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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화. 촉박 (270/367)


270화. 촉박
2022.09.28.


다가 공작은 실실 웃으면서 자신의 뺨을 톡 치던 건방진 황제를 떠올리자 속에서 으드득 이가 갈렸다.

타리움에 돌아가자마자 치료 방법을 찾고, 치료 방법을 찾아서 바로 사절단을 보내고, 그러면서 소문까지 내게 하고. 이 모든 게 그 영악한 머리에서 나왔으리라.

이렇게 해두면 그가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하이신스 치료를 막지 못할 거라고 계산한 거겠지.


“사실이라면 좋은 소식이지.”

속은 비틀렸으나 다가 공작은 입가에 거짓 미소를 만들어냈다. 어쨌건 상대는 즉위한 지 채 일 년도 되지 못한 애송이였다.

심지어 제왕학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아무 짐도 없이 그저 밝고 재미나게 살다가 얼결에 황제가 된 풋내기.


‘그런 이에게 밀릴 수야 없지.’

“하지만 라트라실 황제는 하이신스 폐하께서 쓰러질 때 곁에 있던 사람 아닌가. 글쎄. 그땐 감히 타리움의 황제께 책임을 물지 못했지만, 솔직히 찝찝한 구석이 있다네.”

‘찝찝한 구석’이란 말에 타리움 사절단 대표의 이마에 힘줄이 올라오고 눈이 날카로워졌다.


“찝찝한 구석이라니요?”

다가 공작은 팔짱을 끼고서 지치고 힘들단 미소를 지었다.


“이 소동을 벌인 범인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클라인 황자에게 수상한 혐의가 몇 가지 발견되었지. 그런데 클라인 황자는 라트라실 황제의 후궁이 아닌가. 퍽 사이도 좋은. 그런데 그 부부와 함께 있던 내 사위가 갑자기 쓰러져버렸으니…….”

다가 공작은 끝말을 잇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으나, 그가 뭘 말하고 싶은지 이 자리에 못 알아듣는 사람은 없었다.

능구렁이 같은 새끼. 내 사위는 무슨. 타리움 사절 대표는 속으로 퉤 침을 뱉었다.

다가 공작이 바로 받아주지 않으리라는 건, 라트라실 황제 역시 사절단을 보내면서 미리 한 말이긴 했다.


“그자는 뭔 핑계를 대서라도 우리가 하이신스를 치료하지 못하게 막을 거다. 하이신스를 여기로 보내지도 않을 거고. 아마 기분 나쁜 말도 해댈 텐데. 무슨 말을 하든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라. 일부러 도발하는 걸 테니.”

그래도 역시 기분이 나빴다.

* * *



‘괜찮을까.’

라틸은 뱀파이어 용병을 통해 사절단이 카리센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몇 시간이 지나 바로 들었다.

하지만 회담 내용은 알 수 없었기에 괜히 싱숭생숭해져서 커피만 마셔댔다.

라나문은 그런 라틸의 옆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라틸은 라나문의 시선을 알면서도 연신 커피잔만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라틸이 커피잔을 내려놓자 조용히 라틸을 바라보기만 하던 라나문이 물었다.


“사람들이 제게 물어보고 있습니다, 폐하.”

라틸은 인상을 찌푸리고 허공을 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라나문이 자신의 속눈썹이 잘 보이는 각도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다.


“무엇을?”

“제가 ‘대적자의 검’을 뽑았으니 이제 어떻게 되는 거냐고요.”

“아. 아아. 그거.”

라틸은 커피잔을 다시 들어 올리려다가 안이 텅 빈 걸 보고서 손을 뗐다.

안 그래도 시종장이 그랬다. 라나문에게 지금 귀족들이 엄청나게 몰려들고 있다고. 클라인 건이 너무 코앞에 있어서 당장 신경 쓰지 못하고 있지만.

라틸은 미간을 찌푸렸다.


“글쎄. 어떻게 되려나.”

무책임한 말 같지만 솔직한 심정이었다. 자신이 로드란 걸 안 뒤에도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아직 감이 안 잡히는데. 대적자가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라틸이 알 리가 없었다.

일단 역사 속에서 내내 했던 것처럼 자신과 라나문이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도록 유도해야 하는데…….


‘아!’

“그러고 보니 카리센에선 대체 어디 갔던 거야?”

“단백이라던 성기사 단장이 찾아와서 로드를 죽이자고 했습니다.”

“!”

라틸은 라나문의 커피를 가져다 마시다가 뿜을 뻔했다. 라틸이 사레에 들려 콜록거리자 라나문이 손을 뻗어 등을 두드려주었다.


“괜찮으십니까?”

라틸은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슬쩍 라나문의 턱을 보았다. 라나문은 평소처럼 무표정해서 성기사가 왔다 갔다고 달라진 건 없어 보였다.

라틸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그래서 넌? 넌 어쩌자고 했어?”

“대답을 미뤘습니다.”

“왜?”

“귀, 흠. 깊게 생각해봐야 할 듯해서요.”

방금 귀찮았다고 말하려 했던 거 같은데. 라틸은 입 밖으로 올라오려는 말을 꾹 삼키고서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하긴. 네 말이 맞다.”

하지만 라나문의 말을 듣고 나자, 라틸은 라나문이 대적자라면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어렴풋하게 깨달았다.


‘라나문이 나한테 반하게 해야 해. 사랑이 아니라 우정이어도 상관없어. 어떻게든 날 좋아하게는 해야 해. 내가 로드란 걸 안 후에도 절대로 내 적이 되지 않으려 할 만큼.’

물론 라나문이 강해지기 전에 죽여 버리면 굳이 이럴 필요는 없었다. 서넛이나 칼라인이 원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라틸은 라나문이 자신의 뒤통수를 치면서 ‘로드는 죽어라!’ 하고 나오지 않는 이상 굳이 그를 죽이고 싶진 않았다. 어쨌건 그는 자신의 후궁이고 어떤 의미로는 남편이 아닌가.

정의감이 어마어마하게 강했다던 이전 대적자들이라면 모를까, 지금 라나문은 외려 남들보다 나태한 면이 강한 것 같으니 괜찮지 않을까?

저절로 한숨이 나와서 라틸은 이마를 짚었다.


‘그런데 라나문은 아트락시 공작 때문에 여기 온 건데. 진심으로 날 사랑하게 만들 수 있긴 할까?’

“폐하?”

라틸이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라나문이 의아한 듯 물었다. 라틸은 그의 수려한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서 그의 얼굴을 쓸다 물었다.


“라나문.”

“네, 폐하.”

“날 사랑해봐.”

“!”

 

 

* * *

다음날.

라틸은 카리센에 보낸 뱀파이어 용병을 통해 클라인이 감옥에 갇혔다가 탈출해서 여기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난리가 났답니다.”

뱀파이어 용병은 그 이야기를 하면서 낄낄 웃어댔다.


“다가 공작이란 인간은 그걸 빌미로, 클라인 황자가 하이신스란 황제를 쓰러지게 만든 범인이 맞단 식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하고요.”

뱀파이어라서 그런가? 아니면 그냥 원래 성격이 그런가? 상황 돌아가는 게 그저 즐거운 눈치였다.

라틸은 심각하게 그 이야기를 들었으나, 뱀파이어 용병이 자꾸 클라인이 위태로운 이야기를 하면서 실실 웃자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


“그게 웃겨?”

그제야 뱀파이어 용병은 정색하고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라틸은 고생하고 온 뱀파이어 용병에게 괜히 신경질을 내지 않기 위해 더 차갑게 묻는 대신 나가보라 손짓했다.


“고생 많았다. 쉬도록 해.”

뱀파이어 용병이 나가자 라틸은 소파에 쭉 늘어지듯 누웠다.

하이신스의 치료는 다가 공작이 막아서고 있고. 클라인 또한 그놈 때문에 형에게 좀비 수프를 먹인 나쁜 놈 이미지가 되어 버렸다.

생각해보니 더 옛날 일로 들어가면 다가 그놈 때문에 하이신스와 헤어진 것이기도 했다.


‘진짜 짜증 나는 인간이네, 그 인간.’

그래도 클라인이 그곳을 무사히 탈출해서 여기로 온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이신스를 치료하는 건…… 역시 대신관이 신성력을 알약이나 물약 형태로 바꿀 수 있게 된 다음에 해야 하나.’

그렇게 되면 칼라인이나 서넛이 몰래 하이신스를 찾아가 약을 먹이고 올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대신관이 연습을 하고는 있지만 그렇게는 잘되지 않는 듯해서 문제였다.

라틸은 무거운 머리를 누르다가, 억지로 소파 등받이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일단 클라인이 오면 좀 달래줄 준비를 해두자. 마음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을 테니.’

 

* * *

비교적 평화로운 타리움과 달리 카리센의 상황은 급하게 돌아가고 있어서, 뱀파이어 용병이 라틸에게 클라인 황자가 탈출했단 보고를 할 무렵. 클라인은 이미 다가 공작 일파에게 붙잡혀 있었다.

클라인과 바닐, 악시안 세 사람은 열심히 달아났으나 안타깝게도 그들에겐 잡히기 쉬운 두 가지 결정적 약점이 있었다.

하나는 클라인의 외모가 지나칠 정도로 아름다워서 너무 눈에 띈다는 점.

다른 하나는, 클라인이나 악시안과 달리 바닐은 그냥 평범한 시종의 체력과 힘을 가지고 있단 점이었다.

이 약점들 때문에, 카리센의 국경을 넘기기는커녕 반을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붙잡힌 클라인은 그 길로 꽁꽁 묶인 채 다시 이송되었다.

하지만 다가 공작은 이번에는 황자를 황궁이 아니라 수도 근처에 있는 자신의 별장으로 데려가게 했다.

하이신스 황제의 지지자들이나 중립들이 난리 칠 걸 대비해 클라인을 붙잡았단 소리는 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은밀하게 클라인을 붙잡아 두었다는 보고를 받자, 조용히 자리를 비우고 측근들만을 챙겨 별장으로 갔다.


“황자는?”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다가 공작은 마차에서 내리며 바로 물었다.


“지하 감옥에 묶어 뒀습니다.”

“묶어서 후원으로 끌고 와.”

다가 공작의 지시에 그의 부하들은 바로 지하로 이동했다.

미셜 후작은 좀 초조하게 곁에 있다가 물었다.


“공작님, 어차피 죽일 생각이긴 했지만 몰래 암살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니면 전에 말한 것처럼 도주하다가 죽은 거로 위장하거나…….”

“그래서 지금 하려는 거 아닌가.”

“네?”

“사람들은 클라인 황자가 도주한 것만 알지 잡혀 온 건 모르니까. 여기서 죽으면 계속 도주 중인지 아닌지 다들 알게 뭔가. 안 그래?”

차갑게 뱉은 다가 공작은 무심한 눈으로 후원으로 걸어갔다.

미셜 후작은 ‘이래도 되나?’ 싶어서 슬그머니 그 뒤를 따랐다. 그는 여전히 의아했다.

황제의 지지자들은 클라인 황자가 너무 폭력적이고 멍청하다고 무시해 왔으니, 황제를 대신해서 밀어줄 것 같지도 않은데. 꼭 그 황자를 죽일 필요가 있나?

미셜 후작은 다가 공작이 하이신스 황제가 쓰러지던 날, 아이니가 사용하지 못한 검을 라트라실 황제가 사용하는 걸 본 그 현장 사람들 모두를 다 죽일 생각이란 걸 모르고 있었다.

* * *

라틸이 첫 번째 보고를 받고 한 시간 뒤에 찾아온 뱀파이어 용병은 앞선 뱀파이어 용병과 전혀 다른 내용을 보고했다.


“클라인 황자가 잡혔다고 합니다.”

라틸은 차를 마시면서 보고를 듣다가 손에 힘을 꽉 주고 말았다.


“뭐?”

찻잔이 손안에서 완전히 바스러져 깨지자 서넛이 다가와 얼른 손수건으로 손에 묻은 차를 닦아 주었다.


“아니, 한 시간 전에는 탈출해서 오고 있다 했잖아?”

뱀파이어 용병은 앞선 용병과 달리 진중한 성격인지 까불지 않고 덤덤하게 보고했다.


“수배서를 풀고 얼굴을 가린 이들을 하나하나 다 확인해서 잡아냈다 합니다.”

라틸의 손을 다 닦은 서넛은 손수건을 가지고 옆으로 물러나며 라틸의 표정을 살폈다. 라틸은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서넛은 그 모습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제가 가서 그 망아지를 구출해 올까요?”

라틸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더니 잠시 뒤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일어서며 말했다.


“아니. 내가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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