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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화. 사기꾼 (273/367)


273화. 사기꾼
2022.10.09.


아이니는 옆방 창가에 서서 차가운 창틀에 이마를 기대었다.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는 부드러운 바람이 들어와 그녀의 머리카락과 이마를 간질였으나, 아이니는 이를 느낄 여력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를 어쩐다.’

루이스가 곁으로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


“저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실 건지요, 황후 폐하?”

“아버지께서 달리 저들에 관해 이야기를 하진 않으셨느냐.”

“저들을 데리고 있단 건 알았지만 저들이 타리움 후궁과 황자인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황후 폐하.”

“식시귀에 관한 건?”

“그건…….”

“솔직하게 말해라, 루이스. 네가 아버지가 아니라 내 사람이라면.”

루이스는 억울한 얼굴로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전 당연히 황후 폐하의 사람입니다.”

“그럼 말해.”

루이스는 초조하게 입술을 달싹이다가 아이니의 눈치를 보았다. 아이니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이스는 마지못해 털어놓았다.


“다가 공작님께선 헤움 황자님이 식시귀로 되살아나신 걸 보시곤 그쪽에 관심을 두셨습니다.”

아이니는 다가 공작이 좀비에게서 혈액을 체취해 가지고 있었다고 털어놓았던 걸 떠올렸다.


‘그때도 연구하려 했단 말을 하셨지. 식시귀 쪽도 연구하려 하셨나.’

루이스는 재차 아이니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연구한다고 해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죠. 그러다 먼 친척뻘인 타리움의 쇼버 후작부인이 은밀하게 부탁을 하나 해 왔습니다. 사정상 타리움에 있을 수 없게 된 모자를 숨겨달란 거였죠.”

“그게 저 두 사람이었군.”

루이스는 아이니의 눈치를 힐긋 보며 마지막 말도 할지 말지 고민했으나, 아이니는 깊은 생각에 잠겨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루이스는 아이니에게 다가 공작이 헤움 황자의 목을 빼돌려 보관 중이고, 그걸 연구 재료로 저 분홍머리 모자에게 주었단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황자의 목 위치를 저들이 알고 있다는 것도.

대신 루이스는 조심스럽게 아낙차를 재촉했다.


“황후 폐하. 어떤 선택을 내리시든 빨리하셔야 합니다. 저들의 말처럼, 사람들 앞에서 공작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식시귀로 되살린다 해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어떻게 아버지를…….”

아이니는 연신 입술을 씹으면서 방 안을 몇 바퀴나 빙글빙글 돌았다. 누구라도 자기 아버지를 괴물로 바꾸는 일을 쉽게 결정하진 못할 것이다.

이 와중에 찰칵찰칵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시계 초침 소리는 그녀를 뒤에서 마구잡이로 떠밀고 있었다. 신중히 생각할 시간 따위는 없다고.


“좋아.”

결국 아이니는 아버지를 식시귀로 바꾸는 길을 선택했다.


“사람들을 다 내보낼 테니 그 여자를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데려와라.”

“네!”

루이스가 위층으로 올라갔고, 아이니는 아버지가 누워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루이스를 따라간 아이니가 나타나자 사람들이 호기심에 차 그녀를 보았다.


“비밀리에 아버지가 숨겨둔 의사가 있다 한다. 하지만 신분을 드러낼 수 없는 사정이 있다 하니 치료할 동안 다들 자리를 비켜라.”

아이니는 적당히 둘러대고서 사람들을 내보낸 뒤, 다가 공작 곁으로 가 그의 손을 꽉 틀어잡았다.


‘식시귀 만드는 이들을 곁에 뒀단 건 아버지가 거기에 관심이 있었단 걸 테니. 이게 맞을 거야. 그리고 헤움. 처음엔 소름 돋게 등장했지만 이후엔 옛날과 많이 다르지 않았어. 이성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면…….’

“황후 폐하. 아낙차 님과 트라탈라 님을 데려왔습니다.”

루이스가 타리움의 두 모자를 데려오자, 아이니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낙차는 빙그레 웃고서 손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죄송하지만 황후 폐하. 따님께서 보실 장면은 아닐 테니 잠시 다른 곳에서 차라도 한 잔 드시고 오시지요.”

“나도 자리를 비켜야 한다고?”

“루이스 양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허튼짓이라도 했다간-.”

“사방이 다 황후 폐하의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불안하시나요?”

 

* * *

아이니가 루이스의 부축을 받아 자리를 비키자, 넓은 방 안에 아낙차와 틀라, 의식 없는 다가 공작 셋만이 남게 되었다.

아낙차는 다가 공작이 아직 살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에게 다가가 맥을 짚었다. 틀라는 곁에 서 있다가 걱정스레 물었다.


“어머니. 잘 하실 수 있겠어요?”

“연습했으니 잘 되겠지.”

“하지만 사람으로 이렇게 본격적으로 하시는 건 처음인데…….”

틀라는 걱정스러웠으나 아낙차는 조금도 떨지 않고 다가 공작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이미 의식이 없었기에 공작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아낙차는 상자에 담아 챙겨온 도구를 테이블 한편에 늘어놓으며 새가 날개짓 하듯 부드럽게 아들을 달랬다.


“걱정 마라. 실패해봤자 안 깨어나기밖에 더하겠니.”

“그건 그렇지만…….”

“쉿. 조용히. 집중해야 해. 그냥 식시귀가 아니라 우리의 꼭두각시 식시귀로 만들어야 하니까.”

아낙차가 소매를 걷고 공작 앞에 서자, 틀라는 조용히 테이블로 걸어가 한 더미의 말린 짚과 푸른 빛을 띠는 열매를 꺼내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 * *

라틸의 등에 안긴 채 두근두근 즐겁던 클라인의 비행은 시간이 지날수록 즐겁지 않아졌다.


“폐하. 멀미가…….”

“토하면 안 된다, 클라인. 여기서 토하면 진짜 난리 난다.”

“토할 것 같진 않습니다. 그런데 속이 울렁거리고…….”

“그게 토 나오려는 거 아냐?”

“아니라니까요.”

클라인이 등에 대고 이마를 비비자, 평소와 달리 귀여운 게 아니라 걱정부터 들었다. 저 황자, 내 등에 대고 토하는 거 아냐?

비슷한 생각인지 그리핀이 아래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로드! 저 인간 내리쇼 내리쇼! 내 깃털 한 가닥도 상하면 안 돼요!]

 

 


“내려줄까?”

“아뇨. 하강했다 다시 올라올 생각을 하면 더 끔찍합니다.”

클라인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그로부터 오래 지나지 않아 드디어 ‘신성한 새’가 어느 야트막한 언덕에 내려앉았다.

클라인은 새가 땅에 닿자마자 옆으로 굴러떨어지듯 내려서는 어딘가로 뛰어갔다.

라틸은 그가 토하러 갔나, 생각했지만 돌아올 때 보니 클라인은 입이 깨끗한 건 물론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어디 다녀 왔어?”

“신선한 흙냄새를 맡고 왔습니다.”

클라인이 대답하는 동안 두 사람을 태우고도 충분하던 거대한 하얀 새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손바닥보다도 더 작게 변했다.

클라인은 그걸 보고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작아지네요?”

“응.”

라틸은 조그매진 그리핀의 배를 한 번 쓸어주고서 하늘로 날려 보냈다.


“신기해요. 신비롭습니다.”

“그래. 신기하지.”

‘신비롭진 않지만.’

그리핀이 크기를 마음대로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게 된 건 사실 라틸도 얼마 되지 않았다.

라틸이 자기에게 올라타면 자기 허리가 부러진다느니, 자기는 앙증맞은데 라틸은 거대하다느니, 250년이 지나면 커다래질 거라느니 하던 그리핀의 말은 전부 다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라틸은 그제야 백화가 ‘그리핀은 하는 말의 90%가 다 거짓말’이라 했던 걸 떠올렸다. 진짜 90%가 거짓말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거짓말이 입에 붙은 새란 건 확실해 보였다.

필요할 때 나타나준 걸 보면 악의는 없는 듯하지만.


“그런데 왜 황궁까지 새를 안 타고 가고 여기서 멈추십니까?”

‘백화나 대신관이 그리핀을 알아볼까 봐.’

외관을 바꿨지만 혹시 모르지 않던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러나 이걸 설명할 수는 없기에, 라틸은 대답 대신 팔을 뻗어 클라인의 몸을 자신에게 꽉 가져다 붙였다.

클라인은 아직 좀 어지러운지 비틀거리면서 끌려오다가 라틸과 꼭 붙어서자 돌처럼 굳어서는 삐걱대기 시작했다.


“폐하.”

“게스타더러 망아지 망아지 해대더니. 이제 공식 망아지는 너다, 이 사고뭉치야.”

클라인은 뭐라고 중얼중얼 항의했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얼핏 들으니, 발단은 좀비 수프지 자기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듯했다.

사실 맞는 말이긴 했으나, 클라인을 구하기 위해 그리핀부터 뱀파이어 용병들까지 다 끄집어내야 했던 라틸은 동의해주지 않았다.

대신 그의 단단한 허리를 아프지 않을 정도로 콱 틀어쥐고서 확실하게 경고했다.


“화나면 가출하지 말고 나한테 와. 나한테 와서 ‘이런 이런 게 화가 난다’라고 털어놓으란 말이야. 알았어?”

“제가 가면 귀찮아하시잖아요.”

“내가…….”

‘내가 언제?’라고 물으려다 보니 몇 가지 일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구체적인 상황은 기억나지 않지만, 좀 귀찮아했던 것 같기도 하다.

라틸은 우물거리다가 슬쩍 말을 바꿨다.


“내가 귀찮아해도 와. 그때그때 귀찮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와.”

“정말입니까? 그럼 매일 가도 됩니까?”

라틸은 말없이 클라인의 허리만 꼭 붙잡고 입술을 꾹 닫았다.


“폐하? 왜 갑자기 말이 없어요?”

 

* * *

언덕에서 중앙부 도시를 가로질러 황궁까지 걸어간 라틸과 클라인의 모습에, 정문 앞을 지키는 경비병들은 기겁해 펄쩍 뛰었다.

황제와 황자 출신 후궁이 난데없이 걸어서 문 앞에 나타나자 황망한 듯했다.


“클라인. 네 방에 가서 쉬고 있어라.”

“바닐이랑 악시안은-.”

뱀파이어 용병들은 하루 만에 여기 올 수 있겠지만, 바닐과 악시안을 옆에 두고서 제 속도를 내진 못할 테니 아마 말을 타고 급히 오더라도 며칠은 걸릴 것이다.


“오는 대로 보내줄게. 하지만 오늘 오진 못할 거야. 우리가 유난히 빨리 온 거니까.”

라틸이 시간을 계산해서 말하자 클라인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하렘 쪽으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자 당장 달려가서 위로해주고 싶었으나, 라틸은 일단 자신이 카리센에서 하고 온 짓을 마무리지어야 했기에 개인 집무실로 바삐 걸어갔다.


“오셨습니까, 폐하.”

“안 그래도 클라인 황자님을 데리고 오고 계신단 소식을 조금 전에 받았습니다.”

라틸이 새하얗고 거대한 새를 타고 날아가는 장면을 본 비서와 시종들은, 황제가 하루가 가기 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온갖 복잡한 표정을 드러내며 인사했다.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새하얀 새를 타고 날아갔다가 클라인 황자까지 데리고 나타나자 상당히 감명 깊은 듯했다.


‘카리센에서 대적자의 검을 뽑길 잘했어.’

라틸은 그들이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조금 부담스러웠으나, 뻔뻔한 척 굴기로 하고서 시종장을 불렀다.


“사블레 후작.”

“네, 폐하.”

“다가 공작이 클라인을 죽이려는 걸 구출해 왔습니다.”

“예?”

시종장은 물론 한 방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정적에 휩싸였다.


“정말입니까?”

시종장은 가까스로 되물었다.


“자기 별장에 잡아놓고 몰래 죽이려는 걸 구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가 공작도 거의 죽기 직전까지 다쳤어요.”

“세상에. 그러면…….”

“그런 장면을 들켰으니 최대한 다 우리 탓이라고 몰아가려 하겠죠.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예.”

“그놈들, 분명 하이신스 황제 치료를 거부했을 겁니다. 사절단이 와서 그 보고를 하면, 이번 좀비 수프 사건을 일으킨 게 카리센이란 걸 공표하고, 카리센이 어둠의 힘을 이용하려 드는 걸 공개적으로 비난할 겁니다.”

뒤이어 라틸이 몇 가지를 더 지시하고 시종과 비서들이 모두 흩어지자, 뒤에서 가만히 상황을 듣던 서넛이 걱정스레 물었다.


“폐하. 어둠의 힘을 이용하는 건 우리나라인데. 괜찮을까요?”

“무슨 상관입니까. 피인어는 인어라 하고 흑마법사는 마법사라 하고 그리핀은 염색해서 신성한 새라 우기면 우리는 그런 적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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