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8화. 신출귀몰 잘 돌아다니는 (268/367)


268화. 신출귀몰 잘 돌아다니는
2022.09.21.



“아이니 황후께서 평소 국무에 많이 관여하셨다면 모르겠지만, 글쎄요. 황후 폐하께선 거의 국정에 관여하지 않으셨잖습니까.”

하이신스 황제의 시종이 소곤거리자, 재상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오.”

“너무 속이 뻔히 보입니다. 폐하께서 깨어나실 때까지 아이니 황후가 대리해 역할을 수행할 거라고요? 본인이 하겠단 거 아닙니까.”

“그러게 말이오.”

재상이 힘없이 같은 말만 반복하자 시종은 한숨을 내쉬었다.


“클라인 황자님이 정말 범인이실까요?”

재상은 고개를 저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사실 이런 짓을 할 사람은 다가 공작이라 생각하오.”

“그렇죠.”

“하지만 문제 된 수프를 운반한 하녀가 하필 본인도 좀비로 변해 버려서……. 게다가 아이니 황후에게 가 버렸으니, 오히려 그쪽도 피해자의 입장이 되어 버리지 않았소.”

재상과 시종은 아주 조용하게 소곤거리다가도 누군가 지나가는 기미만 보이면 입을 다물었다.

즉위한 내내 황제는 다가 공작을 쫓아내기 위한 준비를 해왔으나, 그것도 본인이 말짱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이 모든 일을 준비하고 실행해야 할 사람이 의식을 잃어버리자, 황제 일파는 순식간에 발언권이 줄어들어 버렸다.

반면 점점 밀려나던 다가 공작 일파는 아주 신이 났다.

아이니 황후는 ‘대적자의 검’을 뽑았다. 비록 세 명이 뽑긴 했으나, 어쨌건 둘은 다른 나라 사람이고 이 나라에선 아이니 황후 한 명만이 뽑았다.

이 와중에 다가 공작 일파를 멀리하던 황제가 죽지도 않고 쓰러져만 주자 그들은 제 세상을 만난 양 활기차졌다.

그러나 다가 공작은 안심하지 않았다.


“공작님. 일은 다 잘 풀려 가는데. 표정이 안 좋으십니다?”

“일이 잘 풀려 가는 것처럼 보이나.”

“그럼요. 양위 이야기가 나오기엔 황제 폐하의 나이가 너무 젊은데다 아직 죽은 것도 아니고. 황제의 측근들은 끈 떨어진 신세가 됐고. 클라인 황자는 그들을 모으기엔 세력이 다르고. 인망도 없지요. 반면 우리 황후 폐하는 존재만으로도 국민들의 신뢰를 다 끌어모으는 중입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클라인 황자.”

“그 망나니 황자 말입니까? 감옥에서 아무것도 못 하는 그 황자요?”

측근인 미셜 후작은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 황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공작님. 그냥 그렇게 갇혀 있을 뿐이에요. 다른 나라 후궁 처지라 임시로 대리 황제 역할을 수행하지도 못하고요.”

“못 하지. 보통은.”

“예?”

“못 하는데, 무리를 해서라도 밀어보려는 자들이 있는 것 같아.”

미셜 후작은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제정신이랍니까?”

“사태가 심각하니 정신없는 와중에 밀어붙이려는 거겠지. 우리가 클라인 황자를 바로 감옥에 넣은 것처럼.”

“!”

“그 황자는 자기 의견이 없어. 진짜 황제가 되길 기대할 순 없지만 꼭두각시 역할은 잘 해낼 거 아닌가. 권력이 생기면 망나니짓은 더 심해지겠지만, 그 정도는 봐줄 수 있다 이거겠지.”

“!”

“아니면 적당히 이름을 올려두고 그 황자는 외국으로 보낸 다음 국무는 황제의 측근들이 해먹으려는 거거나.”

“그럼, 그럼 어찌합니까?”

미셜 후작은 초조해서 소파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감옥에 가두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는 뭘 할 수도 없는데요. 황제 측근들이 가짜 알리바이라도 만들어서 감옥에서 내보내려 하면…….”

심각한 표정으로 호흡하던 다가 공작이 감았던 눈을 차갑게 뜨며 일어섰다.


“클라인 황자를 죽여야겠다.”

“예?!”

미셜 후작은 너무 놀라서 넘어질 뻔했다. 그는 소파 등받이를 잡고 서서 당황해 웅얼거렸다.


“감옥에서 죽으면 누가 봐도 우리가 죽인 티가 날 텐데요?”

“당연히 감옥에서 죽으면 안 되지.”

“그러면…….”

“황제 일파 중 하나를 자극해서 탈출시키는 거다. 그때 죽이면 돼. 수상한 인물이 탈옥하기에 죽였는데, 잡고 보니 클라인 황자였다고 하는 거지.”

“!”

 

* * *

하이신스 황제가 잠든 방은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으나, 아이니만큼은 아무런 제지 없이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보통의 황후라면 위험하단 이유로 가로막는 이들이 있었겠으나, 아이니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대적자임을 증명한 황후였다.

사람들은 아이니에겐 신비한 힘이 있어서, 어두운 존재들을 상대할 때 그 힘이 발휘될 거라 믿었다. 이 탓에 그녀가 하이신스를 보러 들어가도 붙잡거나 말리는 이들은 없었다.

잠든 하이신스의 앞으로 간 아이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쓰러진 그를 내려다보았다.

눈을 감은 그는 얼굴이 푸르스름하긴 하지만 표정만큼은 평온해서 깊은 수면 아래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아이니는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내가 미우십니까.”

중얼거린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왜 나와 결혼했어요?”

 

 
아이니는 누운 하이신스의 옆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묻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자신이 나서서 클라인 황자를 감옥에 가두는 건 이른 처사라고, 그를 빼내달라 해야 한단 건 알았다.

하지만 그랬다가 정말 일이 꼬이고 꼬여 그 화살이 아버지에게 향하면?

동생이 좀비 혈액을 가지고 놀았단 아버지의 말은 믿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런 위험한 걸 동생이 손을 댈 만한 곳에 둘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아버지의 동생 핑계는 더욱 무서웠다. 그건 동생이 ‘실수’로 좀비 혈액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아버지가 ‘고의’로 좀비 혈액을 잃어버렸단 뜻이니까.

아버지는 어마어마한 비밀에 대한 힌트를 그녀에게 살짝 알려주면서, 그녀에게 선택지를 떠넘긴 것이었다.

클라인 황자를 구했다가 일이 틀어지면, 그래서 이쪽도 잘못한 게 있단 게 밝혀지면…… 가족 전체가 죽게 될 거라고.

일이 잘못되면 거기에 휩쓸리는 건 그녀와 다가 공작만이 아니라 죄 없는 식구들까지 함께라고.


“내가 미우십니까?”

아이니는 다시 하이신스에게 묻다가 그의 이불에 머리를 대고 흐느꼈다.


“나는 밉습니다. 내가. 밉습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대적자? 대체 뭐가 대적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빌어먹을 검을 뽑는 걸 제외하면 대체 뭘 할 수 있단 건지도요. 아니, 사실은 알아요. 제대로 대적자 노릇을 하려면 뭘 해야 했는지.”

대적자 노릇을 하려면 기르골의 손을 잡아야 한다. 헤움의 목을 잘라 나무 위에 걸어두고 간, 그 기르골의 손을.

그게 옳은 거라고? 아이니는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 * *

타리움에 돌아오고서도 며칠이 지나서야 라틸은 기르골을 떠올렸다.


‘아, 맞다. 기르골. 여기 두고 갔지.’

정확히는 어디 다녀온다는 말도 안 하고 갔는데…….


‘어째 너무 조용한 거 같다?’

라틸이 빠르게 움직이던 펜을 멈추자, 시종장이 곁에 서 있다가 “폐하?” 하고 불렀다.

라틸은 잠깐 허공에 대고 펜을 움직이다가 머리를 젓고서 다시 보던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아닙니다. 잠깐 생각난 게 있어서요.”

“하이신스 폐하께선 괜찮으실 겁니다.”

라틸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가 공작이 미치지 않았다면 대놓고 치료를 거부하진 않겠지.

그때처럼 온갖 모욕 섞인 제안을 뒤섞어서, 이쪽이 ‘더러워서 치료 안 해준다’라고 몰아가게 한다면 몰라도.

하지만 라틸은 하이신스를 구할 때까진 다가 공작의 그 모욕 섞인 제안도 술렁술렁 넘어가 줄 생각이었다.

두 시간 뒤. 안건을 마무리 지은 라틸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잠깐 벗었던 겉옷을 걸쳤다.


“사블레 후작. 마무리 정리 부탁합니다.”

“하렘에 가십니까, 폐하? 지금 라나문 님이 ‘대적자의 검’을 뽑았단 것 때문에 귀족들이 난리가 났던데요.”

“아, 손님들 머무는 곳에 갑니다.”

“윌랑 왕자요?”

“네.”

 

* * *

당연히 라틸은 윌랑 왕자를 찾아온 게 아니었다. 라틸이 찾은 건 기르골이었다.

아무 소식도 안 들리는 걸 보니 조용히 있긴 있는 것 같은데. 워낙 어디로 튈지 모르는 뱀파이어이다 보니, 조용하면 조용한 대로 신경이 쓰였다.

한참 폭발하기 직전일 수도 있고.


“기르골은?”

그런데 가서 보니 기르골이 보이지 않았다.

라틸이 의아해 묻자, 윌랑 왕자가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그걸 왜 저한테 찾으시는 겁니까?”

“난 그대처럼 까칠한 사람을 좋아해, 왕자. 그대가 험악하게 말할수록 내 옆에 두고 온순해질 때까지 괴롭히고 싶어져.”

“어디 다녀올 데가 있다고 몇 주 전에 자리를 비웠는데, 이후론 저도 모르겠습니다.”

왕자의 목소리가 조금 고분고분해지자, 라틸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해주었다.


“좋아. 고분고분하게 대하니 흥미가 좀 떨어지네. 앞으로도 이렇게 해, 왕자. 내 흥미가 뚝뚝 떨어져야지 내가 얼른 꺼지라고 윌랑으로 쫓아내 줄 거 아닌가.”

“……예.”

라틸은 웃으면서 돌아섰으나, 돌아설 때 표정은 웃고 있지 않았다.


‘몇 주 전이면 내가 카리센에 갈 때쯤부터 자리를 비운 거 아냐? 그 미친 뱀파이어…… 괜찮은가. 이상한 데서 눈 돌아가 있거나 한 거 아냐?’

 

* * *



“난 취향이 까다로운 편이야, 도련님.”

언제쯤 여기서 나갈 수 있으려나…… 생각하며 감옥에 쪼그려 있던 클라인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섰다.

그곳에서 하얀 머리카락에 피부가 몹시 창백한 붉은 눈동자의 남자가 이 감옥 안에서 조금도 때 타지 않은 새하얀 제복을 입고 서 있었던 것이다.


“누구냐!”

낯선 얼굴에 클라인이 외치자, 양옆에서 “황자님?” “무슨 일이세요?” “전하?” 하고 바닐과 악시안이 연달아 불러댔다.

하얀 머리 남자는 시끄러운지 “쉿. 쉿.” 하고 손가락을 입 앞에 대고서 조용히 하란 신호를 보냈다.


“이러면 내가 못 구해주잖아, 도련님.”

악시안과 바닐이 조용해졌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다들 눈치껏 ‘누군가 황자님을 구하러 왔구나’ 생각하는 듯했다.

반면 하얀 머리 남자와 마주 선 클라인은 잔뜩 날을 세운 채 갑자기 뒤에 선 남자를 노려보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꽉 막힌 감옥이다. 사방이 벽이고 바로 앞은 철창살인데. 갑자기 등 뒤에 나타난 사람을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 누구야. 누군데 여기 있어?”

클라인이 날을 세우고 묻자, 하얀 머리 남자는 두 손을 들어 어깨를 으쓱하고는 활짝 웃었다.


“우리 도련님은 그거지?”

“뭐?”

“폐하의 장난감.”

“뭐 이 새끼야?! 난 폐하 동생이야!”

“그쪽 말고. 다른 쪽 폐하.”

라트라실을 칭하는 말에 클라인의 표정이 싹 굳었다.


“너 누구야.”

라틸이 보낸 사람이라면 그를 이런 식으로 표현할 리가 없다. 하이신스가 보낸 사람이어도 그를 이런 식으로 표현할 리가 없다.

클라인은 본능적인 경계심을 느끼고서 손으로 검을 찾다가, 검이 잡히지 않자 주먹을 쥐고 하얀 머리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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