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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보자고 (259/367)


259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보자고
2022.08.21.


손에 힘을 주자 이전처럼 빡빡한 느낌이 났다. 하지만 힘을 더 주어 잡아당기자, 검은 결국 힘겹게 온전한 자신의 형태를 라틸의 손안에서 드러냈다.

라틸은 검을 한 바퀴 휙휙 돌려보다가 아이니를 향해 방긋 웃었다.


“뽑히는군.”

 

 
아이니는 귓불이 붉어져서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아이니뿐만 아니라 카리센 사람들 역시 얼어붙어서 서로 눈동자만 굴려대고 있었다.

라틸은 그 분위기를 뻔히 느끼면서도 작지 않은 목소리로 혼잣말인 척 중얼거렸다.


“음. 역시 사기 같은데.”

카리센 사람들은 아이니를 제외하면 죄다 못 뽑더니, 타리움 사람인 자신이 뽑으니 바로 뽑히지 않았냐고, 라틸이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자 다른 나라 사절단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리도 해보겠소!”

“진짠가 가짠가 우리도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정말로 카리센에서 수작질을 한 거라면 부끄러워해야 할 겁니다!”

다가 공작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서 라틸과 아이니, 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태연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머리카락과 이마 사이로 파랗게 힘줄이 올라와 있었다.


“우리는 안 되는데?”

“타리움 황제 폐하와 카리센 황후 폐하만 뽑히는 거 아닙니까?”

“사기가 아니라 대적자가 둘 아니오?”

그러나 라틸을 제외하고는, 다른 나라 사절단 그 누구도 검을 뽑지 못했다.

라틸의 등장이 못마땅하긴 하지만 그래도 사기로 몰리는 것보단 낫다 여겨지는지, 아이니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천천히 떴다.


“대적자가 둘이라고?”

“진짜야? 가능해? 전설로는…….”

“전설이니까 중간에 틀린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

“난 사실 그런 전설이 있는 줄도 몰랐어.”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많으면 좋은 거 아냐?”

처음에는 몇몇이 작게 소곤거렸으나, 나중에는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이 소곤거리게 되었고, 그 바람에 주위는 점점 시끄러워졌다.

주위가 시끄러워지자 다들 자기 목소리를 더 크게 내면서 웅성거리는 소음은 끝도 없이 높아져만 갔다.

원하던 대로 아이니가 대적자라는 데서 초점이 비껴나가자, 라틸은 ‘이 정도면 됐나?’ 싶어서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타리움 사절단이 모여앉은 쪽을 보았다.

그런데 라틸이 그쪽으로 돌아가려고 막 한 발을 내디디는 순간. 물끄러미 사태를 지켜보던 라나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라나문은 지금껏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으나, 사람들은 그가 등장했을 때부터 주기적으로 라나문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소란한 가운데에도 라나문이 천천히 일어나서자 주위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라나문이 천천히 무대 중앙으로 나오자, 떠들어대던 사람들도 침묵에 전염된 것처럼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라나문이 사절단 사람들 틈에 묻혀 있어서 얼굴을 보지 못했던 대중들은, 갑자기 나타난 절세미인의 등장에 눈을 비비고 크게 부릅떴다.

먼발치서 라나문을 힐긋대던 카리센의 귀부인들도 라나문이 무대에 올라오면서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되자,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리기 위해 다들 부채를 펼치고 입가를 가렸다.

다가 공작은 얼굴만 반반한 타리움 황제의 후궁이 갑자기 무대 중앙에 등장하고 그것만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앗아가버리자 불쾌해져서 노려보았다.


“저도 한번 뽑아보고 싶군요.”

이 불쾌함은 라나문의 말에 일직선으로 더욱 치솟았다.

이젠 개나 소나 우리를 무시하는가! 다가 공작은 속으로 욕설을 뱉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등장만으로도 큰 호의를 품고 라나문을 보는 상황에서, 그에게만 안 된다고 거절할 수는 없었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 검을 뽑을 수 있다고 해두지 않았던가.

다가 공작은 마지못해 허락했다.


“그러시게.”

라나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대적자의 검을 세워둔 지지대로 걸어가 손잡이를 한 손으로 쥐었다. 그러고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검을 뽑아 버렸다.

‘스르릉’ 하는 맑은 소리가 나며 검이 쑥 뽑히자, 아이니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라틸은 얼결에 물개박수를 쳤다.


“오. 우리 라나문.”

타리움 사절단들도 영문은 몰랐지만 자신들의 황제와 후궁이 대단한 검을 쏙쏙 잘 뽑아대자 좋아서 같이 박수를 쳤다. 뭔 일인진 모르겠지만 좋은 일인 건 분명하니까.

사람들은 라틸이 검을 뽑았을 때보다 더욱 웅성거렸다.


“어떻게 된 거야?”

“셋이나 뽑았잖아?”

“그럼 대적자가 셋이야?”

“설마 그러려고. 둘이야 어찌어찌 늘어났다 쳐도 셋은 좀?”

“셋보다 더 많을 수도 있는 거 아냐?”

“그러니까. 셋이 뽑을 정도면 다른 사람도 찾아보면 더 있을 거 같은데?”

“대적자가 맞긴 해?”

아이니는 가장 첫 번째로 뽑은 데다, 뽑기 전에 다가 공작이 한껏 찬양할 분위기를 만드는 바람에 똑같이 검을 뽑고도 우스운 입장이 되고 말았다.

아이니는 표정을 침착하게 관리했으나 마음은 폭풍우 치는 밤바다에 홀로 둥둥 떠다니는 부표처럼 들썩였다. 라틸이 이 상황을 의도한 건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이 교묘한 순서 배치가 의심스러웠다.

그녀는 하얀 눈으로 라틸을 흘겨보았다. 그러나 라틸은 아이니 쪽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아이니에 대해선 신경 쓸 것도 없다는 듯 자신의 후궁만을 보고 있었다. 입가에는 사랑이 가득 담긴 미소를 띤 채.

그러나 아이니가 라틸을 좀 더 가까이서 보았더라면, 입은 웃고 있으나 눈꺼풀에 힘이 들어갔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된 거지?’

처음에는 라나문도 검을 뽑자 잘됐다 싶어서 그저 웃고 있다가, 뒤늦게 라틸도 깨달아버린 것이다. 이 상황의 이상함을.

왜 로드인 자신이 ‘대적자의 검’을 뽑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라틸 자신은 로드여서 뽑았다. 아이니는 대적자여서 뽑았다. 그러면 라나문은?


‘라나문은 어떻게 뽑았지?’

슬금슬금 불안함이 척추를 타고 올라와 목 뒤를 콕 찔렀다. 라틸은 ‘드드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어색하게 고개를 돌려 타리움 사절단 사이에 끼어 있는 서넛을 보았다.

서넛은 온기 한 톨 느껴지지 않는 스산한 눈으로 라나문을 보고 있었다.


“폐하.”

라나문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라틸은 서넛에게서 시선을 돌려 라나문을 보았다. 라나문은 뽑을 검을 들고 라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분위기를 타고 나와서 뽑긴 했는데. 도로 꼽아두면 되는 겁니까.”

다가온 그가 물었고 라틸은 “그렇지 않을까.” 하고 대답하다가, 일부러 손을 뻗어서 그와 손이 닿도록 검을 옮겨 들었다.

라나문은 개의치 않고 라틸에게 검을 넘겨주었다. 라틸을 로드로 여기는 태도는 아니었고, 검을 함께 들고 있어도 뭔가 다른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다.

라틸은 검을 검집에 도로 집어넣고서 라나문에게 한 번 미소 지어준 뒤 아이니 쪽을 보았다. 라나문에 대한 일도 알아봐야 하지만, 우선 당장은 아이니부터 해결해야 하니까.

아이니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서 우두커니 서 있다가 라틸과 시선이 맞자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놀랍다는 투로 말했다.


“세 사람이나 검을 뽑다니. 신기하군요. 어쩌면 이번 세대는 대적자가 세 명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녀는 영광을 나누어서라도 자신이 대적자라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고 있었다.

그러나 라틸은 아이니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대신 “음.” 하고 이마를 긁적이며 일부러 자신 없는 목소리를 냈다.


“글쎄요. 난 내가 대적자가 아니라 생각해서요, 아이니 황후. 혹시 검이 가짜는 아닐까요?”

“!”

“한 명밖에 없다는 대적자가 셋이라니. 이상하잖아요.”

설마 라틸이 자기 자신까지 가짜 취급을 하면서 자신을 공격할 줄 몰랐던 아이니는 당황한 듯 내내 잘 관리하던 표정이 흐트러졌다. 그녀의 멍한 시선이 라틸에게 닿았다.

희미하게 미안한 감정이 올라오는 걸 모른 척하며 라틸은 악의가 없는 척 방긋 웃기만 했다.


“이런 건 확실하게 해야 하니까.”

 

* * *

라틸이 두고 갈지 데려갈지, 말하고 갈지 그냥 갈지 고민했던 기르골은 지금 카리센에 있었다.

심지어 그는 사건이 벌어지는 바로 그 단상 아래, 다닥다닥 늘어선 사람들 사이에 서서 위에서 사태를 그대로 지켜보고 있었다.


‘희한하긴 하군.’

모자를 푹 눌러써 얼굴을 가린 그는 고개를 기웃하며, 돌아가는 상황을 호기심 어린 눈길로 구경했다.


‘제자님은 로드라 치고. 왜 둘일까.’

공교롭게도 검을 뽑은 아이니와 라나문 모두, 지금까지의 대적자들에 비해 정의감이 부족한 편이다. 이런 점과도 관련이 있는 걸까?

* * *



“굉장하십니다, 폐하!”

“우리 라나문 님도 참으로 장하십니다!”

“두 분이 우리 타리움의 보배입니다.”

“그자들, 그 카리센 작자들 표정 굳어지는 거. 보셨습니까?”

난데없는 라틸과 라나문의 개입으로 영광스러워야 할 자리가 어영부영 엎어진 뒤. 라틸은 타리움 사절단을 데리고 궁전으로 돌아갔다.

넓은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타리움 사절단은 있지도 않은 악기를 두드리는 분위기였다. 누군가 북을 건넸다면 분명 다들 두드렸을 것이다.

아이니 황후가 라틸에게 공개적인 사과를 청하지 않았더라면 이 정도로 기뻐하진 않았겠으나, 라틸과 라나문이 나서서 검을 뽑아버린 건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카리센 사람들에게 공공의 적 취급을 받는 와중이었다.

그럴 때 나서서 검을 한 번 뽑고, 이어서 두 번 뽑기까지 해버리자 카리센 사람들의 적의는 쏙 들어갔고 자존심은 뭉텅 꺾인 반면, 타리움은 허파가 자부심으로 꽉꽉 차오르게 된 것이다.

황제와 후궁이 대적자이냐 마느냐 하는 건 그들에겐 당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일단 라틸이 나서서 ‘나도 대적자고 내 후궁도 대적자다’고 주장한 게 아니라 ‘이 검 가짜 아닌가’라고 말해버렸으니까.

반면 카리센은 분위기가 황당한 분노로 침체되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공작님?”

“황후 폐하가 대적자인 줄 알았는데. 저 검이 가짜였던 겁니까?”

“이게 무슨 망신입니까. 이럴 줄 알았다면 다른 나라 사람들은 부르지 않았을 겁니다.”

“대적자가 세 명일 수는 있는 건가요?”

귀족들이 달라붙어서 다가 공작에게 먹이를 요구하는 새끼 새들처럼 쪼아대자, 다가 공작은 참다못해 언성을 높였다.


“진정들 하시오!”

귀족들이 조용해지자, 다가 공작은 이를 부드득 갈고서 복도 너머, 타리움 사절단들이 걸어간 방향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대적자는 우리 아이니 황후 하나뿐입니다.”

“하지만 검을 세 명이 뽑았는데-.”

“무슨 상관이오! 검을 몇 명이 뽑든, 검은 다 하난데!”

“!”

“그리고 그 하나뿐인 검은 우리 카리센에 있지. 그러면 우리 아이니 황후가 대적자인 겁니다. 알았습니까?”

“그 검이 진짜는 맞는 겁니까?”

조심스럽게 물어본 귀족은, 다가 공작이 죽여버릴 기세로 호랑이처럼 쳐다보자 얼른 눈을 내리깔고 다른 귀족 뒤로 몸을 숨겼다.

다가 공작은 주먹을 꽉 쥐고서 성큼성큼 그 멍청이들 사이를 지나쳐 인적이 드문 곳까지 걸어갔다. 그 뒤는 공작의 최측근 몇 명만이 따라붙었다.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곳에 도착하자, 다가 공작은 그제서야 멈춰서서는 확 돌아서며 그의 오른팔과 같은 미셜 후작에게 지시했다.


“전에 지하 감옥에서 빼돌린 좀비 혈액량이 어느 정도이지?”

“그렇게 많진 않습니다, 공작님.”

“타리움 사절단이 먹는 식사에 조금씩 섞어 보내라.”

“!”

다가 공작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무섭게 눈을 빛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한번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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