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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화. 두 명은 너무 무겁다 (272/367)


272화. 두 명은 너무 무겁다
2022.10.05.


비록 카리센의 영역이지만, 이곳은 다가 공작이 황자를 죽이기 위해 별장에 최소한의 측근들만 남긴 곳이었다.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려던 그 행동은 지금 그들의 발목을 도로 움켜잡았다. 머릿수로 밀리는 건 명백히 다가 공작 일파였다.

아이니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 역시 아버지를 말리기 위해 급히 달려온 터라, 최소한의 호위 외엔 다른 병력이 없었다.

라틸은 적들을 열 받게 하기 위해 일부러 미소를 유지한 채, 바닐과 악시안에게 지시했다.


“저기 활 든 사람들 있는 쪽으로 가. 보호해줄 거다.”

“황자님은…….”

“그대들은 낭만이 없구나. 구하러 왔으면 데리고 가는 것까지 한 세트다.”

라틸이 고갯짓으로 타고 온 하얗고 거대한 새를 가리키자, 바닐과 악시안은 묵례를 하고서 흑사신단 용병들 쪽으로 다가갔다.

라틸은 용병들이 그들을 챙기는 걸 확인하자, 자신도 클라인을 데리고 새 등에 다시 올라탔다.


[아이구 내 척추우우……! 내 척추 부러진다아아아……!]

하얗게 염색시킨 그리핀이 꽥 비명을 토했으나, 다행히도 그 외침을 들을 수 있는 건 라틸 뿐이었다. 라틸은 발아래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애써 모른 척하고서, 얼른 날라고 그리핀의 목덜미를 주물주물 문질렀다.


“출발. 출발.”

그리핀은 꽥 비명을 한 번 더 지르긴 했으나, 시키는 대로 순순히 날아올랐다.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얼른 타리움에 그들을 내려놓고 뜨끈한 목욕을 하러 가고 싶은 듯했다.

라틸은 화 좀 풀라고 그리핀의 목덜미를 계속 문질러 주면서도 고도가 높아질수록 더 작게 보이는 아이니와 다가 공작 무리를 계속 내려다보았다.


“많이 화났나 보네.”

아이니는 끝까지 라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라틸 역시 그녀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다 완전히 구름 위로 올라가 아래 세상이 내려다보이지 않게 되자, 클라인이 라틸의 허리를 꽉 붙잡고서 중얼거렸다.


“절 구해주긴 했습니다.”

“누가? 아이니가?”

“네.”

“목 조르고 있던데?”

“거기서부터 보셨습니까?”

“어. 다가 공작 쓰러진 것도 나중에 봤다.”

“다가 공작이 절 죽이려는 걸 형수님이 구해줬어요.”

라틸이 고개를 돌리자 클라인은 기겁해서 라틸에게 매달리며 외쳤다.


“저 보지 말고 앞 보세요!”

승마할 때처럼 라틸이 새가 잘 가도록 조종하는 거라 여기는 듯했다. 그리핀은 그냥 혼자 날고 있는 건데도.

하지만 클라인이 너무 무서워하고 있는지라, 라틸은 소원대로 다시 앞을 보며 물었다.


“근데 구해줘 놓고 왜 네 목을 졸라?”

“제가 다가 공작 목을 물어뜯어서요.”

“아, 그래서 입가에 피가-.”

“으악! 으악! 으악! 앞에! 앞에 보시라고요! 피 안 닦아 주셔도 되니까!”

라틸이 손수건을 꺼내며 고개를 돌리자 클라인이 기겁해서 비명을 질러댔고, 그리핀이 욕을 했다.


[로드, 그 인간더러 당장 안 닥치면 내가 꼬리로 뒤통수를 후려칠 거라고 전해줍쇼!]

게스타의 도움을 받아 그리핀 색을 잠시 하얗게 바꾸고 사자 꼬리 역시 독수리 꼬리처럼 바꾸긴 했으나, 이건 환상 마법일 뿐. 그 실체는 여전히 사자 꼬리였다.

라틸은 붕붕 마차 바퀴처럼 회전 중인 그리핀의 꼬리를 보고서, 자신의 허리를 감싼 클라인의 손등 위에 손을 겹치고 달랬다.


“알았으니 진정해. 네가 이러면 새가 더 놀란다.”

“대체 이 새는 뭡니까?”

“신성한 하얀 새.”

“네?”

“이름은 미정이다.”

나중에 비슷하게 생긴 전설 속의 새가 있으면 그거라고 우겨야지. 급히 나오느라 위장용 이름을 생각하지 못한 라틸은 대충 둘러대면서 다시 다가 공작에 대해 물었다.


“근데 그자는 미쳤구나. 아무리 네가 탈옥했다 해도 황자인데 그냥 죽여버리려 하다니.”

“안 미쳤으니 몰래 죽이려 한 거겠죠. 사람들은 제가 탈옥한 것까지만 알 테니까요.”

“그래서 더 괘씸하다. 잘 물어뜯었어.”

“예.”

“하지만 아이니는…… 미묘하네.”

다가 공작에게서 구해준 건 고마운데, 그러고서 본인이 목을 조른 건 화가 나고. 하지만 아이니가 없었더라면 이미 클라인은 죽었을지도 모른다.

라틸은 혀를 찼다. 항상 그래. 이상하게 그 여자와는 뭔가 애매해진다. 사실 첫인상은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마치 모든 상황이 그녀와 라틸의 대립을 부추기는 것처럼 여겨졌다.


‘어?’

라틸은 고개를 기웃했다.


‘그러고 보니 도미스 꿈에서도 뭔가 비슷한 말이 나온 거 같은데.’

잘 생각해보니 도미스의 꿈속에서도 좀 그렇긴 했다.

안야는 도미스와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듯했고 도미스도 안야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둘은 꼭 어디선가 마주쳤다.

마주칠 때마다 상황은 악화되었고 사이는 점점 틀어졌다.


‘어라.’

라틸은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기분 나쁜데. 정해진 운명이라도 있어서 휘둘리는 거 같잖아?’

“폐하?”

라틸이 갑자기 조용해지자 더 불안한지 클라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라틸은 자신의 허리를 감싼 그의 팔 위에 팔을 겹치면서 손을 토닥였다.


“어, 아니. 뭘 좀 생각하느라.”

“형수님 생각하십니까? 사실 저도 형수님한텐 좀 감정이 복합적입니다.”

목덜미에 클라인의 한숨이 닿자 괜히 솜털이 일어났다. 이윽고 등에, 클라인이 살짝 기대는 게 느껴졌다.

기댄다고 해도 클라인의 키가 더욱 컸기에 모양새가 좀 우스웠으나, 클라인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라틸이 자신을 구하러 나타난 게 너무 좋기만 했다.


“폐하.”

“응, 클라인.”

“폐하.”

“왜?”

“폐하.”

“?”

죽기 직전 라틸이 생각났다고 하면, 빈말이라 여길까 진심인 줄 알아챌까. 클라인은 괜히 라틸을 몇 번 부르기만 하다가 뒤에서 그냥 가만히 웃었다.


 

* * *

다가 공작의 별장에 남은 이들 중엔 웃을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의사는?”

아이니가 길고 얇은 코트를 벗어 시녀에게 건네며 묻자, 의사를 부르러 뛰어가다가 도중에 돌아온 호위 하나가 다급히 대답했다.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다가 공작이 사람들을 다 물려둔 영향은 아까 병력의 차이를 불러왔고, 이젠 공작의 목숨줄을 잡고 죄었다.

아이니는 입술을 짓씹으며 초조하게 아버지를 살폈다. 목을 물어뜯긴 터라 출혈이 너무 심했다. 상처 자체는 크지 않아 보이지만 이대로라면 과다 출혈로 죽을 것 같았다.

실제로 이미 경련은 잦아들고 있었고 공작은 아예 의식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목을 막았던 손도 떨어진 지 오래라, 다른 사람이 잡고 있었다.

다른 병사 몇이 창고에서 들것을 찾아와서, 우선 측근들은 공작을 건물 안으로 옮겼다.


“의사는?”

“아직…….”

아이니는 아버지를 애타게 바라보며 눈물을 억지로 참았다.

아버지가 미울 때도 많았고 이해 안 갈 때는 더 많았고 화날 때는 더더욱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가족이었다. 이런 식으로 아버지가 죽는 걸 보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아버지를 물어뜯은 클라인 황자를 직전에 구해낸 건 자신이 아니던가.

그런데 한참 초조하게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자니, 루이스가 살며시 다가와서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후 폐하. 저…… 공작님이 데리고 있던 사람들이 황후 폐하를 만나고 싶어 합니다.”

“이 와중에 그게 무슨 소리냐.”

아이니가 냉담하게 되쏘자, 루이스는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공작님이 인장을 주신 데다가, 저…… 이 별장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아이니가 눈살을 찌푸리고서 나중에 찾아오라 하라 말하려다가, 다시 입을 닫았다.

아버지는 황자를 죽일 장소로 여기를 고르고 최측근들만 데려왔다. 고용인들조차 믿을 만한 극소수만 남게 하고 다 내보냈고. 그런 곳에서 이미 지내고 있던 손님이라고?

아버지가 그 손님을 내보내지 않고 여기에 뒀어? 황자를 여기서 죽일 거면서?


‘뭔가 있다.’

생각을 바꾼 아이니는 루이스에게 다시 명령했다.


“데려와라.”

루이스의 목소리가 다시 작아졌다.


“다른 사람들 시선을 피해 만나고 싶어 합니다.”

아이니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직접 몸을 일으켰다.


“어디 있지?”

“이쪽으로…….”

루이스를 따라 아이니는 구불구불한 원형 계단 세 개를 올라가 긴 복도를 걸어갔다.

복도에는 창문이 다 열려 있어서, 바람이 불 때마다 커튼이 휘날리고 창문이 들썩이는 소리가 났다.

복도의 끝까지 걸어가자 활짝 열린 문이 보였다. 바닥에 깔린 어두운 적색의 러그도.

문 안으로 들어서자, 복도에서 볼 수 없는 방향 쪽으로 몹시 아름다운 여자와 그 여자를 쏙 빼닮은 미청년이 나타났다.

아이니는 그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다 물었다.


“누구냐.”

혹시 아는 사람들일까 싶었으나, 이전에는 본 적이 없는 이들이었다.

루이스가 살며시 열려 있던 문을 닫고 조용히 섰다.

특이하지만 봄처럼 사랑스러운 분홍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자는, 아이니가 자신을 보자 상냥하게 웃고서 손에 쥐고 있던 걸 내밀었다.


“미리 보여드리겠습니다. 다가 공작이 우리에게 준 그의 인장입니다.”

아이니는 아버지의 인장을 확인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들이 아버지의 손님이 확실하단 건 알았다. 하지만 역시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너희는 누군데 여기 숨어 지내는 거지?”

아이니의 시선이 방 안 여기저기에 있는 생활 흔적을 훑고 지나갔다.

분홍색 머리 여자의 입꼬리가 우아하게 올라갔다.


“저는 타리움 선대 황제의 후궁 아낙차입니다. 그리고 여기는, 원래라면 타리움 황위에 올랐어야 했지만 라트라실 황제가 죽여버린 제 아들. 트라탈라 황자지요.”

“!”

아이니는 여자와 쏙 닮은 청년을 보았다. 활짝 만개한 봄꽃처럼 화사하게 아름다우면서 처연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동시에 가진 청년. 겉으로 보아서는 죽은 사람 같지 않다.

아이니는 미간을 찡그렸다.


“죽은 황자?”

그러고 보니 라트라실이 즉위하며 제 이복 오빠를 처형시켰다던데. 그 사람인가?


“식시귀로 깨어났답니다. 카리센의 헤움 황자님처럼.”

“!”

아이니는 차가운 눈으로 아낙차를 쳐다보았다. 아낙차가 누군지는 그렇다 쳐도. 어쨌건 타리움 사람인 그녀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왜 내 아버지가 당신들을 여기에 둔 건가.”

“그건 사정이 기니 나중에 공작님께 직접 들으시고. 지금 중요한 건 이거지요. 전 다가 공작을 다시 살릴 수 있답니다, 황후 폐하.”

“다시 살려? 설마. 네 아들처럼 식시귀로 살리겠단 건가?”

아이니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뱉었다.


“아버지는 아직 살아 있다.”

“네, 하지만 의사가 오는 사이 돌아가시겠지요. 의사는 공작을 보고 죽었다 할 테고. 그땐 마음을 바꿔서 공작을 살려도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겁니다. 가엾은 헤움 황자님처럼.”

“!”

“하지만 공작이 살아 있는 지금이라면 아무도 모르는 새 공작을 식시귀로 바꿀 수 있을 겁니다. 어떤가요, 황후 폐하? 제가…… 도움을 드릴까요?”

부드럽게 질문한 아낙차는 틀라의 어깨를 잡으며 미소 지었다.


“공작님도 우리 틀라처럼 되살릴 수 있어요. 틀라도 제가 되살린 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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