서 웬일로 서넛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저 자연 친화적인 뱀파이어가 그 배신자 뱀파이어 기르골이라고? 그 악명 높은? 저렇게…… 꽃을 사랑하는데?]

서넛은 자연을 사랑하면 일단 착할 거라 여기는 모양이다.

문이 다 열리자, 기르골은 물 주던 걸 멈추고서 라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천천히 그의 입술 끝이 벌어지며 올라갔다.

꿈속에서 도미스의 냉대에 당황하던 그의 모습이 순간 겹쳐지며 지나갔다.

그러다 기르골의 눈동자가 라틸의 어깨 너머로 건너가는 순간.

라틸은 서넛에게 지시했다.


“나가서 기다려요, 서넛 경.”

서넛은 순순히 “네.” 대답하고서 밖으로 나갔다.

라틸은 문을 발로 툭 쳐서 닫고서 기르골을 계속 쳐다보았다.

수많은 꽃으로 가득 찬 그의 방 안에서는 짙고 달콤한 향기가 감돌았다.

기르골이 물뿌리개를 이상한 각도로 드는 바람에 거기서 흘러나온 물이 그의 신발을 적시고 매끈한 바닥을 흘러갔다.

라틸은 화분을 피해 걸어가며 물었다.


“이러면 어디에 앉고 누워?”

“옆방에서.”

“옆방은 다른 사람이 쓰잖아.”

“그래?”

쫓아냈군. 라틸은 혀를 차고서 까치발을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라틸이 바로 앞으로 다가오자 기르골은 물뿌리개를 내려놓더니 라틸을 번쩍 들어올려 창틀에 앉혀 주었다.

얼결에 창틀에 앉게 되자, 기르골은 커튼을 펼쳐 라틸에게 덮어 주더니, 만족스럽게 웃었다.

뭐 하는 짓인진 모르겠지만.


“좋은 꿈을 꿨어, 아가씨.”

“내가 나왔어?”

“아가씨가 날 죽였어.”

“좋은 꿈…… 확실해?”

“아가씨가 너무 슬퍼서 울었거든.”

“그게 좋아?”

“난 좋아.”

무슨 뜻일까, 생각하고 있자니 기르골이 물뿌리개를 가져와 물었다.


“아가씨 머리에 뿌려봐도 될까?”

‘하지 마 미친놈아!’

“안 돼.”

라틸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기르골은 물뿌리개를 옆에 순순히 내려놓았다.


“화분이 왜 이렇게 많아?”

라틸은 그가 자신의 머리에 물을 못 뿌리도록 물뿌리개를 발로 잡고 끌어오며 물었다.

기르골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가씨가 안 오는 날마다 하나씩 구해놨어.”

“어디서 구했는데?”

“온실에서 뽑아왔어.”

‘온실 담당자가 비명을 지르겠군.’

“화원이랑.”

‘화원 담당자도 비명을 지르겠군.’

라틸은 방 안을 빼곡하게 채운 꽃들을 둘러본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다 차기 전에 오다니. 내가 딱 좋은 타이밍에 왔네.”

기르골이 활짝 웃었다. 미친 것 같지만 머릿속 젠가는 무사해 보였다.

기르골이 라틸의 옆에 나란히 앉더니, 손가락으로 라틸의 귓가 머리카락을 돌리며 물었다.


“무슨 일로 왔어? 나 보려고 왔어?”

“회의실에서.”

“응.”

“손으로 8자 표시한 거. 무슨 뜻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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