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6화. 사랑이 위대한가 확인해 볼까? (276/367)


276화. 사랑이 위대한가 확인해 볼까?
2022.10.19.



 
다음날.

오전 업무를 하던 도중, 라틸은 칼라인의 방문을 받았다. 칼라인은 라틸에게 흑사신단 용병이 전해온 카리센의 상황을 이야기해주었다.


“아이니 황후가 수도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라틸은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곧 내 욕을 하겠네. 아니면 클라인 욕이나. 아니면 둘 다? 다가 공작 장례식에서 욕으로 꽉 찬 연설문을 읽으려나. 연설문까진 다가 공작이 준비하고 갔어야 할 텐데.”

라틸은 아이니를 생각하면 감정이 늘 복합적이었다. 이리저리 휘말려 날아다니는 그녀, 클라인을 구하기 위해 뛰어와 준 그녀가 가엾다 싶으면서도, 그녀와 대립하는 모든 상황에 화가 났다.


“카리센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나 봅니다, 주인.”

“많은 일이 있었지. 알잖아, 그대도. 직접 가진 않아도 부하들을 다 보내줬으니까.”

“그렇지요. 하지만 다가 공작 장례식은 없을 겁니다, 주인.”

“장례식 생략한대?”

“살아 있답니다.”

라틸은 고개를 반사적으로 끄덕이다가 “응?” 하고 되물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다가 공작이 살아 있다고?”

“네.”

“목 옆에. 여기. 여기 뜯겼던데?”

“살아 있답니다.”

“……하긴. 그때도 살아 있긴 했어. 바로 치료했나?”

고개를 기웃하는 라틸에게 칼라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다가 공작이 살아 있단 게 문제가 아닙니다, 주인.”

“그럼?”

“그쪽에서, 폐하와 클라인 황자가 어두운 힘을 이용해 하이신스 황제를 잠들게 한 거라며, 타리움이 어두운 세력을 이용하는 나라라 비난했습니다. 공개적으로.”

“아하.”

라틸은 짧게 혀를 찼다.


“그럴 줄 알았어.”

이미 짐작한 일이라고 해서 기분 나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라틸은 그 일을 더 언급하지 않고 참았다.

라틸 역시도 이미 카리센을 몰아붙일 준비를 끝낸 상태였고, 그 계기가 되어줄 사절단만 오면 열심히 개소리를 퍼부어 줄 준비가 되어 있기에 인내심을 발휘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뒤.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절단이 돌아오자, 라틸은 그들을 가장 큰 회의실로 오라 한 다음 굳이 이곳에 머무는 외국 대사와 귀빈들까지 모두 다 모이라 했다.

라틸은 사람들이 모일 동안 재빨리 방으로 돌아가 평소보다 훨씬 신경 쓴 옷으로 갈아입으며 생각했다.


‘다가 공작. 하이신스에 대한 건을 이용하려고 외국 귀빈들을 다 꺼지라 한 거 같은데. 그게 큰 실책이었단 걸 이제 알 거다.’

대관식이나 행사 때 입는 의상만큼은 아니지만, 평소보다는 한껏 신경을 써 예복을 차려입은 라틸은 허리를 쭉 펴고 회의실로 빠르게 걸어갔다.

라틸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서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인사를 올렸다. 개중에는 못마땅한 표정의 윌랑 왕자도 있었고, 그 왕자의 뒤에는 기르골도 있었다.

기르골을 보자 심장이 철렁하며 손가락이 움찔했으나, 라틸은 그가 아무리 무서운 뱀파이어여도 사람들 앞에서 떠는 모습을 보일 마음은 없었다.


“다들 들었는가?”

라틸은 가장 상석에 있는 단상으로 걸어가 옥좌에 다리를 꼬고 앉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가볍게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은 황제가 뭘 물어보는지 몰라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저었다.


“짐이 카리센에 몇 주 전에 사절을 보냈지. 하이신스 황제를 치료해주겠다고. 그 사절단이 오늘 막 돌아왔네. 거기서 어떤 답을 보내왔나 궁금하지 않나? 다 같이 들어 보자고.”

라틸은 이 일이 무척 재밌다는 듯 일부러 입가에 미소를 띠고서, 사절단 대표에게 말해보라 손짓했다.

대표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쏠리자 몇 걸음 앞으로 나와 보고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아이니 황후는 다가 공작에게 모든 걸 일임했고, 다가 공작은 하이신스 황제의 치료를 거부했습니다.”

이미 그럴 줄 알았지만, 라틸은 충격받은 것처럼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예상은 했지만 진짜 나쁘군.”

라틸은 힐긋 외국 대사들이 주로 모인 곳을 살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으며 무언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라틸은 들으라는 듯 한숨을 내쉬고서 사절단 대표를 위로했다.


“사건이 터졌을 때도 다가 공작은 나는 물론 그곳에 와 있던 외국 귀빈들을 모두 다 새벽같이 내보냈지. 심지어 자기들이 검 뽑는 걸 보여준다고 초빙해 놓고서 말일세. 그때 뭔가 이상하단 생각은 했지만, 치료를 대놓고 거부하다니. 솔직히 좀 수상하군.”

라틸의 부추김에 외국 대사들이 주고받는 눈짓이 더욱 빨라졌다.

라틸은 쯧쯧 혀를 찼다.


“그뿐인가. 클라인 황자는 현장에서 하이신스와 같이 뛰어다녔는데. 내가 떠나자마자 뜬금없이 범인이라며 감옥에 가두었어. 그래놓고 수사를 제대로 하지도 않고. 우리 클라인 황자는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서 찬 바람만 불어도 감기에 걸리는 연약한 왕자인데, 그런 애를 감옥에 가두고 자백하라 고문을 해대서…… 아.”

라틸이 스트레스를 못 이기는 듯 이마를 짚자 얼른 서넛이 다가와 부채질을 해주었다.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 폐하.”

“화가 안 나게 생겼느냐. 하이신스 황제가 쓰러졌을 때 우리나라 사절단도 자그마치 네 명이나 쓰러졌는데, 쓰러진 이들을 다 챙겨서 쫓아내더니. 치료법을 알아내서 같이 치료해주겠다 하니 치료도 거부하고. 꼭 하이신스 황제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들처럼. 대체 난 그 사람들이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

라틸은 이마에서 손을 떼 사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경들은 알겠나?”

사람들은 황제가 뭘 말하고 싶은지 비슷한 걸 떠올렸으나, 타리움 사람들은 외국 대사들이 있어서, 외국 대사들은 타리움 사람들이 있어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라틸은 웃으면서 그들을 둘러보다가 표정에서 장난기를 싹 지우고 벌떡 일어나며 차갑게 말했다.


“모두 말 못 하겠다니 내가 하지. 나는 다가 공작을 비롯해 그 무리들이 수상하고 어두운 힘을 이용해 하이신스 황제를 공격했다 생각하네.”

이미 다 알아들은 이야기였으나, 라틸이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던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개중 윌랑 왕자가 손을 들고 물었다.


“하지만 아이니 황후는 대적자의 검을 뽑지 않았습니까. 그런 사람이 어두운 힘을 이용하려 들까요?”

라틸은 자신의 손을 내보였다.


“그 검은 나도 뽑았다네, 왕자.”

“!”

이어서 라틸은 아트락시 공작을 가리켰다.


“아트락시 공작의 장남도 뽑았지.”

라틸의 손은 다시 뒤로 돌아가, 얼결에 불려 나와 서 있는 대신관과 백화. 므라딤을 가리켰다.


“게다가 여기엔 대신관도 있고 백화도 있고, 순수함의 결정체나 다름없다는 인어 수장도 여기 있다. 날 못 믿어도 이들은 믿어야지. 그런데도 치료를 거부했어.”

“그건…… 그래도 대적자인데 어둠의 힘을 쓸 것 같지는…….”

“윌랑 왕자. 아이니 황후는 점잖은 사람이 맞아. 어둠의 힘을 이용하려 드는 사람이 아니지.”

라틸이 갑자기 비난하던 상대를 칭찬하자, 왕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라틸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다시 제자리에 앉으며 노골적으로 빈정거렸다.


“하지만 황후의 부친은 그럴 사람이거든. 그리고 아이니 황후는 제 부친인 다가 공작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지.”

아이니 황후가 원래는 하이신스 황제의 정적인 헤움 황자의 약혼녀였던 건 모르는 이들이 없기에, 다들 이 부분은 부정하지 못했다.

라틸은 어깨를 으쓱했다.


“꼭두각시가 선해 봐야 뭐. 선한 꼭두각시밖에 더 되겠나.”

말을 마친 라틸은 힐긋 기르골을 보았다. 기르골이 손가락으로 8 숫자를 만들어 보였다.


‘무슨 뜻이야?’

 

* * *

라틸은 기르골에게 그 ‘8’이 무슨 뜻인지 묻고 싶었지만, 회의가 끝나고 멋있게 퇴장해야 하는 타이밍에 “기르골아. 잠깐만.” 하면서 그에게 총총 걸어갈 수는 없었다.

결국, 라틸은 들어올 때처럼 가벼운 걸음걸이로 나갔고, 서넛이 그 뒤를 따라왔다.

밖으로 나가자 서넛은 아까 회의 도중 꺼내서 라틸을 부쳐주었던 그 부채를 다시 꺼내 느리게 부쳐주며 물었다.


“아이니 황후를 직접 공격하진 않으십니다? 그냥 대놓고 ‘카리센은 어둠의 힘을 사용한다. 나쁘다. 공격.’ 이렇게 끝내실 줄 알았습니다.”

“아이니 황후는 평판이 좋잖습니까.”

“?”

“외국에도 좋고 자국에도 좋고. 최근엔 대적자의 검도 뽑았습니다. 그녀를 공격하는 건 공격 대비 효율적이지 못합니다.”

“아. 그렇겠군요.”

“황후의 지지자들은 내가 아무리 정당한 이유를 들어도, 황후를 직접 공격하면 눈과 귀를 막고서 ‘우리 황후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고 대응할 겁니다. 그러니 다가 공작을 공격하고, 황후는 공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휩쓸려 다닌다고 해버릴 겁니다.”

라틸의 입꼬리가 삐죽 못되게 올라갔다.


“그러면 황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황후를 직접 공격할 때보단 이성적으로 판단할 테니까요.”

“그렇군요.”

그렇게 둘이서 계속 걸어가고 있자니 뒤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자 칼라인이 일부러 발소리를 내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라틸을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 굳이 풀을 밟고 돌을 차면서 오는 듯했다.

라틸이 잠시 멈춰 서자 칼라인은 라틸의 곁에 서서 서넛을 보았고, 라틸은 둘을 번갈아 보다가 다시 가던 길을 걸어갔다.

자연스럽게 칼라인은 라틸의 반대쪽 옆으로 서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 아이니 황후는 전대 대적자처럼 자기 세력을 100% 집결시키진 못할 겁니다. 이쪽은 당장 위험하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 라나문을 어떻게 할 건지 정해야 합니다.”

라틸은 회랑을 따라 걸어가다가 라나문 이름이 나오자 우뚝 멈춰 섰다.

라틸은 서넛과 칼라인을 번갈아 보았다. 조금 전 만났으면서. 미리 자기들끼리 여러 번 이야기 한 주제일까? 둘 다 굳고 단호한 표정으로 라틸을 보고 있었다.

두 뱀파이어가 원하는 건 분명해 보였다.


“둘은 내가 라나문을 죽이길 바랍니까?”

서넛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폐하의 손을 더럽힐 필요 없습니다. 눈을 감고 있겠다 해주시면 그사이에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라틸은 인상을 찌푸렸으나 서넛과 칼라인의 표정에 변함이 없었다.


“주인. 아이니 황후가 대적자 역할을 수행하면 나라 대 나라 싸움이라도 되지만, 라나문이 대적자의 임무를 수행하면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게다가 라나문 근처에는 백화랑술과 대신관도 있습니다.”

라틸이 다시 말없이 걷기 시작하자, 서넛과 칼라인이 라틸의 뒤를 계속 따라왔다.

라틸은 한참을 걷고 걸어서, 하렘을 한눈에 내다볼 수 있는 지대가 높은 언덕 부근까지 올라갔다.

라틸은 그곳에서 동그란 도넛 형태의 하렘 지붕들을 심각하게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쾌활하게 웃었다.
 

  
그 뜬금없는 미소에 서넛과 칼라인은 서로를 보았으나, 라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둘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틸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는 대신 활짝 웃으면서 둘을 번갈아 보았다.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가. 한 번 봐볼까?”

동화책에 나올 법한 대사에 둘의 표정이 묘해졌다.

라틸은 손을 뻗어 라나문이 머무는 지붕을 가리켰다.


“로드와 대적자는 최소 수천 년을 싸웠지. 하지만 그 대적자는 지금 내 후궁이 되어 저 밑에 있다.”

이윽고 그 손가락은 옆을 가리켰다.


“저기에는 대신관이 지내고 있고.”

손가락은 또 옆을 가리켰다.


“저기엔 내 전대 나이트가 지내고 있지.”

그 전대 나이트인 칼라인이 움찔했다.

라틸은 손을 거두고 활짝 웃으면서 칼라인을 보았다.


“로드와 대적자는 늘 싸우다 죽어 갔지만, 이번엔 다를 거다. 왜냐. 이번엔 모든 다툼을 궁중 암투 선에서 끝내게 할 수 있거든.”

서넛의 표정이 굳었고 칼라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정의로워야 할 대적자 하나는 귀찮음에 절어 있고. 다른 대적자 하나도 정의로움보다 가족애가 강해. 그리고 나는 세상 전체를 어둠의 힘으로 지배해 발밑에 두겠단 야욕은 없다. 내 나라 내 국민이 평안하면 그걸로 됐어. 변화가 일어난다면 지금이 기회 아니냐?”

라틸은 라나문이 머무는 지붕 위를 노려보았다.


“라나문이 날 사랑하게 만들어서 대적자 임무를 수행하지 않게 할 거다. 그가 궁중 암투를 벌이는 데만도 바빠서 대적자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없게 할 거다. 대신관도 내 품에 가둬서 어느 한쪽을 편들지 못하게 할 거고.”

“!”

“로드가 나타나지 않으면 결국 대적자가 나설 필요도 없잖아. 안 그래? 걔들은 세상을 안정시키는 게 아니라 로드를 죽이는 게 목표라며. 없는 사람을 무슨 수로 죽이겠어?”

“정체를 끝까지 숨기실 생각이십니까?”

“안 될 거 있나?”

안 될 건 없지만 서넛은 마음이 아파 고개를 숙였다. 라틸이 각성하지 않는 건 그 자신이 원하는 바인데도, 어쩐지 마음이 아팠다.

칼라인은 조금 더 현실적으로 접근해 물었다.


“기르골은요? 기르골은 이미 주인이 로드인 걸 알고 있을 텐데요.”

칼라인은 자기가 말하다가 자기가 놀라 라틸을 보았다.


“설마, 주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