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시간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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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화. 시간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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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화. 시간 싸움
2022.08.31.
궁전 본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외진 정원으로 온 라나문은 궁전 안에서 어떤 소란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라나문은 아직 서늘하지만 서서히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저녁 공기 속에서, 자신을 부른 사람이 누구인지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마침내 바스락 소리가 나더니 풀숲 사이에서 풀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나문은 그쪽을 보았다. 노란 제복 차림을 한, 색상을 제외하면 디자인은 백화와 흡사한 차림의 여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라나문의 곁에 도착하자, 먼저 인사를 올렸다.
“성기사단 단백술의 단장입니다. 단백이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라나문 님.”
라나문은 미간을 찌푸렸다.
“단백술은 처음 듣는데.”
성기사가 부른단 이야기는 듣고 나왔으나, 단백술은 정말로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단백은 활짝 웃으면서 발표하듯 말했다.
“백화랑술에 비해서는 덜 알려졌지요. 백화랑술에서 천 년 전에 떨어져 나와 쭉 이어진 단체입니다.”
“그래 봐야 500년에 한 번씩 문제가 터지니, 딱 두 번 활약한 곳 아닌가.”
“하하. 그렇기도 한데요. 로드가 없다고 해서 몬스터들이 아예 없진 않습니다. 저희 단백술은 수면 아래에서 간혹 나타나는 그런 것들을 계속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예.”
단백은 눈을 영리하게 빛내며 기대에 찬 눈으로 라나문을 바라보았다. 라나문이 무언가 반응해주길 원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부른다기에 나왔을 뿐인 라나문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이에 멀뚱히 서로를 쳐다보기를 3분가량. 견디다 못한 단백이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 낮에 광장에서 봤습니다. 대적자의 검을 쑥 뽑으셨지요.”
“그거 때문에 온 건가?”
“예.”
“하지만 검을 뽑은 건 세 명이었는데. 왜 날 찾았지?”
“검을 뽑은 건 세 명이지만 가장 수월하게 뽑은 건 라나문 님이니까요.”
“수월?”
“네. 타리움 황제는 조금 빡빡하게 뽑았고, 아이니 황후는 잘 뽑긴 했지만, 검이 무거워 보였습니다. 하지만 라나문 님은 어린아이 장난감을 다루듯 쑥 뽑았지요. 그걸 보고 라나문 님께 오게 되었습니다.”
라나문은 성기사가 부른단 이야기에 어렴풋이 이런 류의 이야기가 나오리란 예상을 하고 오긴 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듣자 슬며시 귀찮은 마음이 솟았다.
이 성기사는, 그러면 역시 대적자다운 일을 해달라 청하러 온 건가. 예상하고 나오긴 했지만, 코앞에 짐이 들이밀어 지자 라나문은 조금 후회가 솟았다.
“너는 내가 대적자로서 해야 할 역할을 해주길 바라고 온 건가.”
“네!”
라나문이 인상을 찡그리는데도 단백은 그저 좋다고 웃었다. 라나문이 대적자 임무를 거부하리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밝은 미소였다. 라나문은 다시 물었다.
“대적자가 되면 뭘 해야 하지?”
“성기사단들을 통솔하는 대장이 되어서 어둠과 맞서 힘을 길러야지요.”
“굉장히 귀찮을 것 같군.”
“하지만 아주 영광된 자리입니다, 라나문 님!”
“…….”
“그리고 최종적으론 로드를 죽여 세상을 구하면 됩니다.”
단백의 눈이 이미 라나문이 영웅이 되기라도 한 양 초롱초롱해졌다.
“음. 이상한 게 있다면, 전에는 이쯤이면 대적자의 스승이 나타나 도와줬다 들었거든요. 그런데 아직 안 나타나긴 하네요.”
“기르골 말인가.”
“네, 그런 이름이라 들었습니다. 하긴. 지금은 대적자 후보가 세 분이니, 그분도 헷갈리긴 하겠네요!”
단백은 혼자 말하고 혼자 깨우쳤다.
어디선가 희미한 고함이 들려오는 듯해 라나문은 고개를 들었다가, 귀를 기울여도 이어지는 소리가 없자 다시 고개를 내렸다.
단백은 열정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그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혹시 후궁의 몸이셔서 곤란하신 겁니까?”
가장 큰 곤란함은 후궁이 아니라 귀찮음이었으나, 라나문은 그런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후궁의 몸이라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곤란하군. 날 보고 싶다 하니 나오긴 했는데.”
“아 그렇군요!”
단백은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곧 또 밝게 웃으면서 외쳤다.
“그럼 후궁을 그만두시면 되지 않을까요?”
“글쎄.”
라나문은 단백이 절대로 귀족 출신은 아닐 거라 확신했다. 설령 귀족 출신이더라도 그녀는 귀족가에서 자라진 않았을 것 같았다.
라나문이 시원스레 대답해주지 않자 단백은 울상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라나문 님은 세상을 구하고 나면 황제가 될 수도 있는 분이신데, 후궁 역할을 하느라 세상을 구할 수 없단 건 좀 이상해서요.”
“황제?”
본인은 충성심이 깊지 않지만 그래도 라나문은 대대로 충신 가문인 아트락시 가문 사람이었다. 라나문이 불쾌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자, 단백이 얼른 덧붙였다.
“타리움 제국 얘기하는 거 아니에요, 라나문 님!”
남들은 황제 이야기가 나오면 야망이 끓겠으나 라나문은 귀찮음이 끓기 시작했다.
실은 아까부터 귀찮음은 이미 한계치를 넘어 있었다. 라나문은 얼른 거품을 푼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고 침대에 누워 쉬고 싶어졌다.
하지만 라나문은 여기까지 자신이 온 이유, 바로 ‘국서 자리’를 떠올리고서 미간을 찡그리고 이마를 눌렀다.
대적자가 되면 후궁을 떠나 귀찮아지겠지만, 떠나기 전에 국서 자리를 예약하고 갈 수 있다. 혹은 국서 자리를 맡아 놓고 갈 수 있다. 그러나 아주 귀찮아진다.
황제도 대적자인 거 같은데. 황제와 같이 대적자 역할을 하면…….
‘안 되겠지. 폐하는 나라를 지켜야 하니.’
라나문의 귀찮음과 자존심이 동시에 충돌했다. 대적자가 되자니 귀찮은데, 대적자 위치를 포기해 다른 사람이 국서가 되면 자존심이 상한다.
그는 일생일대의 선택지를 앞에 두자 아직 한 것도 없으면서 또 피로해졌다.
단백은 그런 라나문의 고민하는 모습을, ‘역시 전설이랑 현실은 다르구나’라고 생각하며 입을 벌리고 구경했다.
전설 속 대적자들은 알아서 세상을 구할 열정에 빛나고 있었다던데. 혹은 먼저 성기사들을 데리러 왔다던데. 왜 이 대적자는 이렇게 느긋하고 느릿한 걸까.
그 순간. 희미하고 간헐적으로 들려서 ‘진짜인가?’ 싶던 소란이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확실하게 들려왔다.
라나문은 고민하던 걸 멈추고 고개를 들었고 단백도 멀리 보았다. 이곳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커다란 본궁 창문에 사람 비슷한 게 버둥거리는 것 같았다.
“저게……?”
“나중에 얘기하지.”
라나문은 잘됐다 싶어서 얼른 그쪽으로 걸어갔다.
“아, 저기, 저는-.”
“나중에.”
그게 아니라…… 저 안 도와도 되나요? 성기사인데……? 성기사 단장인데? 단백은 입을 뻐끔거렸으나, 라나문은 대답 한마디 하는 것조차 시간을 질질 끌던 사람답지 않게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와. 대적자님이 맞긴 한가 봐.”
그 속도를 본 단백은 멍하게 감탄하다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대적자님이 대적자 안 하신다고 하면 어떡해야 하지. 어째 영 떨떠름해 하는 눈치시던데. 두 번째로 검을 쉽게 뽑은 아이니 황후한테 가봐야 하나.”
* * *
소란을 듣고 본궁 쪽으로 걸어가던 라나문은 도중에 서넛을 발견했다. 서넛은 멀지 않은 곳 담벼락에 몸을 기댄 채 서 있었다.
라나문은 힐긋 서넛을 보았으나 말을 걸지 않고 본궁 쪽으로 걸어갔다. 그저 창문이 깨졌을 뿐 별일이 없으리란 건 알지만, 굳이 서넛과 할 말이 없었다. 서넛은 그저 황제의 근위기사일 뿐이니.
“할 겁니까. 대적자.”
그러나 서넛 쪽에서 라나문을 천천히 따라오며 질문을 해왔다. 라나문은 따라오는 발소리가 없었는데도 서넛의 목소리가 멀지 않은 뒤에서 들리는 걸 깨닫고 아주 조금 놀랐다.
‘소리 없이 따라온 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그래도 라나문은 계속 앞만 보고 걸어갔다. 그 뒤에서 서넛의 동공이 커다래지고 있다는 건 알지 못했다.
그러나 재차 들려온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에, 서넛은 라나문을 노리다 말고 본궁 쪽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그 소리를 같이 들은 라나문은 이미 뛰고 있었다.
‘운 좋게 살았군.’
서넛은 혀를 차고서, 라나문과 다른 방향으로, 하지만 라나문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본궁을 향해 뛰어갔다.
* * *
이런 모든 상황에서 클라인은 동떨어져 있었다. 처음엔 그가 지내는 숙소가 본궁과 떨어져 있어서. 다음에는 황제의 숙소로 와 보니 사람들이 아무도 없어서.
“뭐야. 왜 아무도 없어?”
라틸의 말처럼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고, ‘폐하2’ 인형만을 가지고 찾아온 클라인은 어리둥절해서 텅 빈 복도와 활짝 열린 방문을 쳐다보았다.
원래 외국에서 손님으로 온 황제가 머무는 방 근처로는 자국에서 데려온 근위병들이 진을 치고 있어야 하는데. 여기는 아무도 없었다.
일부는 수프를 먹은 이들을 해결하러 갔고 일부는 앞장서서 뛰어다니는 황제를 쫓아다니느라 자리를 비운 것이었으나, 클라인이 이를 알 리 없었다.
“그냥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덜컥 겁이 난 바닐이 뒤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한데요.”
“분위기가 이상하면 더 가봐야지. 폐하 방문이 열려 있잖아.”
그러나 클라인은 이상하단 생각을 하자마자 오히려 더 성큼성큼 걸어가, 가장 안쪽에 있는 황제의 방문 앞으로 갔다.
“어!”
방문 앞에 가자 그는 놀라서 짧게 외쳤다.
“안이 왜 저런데요?”
바닐도 놀라서 펄쩍 뛰었다.
단정하고 깔끔해야 할 황제의 방 안이 어수선했던 것이다. 특히 탁자 주위로 접시들이 바닥에 엎어져 굴러다니고, 음식용 카트는 아예 옆으로 뒤집혀 있었다.
깨진 접시 파편과 쏟아진 음식물들이 마구 얽혀 있는데, 그 사이로 누군가의 토사물도 보인다.
“이게 무슨 일이야.”
게다가 그 탁자부터 문까지 이어지는 길에 놓인 가구들이 죄다 옆으로 밀려나거나 엎어져 있어서, 누군가 비틀거리면서 그곳을 달려간 걸 알 수 있게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클라인이 앞으로 나아갔다.
“들어가지 말아요, 황자님.”
바닐은 더욱 겁이 나서 황자의 팔을 잡았다.
“가서 사람들을 불러와요.”
“네가 불러와.”
그러나 클라인은 바닐의 손에서 팔을 떼며 계속 앞으로 갔다. 그래도 바닐이 떠나지 않고 발만 구르고 있자 고개를 돌리고서 재차 명령했다.
“얼른!”
“황자님은…….”
“암살자가 찾아와도 내가 더 세. 네가 있으면 싸울 때 방해만 된다.”
그건 그렇기에, 바닐은 우물거리다가 얼른 뒤돌아서 복도를 달려갔다.
클라인은 그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방 안을 살피고는 여기저기 사람이 들어갈 만한 곳을 찾으며 라틸을 불렀다.
“폐하! 폐하? 폐하!”
겉으로 봐선 아무도 없긴 한데. 그래도 혹시 황제가 이 사이 어딘가에 쓰러져 있을까 염려되어서였다.
그러고 있자니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클라인은 옷장 안쪽을 보다가 문을 닫고 고개를 돌렸다. 카리센 경비병들이 놀란 표정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문 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당황해서 클라인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전하?”
“바닐이 불러서 왔나?”
“아닙니다. 타리움 병사 하나가 지원을 요청해서 왔습니다. 대체 이게…….”
“나도 모른다. 와보니 이 꼴이어서. 지금 나도 폐하를 찾고 있는데-.”
대답이 끝나기 전에 문 너머에서 “클라인!” 하고 외치는 소리가 나더니, 라틸 황제가 경비병들 사이를 헤치고 나타났다. 그 뒤로 보이지 않던 타리움 근위병들이 줄줄이 따라왔다.
“폐하!”
안도한 클라인이 웃으면서 다가가자, 라틸은 황급히 그의 얼굴을 감싸고 입을 벌리게 하고서 수프를 먹지 않았나 살폈다.
“폐하?”
클라인이 어리둥절해 있자니 라틸이 다급히 물었다.
“먹었느냐?”
“예? 뭐를요?”
“저거!”
라틸이 손가락으로 토사물과 섞인 수프를 가리키자 클라인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제가 저걸 왜 먹습니까.”
“궁금해서 살짝이라도 찍어 먹지는-.”
“제가 미쳤습니까?”
클라인이 황당해서 묻자, 라틸은 그제야 그의 어깨를 붙잡고 가슴에 이마를 대며 안도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클라인은 의아해서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라틸이 대답을 하려는데, 위쪽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나더니 무언가 커다란 게 뚝 떨어졌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뭐가 떨어진 지 볼 수 없었으나, 분명 위층 창문에서 ‘무언가’가 떨어진 것 같았다.
라틸과 클라인은 달려가서 고개를 내밀고 창문 아래를 한 번, 위쪽을 한 번 보았다. 바로 위층 창문은 멀쩡했다. 그렇다면…….
클라인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 위층 위층, 형수님 방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