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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화. 회수해야겠다. (277/367)


277화. 회수해야겠다.
2022.10.23.


그가 뭘 상상하는지 눈에 훤히 보인다. 라틸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칼라인의 어깨 끝이 조금 내려왔다.


“놀랐습니다.”

라틸은 민망해서 한 손으로 눈가를 짚었다.


“걔는 들어와도 문제고 안 들어와도 문제잖아. 들어오란다고 들어올 사람도 아니고. 라나문도 들어오란다고 들어올 사람이 아니긴 한데, 그쪽은 운이 좋았지. 아트락시 공작이 알아서 넣어줬으니까.”

기르골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서넛은 고개를 기웃했다. 라틸은 끙 소리를 내며 눈썹을 구겼다.

라틸이 볼 때 기르골은 일종의 자연 현상이었다. 통제 불가능한 자연 현상.


“기르골은 후궁에 두면 궁중 암투를 하는 게 아니라 거기 사람들을 죄다 죽여버릴걸.”

라틸이 힘없이 중얼거린 말에 칼라인이 수긍했다.


“그렇지요.”

“내 말을 잘 들을 거 같지도 않아.”

아직 모든 게 어렴풋하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다른 것들은 굴러갈 방향성이 잡혔다. 심지어 그 다가 공작조차도 방향성은 잡혔다. 그 인간은 무조건 안 좋은 쪽으로 갈 테니.

하지만 기르골은…….

라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서 몸을 돌렸다.


“기르골 관해선 생각 좀 해봐야겠다.”

‘도미스의 기억을 마저 보면 기르골에 대해 잘 알 수 있을까?’

하지만 요즘은 도미스 꿈을 매일 꾸지 않았다. 게다가 그 도미스도 결국 최종에는 기르골과 틀어졌지.


‘도미스도 기르골을 통제하지 못한 거야. 사이가 좋아 보였는데도…….’

 

* * *

히얼란은 힐긋 소단주의 눈치를 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지, 타시르는 한쪽 다리 발목을 다른 쪽 다리의 무릎에 얹은 편한 자세로 앉아 멀뚱히 등불만 보고 있었다.
 

 
펜에서 잉크가 새어 나오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모습에 히얼란은 조심스럽게 그를 불러보았다.


“소단주님?”

의외로 대답은 바로 나왔다.


“히얼란. 폐하가 요즘 그 용병들을 가까이하시는 거 같지?”

“예? 흑사신단이요? 아…… 예, 그렇죠. 공식적으로 쓰진 않으시지만요. 왜 그러세요?”

타시르는 대답 대신 양 다리 자세를 바꿔 앉았다.

원래 황제는 흑사신단보다 흑림 쪽에 더 의지했다. 가짜 황제 사건 때만 해도 그랬다. 그런데 최근 들어 황제는 흑사신단을 더 의지하고 있었다.


“칼라인과 폐하 사이에 변화가 있었나.”

“네? 칼라인 님이요?”

“차가운 물 한 잔만.”

히얼란이 물을 뜨러 나간 사이. 타시르는 재빨리 노트 앞장을 뜯고 그 위에 낙서 같이 생각을 정리했다.


‘라나문 님은 자기가 대적자인가 의심하고 있었지. 하지만 라나문 님 말고, 대적자란 의혹을 받던 여자가 하나 더 있었다. 붉은 머리 여자가 갈색 머리 여자를 대적자로 의심하고 있었어. 하지만 그 여자에 대한 내용이 갑자기 사라졌고, 폐하와 아이니 황후는 뜬금없이 또 다른 대적자라 나타났다. 그러면서 흑사신단이 갑자기 중용되고 있지.’

우연일 수도 있지만 붉은 머리 여자가 갈색 머리 여자를 대적자로 의심하던 그 시기에, 칼라인은 실종되었던 상태였다.

두 가지 일은 전혀 관련 없어 보였고 여전히 관련 없어 보였으나, 대적자들이 셋이라 우르르 나타나는 이때 칼라인의 용병들이 갑자기 황제에게 중용되기 시작했다.

이 역시 관련 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변화의 시기에 늘 똑같은 톱니바퀴 두 개가 돌아가고 있다면 그사이에는 어떤 연결 고리가 존재하는 게 아닐까?

얼핏 보면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는 그런 작은 톱니바퀴라도?


‘용병왕은 지금의 변화와 관련이 있는 걸까.’

“도련님, 여기요.”

히얼란이 물을 떠 와 타시르에게 내밀었다.

타시르가 물을 마시는 사이 히얼란은 알아보기 어려운 글씨로 가득 한 노트를 힐긋 보았다.

이게 뭐냐고 그가 묻기도 전에 타시르가 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난 클라인 황자처럼 막무가내로 돌진할 성격도 못 되고, 가만히 있어도 사건의 중심부로 갈 위치도 아니지.”

“네?”

“갑자기 밖에선 좀비가 나타나고, 500년 만에 영웅이 나타나고, 타리움과 카리센은 서로가 어둠의 힘을 이용하는 나라라 선언하잖아.”

“그렇죠? 한데 그게 왜요?”

“두 강대국이 서로를 위험한 나라라 선언했으니, 그 사이에서 다른 나라들은 많이 혼란스러울 거다. 세상이 더 어지러워지겠지.”

“그래도 여긴 황궁 안이잖아요. 괜찮을 거예요, 소단주님.”

“괜찮은 정도여선 안 돼.”

“예?”

“폐하는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있는데. 그 흐름을 못 따라가면 국서 자리는 날아간다 이 말이잖아, 히얼란. 좀 빠릿빠릿하게 알아들어.”

“아……?”

히얼란은 멍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타시르는 책상을 펜 끝으로 두드리다가 손바닥 끝으로 떨어진 먹물을 문질렀다.


“그냥 폐하한테 아양이나 떨고 할 때가 아니다.”

히얼란은 그제야 타시르의 말을 다 알아듣고 기겁해 말렸다.


“태풍이 불 땐 몸을 사려야죠! 그게 좋은 거예요, 소단주님.”

“여기서 몸을 사리면 무사한 게 아니라 아예 바람 타고 날아가 버려. 폐하 안중 밖으로.”

“!”

“같이 고생도 좀 하고 해야 기억에 남지.”

무슨 고생을 하시려고…… 히얼란은 겁이 나서 괜히 손톱을 물어뜯었다. 타시르가 혼자 그 고생을 한다면 모를까. 그 고생을 자기가 같이해야 할 게 뻔하기에 사실 그리 내키지 않았다.


“히얼란.”

“네, 소단주님.”

“큰 싸움이 벌어질 거다. 운이 좋아 전쟁까진 안 가더라도.”

“으.”

“현재 내 선에서 운용 가능한 상단 자금과 내 비자금, 내년 예산이 얼마지?”

“다 합쳐 봐야 하지만 오백억 바르트는 훨씬 넘죠.”

“그거 다 털어서 대형 신전 주위 건물들을 다 사.”

“예?!”

“대형 신전이 아니라도 수도나 국경 부근에 있는 신전이라면, 주위 건물을 전부 사. 다른 나라에서도 살 수 있으면 사고.”

히얼란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놀라 물었다.


“무기나 쇠나 먹을거리 같은 게 아니라요?”

타시르는 생각을 설명하는 대신 방긋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라나문 도련님한테 대적자 일로 도움을 준 적이 있지. 그것도 회수해야겠다.”

“!”

 

* * *



‘도미스 꿈은 오랜만이네.’

기르골을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잠시 소파에 누웠는데 그사이에 잠이 든 모양이다.

라틸은 계속해서 달려가는 도미스의 몸 안에서 이곳이 전의 그 숲이란 걸 알아차렸다.

얼마나 그렇게 달렸을까? 한참 만에야 도미스가 우뚝 멈춰 서더니 놀라 생각했다.


[다리가 안 아파!]

너무 상황이 정신없다 보니 이제서야 다시 통증이 없단 걸 알아차린 듯했다.

그걸 깨달은 도미스는 더 뛰는 대신 나무 그루터기에 앉았다. 도미스는 빠르게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떨어진 낙엽들을 꽉 쥐어 부수었다.


[나한텐 이상한 힘이 있어. 확실해. 대체 왜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도미스는 손을 펴서 초조하게 손등과 손바닥을 번갈아 보았다.


“이 능력으로 내가…… 사냥꾼이 될 수 있을까?”

‘아직 자기가 로드일 거란 생각은 못 하는구나.’

 

* * *

도미스가 그루터기에서 몸을 일으키자 장면이 바뀌었다. 그녀는 이미 궁전에 돌아가 있었고, 옆에는 물을 반쯤 받은 양동이와 벽에 기대어 둔 대걸레가 있었다.

하지만 도미스는 열심히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까치발을 들고 창문 너머 기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도미스! 뭐 해!”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도미스가 얼른 발을 내리고 대걸레를 쥐는 순간, 앞에 펼쳐진 건 긴 황궁 복도가 아니라 어두운 빨래터였다. 손에 든 것도 대걸레가 아니라 목검이었다.


‘어설프네.’

그 어설픈 솜씨로 도미스는 기사들이 검 휘두르던 모습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설픈 솜씨는 도미스가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눈에 띄게 좋아지더니, 어느 순간 옆에서 한 남자가 “좀 더 강하게. 빠르게. 한 호흡으로.” 하고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도미스의 소매 역시 조금씩 짧아지더니 지금은 손목보다 조금 위로 올라갔다.

라틸이 그걸 인식하자마자 도미스는 검 휘두르길 멈추더니 옆을 보며 남자에게 웃었다.


“늘 고마워요, 믹스 경.”

“고마워할 필요 없어. 네가 재능 있어 보여서 가르치는 거니까.”

“그래도요. 보통은 안 그러잖아요.”

도미스가 ‘믹스 경’이라 부른 기사는 픽 웃더니 들고 있던 물병을 건넸다.


“넌 실력이 뛰어나, 도미스. 언젠간 도미스 양이 아니라 도미스 경이라 불릴 날이 올 거다. 좋은 기회가 있을 것 같으면 내가 알려줄 테니 늘 준비를 철저히 해둬.”

다시 주위 배경이 바뀌었을 땐 도미스는 화장대 앞에 앉아 있고 동생과 다른 안야는 뒤에서 머리를 땋아주고 있었다.

도미스는 거울 너머로 안야를 한 번씩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 안야 씨.”

“너 머리카락이 꼭 개털 같다, 도미스.”

“!”

“하하. 미안. 그런데 진짜야. 푸들 같아.”

“…….”

“왜 부른 거야?”

“저, 사냥꾼이 되어볼까 싶어서요.”

“내가 푸들이라 불러서 그래? 날 사냥하려고?!”

도미스가 웃음을 터트리는 바람에 안야는 열심히 땋던 머리끝을 놓치고 말았다.


“어어, 움직이지 말라니까?”

“안야 씨 때문이 아니라요. 그냥. 적성에 맞는 거 같아서요.”

도미스는 왕궁 하녀 일을 소개해준 게 안야이기 때문에 눈치를 보았지만 안야는 흔쾌히 대답했다.


“그래 그럼. 목표가 생겼으면 그걸 이뤄야지.”

“괜찮아요……?”

“뭐 어때.”

안야는 도미스의 머리 끝을 주워다 빠르게 다 땋은 다음 검은 고무줄로 칭칭 말고서 히죽 웃었다.


“그럼 궁전 밖에서 살아야겠네? 나랑 같이 살면 되겠다.”

도미스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자 안야가 등을 팡 두드렸다.


“언니랑 같이 살기 싫어?”

‘언니’라는 표현에 도미스는 더욱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으나, 곧 빠르게 고개를 젓고서 안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안야는 그런 도미스를 몇 번 토닥이다가 갑자기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 그런데 곧 클레렌드 대공 후계자가 여기 온다더라. 네 그 재수 없는 의붓동생 말이야. 몇 달 전에 진즉에 온다더니. 왜 이제 오나 몰라? 한…… 내일이나 모레 뒤쯤에 도착한다던데. 아프다 하고 병가라도 낼래?”

도미스는 동생 안야가 왜 늦게 오는 건지 알고 있었다. 다쳐서 그렇다. 다 나은 다음 오는 거겠지.

동생 안야만을 챙기던 칼라인이 떠오르자 마음이 욱신거렸지만, 도미스는 이전과 달리 쥐꼬리만큼 더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든 말든 상관없어요. 피해도 만나게 된다면 안 피하고 그냥 여기 있을 거예요.”

 

* * *

또 장면이 바뀌었고, 도미스는 얼핏 보기엔 들판 같은 곳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궁전이 그리 멀지 않은 걸 보니 궁전 안에 있는 어딘가인 듯했다.


“씩씩해졌네.”

그러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도미스는 검을 내려놓고 뒤를 보았다.

햇볕을 등지고 있다가 도미스는 잠시 눈이 부셔서 인상을 쓰고 눈을 감았다.

몇 번 눈을 깜빡이는 사이. 빛이 만들어낸 실루엣 같은 게 가까이 다가오면서 점차 모습을 드러냈다.

단정한 구두와 맵시 좋은 몸, 창백한 손, 그리고 아름다운 얼굴까지.


“기르골!”

기르골을 알아본 도미스는 활짝 웃으며 그에게 팔을 뻗었다. 하지만 완전히 그를 끌어안지는 못하고 주춤 안는 시늉만 하다가 손을 풀고 머쓱하게 웃었다.

기르골도 두세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눈웃음을 지었다.


“다시 봐서 반가워 아가씨.”

도미스는 목검을 아래로 내리고서 중얼거렸다.


“전에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다음날에 가보니까 없더라. 우린 친구인데. 왜 항상 말도 없이 사라져?”

“좀 사정이 있었어요. 원한 건 아니었어요.”

도미스는 힘없이 웃다가 기르골이 왔다는 건 동생 안야도 왔으리란 걸 떠올리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피하지 않겠다고 남긴 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식구들 때문에 이런 기분으로 있고 싶진 않아서, 도미스는 얼른 밝게 화제를 돌렸다.


“칼라인도 여기 왔어요?”

화제를 돌려서 나온 게 왜 하필 칼라인인지, 도미스는 말을 꺼내자마자 후회했으나 그가 여기 있는지 궁금하긴 했다. 마지막 만남이 좋지 않았으니까.

뜻밖에도 기르골은 팔짱을 끼더니 살짝 장난스럽게 화난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가 떠나고 나서 칼라인도 떠났어.”

“떠나다니요?”

“대공 후계자. 어쩌면 우리가 잘못 찾은 건지도 모른다고.”

도미스는 그렇구나, 하고 중얼거리다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네? 그럼-.”

“아가씨 의붓동생이 어쩌면 후계자가 아닐지도 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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