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치료법을 찾아야 해
(266/367)
266화. 치료법을 찾아야 해
(266/367)
266화. 치료법을 찾아야 해
2022.09.14.
“아버지!”
쾅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아이니 황후가 들어왔다.
다가 공작은 수프를 쥐꼬리만큼 덜어 놓고 먹다가 힐긋 고개를 들었다.
분노로 얼굴이 붉어진 아이니가 화난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가 공작의 바로 앞까지 성큼성큼 다가온 그녀는 탁자에 두 손을 쾅 짚으며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설명해주세요. 클라인 황자를 범인으로 지목해 가두다니요? 게다가 제 명령이라 하시다니요!”
언성을 높이자 긴 속눈썹까지 떨렸다. 안 그래도 하이신스가 자신을 구하고 쓰러진 일로 심란한데. 아버지까지 이런 일을 벌이자 아이니는 몹시 화가 났다.
하지만 다가 공작은 이미 고지식한 딸이 어떻게 나올지 파악하고 계획을 세워둔 상태였다.
“의심할 만하니 한 것이다.”
“클라인 황자는 제 방에서 좀비와 싸우고 있었어요! 아시잖아요! 보셨잖아요! 자기가 한 짓이라면 뭐 하러 그런 위험한 상황에 있었겠어요?”
“경비병들이 라트라실 황제의 방에 가 보니, 다 엎어진 방 안에 클라인 황자가 혼자 여기저기 수상쩍게 행동하고 있었다더라. 증거를 치우려 했던 거겠지.”
“아닐 수도 있어요! 그런 이유만으로 가두셨어요?”
“때맞춰 대신관의 부적을 가지고 있던 것도 이상했다. 그게 좀비화를 막아준단 걸 알던 것도 이상했다. 딱 그 타이밍에 황제에게 붙인 것도 이상했다. 안 그러냐. 꼭 뭘 미리 준비해서 온 사람처럼.”
“그건…….”
“일이 벌어지자마자 라트라실 황제는 외국 사절들을 불러서 이 아비를 공격했지. 놀랐을 텐데도 대번에 그런 짓부터 하더라. 외국 사절들을 모아다, 내가 폐하 치료를 막는다고 했단 말이다. 이게 놀란 사람이 할 행동 같으냐?”
“…….”
“클라인 황자는 그 황제의 후궁이다, 아이니. 라트라실 황제는 여기에 올 때도 클라인 황자 핑계를 대고 왔어. 클라인 황자가 아니었으면 라트라실 황제가 여기에 오지도 않았고, 그 황제가 여기에 안 왔으면 이 사건도 안 벌어졌어. 다 한패다. 다 한패란 말이다!”
거침없는 공작의 말에 아이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가 공작은 그 모습을 보다가 준비해 둔 마지막 패를 내밀었다.
“고백할 게 있다. 실은 이 일에 이 아비도 연관이 조금 있긴 하다.”
아이니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게 무슨……?”
“수프에 뭔가 들어가서 문제가 일어났다 했지. 좀비 혈액일 거다. 그리고 좀비 혈액을 채취한 건 이 아비다. 지하 감옥에 연회장 좀비들을 가두어 두었을 때. 그때 조금 얻어놨다.”
“아버지?!”
다가 공작은 쓸쓸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연구하기 위해 가지고 있었다. 너는 대적자니까, 그것들을 연구해야 네가 손쉽게 무찌를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여겼어!”
다가 공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 잘못도 있다. 관리를 잘 해야 했는데. 네 동생이 그걸 가지고 놀다가 잃어버릴 줄은 나도 몰랐어.”
동생 이야기까지 나오자 아이니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아이니의 동생은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이제 막 열 살이 된 어린아이였다. 그런데 그 애가 그 위험한 물건을 가지고 놀다가 잃어버렸다고? 게다가 아이가 손에 닿을 아무 곳에나 혈액을 보관했다고?
다가 공작은 심각한 눈으로 아이니를 쳐다보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끔찍한 가정을 들려주었다.
“나는 클라인 황자를 의심하지만, 그래. 네 말처럼 그 황자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지. 다른 진범이 있을 수도 있어. 하지만 일이 잘못되어 진범을 못 잡으면? 나와 네 어린 동생이 연루될 수도 있다. 어린아이의 실수로 가문이 멸족할 수도 있단 말이다.”
아이니의 동생이 황궁에 자주 놀러 온 건 맞지만 이번 일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아이가 뭔가를 가지고 놀다가 잊어버린 건 맞지만 그게 좀비 혈액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니는 이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아이니가 창백한 얼굴로 파르르 떨고 있자, 다가 공작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서 다가가 딸을 끌어안고 위로했다.
“염려 마라. 일단 가둬두었지만, 죄를 덮어씌운단 건 아니야. 그러면 안 되지. 철저하게 수사를 할 거다. 진범이 나오면 그때 풀어주면 될 일이고.”
“아버지…….”
“이 일은 아버지가 잘 처리할 테니 염려 말고. 너는 카리센을 지킬 생각이나 해라.”
“…….”
“아이니. 아이니! 이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너는 난세에서 사람들을 지켜낼 영웅이자, 카리센의 황제야!”
“!”
“하이신스 황제가 깨어날 때까진 네가 황제 역할을 해야 해. 절대로 이런 일에 흔들려서도 약한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된다. 알았느냐?”
“하지만 클라인은-.”
“일이 최악으로 달려서 하이신스 황제가 죽으면 타리움 황제는 클라인을 차기 황제로 밀 거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타리움에서 카리센을 먹을 수 있으니까.”
“!”
“정신 차려라. 온정은 네 국민들에게 보내는 거지, 네 적들에게 보내는 게 아니야!”
* * *
클라인은 이를 악물고서 철창살을 꽉 쥐었다. 설마 그 미친 다가 공작이 라트라실 황제가 가자마자 이렇게 나올 줄이야.
게다가 하이신스의 목숨을 구하는 데 사용한 대신관의 부적을 오히려 이를 위해 준비한 계략으로 몰아가 버리다니.
“형님……. 젠장!”
클라인은 주먹으로 벽을 쾅 치고서 이를 갈았다.
“악시안.”
“네, 전하.”
“이러다 다가 공작이 형님 부적을 떼가기라도 하면 어쩌지?”
“당장은 그러지 못할 겁니다. 폐하께서 돌아가시면 아이니 황후도 황후가 아니게 되니까요. 두 분 사이에 후계자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겠지?”
“예. 최대한 버티다가, 아이니 황후가 국민의 영웅으로 완전히 자리 잡고 위명이 나라를 다 덮을 정도가 되면 그때쯤 다시 머리를 굴리겠지요.”
클라인은 다시 주먹으로 벽을 쾅 내리쳤다. 옆 칸에서 바닐이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자님…… 손 다쳐요. 그러지 마세요.”
클라인은 중앙에, 바닐과 악시안은 각기 양옆 칸에 한 사람당 한 칸씩 따로 갇혀 있었다.
클라인과 악시안이 아무리 강하다지만 근위병 수십 명이 포위하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설령 그 자리에서 어찌어찌 도망을 친다 해도 오히려 적들은 잘됐다 싶어서 더 누명을 덮어씌울 테니.
“폐하께서 도와주실 거다.”
클라인은 라틸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폐하가 우리를 도우러 올 거야.”
그러나 불쾌한 목소리가 그의 희망을 잘라먹으며 나타났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클라인은 차가운 쇠에 이마를 대고 있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다가 공작이 소리가 잘 울리지 않는 신발을 신고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개자식.”
클라인은 그 낯짝을 보자 이부터 갈았다.
“형님을 공격한 건 네놈이면서 나한테 뒤집어씌워?”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릴.”
그러나 다가 공작은 도발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먼저 수상한 행동을 하였으니 이렇게 된 겁니다, 클라인 황자.”
“수상한 행동은 네놈과 네 딸자식이 한 거겠지.”
다가 공작은 ‘쾅’ 소리가 나도록 철창살을 걷어찼다.
“황후 폐하께 무례하군.”
“무례한 건 그쪽입니다, 다가 공작. 황자 전하께 지금 뭘 하는 겁니까.”
악시안이 옆에서 소리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하고서 이를 갈았으나, 다가 공작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황후 폐하는 이제 대리 황제가 되실 거고, 앞으로 진짜 황제가 되시겠지. 당연히 무례한 건 이 망나니 황자가 아니겠나.”
듣는 귀가 없다고 대놓고 클라인을 모욕한 다가 공작은 크게 껄껄 웃었다.
클라인은 자신이 저주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흑마법사가 되고 싶었던 적은 없으나, 이 순간만큼은 그런 방법이 있다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다가 공작의 낯짝에 주먹을 휘둘러주고 싶었다.
하지만 상상일 뿐이어서 다가 공작은 멀쩡하게 클라인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눈을 마주치고 있기를 5분가량. 다가 공작이 갑자기 미묘하게 웃더니 이상한 말을 했다.
“낯짝은 괜찮군.”
이 상황에서 절대로 칭찬일 리 없는 말에 클라인의 얼굴이 구겨졌다.
다가 공작은 그래도 태연히 웃고 있다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제안을 했다.
“클라인 황자. 사실 그쪽을 살려줄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해. 황자에게도 그리 나쁘지 않은 제안이지.”
“닥쳐.”
듣지도 않고 클라인이 욕을 뱉었으나 다가 공작은 닥치지 않았다.
“아이니 황후와 결혼하는 건 어떤가. 그러면 살려줄 수도 있네.”
바닐과 악시안이 동시에 헛웃음을 뱉었다. 클라인 역시 화가 나서 이를 내밀었다.
“나는 라트라실 황제 폐하의 남편이다.”
“후궁이지. 그것도 임시 후궁. 스스로 그만둘 수 있는.”
“!”
“총애도 못 받고 있다던데. 그냥 그만두고 와서 아이니 황후와 결혼하게. 국서를 꼭 거기서 해야 하나?”
“너…… 개자식……!”
“그러면 감옥에서 풀어줄 수 있어. 황자는 어차피 머리가 나빠 정치에 관여하지도 못할 테니.”
클라인은 창살을 뽑아버릴 태세로 쥐고 흔들었다.
“개소리!”
제안하긴 했으나 받아들일 거라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던지, 다가 공작은 실망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가. 안타깝군. 서로에게 좋은 평화적인 방법이었는데. 역시 머리가 나빠.”
* * *
카리센에 갈 때와 달리 돌아오는 길은 분위기가 몹시 무거웠다.
라틸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이 사태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다가 공작이 어디부터 어디까지 개입한 건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음식에 독을 탄 건 좀비가 되어 있던 그 하녀인데. 왜 뜬금없이 자기도 좀비가 되어 있던 걸까? 심지어 그 자리에서도 아니고 두 층 위에서?
게다가 다가 공작. 설령 다가 공작이 아니더라도 진범은 분명 타리움 사절들을 노렸는데, 왜 불똥은 아이니 황후 쪽으로 튄 걸까.
실수가 있던 건가. 아니면 모두 의도된 건가.
라틸은 심각하게 고민하느라 마차 창문 밖으로 서넛과 라나문이 이쪽을 걱정스레 보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알아차렸더라도 모른 척했을 것이다. 일부러 둘 다 떨어져서 오라고 저기 둔 거니까.
라틸이 서넛에게 말을 건 건 그로부터도 하루가 꼬박 지나서였다.
“서넛 경.”
라틸이 부르자, 서넛은 말없이 라틸의 눈치를 살피다가 얼른 다가왔다.
“예, 폐하.”
라틸은 마차 안에 들어오라 한 다음, 문을 닫고서도 거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지시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좀 불안합니다. 대책을 좀 세워야겠습니다.”
“네, 말씀하시지요.”
“칼라인 밑에 용병들. 뱀파이어지?”
“대다수는 그럴 겁니다.”
“뱀파이어들은 이동 속도가 빠르지. 그자들에게 카리센을 왔다 갔다 하면서 거기서 일어나는 소식을 내게 전하게 해요.”
“다가 공작이 일을 칠 거라 여기십니까?”
“그러고도 남을 작자란 걸 봤습니다. 생각보다 더 미친 인간 같았습니다.”
서넛이 마차 밖으로 나가자, 라틸은 창틀에 이마를 대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라나문이 대적자일지도 모른단 걸 알게 되어서 이래저래 곤란한데, 이 와중에 하이신스가 쓰러지다니.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잠시 눈을 감았다.
‘대신관한테도 좀비화를 치료할 수 있는지 물어보고. 게스타한테도 물어보자. 좀비는 흑마법으로 만든 게 아니라 했지만, 혹시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