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틀어지기 시작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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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화. 틀어지기 시작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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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화. 틀어지기 시작한 사건
2022.10.26.
“네 의붓동생 왔다던데. 설마 그사이에 만나진 않았지?”
도미스가 베개를 끌어안고서 침대를 굴러다니고 있으려니, 안야가 발로 문을 열고 들어오며 물었다.
두 손 가득 종이봉투를 든 안야는 방구석에 봉투를 내려놓고는 좀비처럼 걸어와 도미스의 위에 엎어졌다.
“아이고 머리야.”
그녀에게서 짙은 술 냄새가 났다. 이곳은 왕실 하녀로 일하는 도미스의 숙소였지만 1인실인 터라, 안야는 자기 집에 가기 싫으면 늘 이렇게 와서는 하루나 이틀 자고 가곤 했다.
“술집 손님인 척 잠입수사 한다고 다섯 시간 연거푸 술을 마셔댔더니 머리가 박살 날 거 같아.”
“안야 씨. 내가 오늘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안야는 꾸물꾸물 옆자리로 이동해 아예 자려는 듯 눈을 감다가 “어?” 하고 비몽사몽 물었다.
“무슨 얘기인데?”
“내 의붓동생이요. 안야 씨랑 이름 똑같은 애.”
“걔가 너한테 또 뭐래? 걔 너랑 진짜 무슨 악연 아니야?”
“클레렌드 대공 후계자가 아닐 수도 있대요.”
안야는 바닥에 이마를 대고 있다가 확 고개를 치들었다.
“뭐? 진짜야?”
“아니요. 말한 사람도 확실하게 말한 건 아닌데…….”
안야는 잠시 고개를 기우뚱하더니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면 좋겠다.”
도미스는 자신을 불쾌하다는 듯 내려다보던 안야와 자신이 안야의 앞길에 방해가 될 거라 말하던 양모, 근처에도 오지 말라며 고함을 질러대던 양부를 떠올렸다. 안야는 양부와 다른 사람이라고 두둔하던 칼라인까지.
도미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아니면 좋겠어요.”
* * *
장면이 바뀌었다. 도미스는 한 손에는 빨랫거리가 가득 든 바구니를, 다른 한 손에는 뭘 섞었는지 부드러운 향이 나는 물이 가득 담긴 양동이를 들고 가고 있었다.
그러다 도미스는 계단 여러 개가 얽혀 있는 복도 끄트머리 지점에서 멈춰 서서 위쪽을 쳐다보았다.
비스듬한 계단 너머 난간에서 두 명의 안야가 싸우는 게 보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둘 다 무언가 날카롭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다 수사관 안야 쪽이 돌아서면서 무어라 쏘아대는 순간. 돌아서서 자리를 뜨려던 동생 안야가 갑자기 눈이 번뜩이더니 확 몸을 돌리면서 다른 안야의 어깨를 잡아챘다.
상황을 보니 ‘잠깐만, 멈춰!’ 이 정도의 요구를 하는 듯했다.
수사관 안야는 거기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동생 안야의 팔을 뿌리쳤는데, 서로 힘을 주다 보니 그 순간 몸이 기우뚱하면서 계단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
라틸은 도미스의 머릿속이 백지처럼 변하는 걸 느꼈다. 얼마나 놀랐던지 비명도 생각도 아예 싹 사라지면서 그야말로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라틸은 도미스의 감정을 공유하면서도 인격은 별개이기에, 동생 안야 쪽이 조금 당황한 표정을 하다가 돌아서는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
기르골은 동생 안야의 근처에 있었는데, 이 와중에도 혼자 표정이 멍했다.
그는 하품을 하다가, 동생 안야가 뭐라고 말하자 웃더니 그녀와 나란히 서서 어딘가로 걸어갔다. 방금 전 떨어진 사람 쪽으로는 관심도 없어 보였다.
라틸의 눈에 그들이 보인다는 건 도미스도 눈은 그쪽을 향하고 있단 거였다.
점차 도미스의 하얗게 질린 머리에 기르골의 웃는 옆모습이 크게 들어왔고, 마침내 커다래지더니 하얘졌던 머릿속이 펑 터지면 입과 마음속에서 동시에 비명이 울렸다.
“안야 씨!”
도미스는 들고 있던 바구니와 양동이까지 다 던지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속도가 빠르던지 계단에서 구르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비명을 들은 경비병들과 몇몇 궁인들도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도미스는 계단 가장 아래쪽에 몸이 꺾인 듯 누운 친구 안야를 발견했다. 기절한 듯한데 입 사이로 피가 한 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야 씨!”
도미스가 울면서 외쳤으나 친구 안야 쪽은 의식이 없었다.
“안야 씨!”
도미스가 재차 울자 옆으로 온 경비병이 목에 손을 올려보더니 다급히 말했다.
“살아 있어. 의사! 의사 불러!”
경비병이 동료에게 말하자, 다른 경비병이 얼른 뒤돌아 어딘가로 달려갔다.
“목뼈가 부러졌을 수도 있으니 건드리지 마요, 도미스 씨.”
경비병의 말에 도미스는 마지못해 안야에게서 손을 뗐으나 그 손은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저 사람이!”
도미스의 눈가에 강한 열기가 느껴졌다. 도미스는 고개를 확 들고서, 아까 동생 안야가 서 있던 방향을 보았다. 동생 안야가 인상을 찌푸리고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르골은 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 * *
다시 배경이 바뀌었을 때. 도미스는 침대에 누운 친구 안야의 손을 잡고 있었다. 다행히 죽진 않은 것 같았지만…….
[안야 씨. 깨어나 봐요. 제발…….]
‘아직 못 깨어났구나.’
아직 친구 안야는 의식이 없는 듯했다. 혀를 차고 있자니, 슬퍼하던 도미스가 이번에는 안야의 손을 놓고서 주먹을 꽉 쥐고 가쁘게 호흡했다.
[클레렌드 대공 후계자라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게다가 안야 씨가 혼자 발을 헛디딘 거라고? 혼자 실수한 거니까 대공 후계자한테 무례하게 굴면 안 돼? 말도 안 돼! 안야가 안야 씨 어깨를 잡으려 안 했으면 안야 씨가 발을 왜 헛디뎠겠어!]
동생 안야 쪽이 친구 안야를 떠밀지 않은 건 알지만, 도미스는 애초에 동생 안야가 다른 안야를 그렇게 잡아 돌려세우려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 여겨 화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도미스가 돌아보자, 문이 살짝 열리더니 그 사이로 기르골이 몸의 반 정도를 내밀었다.
그를 보자 도미스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얼굴 보기 싫다고 했잖아요! 오지 말아요! 나한테 사과할 필요 없으니까!”
‘이미 몇 번 왔다가 그냥 갔나 보네.’
당황한 기르골의 표정을 본 라틸은 속으로 혀를 찼다.
도미스의 머릿속에서, 동생 안야를 보며 웃던 기르골의 옆모습이 연달아 튀어나오자 라틸은 혀를 찼다.
아무래도 도미스는 기르골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웃으면서 동생 안야와 대화를 나누던 그 장면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기르골은 주저하다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 도미스는 닫힌 문을 노려보다가 다시 쓰러진 친구 안야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 * *
‘어?’
장면이 바뀌거나 시간을 훌쩍 넘어간 기억이 보일 때. 언제나 배경 전환은 부드러운 편이었다. 너무 매끄러워서 그 전 장면과 바로 이어져 보일 정도로.
그러나 지금은 상태가 이상했다.
‘도미스?’
라틸은 도미스에게 말을 걸 수 없단 걸 알면서도 그녀를 불러 보았다.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고 계속해서 눈앞이 점멸했다 밝아지기를 빠르게 반복했다.
눈을 의식적으로 빠르게 깜빡거려서 까만 화면과 밝은 화면이 계속 바뀌는 걸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도미스! 왜 이래?’
얘가 충격을 받아서 미친 건가? 당황해서 이름을 외쳐보고 있자니, 깜빡이던 게 뚝 멈췄다.
하늘에서는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고, 도미스는 어느새 밖에 서 있었다.
너른 들판엔 아무도 없었으나, 궁전이 가까운 걸 보니 궁전 내부에 있는 어느 공간 같았다.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번개가 번쩍였다.
도미스는 맞은편에 선 기르골을 보고 있었다. 날이 어두운 데다 쉴 새 없이 내리는 비 때문에 잘 보이진 않지만, 맞은편에서 비를 맞고 서 있는 남자는 기르골이 분명했다. 무언가를 든 기르골.
[아직 보기 싫어.]
도미스는 아직 기르골에게 화가 난 듯했으나, 기르골은 비를 맞으면서 도미스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가까워지면서 세찬 비와 어두운 하늘 탓에 잘 보이지 않았던 그의 짐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건…… 목이었다.
비에 흠뻑 젖어 살과 머리카락이 아래로 쏠려 있는 잘린 목. 아직도 목 끝에서는 피가 흘러나와 비가 섞여 잔디로 떨어지고 있었다.
도미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며 오한이 들었다.
[아버지……?]
다시 한번 시야가 엄청난 속도로 깜빡여댔다. 그 깜빡임이 멈추었을 때. 기르골은 도미스의 바로 앞에 있었다.
도미스와 마주 선 그가 하얗게 웃으면서 양부의 잘린 목을 내밀었다.
“이거 줄게 아가씨. 기분 풀어. 응?”
깜빡임이 더욱 빨라졌다. 실제로 도미스가 눈을 깜빡이는 건 아닌데. 대체 무슨 연유인지 라틸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번개가 번쩍이면서 기르골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보였다. 빛을 받은 부분은 천사처럼, 빛을 받지 못한 부분은 암울한 악마처럼 보였다.
그가 손에 든 건 끔찍하기 그지없는데. 빛을 받은 기르골의 표정은 신전 벽에 새겨진 것처럼 아름답고 깔끔해서, 오히려 보는 사람을 더욱 오싹하게 했다.
안 그래도 붉은 그의 눈동자가 오늘따라 더욱 요사스러워 보였다.
라틸은 그 표정을 알아보았다. 그건 기르골의 얇은 정신머리 젠가가 무너지기 직전에 나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를 알 리 없는 도미스는 뒤로 비틀 물러나다가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아아아악!”
순간. 성큼성큼 다가온 누군가 커다란 손으로 도미스를 대번에 뒤로 쭉 끌어당기더니 자신의 등 뒤로 보내며 낮고 단호하게 말했다.
“저리 치워!”
도미스에게 한 말은 아니었다.
도미스는 자신을 밀어낸 게 누군지도 모르고서 무작정 등 부위 옷을 꽉 잡고 매달렸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싫은 사람이었으나 오랫동안 아버지로 알고 온 사람의 목을 갑자기 코앞에서 봐 버린 충격이 큰 듯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도미스. 도미스!”
기르골이 볼 수 없도록 도미스를 감춰준 사람이 우산을 대신 받아 들며 차분하게 이름을 불렀다.
칼라인이었다.
“칼라인. 방금, 방금 그거. 방금 그게.”
도미스가 양처럼 떨자 칼라인은 무릎을 굽혀 도미스를 살피며 물었다.
“괜찮아?”
도미스는 난데없이 나타난 칼라인을 바라보다가, 울상을 지으며 그를 밀쳐냈다.
“그쪽도 꺼져요! 둘 다 꺼져! 뭐 하자는 거예요!”
다리가 부러진 자신의 앞에서 안야를 두둔하던 칼라인이, 갑자기 나타나서 편을 들어주자 고맙다기보다는 경계부터 드는 듯했다.
칼라인은 꺼지는 대신 계속해서 떠는 도미스를 끌어안고 등을 두드렸다.
“괜찮아. 괜찮아. 쉿. 괜찮아.”
그가 단조롭게 몇십 번이나 괜찮다는 말을 계속할수록 도미스의 떨림은 점점 멎어갔다.
하지만 떨지 않게 된 후에도 도미스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를 못하고 물었다.
“그 사람. 계속 뒤에 서 있어요?”
도미스가 작은 목소리로 묻자 칼라인이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더니, 누군가와 눈짓을 주고받고서 “아니.” 하고 대답했다.
“목은요?”
“없어. 들고 갔어.”
도미스는 그제야 칼라인을 붙잡은 손을 놓았다. 하지만 두렵고 놀라운 마음이 가시자, 다음으로 떠오른 건 칼라인에 대한 분노였다.
“그쪽도 안야 편이잖아요. 같이 가버려요.”
그러나 칼라인은 떠나는 대신 도미스를 계속 바라보기만 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이고 약한 눈으로.
그런 시선을 계속 보내다가, 한참 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도미스. 어쩌면 네가…… 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