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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화. 각성 (280/367)


280화. 각성
2022.11.02.


장면이 바뀌었고, 주위가 무척 분주해졌다.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며 테이블보를 쫙쫙 펼쳤고 그 위에 반짝이는 촛대를 내려놓았다.

하녀들이 바닥을 쓸고 가면 하인들이 꾸덕꾸덕한 정체 모를 액체를 바른 대걸레를 들고 그 뒤를 밀며 따라갔다.

클레렌드 대공 후계자의 방문을 축하하기 위해 모레 있을 연회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꿈속에서 이와 관련된 정보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지만, 라틸은 도미스가 속으로 하도 구시렁거려서 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평소 도미스는 일할 때도 별로 불만을 품지 않는 타입이었지만, 동생 안야를 위한 파티 준비를 제 손으로 하는 건 영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하얀 테이블보 위에 윤이 나는 꽃병을 올리고 거기에 거대한 꽃다발을 꽂고 있자니, 어디선가 나지막하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칼라인의 목소리와 동생 안야의 목소리처럼 들려서, 도미스는 꽃꽂이하던 걸 멈추고 주춤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두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대체 이 소곤거리는 소리는 어디서 들려오는 것일까.


‘그러게. 어디서 나는 거지?’

도미스는 무시하고서 계속 꽃꽂이를 하려 했으나, 그 속삭이는 소리가 자꾸 정신을 갉아대는 느낌이 나자 꽃다발을 끌어안고 연회장 밖으로 나갔다.

연회장 밖 역시 많은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로 바빴고 안야와 칼라인은 보이지 않았다.

도미스는 자신의 머리 여섯 개는 합친 것처럼 거대한 꽃다발을 끌어안고서, 뒤뚱거리며 복도를 계속 걸어갔다.

두 개 계단을 올라 창문 근처 발코니 부근에 가자 마침내 목소리의 주인들이 있었다. 도미스는 멍하게 걸어가다가 황급히 기둥 뒤에 숨었다.


‘아니, 저기서 나는 소리를 저어어 아래에서 들었다고?’

라틸은 황당했으나 일단 들은 건 들은 거였다.

게다가 저 아래쪽에 있을 때는 소곤대는 소리만 들리더니. 여기까지 오자 소곤대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두 사람이 대화하는 내용도 들려왔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가…… 후계자가 아니라니요?”

도미스는 첫 소절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꽃을 떨어뜨릴 뻔했다. 기르골에게 ‘후계자를 잘못 찾았을지도 모른다’라는 가능성을 주워듣긴 했지만 ‘설마 그러겠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아니라고?


“그래. 도중에 문제가 생겨서. 잘못 안 거 같다.”

칼라인의 대답에 안야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동생 안야가 싫은 것과 별개로 도미스는 지금 안야의 기분이 어떨지 짐작이 갔다.

자신 역시 자기가 부모의 친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쫓겨날 때 아주 비참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잘못 알았단 게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제가 순서에서 밀린단 건가요? 저보다 더 후계자에 가까운 친척이 있었단 말이에요? 아니면 완전히 다른 사람과 절 착각했단 건가요?”

“아예 착각했어.”

동생 안야가 숨을 깊게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칼라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내 잘못이다.”

안야의 호흡이 조금 더 거세졌다.


“지금 그걸…… 하. 사과라고……? 내 삶을 완전히…… 이렇게 망쳐 놓고서…… 사과라고 하는 건가요?”

“네게 준 집과 별장 등은 모두 돌려받지 않겠다. 내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니까. 재산 역시 평생 풍족하게 살 수 있도록 처리해두겠다.”

“돈 문제가 아니에요!”

안야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쪽 잘못으로 내 인생이 가짜가 돼버린 거잖아요, 지금!”

“미안하다.”

“난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부터 대공의 후계자로 컸어요. 평생 그렇게 살았다고요. 다른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어요. 내 친구들, 지인들, 전부 다 날 대공의 후계자로 알고 있어요.”

“…….”

“그런데 이제 와서 뭐? 내가 아니라고? 그럼 나는 뭐가 되는데요? 평생을 가짜 삶을 산 나는 뭐가 되는데요?”

“네겐 미안하단 말 외엔 뭐라 말할 게 없군. 내 잘못이니.”

“그래서. 지금 이 말을 하는 이유가 뭐예요? 데려온 게 가짜라고 말하고 연회를 엎어야겠다고?”

“네 입장도 있으니, 여기를 떠난 후에 정리하지.”

“하. 진짜…… 진짜 너무하다.”

안야의 목소리 끝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도미스는 처음 들어보는 허탈하고 슬픈 목소리였다.


“그래서. 그래. 누구던가요, 그 ‘진짜’ 후계자는? 내 자리, 아니, 나한테 맡겨뒀던 자리에 칼라인 씨가 올려두려 하는 그 ‘진짜’ 후계자요.”

“아직 확인 중이라 확실히 대답하기 어렵군. 한 번 잘못 알기도 했으니 이번엔 제대로 파악하고 싶어서.”

“혹시 도미스예요?”

날카로운 안야의 목소리에 도미스는 괜히 움찔했다. 칼라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미스는 꽃다발을 안고 떨다가 자기가 더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왜 대답을 안 하지? 아니라 해야 하는 거 아냐?]

꽉 끌어안은 꽃에서 짙은 꽃향기가 코를 넘어와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도미스는 갈비뼈 부근이 괜히 간지러워졌다. 지금 칼라인의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머리가 하얗게 질렸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 내내 칼라인이 계속 주위를 맴돌았지. 혹시…… 저거 때문일까? 확인해보고 싶어서?


“그것도 검토 중이고.”

칼라인이 뒤늦게 한 대답에 동생 안야가 웃는지 우는지 애매한 소리를 냈다. 곧 퍽퍽 누구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줄 알았지. 요즘 기르골 씨랑 칼라인 씨가 걔를 유달리 챙기는 거 보고 뭔가 있겠지 싶었어요.”

“…….”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아버지가 실종돼서 지금 내가 어떤 마음인지 알면서. 도미스는 기르골 씨를 이용해서 어머니까지 납치하려 했어요. 기르골 씨가 걔 부탁을 들어준 것도, 걔가 후계자일지도 몰라서, 그래서 그래요? 난 후계자가 아니니까, 진짜 후계자한테 잘 보여야 해서?”

“그런 게 아니야, 안야. 진정해.”

“어떻게 진정하는데!”

“…….”

“다른 사람이면 그래, 기분 나빠도 그냥 기분만 나쁜데. 어떻게, 어떻게 도미스 이름을 여기서 꺼내냐고!”

 

 

* * *

도미스가 꽃다발을 안고 왔던 길을 돌아가면서 다시 화면이 바뀌었다.

들고 있던 꽃은 없었고 그들은 회랑인지 테라스인지 애매한 곳에 서 있었다.

난간 주위로는 연한 보라색과 노란 꽃이 뒤섞여 피어 있었고, 금색과 은색 풍선을 묶어 바람이 불 때마다 풍선들이 반짝이며 흔들렸다.

어두운 밤이었으나 바닥에 조명이 들어와 있어서 이 멋진 풍경을 보는 게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풍경보다 시선을 잡아끄는 건 앞에서 울고 있는 동생 안야였다.

칼라인과 기르골은 보이지 않았다.

동생 안야는 화려한 드레스 차림이었는데, 궁전보다도 그녀가 더욱 화려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모습으로 동생 안야는 도미스를 노려보며 계속 울었다.

그러다 도미스가 불편함을 느끼고 옆으로 지나가려 하자, 팔을 뻗어 막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네가 거슬리고 싫었어.”

도미스는 대답하는 대신 허리를 숙여 팔 아래로 지나가려 했지만, 안야는 손을 뻗어 그녀를 또다시 막았다.

그러고는 도미스를 혐오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내게 아주 나쁜 존재란 걸 보자마자 알 수 있었어. 너랑 부딪칠수록, 그냥 그게 느껴졌어. 넌…… 그런 거 모르겠어?”

“비켜줘. 너랑 말도 하고 싶지 않아.”

“넌 어릴 때, 내가 기억도 안 날 땐 내 부모님을 뺏어가려 했고. 커서 나타나선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뺏어가려 했지. 그런데 이젠…… 내 자리까지 뺏어가네?”

안야의 눈이 증오심으로 파랗게 빛났다. 도미스는 그녀의 팔을 뿌리치고 가려다가, 화가 나는지 발끈해 돌아서서 같이 쏘아붙였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너야말로 내가 원하던 걸 다 가져갔잖아. 내가 사랑한 부모님은 날 버리고 너만 챙겨서 달아났어. 칼라인? 내가 먼저 사랑했어!”

“!”

“내가 먼저 사랑해서, 날 데려가 줬으면 했지만 안 그랬잖아. 그는 너한테 갔지. 넌 고생 한 자락 안 해보고 컸어. 내가 여기저기서 버림받고 나뒹굴고 욕을 들어먹으면서 지낼 동안.”

말을 하다 보니 감정이 북받치는지 도미스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그런데 뭐? 내가 네 걸 뺏는다고? 모든 것, 심지어 높은 작위까지 가졌으면서도 계속 날 쫓아내고 괴롭힌 게 넌데. 네가 왜 나한테 그래?”

“넌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 도미스. 난 지금 엄청난 오해 때문에 모든 걸 잃게 생겼고 넌 모든 걸 가지게 생겼거든. 난 지금 널 씹어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으니까…… 그딴 식으로 쳐다보지 마. 그 눈, 뽑아 버리고 싶으니까.”

도미스의 입술이 위로 올라가며 목 안쪽에서 이상한 기운이 들끓었다.

도미스는 화를 참지 못하고 안야의 멱살을 잡아챘다.


“네가 왜 나한테 화를 내? 네가 뭔데? 오해? 넌 그 오해로 평생 편하게 살았잖아. 난 그 오해로 평생 힘들게 살았어. 그런데 왜 네가 날 원망해?”

그때.


“무엄하다!”

차가운 목소리가 회랑 저 너머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막 바람을 쐬러 연회장 테라스로 나온 왕관 쓴 사람이 두 사람을 무섭게 쳐다보고 있었다.

왕관 쓴 사람은 뒤에 병사들을 이끌고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도미스에게 매섭게 명령했다.


“클레렌드 대공의 후계자에게 감히 뭐 하는 짓이냐. 당장 무릎을 꿇고 사과하라!”

왕은 도미스가 안야의 멱살을 잡는 장면부터 본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도미스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전 무엄하게 굴지 않았습니다, 전하. 지나가려는 저를 붙잡고 모욕한 건 이 사람이에요.”

“이 사람?”

사정을 모르는 왕의 눈엔 왕인 그조차 신경 써야 할 정도로 대단히 신분 높은 안야에게 도미스가 미친 짓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틀림없었다.

왕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뱉더니 몹시 분개해서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당장 저 미친 하녀가 무릎을 꿇게 해라!”

그 말에 병사들이 억지로 그녀의 어깨를 눌러 무릎을 꿇게 하려 했으나, 힘이 세진 도미스는 그들을 대번에 뿌리쳤다.

뿌리친 데서 모자라 병사들은 거의 3m 가까이 뒤로 날아갔다.

자신도 취객들을 상대로 한 번 겪은 일이기에 라틸은 이 상황이 아주 이상하지 않았으나, 동생 안야와 왕, 병사들은 몹시 경악한 듯했다.

게다가 라틸이 사는 시대와 달리 여기는 좀비나 괴물들이 흔한 시대이기에, 왕은 대번에 “괴물! 괴물이다!” 하고 외쳤다.

그 말에 도미스가 무어라 반박하려는 찰나. 평소보다 좀 더 격식 있는 차림을 한 수사관 안야가 달려오더니 왕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다급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괴물이 아니라 제 동생입니다. 좀 놀란 것 같으니 제가 데려가 진정시키겠습니다.”

수사관 안야는 도미스에게 작게 재촉했다.


“전하께 죄송하다고 해, 도미스. 가서 쉬자.”

왕과 싸우는 건 미친 짓이었다. 궁정에서 일하는 수사관이니, 안야는 빨리 사태를 가라앉히고 도미스를 소란에서 빼내고 싶었을 것이다.

다행히 수사관 안야가 왕에게 신뢰를 받고 있던지, 왕의 표정에 약간 변화가 생기려는 찰나.

동생 안야가 도미스를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괴물이 아닌 거. 확실한가, 안야 경? 그쪽이 동생이라 주장하는 저 여자. 내가 알기론 랑스터 백작가에서 이미 귀족 하나와 하녀 하나를 살해한 살인자라 알고 있는데? 도망치듯 달아났지. 어디로 갔나 했더니, 안야 경이 여기로 데려왔을 줄은 몰랐어.”

그 말에 왕은 표정이 다시 험악해져 물었다.


“정말이냐, 안야 경!”

“아닙니다, 전하!”

안야가 황급히 대답했으나 왕은 클레렌드 대공 후계자의 말에 더욱 신뢰가 가는 듯했다.

그는 화가 나서 다시 명령했다.


“당장 저 살인범을 체포해라!”

병사들이 도미스를 붙잡는 사이, 왕은 동생 안야를 보며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사과했다.


“이거 참. 기껏 좋은 연회를 열어 놓고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 저 하녀는 잘 심문해서 처리할 테니 화 풀도록 하게.”

수사관 안야는 당황해서 왕에게 다가가며 외쳤다.


“정말로 아닙니다, 전하. 그 사건은 오해였습니다!”

“오호라. 사건이 있었던 게 맞군? 그런데 안야 경은 사적인 감정 때문에 그 죄를 덮어준 거였나?”

“전하, 클레랜드 대공 후계자는 도미스 양부모의 자식입니다. 이 때문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도미스에게 악의를 품고 대했으니, 말을 다 믿으면 안-.”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병사가 수산관 안야를 밀쳐냈다.

크게 다쳤다가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수사관 안야는 팽개쳐지자 힘없이 밀려나며 난간에 머리를 박고 떨어질 뻔했다.

놀란 도미스는 안야를 붙잡기 위해 몸을 일으키며 다시 병사들을 뿌리쳤는데, 그 엄청난 힘이 병사들에겐 위협이 되었던 걸까.

도미스에게 뿌리쳐진 병사가 안쪽 창문을 부수며 넘어가는 순간.

옆에 있던 다른 병사가 기겁해서는 “괴물!”이라고 외치며 도미스를 검으로 벤 것이다.

그러나 검에 베인 건 도미스가 아니라, 놀라서 도미스를 감싼 수사관 안야 쪽이었다.

수사관 안야는 도미스를 안은 채 바닥을 굴렀다.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도미스는 까만 하늘을 보았고, 자신의 얼굴 위로 흐트러지는 수사관 안야의 머리카락을 보았다.

더듬더듬 손을 올리자 손에 피가 묻어났다.

주위로 소란이 일었으나 도미스의 머릿속은 멍하게 울리기만 했다.

모든 소란이 동떨어진 곳에서 나는 소음처럼 귓가를 맴돌기만 했고, 아무것도 인식되지 않았다.

그저 손에 진득하게 묻은 그 피, 붉은 피만이 점점 시야에 차오르고 있었다.

라틸은 도미스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감지하고 소름이 돋았다.

무언가가 저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분노가 도미스의 핏줄을 검게 변화시키며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앞이 깨진 유리 파편처럼 다 부서지는 순간.

도미스는 상체를 일으켜 수사관 안야의 목을 물고 피를 빨아당겼다.


“괴물이다!”

“뱀파이어야!”

“죽여!”

소란이 점차 목소리의 형태를 띠어 갔으나 도미스는 수사관 안야의 피를 계속해서 빨아 마셨다.

그리고 그녀의 목에서 입술을 떼는 순간, 도미스가 ‘무언가’를 수사관 안야에게 불어넣었다.

‘무언가’가 들어가자 싸늘하게 멈췄던 수사관 안야가 호흡을 크게 한 번 하더니, 아주 느리게 그녀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도미스는 두 팔로 쓰러진 수사관 안야를 안고서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모든 사람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무어라고 외쳐대고 있었으나, 도미스는 그들의 목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라틸은 도미스가 지금 이 순간. 완벽하게 강해졌단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도미스 역시 그걸 알았다. 또한 자신이 아등바등 매달려 왔던 이 모든 작고 소소한 평화를 움켜쥔 자들이 너무나…… 역겹다는 것도.


“가치 없다.”

차가운 목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가는 순간, 사방이 폭파하며 테라스를 장식한 꽃잎과 보석들이 작게 부서져 튀기 시작했다.

느리게만 보이는 그 광경들 사이로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고 있었다.

바닥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한 어둠이 천천히 그들을 감쌌다.

도미스는 자신이 끌어안은 안야를 안고서 동생 안야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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