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우리 취미가 같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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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화. 우리 취미가 같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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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화. 우리 취미가 같나 봐
2022.08.24.
방으로 돌아온 라나문은 걸치고 있던 겉옷을 툭 벗어 옆으로 내밀었다. 그러다가 카르둔이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옷을 받아 들자, 부담스러워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카르둔은 희희낙락해서 밝게 물었다.
“도련님. 전 진짜요. 진짜 이럴 줄 몰랐습니다. 도련님뿐만 아니라 폐하까지 검을 딱 뽑으시다니!”
감격한 카르둔은 두 손을 모으고 오징어처럼 흐물거렸다. 물에 푼다면 넓게 풀릴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영 마땅치 않은 라나문은 무시하고 가버렸으나, 카르둔은 라나문이 벗어둔 겉옷을 끌어안고서 졸졸 쫓아오며 계속 말을 시켰다.
“도련님. 도련님. 그러면 이제 대적자가 셋인 걸까요?”
“모르지.”
카르둔과 달리 장본인인 라나문은 오히려 덤덤한 목소리였으나, 카르둔은 라나문이 진짜로 이 일에 아무 관심이 없다면 애초에 그 자리에서 나서지도 않았으리란 걸 알았다.
즉, 라나문은 진짜로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관심이 없는 척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관심은 가지만 호기심을 드러내기 귀찮거나.
“도련님 도련님. 제 생각엔요, 폐하랑 도련님은 운명이에요. 타고난 한 쌍이죠. 하나의 검을 뽑는 하나의 운명! 국서는 도련님 외엔 아무도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죠?”
“글쎄.”
“아니, 진짜 그렇잖아요. 폐하와 한 쌍인 도련님을 두고 누가 감히 국서가 되겠어요?”
라나문은 대꾸하지 않고 침대 근처로 걸어가 윗옷 단추를 풀었다.
그러나 카르둔이 아까 받은 겉옷을 옷걸이에 걸어 놓고 잠옷을 챙기면서도 쉴 새 없이 입을 움직이자, 라나문은 듣다 못해 차갑게 물었다.
“그러면 아이니 황후는. 검 뽑은 사람 둘이 운명이면, 다른 하나는?”
진짜 궁금해서 물었다기보다는 그만 좀 설레발을 치라고 한 말이었다.
그 말은 효과가 있어서 카르둔은 “그야…….” 하고 중얼거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카르둔은 아이니 황후에겐 아예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쪽도 검을 뽑긴 했지만, 다른 남자랑 결혼한 여자, 심지어 외국 황후니까. 당연히 운명으로 얽혀 있느니 어쩌니 할 수 없었다.
할 말이 없어진 카르둔이 이제야 조용해져서 옷장을 뒤적거리자, 라나문은 다시 단추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려 라나문이 하려던 일을 막았다.
“네!”
카르둔이 옷을 내려놓고 문을 열자, 앞에 서 있던 호위가 알려주었다.
“라나문 님. 어떤 자가 라나문 님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라나문은 단추를 풀다 말고서 힐긋 시간을 한 번 쳐다보았다. 저녁 시간이었다. 누군가를 못 만날 시간은 아니지만, 안 친한 타인을 만나기에는 애매한 시간.
그런데 호위는 라나문을 만나러 온 사람을 이름이나 직급으로 알리지 않고 ‘어떤 자’라고 했다. 모르는 사람일 확률이 높단 뜻이었다.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네.”
카르둔이 문을 조금 더 크게 열자, 타리움에서부터 데려온 호위가 작은 쪽지를 내밀었다.
“이걸 도련님께 전해달라 하였습니다.”
카르둔이 쪽지를 받아서 라나문에게 가져다주자, 라나문은 한 손으로는 계속 단추를 끄르면서 다른 한 손으로 쪽지를 펼쳐 내용을 훑었다.
빠르게 내용을 확인한 라나문은 다 본 쪽지를 카르둔에게 건넸다. 별로 표정에 변화는 없으나, 진짜 별 내용이 없다면 자신에게 굳이 보라고 주지 않으리란 걸 알기에, 카르둔은 얼른 라나문이 건넨 쪽지를 받아 펼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르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당장 도련님을 뵙고 싶어 하네요?”
* * *
“어느 쪽?”
라틸은 서넛과 편하게 대화하고 싶어서 일부러 하녀를 부르지 않았다. 시녀는 식사를 가지러 가서 방 안에는 라틸과 서넛 둘뿐이었다.
라틸이 1인용 안락의자에 편안하게 앉으면서 서넛을 보자, 서넛은 라틸이 벗은 겉옷을 챙겨 옷장으로 걸어가다가 눈치 없는 척 되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대적자. 라나문 쪽입니까 아이니 쪽입니까 둘 다입니까.”
“모르겠습니다.”
“라나문이 대적자일 가능성은 있습니까?”
“……있으니 뽑았을 겁니다.”
“그럼 확실한 건 아니네요?”
“네.”
서넛은 겉옷을 옷장에 넣고 문을 닫고 돌아서다가, 라틸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했다. 계속 쳐다보고 있었던지 라틸은 안정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서넛은 입을 꾹 다물었다. 라틸이 무슨 말을 할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럼 라나문이 아직 대적자인지 확실한 거 아니니까. 라나문 공격하고 그러면 안 됩니다, 서넛 경.”
역시나. 라틸이 한 말은 서넛의 예상 그대로였다.
서넛이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어 버리자, 라틸이 재촉하듯 “서넛 경?” 하고 재차 불렀다. 서넛은 결국 마지못해 대답했다.
“대적자란 게 확실해지면 공격해도 됩니까.”
그러나 그렇게 나온 말도 고집이 세게 느껴져서, 라틸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아직 안 됩니다.”
아이니 황후가 대적자란 걸 알게 되었을 때도 죽이는 건 안 내켜서 대적자가 아닌 걸로 몰아가려 했는데. 라나문을 죽이자고?
라틸로서는 달갑지 않았다.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찾는 게 좋지 않은가.
그러나 마지못해 들릴 듯 말 듯 “예.” 하고 대답하는 서넛은 아무리 봐도 영 신뢰가 가지 않는 모습이어서, 라틸은 그 모습을 팔을 괴고 계속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라틸이 그렇게까지 쳐다보자 서넛은 조금 찔리는 듯, 저녁 식사가 언제 완성되나 알아보겠다면서 몸을 일으키더니 서둘러 그 자리를 피했다.
라틸은 서넛이 나간 뒤에도 여전히 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그래도 서넛이 명령을 어기진 않을 거란 생각을 하고서 가까스로 의구심을 접었다.
그러나 라틸의 의심이 맞았다. 서넛은 라나문이 진짜 대적자라면 봐줄 마음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미리 죽여야 한다.’
라나문이 대적자라면 필연적으로 라틸에게 해가 된다. 서넛은 절대로 그걸 주시하고 있을 수 없었다.
라틸의 명령을 어겨서 라틸이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고 해도 라틸을 위해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복도를 걸어가는 서넛의 표정에서는 점점 온기가 빠져나갔고, 나중에는 완전히 얼음장처럼 변했다.
서넛은 그 길로 곧장 라나문이 머무는 방을 찾아갔다.
호위는 서넛이 나타나자 바로 알아보고서 반갑게 불렀다.
“서넛 경!”
“라나문 님께 내가 뵙고 싶어 한다 전해라.”
서넛이 평소와 달리 무미건조하게 대꾸하자 호위는 잠시 ‘서넛 경이 왜 저러지?’ 의아해했으나, 곧 오늘은 큰일이 있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알아서 납득했다.
그러나 호위가 서넛의 딱딱한 말투를 이해한다 해도 함부로 문을 열어줄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서넛 경.
호위의 거절에 서넛이 눈썹을 찌푸렸다. 호위는 정말로 미안해하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서넛 경. 라나문 님이 지금 방에 없으셔서요.”
“없다니?”
“아. 어떤 성기사가 라나문 님을 만나 뵙고 싶다 해서요. 절차가 까다로운데. 그걸 다 밟고 와서까지 뵙고 싶어 하더라고요. 라나문 님께서도 궁금하신지 나가셨습니다.”
“!”
“제가 오셨더라고 전해드릴까요?”
호위는 친절하게 물었으나 서넛은 대답 없이 지나갔다.
“필요 없으시구나.”
뒤에서 호위가 머쓱해져서 중얼거려도 서넛은 돌아보지 않았고, 호위는 괜히 민망해져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 짧은 시간. 서넛은 빠른 속도로 사절단 숙소를 벗어나 밖으로 나갔다. 라나문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 * *
라틸은 설마 서넛이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바로 라나문을 찾아갔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 아이니와 라나문 중 누가 대적자인지, 왜 대적자가 둘인지, 라나문은 자기가 대적자인 걸 알고 있는지 아무것도 확실해진 게 없는데.
이런 상황에서 라나문을 공격하는 건 너무 시기상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진짜 라나문이 대적자라면 뭐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생각에 잠겨 있자니 시녀가 들어와 탁자에 음식을 내려놓고 나갔고, 라틸은 멍하게 그 앞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아직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안 끝난 상태라 입맛이 없었으나, 건강을 위해 뭘 먹기는 해야 했다.
“!”
그러나 숟가락으로 수프를 떠서 입 가까이 가져간 라틸은 이상한 냄새를 맡고 바로 흠칫해서 숟가락을 얼굴에서 멀리했다.
‘뭐지?’
라틸은 숟가락을 얼굴에서 좀 떨어진 거리에 두고 보았다. 은으로 된 숟가락은 변색되지 않았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왜? 무슨 냄새가 분명 나는데?’
라틸은 다시 수프를 코 가까이 가져가 냄새를 맡아보았다.
‘희미한…… 피 냄새. 그런데 이상한 피 냄새가 난다.’
피 냄새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안에 뭔가 평범하지 않은 게 들어 있었다.
라틸은 숟가락을 내려놓자마자 시녀를 부르며 방 밖으로 나갔다.
“루이다!”
시녀는 하녀에게 음식용 수레를 건네면서 당부의 말을 하다가 놀라 돌아보았다.
“네, 폐하.”
카리센의 하녀는 황제가 갑자기 나타나자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라틸은 그 하녀를 차갑게 내려다보았고, 시녀는 라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아니. 음식에 뭔가 섞여 있다.”
“네?”
시녀는 놀라서 활짝 열린 문 너머를 보며 물었다.
“안에 이물질이 들어 있나요?”
“아니. 그보다 더 심각한 거. 독. 아니면 비슷한 거.”
이물질과 독은 전혀 다른 얘기였다. 독 이야기가 나오자 주위에 서 있던 근위병들과 시녀는 물론, 음식 수레를 조리실에서 여기까지 끌고 온 하녀까지 무릎을 꿇었다. 특히 하녀는 낯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라틸은 일어나라 손짓하면서 시녀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 음식은?”
“그게…… 잠시만요.”
시녀는 자기가 사용하는 옆방으로 가더니 샐러드 그릇을 가지고 나왔다.
라틸은 그릇에 코를 대어 보았으니 여기에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수프는?”
“아. 수프. 잠시만요.”
시녀가 다시 수프 그릇을 가져와 건넸고, 라틸은 그걸 코 가까이 가져갔다가 인상을 확 구겼다.
“여기도 들어 있다.”
라틸의 말에 시녀는 놀라서 비틀거렸고, 하녀는 덜덜 떨기 시작했다. 라틸은 근위병들을 돌아보며 빠르게 지시했다.
“다들 음식을 먹지 말고 있으라 전하라. 그리고 타리움 사절단이 받은 수프를 전부 가져와라.”
근위병들은 두 명만이 라틸의 곁에 남았고 나머지는 다른 쪽으로 흩어졌다.
라틸은 곁에 남은 근위병에게 눈으로 카리센 하녀를 가리키며 ‘잡아두라’ 지시하고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탁자 앞으로 돌아간 라틸은 아까 너무 놀라 확인하지 못한 다른 그릇들을 하나하나 확인해보았다.
시녀의 샐러드 접시처럼, 수프를 제외한 다른 음식에는 일단 나쁜 냄새가 없었다.
“누가 한 짓일까요? 카리센 사람일까요? 아니면 이 틈을 탄 다른 나라 사람일까요?”
시녀는 초조하게 라틸의 곁에서 서성거렸다. 자칫 잘못하면 독을 먹을 뻔했다는 데 몹시 화가 난 눈치였다.
잠시 뒤. 라틸의 지시를 들은 사절단 몇 명이 우르르 몰려왔다. 근위병 하나는 그 옆에서 모아온 수프 그릇을 음식용 카트에 담고 끌고 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근위병이 카트를 밀고 라틸의 방 안으로 들어오려는 찰나.
다른 쪽에서 달려온 근위병이 카트와 문틀 사이로 쏙 몸을 날리더니, 새치기해 들어와서는 빠르게 보고했다.
“폐하. 한 팀이 이미 먹었다 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비명 비슷한 게 들려왔다. 라틸은 벌떡 일어나 그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느 방향에서 나는 소리인지 또렷하게 알 수 있었다.
“폐하, 위험합니다!”
“저희가 가겠습니다, 폐하!”
관리와 근위병들은 놀라서 뒤를 쫓아왔으나, 라틸은 이 중에서 이런 쪽으로 가장 안전한 건 자신이란 걸 알기에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 * *
그 사이.
라틸이 붙잡아두라 지시한 하녀는 밖이 조용해지자, 옷 안에서 옷핀을 꺼내어 문고리를 따고 슬쩍 문을 열어보았다.
복도에 아무도 없단 걸 확인한 하녀는 씩 웃고서 밖으로 나와 라트라실 황제가 머무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모아온 수프 그릇들이 수레 위에 잘 놓여 있었다. 편리하게도.
하녀는 히죽 웃고서 카트 안쪽에 넣어 숨겨온 접시를 꺼냈다. 이 내용물만 가져가서 폐기하면, 라트라실 황제가 뭘 어떻게 우겨도 상관없다.
이 안에 든 건 일반 독이 아니라 독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검출할 수 없으니.
그런데 하녀가 그 접시에 수프를 옮겨 담고 있을 때였다. 차가운 손이 뒤에서 나타나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던 하녀는 놀라서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이상하게도 몸이 꼼짝하지 않았다. 당황해서 굳어 있는 그녀의 귓가로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나도 이런 거 좋아해. 뒤에서 나쁜 짓 하는 거. 우리 취미가 같구나.”
“누, 누구…….”
하던 행동이 있어서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그녀는 덜덜 떨면서 누구냐고 입술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입을 꽉 다물어야 했다. 뒤에 선 사람이 숟가락을 집더니, 좀비의 혈액을 넣은 수프를 살짝 떠서 그녀의 입으로 가져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