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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화. 나도 해봐도 되나? (258/367)


258화. 나도 해봐도 되나?
2022.08.17.


라틸은 황당해서 “어?” 하고 되물었다.


“조금 전에 내가 네 방 앞에 갔었거든? 그런데 문을 두드려도 안 나온 건 너였거든? 근데 왜 갑자기 내가 널 버리고 간 것처럼 말하지?”

말하다 보니 조금 열이 받아서, 라틸은 클라인의 귀에 대고서 목소리를 평소보다 두 배로 내리깔았다.


“심지어 하렘 열쇠까지 들고 도망갔으면서?”

찔리는 게 많은 듯 클라인은 어색하게 웃더니,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라틸에게 내밀었다.


“이걸 가져가야 따라오실 거 같아서…….”

“…….”

“옷을 벗고 있어서…… 입는 사이에 가버리실 줄은…… 빨리 입는다고 입었는데…….”

라틸이 빤히 보면 볼수록 클라인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어갔다. 하지만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더니. 완전히 작아진 목소리는 거의 안 들릴 정도로 작아지자, 갑자기 되살아났다.


“저 안 보고 싶으셨습니까?”

목소리는 커졌지만, 여기서 라틸이 ‘아니’라고 말하면 큰 충격을 받을 얼굴이었다. 물론 안 보고 싶던 게 아니니 ‘아니’라고 대답하진 않겠지만.

그러고 보니 하이신스가 동생이 술고래가 됐다 했던가. 이제야 눈치챘는데 술 냄새도 좀 나고 있다. 그럼 지금은 술주정 부리는 건가?

라틸은 술에 취한 건지 평소보다 흐릿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클라인을 빤히 보다가 그에게 물어보았다.


“클라인. 라나문이 누구야?”

“재수 없는 족제비요.”

“칼라인은 누구고?”

“재수 없는 용병이요.”

“대신관은?”

“재수 없는 착한 놈이요.”

“그럼 나는?”

“나쁜 사람.”

“!”

취한 게 맞는지, 라틸을 바라보던 파란 눈동자가 점점 은색 속눈썹에 덮여가더니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묵직해지자, 뒤에서 따라온 악시안이 황급히 다가와 사과했다.


“제가 안겠습니다. 무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폐하.”

라틸이 클라인을 건네주자 악시안은 얼른 그를 안고서 재차 사과했다.


“무례하게 굴어 죄송합니다. 여기 온 후로 한숨도 못 주무셨습니다. 지금은 아마 술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실 겁니다.”

라틸은 괜찮다고 말하는 대신 손을 뻗어서 클라인의 이마부터 시작해 은색 머리카락을 한 번에 쓸어 올렸다. 단정한 이마가 살짝 구겨졌다 펴지는 모습조차 그는 아름다웠다.

완전히 잠에 취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라틸은 클라인을 도로 데려가라고 악시안에게 지시하며 말했다.


“술 좀 그만 마시라 해라. 내일 낮에는 아이니 황후가 뭘 한다니까 시간이 없을 거고. 저녁쯤에 술 깨서 오라고 해.”

“예, 폐하.”

 

* * *

다음날.

카리센 수도의 대광장에 사람들이 우글우글 모여들었다. 그중엔 귀족도, 귀족이 아닌 사람들도 있었고, 나이도 옷차림도 모두 각양각색이었다.

대광장의 높은 단상 중앙에는 대적자의 검이 세워졌고, 그보다 한 단 낮은 곳에는 타리움의 고위 귀족들이 한 무리를, 카리센에서 온 사절단이 한 무리를, 다른 나라에서 온 사절단들이 또 각기 한 무리씩 이루어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이미 대적자의 검에 관해 다 듣고 왔는지 자기들끼리 모여 수군거리느라 바빴다.


“저게 대적자의 검이래.”

“로드를 물리치는…….”

“저게 있으면 악을 없앤대.”

“좀비 같은 거?”

“좀비 같은 걸 부리는 사람이 있나 봐.”

외국에서 온 사절단들 역시 호기심을 보이고 있었는데, 특히 몇몇 나라들은 괴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터라 꽤 진지하게 사태를 바라보았다.

라틸은 이 모든 광경을 한 발 떨어진 시선으로 보다가 서넛에게 작게 말했다.


“이 정도로 소문났다면 대적자를 편드는 다른 성기사단에서도 주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 저도 사람들을 살피겠습니다.”

“어? 보는 것만으로 성기사를 알 수 있습니까?”

“아니요. 하지만 행동이 수상할 수도 있으니까요”

라틸은 끄덕이고서 힐긋 하이신스를 보았다.

하이신스는 가장 높은 단상에서, 아이니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시선을 느낀 듯 라틸을 보더니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신스도 참 입장이 곤란하겠네.’

 

* * *

약 30분 정도가 지나자 엄숙하게 차려입은 중년 남자가 단상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사람들은 그 남자가 중앙으로 와 서자 동시에 조용해졌다.

남자는 그런 현상이 당연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다가, 하이신스 쪽을 향해 한번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이번엔 라틸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했다.

라틸이 고개를 끄덕여 화답하자, 남자는 다시 대중 쪽을 보더니 한 손으로 대적자의 검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미 며칠 전부터 공고가 붙어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이게 바로 전설 속의 ‘대적자의 검’입니다.”

서넛이 라틸에게 작게 물었다.


“저거 진짜일까요?”

“글쎄요.”

라틸은 두루뭉술하게 대답했으나, 사실은 답을 알고 있었다.


‘기르골이 대적자의 검을 아이니에게 줬다 했으니, 아마 진품일 거야.’

“이 검의 주인은 영광스러운 우리 카리센의 아이니 황후 폐하시지만…….”

사람들이 지나치게 환호하자, 남자는 좀 진정이 되길 기다렸다가 소리가 잦아들자 다시 말을 이었다.


“못 믿는 사람도 많겠죠. 그래서 특별히 국민 여러분과 외빈 여러분을 모신 가운데, 원하는 사람 모두에게 직접 검을 뽑아볼 기회를 주겠습니다.”

이 얘기는 공고에 안 붙었던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라틸은 공고를 본 건 아니었으나 이미 짐작했던 일이기에 무덤덤하게 사태를 지켜보았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 줄을 서서 올라와 검을 뽑아보십시오. 이 다가 공작의 명예를 걸고, 누구에게든 기회를 허락하겠습니다.”

다가 공작이 옆으로 물러났으나, 국민들은 귀족과 왕족, 외빈들이 모여 있는 단상에 올라갈 염두가 나지 않는지 웅성거리기만 할 뿐 나서지 못했다.

라틸 역시 나서지 않고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이런 가운데 가장 처음 나선 건 카리센의 귀족 청년이었다.


“제가 뽑아봐도 되겠습니까?”

그 청년은 반쯤은 장난인 듯 실실 웃으면서 단상으로 올라왔고, 사람들은 그 용기에 괜히 박수를 쳤다. 거의 축제 분위기나 다름없었다.

귀족 청년은 계속 히죽히죽 웃으면서 검 앞까지 다가가서는 손잡이를 꼭 잡고 당겼다.

그러나 검은 뽑히지 않았다.


“와.”

청년은 신기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활짝 웃으면서 손잡이를 놓았다.

그러고는 친구들 쪽으로 다가가며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뭐라 말했는데, ‘진짜 신기하다’는 뉘앙스 같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청년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서 검을 뽑으려 했으나 역시 검은 검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다른 귀족들이 나서도 마찬가지이자, 보다 못한 덩치 좋은 평민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특히 용병으로 추정되는, 근육이 올록볼록하고 키가 커다란 사람이 나서자 사람들은 괜히 기대해서 “와아아!” 하고 환호했다.

그러나 그 덩치 큰 사람이 힘을 주어도 검은 역시 검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힘센 사람은 검집을 지지대에서 뽑아 허공에 휘두르는 꼴이 되었다.


‘그 기르골이 못 뽑았을 정도이니 힘으론 절대 안 되지.’

라틸은 이 모든 게 헛수고라 생각하기에 상황을 덤덤히 지켜보다가, 힐긋 타리움 사람들을 보았다.

타리움 사절단들도 다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신기하겠지.’

그런데 단 한 명. 라나문만이 유일하게 미간을 찡그린 채 검을 보고 있었다. 이곳에 오는 길에 가끔 마차 창밖을 바라보면서 짓던 그 표정으로.


‘왜 저러지?’

그 모습에 잠시 정신을 빼앗겼는데, 갑자기 어마어마한 환호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사람들이 다 포기하고 내려간 무대 중앙으로 아이니가 홀로 걸어가고 있었다.

맵시 나는 노란 드레스 차림으로 사뿐사뿐 걸어가는 아이니는 마치 숲의 요정처럼 보였다.

그러다 검을 뽑기 위해 모인 이들 중 가장 가녀린 체구의 아이니가 대번에 검집에서 검을 뽑아내자, 환호 소리는 거의 광장 단상이 통째로 쓸려갈 것처럼 커졌다.


 
라틸은 순간 너무 시끄러워서 귀를 막았다가 예의가 아닐 듯해 얼른 손을 도로 내렸으나, 너무 시끄러워서 표정을 펴기가 어려웠다.

반면 다가 공작은 딸이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다른 카리센의 귀족들 역시 자기들의 황후가 대적자의 검을 뽑았다는 게 영광인 듯 밝은 얼굴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아이니가 검을 검집에 다시 넣고 제자리로 돌아가자, 다가 공작은 웃으면서 무대 중앙으로 나와서는 사람들을 둘러보다 외쳤다.


“잘 보셨습니까? 보셨다시피 이 검을 뽑을 수 있는 건 오로지 단 하나. 대적자뿐이지요. 그리고 그건 우리 ‘카리센’의 황후 폐하십니다!”

‘카리센’을 강조하는 말에 국민들은 환호했고, 귀족들도 뿌듯해했다.

외국에서 온 사절단은 조금 웅성거렸다. 분위기는 최고조로 달하고 있었다.


‘아직.’

그러나 라틸은 여전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아이니가 라틸 쪽을 보더니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라틸이 있는 곳은 무대 중앙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두 번째로 높은 단이라, 사람들의 시선은 금세 집중되었다.

라틸은 생글생글 웃고 있다가 아이니가 가까이 오자 진심인 척 칭찬했다


“멋지군요. 대단한 광경을 보여줘서 고맙습니다.”

그러나 아이니는 여기에 칭찬 한마디를 들으려고 온 게 아니었다.


“고맙군요.”

다가온 그녀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사람들이 이쪽을 집중한단 걸 확인하자 목소리를 한 톤 높이며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하지만 칭찬보다 먼저 사과를 해주셨으면 하는데.”

라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과라니요? 내가 말인가요?”

“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이니는 라틸을 서늘하게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직접 하신 말은 아니라지만, 폐하가 데리고 있는 성기사가 절 가짜로 몰아가는 발표를 했지요. 아이니 황후는 ‘절대로’ 대적자가 아니다……라고. 백화랑술의 성기사단장 백화 말입니다.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아, 그건…….”

“그 사람은 너무 먼 곳에 있어 당장 사과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아랫사람이 한 일은 윗사람의 책임. 부디 폐하께서 그자를 대신해 제게 사과해 주셔서 넓은 아량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그 말이 끝나자 카리센의 국민들은 방금 전까지 까맣게 잊었던 일이면서, 평생 그 일만 생각하고 산 것처럼 갑자기 화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라틸이 자기들 앞에서 자기들 황후를 앞장서 모욕하기라도 한 것처럼 험악한 분위기로 라틸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귀족들 역시 차갑게 타리움 사절단 쪽을 쳐다보는데, 계란이 있으면 당장 쥐고 던질 분위기였다.

이를 지켜보던 하이신스는 눈썹을 찌푸리고 일어서며 됐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한발 앞서 라틸이 생글 웃으며 일어섰다.


“뭐 어렵겠습니까.”

서넛은 그 표정이, 라틸이 틀라를 처형시키라 할 때 나온 표정임을 눈치채고 흠칫했다.

서넛 외에도 몇몇 타리움 귀족들도 그 표정을 알아보고서 자기들끼리 눈치를 살폈다.

반면 이를 알 리 없기에, 카리센 사람들은 더욱 기분 나빠하며 수군거렸다.


“괜히 멀쩡한 척하려 웃는 거 봐.”

“웃으면서 우리 황후 폐하를 모욕한 걸 넘기려는 거지.”

“타리움 놈들, 옛날부터 비겁해서 마음에 안 들었어.”

분위기가 몹시 험악했으나 라틸은 태연하게 오히려 무대 중앙으로 나아갔다.

아이니는 설마 라틸이 갑자기 무대 중앙에 가버릴 줄 몰랐던지 얼결에 따라가면서 꺼림칙해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도 라틸이 뭘 하려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라틸은 두 팔을 벌리면서 물었다.


“사과는 언제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그 전에, 나도 이 검. 뽑아봐도 되겠습니까?”

질문이지만 다가 공작의 목소리만큼이나 컸다. 아이니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폐하께서요?”

그녀는 사실, 사디가 죽지 않아서 라틸이 무대 중앙에 가면 어디서 툭 튀어나올 줄 알았다. 사디라면 검을 뽑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황제 본인이 직접 뽑겠다니.

다가 공작을 비롯해 카리센 사람들도 비웃어대자, 타리움의 귀족들은 발끈해서 덩달아 일어섰다.

그래도 라틸은 여전히 태연하게 말했다.


“검을 뽑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전부 카리센 사람들 아닙니까. 이쪽에서도 뽑아봐야 공정하지 않을까요?”

도발하는 목소리는 절대로 작지 않아서, 다가 공작은 옆에서 이야기를 듣다가 얼굴이 굳어 따졌다.


“지금 타리움의 폐하께선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한패가 되어서 폐하를 속인단 겁니까.”

“설마.”

라틸은 절대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으나, 덧붙이는 말은 놀리는 건지 자랑인지 알기 힘들었다.


“다만, 작은 가능성도 확실하게 점검하는 세심한 성품이라.”

라틸이 미소짓자, 카리센 사람들은 더 기분이 나빠 흥분했다. 신분의 고하를 떠나, 모두가 저 황제의 말에 분노했다.

아이니는 그런 라틸을 ‘애쓴다’는 표정으로 보다가 덤덤히 허락했다.


“그러면 해보시지요.”

“그럴까요?”

라틸은 웃고서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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