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별로 도와주고 싶던 건 아니지만
(269/367)
269화. 별로 도와주고 싶던 건 아니지만
(269/367)
269화. 별로 도와주고 싶던 건 아니지만
2022.09.25.
“자세 괜찮네.”
이쪽의 긴장감과 달리 하얀 머리 남자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기본기 좋아.”
“…….”
“눈빛도 좋고.”
하얀 머리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클라인은 그냥 서 있는 상대에게서 빈틈이 전혀 보이지 않는 데 놀랐다. 저자……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때. 평가라도 내리듯 클라인의 자세를 보던 하얀 머리 남자가 아까와 조금 다른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사실 별로 도와주고 싶지 않지만.”
‘무슨 소리지?’
클라인이 그 말을 이해하기도 전. 남자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딱 하나 도움을 줄게, 도련님. 잘 골라봐. 일 번. 감옥 열쇠를 받는다. 이 번. 감옥 벽을 부숴준다. 삼 번. 문제가 될 인간을 죽여준다.”
일 번 이 번이야 그렇다 쳐도 삼 번은 이해도 되지 않는 이상한 선택지였다.
클라인은 당황해서 입을 뻐끔거리다가 감옥 열쇠를 달라 해보기로 했다. 이놈이 정체가 뭐든 열쇠를 받아서 나쁠 일은 없으니까.
클라인이 생각하기에 벽을 부수면 소음이 커서 거의 공개 탈출 수준이 될 거였고, 문제가 될 사람을 다 죽여버리면 그 다음 문제 될 인물이 또 생길지도 몰랐다.
그러나 클라인이 열쇠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 “삼 번이요!” 하고 옆에서 악시안이 고함쳤다.
“왜 네가 골라?”
클라인이 당황해서 고함을 지르자 옆방에서 빠른 변명이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전하. 그게 그럴 수밖에-.”
그러나 악시안이 변명을 하려는 찰나.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하얀 머리 남자가 말했다.
“알았어. 3번.”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눈 깜짝할 사이 사라졌다. 나타났을 때처럼 대번에.
“어디냐? 어디냐!”
클라인은 고함을 지르며 그자가 어디로 갔는지 살폈으나, 이 좁은 감옥 방 안에서 이미 그는 아예 보이질 않았다.
그러나 계단을 급하게 내려오는 발소리가 다시 들려와서, 클라인은 당장 행동을 멈추고 그쪽을 보았다.
마침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대는-!”
그러고서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고서 클라인은 작게 탄식했다.
나타난 얼굴은 뜻밖에도 하이신스가 좀비들과 싸울 당시 아이니 황후의 방에서 같이 싸워대던 근위병이었던 것이다.
그 근위병 역시 클라인을 바로 알아보고서 다가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정확히는 이쪽은 클라인을 찾아온 것이겠지만.
“괜찮아 보이느냐?”
“다친 곳이 없으시니 괜찮아 보입니다.”
클라인은 뭐라고 더 하려다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란 걸 깨닫고 물었다.
“네가 여긴 왜 온 거지?”
“예?”
“형님 방 주위에 있어야 하지 않나? 다른 근위병들이 거기 있어도 그대만 없던데.”
“예. 저는 그날 무리했으니 쉬는 게 나을 거라 해서 지금은 업무에서 배제된 상태입니다. 괜찮다고 해보았지만…….”
근위병은 뒷말을 흐렸다. 업무에서 밀려나 있는 게 원하는 상황은 아닌 모양이다.
“제가 당시 상황을 다 알지는 못해도 전하께서 범인이 아니란 건 압니다.”
“다행이군.”
“그러다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오해받는단 이야기?”
“아니요. 다가 공작이 전하를 이 안에서 죽이려 한단 이야기입니다.”
예상치 못한 말에 양 옆 칸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근위병이 옆을 돌아보자 클라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 시종이랑 너희 근위기사단 부단장. 나랑 같이 잡혀 왔다.”
클라인은 오히려 너무 엄청난 이야기를 들어서 흥분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아주 흥분했는데 내색하지 않았다. 평소 반응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근위병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를 구하러 왔습니다. 달아나시지요.”
근위병은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클라인이 들어 있는 감옥으로 다가오더니 열쇠를 꺼내 열어주었다.
“열쇠를 가지고 있군.”
“예. 무조건 전하를 탈출시킬 생각으로 왔으니까요.”
그러나 문이 열렸는데도 클라인이 쉬이 나오지 못했다.
“내가 달아났다가 형님에게 불똥이라도 튀면-.”
“일어나시겠지요. 얼른 나오시지요, 전하. 여기 계시면 죽습니다.”
근위병은 악시안과 바닐이 들어가 있는 감옥칸도 문을 따준 다음 앞서 걸어가며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근위병을 따라 감옥 계단을 올라가자 중간중간 기절해 있거나 이쪽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병사들이 보였다. 몇몇은 아예 ‘지금 가도 된다, 안 된다’로 신호를 해주었다.
‘기절해 있는 건 다가 공작 쪽 병사이고 살아 있는 쪽이 형님을 따르는 병사들이겠지.’
그렇게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네 사람은 안쪽 성벽 근처까지 도착했다.
안쪽 성벽과 바깥쪽 성벽 사이는 거리가 좀 있지만, 다행히 날이 어두워서 짙은 그림자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그런데 담벼락에 붙어 줄지어 뛰어가고 있자니 뒤쪽에서 ‘쿵’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클라인은 펄쩍 뛰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그곳 바닥에는 활을 든 누군가가 떨어져 죽어 있었다.
막 활시위를 겨누다가 떨어지기라도 한 자세로, 한 손은 활대를 쥐고 한 손은 시위를 당기는 자세로.
클라인은 “으.” 하고 소리 없이 치를 떨었다.
“좀 더 안으로 붙으시지요.”
근위병이 조언했고 클라인은 그렇게 했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자니 머리 위에서 등불이 날아다니며 사람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어떻게 된 건가?”
“탈옥한 범인들을 발견하고 죽이려다가 발을 헛디딘 모양입니다.”
“뭐야? 여기에 발 헛디딜 데가 어디 있다고?”
“긴장한 모양입니다.”
“한두 번도 아니잖나. 누가 밀지 않는 한 여기서 떨어질 데가 어디 있다고 떨어진단 말이야!”
“…….”
“범인들이 한 짓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 말을 듣는데 문득 클라인은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그 하얀 머리 제복 차림 남자가 떠올랐다.
매우 묘한 미소를 짓던, 말도 없이 나타났다가 말도 없이 사라지던 그 남자. 분명 ‘문제가 될 인간을 죽여줄지’라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저 궁수는 만약 살아 있었더라면 문제가 되었을 거다. 자신이나 바닐, 악시안, 혹은 탈출을 돕는 근위병 넷 중 최소한 하나는 저자가 쏜 화살에 맞았을 테니까.
‘대체 정체가 뭐였을까.’
* * *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었지만 결국 네 사람은 성문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가장 체력이 약한 바닐은 안전한 곳에 도착하자마자 헛구역질을 하면서 쓰러졌다. 애초에 그는 무술을 익힌 사람이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클라인은 바닐의 등을 몇 번 두드려주다가, 자신들을 여기에 데려다준 근위병을 보았다.
“도와주어서 고맙다.”
근위병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물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제 전하께선 타리움에 가실 겁니까?”
“나야 당연히…….”
가야 한다고 말하려다가 클라인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전하?”
“모르겠다. 갈 생각이었는데. 내가 가면 형님을 지켜줄 사람이 없잖아. 너도 지금은 형님 곁에 없다면서.”
“네.”
“이런 상황에서 다가 공작이 형님 치료를 거부하기라도 하면…….”
궁전 안으로 돌아갈 수는 없더라도 수도나 하다못해 그 부근에라도 머무르고 있어야 하진 않을까?
“게다가 지금 내가 여길 떠나면 완전히 범인이라고 인정하는 꼴이 되지 않을까?”
클라인은 초조하게 갓 빠져나온 성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근위병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다가 공작이라도 폐하를 바로 해치진 못합니다. 황후 폐하 때문에요. 지금 폐하의 권력이 사라져봐야 아이니 황후에게만 불리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네. 그러니 폐하께선 안심하고 타리움에 돌아가시지요.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바로 그쪽으로 급보를 보내겠습니다.”
* * *
“다 잡은 물고기를 놓쳐?”
클라인 황자가 자신의 측근들을 데리고 달아났단 소식을 들은 다가 공작은 열이 받아서 들고 있던 시집을 팽개칠 뻔했다.
“죄송합니다.”
부하가 머리를 깊숙이 숙여 사과했으나 다가 공작은 쉬이 화가 풀리지 않았다.
탈출하도록 유도만 한 다음 중간에 죽여버리거나 큰 부상을 입혀서 처박아버릴 생각이었는데, 진짜로 탈출해서 가버리다니!
그런데 씩씩거리는 와중에 그를 노하게 할 소식이 하나 더 전해졌다.
“공작님!”
“넌 또 무슨 일이냐.”
“타리움에서 사절이 왔습니다.”
공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 그 황제는 돌아간 지 얼마나 됐다고 사절을 또 보내와? 돌아가자마자 사절을 보낸 거냐?”
“모르겠습니다.”
“들라 해라.”
다가 공작은 자신의 머리를 검 손잡이로 쥐어박은 나라의 사절 따위는 보고 싶지도 않았으나 일단 밖으로 나갔다.
그가 지나가자 사람들이 이전보다 좀 더 두려운 기색으로 인사를 올렸다.
“다가 공작님을 뵙습니다.”
“다가 공작님께 인사드립니다.”
다가 공작은 뻣뻣하게 허리를 펴고서 그들의 두려움으로 가득 찬 인사를 흐뭇하게 받았다.
마침내 사절단들이 모이는 홀에 도착하자, 다가 공작은 그 안으로 들어섰다.
그를 발견한 사절단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을 단상 아래에 두고 섰을 때. 다가 공작은 그들이 대체 뭘 말하려고 자국에 돌아가자마자 돌아왔을까, 불쾌한 와중에 호기심이 들었다.
그는 몇 마디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다가 돌리지 않고 물었다.
“그래. 다들 무슨 일로 온 거요? 분명 외국사절은 일이 해결될 때까지 들여보내 줄 수 없다 하였는데.”
타리움 사절 대표는 앞으로 나서서 조심스럽게 인사하고서 말했다.
“라트라실 황제 폐하께서는 하이신스 폐하와 어릴 때 잠시 수학한 적도 있는지라, 이번에 하이신스 폐하께 벌어진 일에 큰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이 때문에 라트라실 폐하께서는 하이신스 폐하를 꼭 돕고 싶어, 타리움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하이신스 폐하를 치료할 방법을 연구하게 하셨지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가 공작의 마음에 냉풍이 불었다. 설마 ‘연구 시작했다’라는 걸 전하려고 사절을 보내진 않았을 거고. 그러면 혹시……?
설마. 설마. 아니, 그래도 설마 바로 연구 결과가 나오진 않았겠지. 그게 그렇게 쉽게 고쳐질 리가 없지 않은가. 설령 대신관이 곁에 있더라도.
아니, 대신관이 곁에 있어서 문제인 건가? 다가 공작은 초조한 심정에 괜히 혀를 몇 번 씹다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이런 내색을 굳이 감추지 않고서 불쾌한 시선으로 사절단 대표를 바라보았다.
사절단 대표는 이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으며 말했다.
“다행히 타리움에는 유능한 대신관께서 계셔서, 바로 해결 방법을 찾아내셨습니다.”
“!”
예상한 답이 그대로 나오자 다가 공작은 속으로 욕을 뱉었다. 빌어먹을 것들, 부지런하기도 하지.
속내를 모를 리 없을 텐데도 사절단 대표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다가 공작님. 우리의 황제 폐하께서는, 이쪽으로 치료할 사람을 보내도 좋고, 정 안 되면 우리 쪽으로 하이신스 폐하를 보내주셔도 괜찮다고 하십니다.”
딱딱하게 굳은 다가 공작을 보다가 사절단 대표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자랑하듯 말했다.
“정말 좋은 소식 아닙니까? 너무 기뻐서 오는 길에 이 이야기를 여기저기 다 해버리고 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