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저 안 보고 싶으셨습니까?
(257/367)
257화. 저 안 보고 싶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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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화. 저 안 보고 싶으셨습니까?
2022.08.14.
분명 아닌 게 아닌 얼굴인데. 라나문은 바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치곤 표정 변화가 확실한데.”
“그냥 느낌이 이상해서요.”
“첫눈에 반했다던가 그런 거면 돌아갈 땐 내 마차에 올라오지도 못하게 하겠다.”
라나문이 무어라 반박하려는 찰나. 이번에는 아이니 쪽이 라나문을 보더니 고개를 기웃했다.
그 움직임 역시 작지 않아서 이번에는 하이신스가 그녀에게 “왜 그러시오?” 하고 물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이니 역시 고개를 기웃하며 “아닙니다.” 하고 대답할 뿐. 둘 다 서로 아는 사이라고 하진 않았다.
라틸은 라나문과 아이니를 번갈아 보았다. 뭐지. 수상한데. 하지만 이런 데서 ‘너 카리센 황후랑 진짜 모르는 사이 맞아?’라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 사이, 아이니가 어느새 바로 앞으로 다가와 라틸에게 말을 걸었다.
“제가 검 뽑는 걸 보러 여기까지 직접 와주시다니. 영광입니다, 황제 폐하.”
“부담가질 필요 없습니다. 내 후궁이 여기 와 있어서…… 잡으러 온 이유가 더 크거든요.”
라틸은 아이니가 방심하도록 일부러 클라인 핑계를 대면서, 클라인의 방으로 추정되는 창문들을 한 번 주룩 훑었다. 날아간 후궁을 뒤쫓아 온 탐욕스러운 황제 같은 표정도 열심히 지어보면서.
옆에서 라나문이 깜짝 놀라 이상한 소리를 내긴 했으나, 다행히 아이니는 덤덤하게 “그렇군요.” 하고 중얼거렸다.
라틸은 방긋 웃으면서 그녀와 오랜 친구 사이인 것처럼 다정하고 친절한 목소리를 냈다.
“황후. 그대가 꼭 검을 뽑을 수 있길 기대합니다. 인류를 위해서.”
아이니는 라틸의 말을 한 번 따라서 읊조렸다.
“인류를 위해서.”
이어서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칼라인이 근처에 없어서인가. 그래도 전에 왔을 때보다는 한결 침착해 보였다.
라틸도 그녀에게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이고서, 하이신스에게 타리움 사절들이 머물 방을 알려달라 청했다.
* * *
방을 안내받은 뒤, 라틸은 데려온 하녀들이 짐을 풀고 방을 정리할 동안 클라인을 찾기 위해 복도로 나갔다. 뒤를 따르는 건 서넛 한 사람이었다.
라틸은 타리움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복도를 걸어가다가, 주위에 사람들이 없자 서넛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서넛 경은 내일 아이니 황후가 제대로 검을 뽑을 것 같습니까?”
“자신이 있으니 사람들을 불렀을 거라 생각합니다.”
“서넛 경은 아이니 황후가 검을 뽑았으면 좋겠습니까?”
“네.”
“왜요?”
“대적자란 뜻이니까요.”
“대적자를 빨리 찾고 싶습니까?”
“네.”
“왜요?”
“빨리 죽일 수 있으니까요.”
라틸은 서넛과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하며 걸어가다가, 서넛이 아무렇지 않게 던진 섬뜩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틸은 서넛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서넛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보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폐하를 위해선 대적자가 없어야 합니다.”
“둘 다 살 방법은 없습니까?”
“항상 우리가 먼저 죽었습니다. 찾을 시간도 없었습니다.”
“하긴.”
“폐하는 아이니 황후를 살리고 싶으신가 봅니다.”
“내가 죽게 생겼으면 죽일 겁니다. 근데 살릴 수 있으면 살리면 좋죠.”
“너무 안 말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말랑한 게 아니라-.”
현실적인 거라고 대답을 하려다가 라틸은 입을 다물었다. 멀지 않은 곳에 사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계단을 하나 내려가 보니, 바로 아래층 복도에 역시나.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지나가는 사람은…….
“저거 신관 복장 아닙니까.”
“맞습니다.”
신관복을 입고 있었는데, 신관복의 디테일을 살펴보니 고위 신관 같았다.
“대적자의 검 뽑는 일로 불렀을까요?”
“모르겠습니다.”
라틸은 서넛에게 소곤소곤 물어보다가 슬그머니 계단에서 내려가보았다. 그러다 계단을 반 정도 내려왔을 즈음. 라틸은 아주 오랜만에 상대의 속마음을 읽었다.
[괜찮아. 평소 하던 대로 연기하면 된다. 공작님 명령으로 온 거고. 하나도 꿇릴 거 없어. 난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상대가 바짝 긴장한 터라, 힘이 약해진 상태에서도 속마음이 들린 모양이었다. 아니, 그보다 내용이 뭐 이따위지? 라틸은 눈살을 구겼다.
“왜 그러십니까?”
“저자. 가짭니다, 서넛 경.”
라틸이 상대의 속마음을 읽는 줄 모르는 서넛은 ‘진짜?’ 하는 표정으로 라틸을 보았다. 그러나 라틸은 로드이니 뭔가 비장의 수가 있다고 여기는 듯 심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럼 어쩌지요.”
“모르겠습니다. 뭐 때문에 온 지를 봐야-.”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말하면서 고위 신관을 슬그머니 뒤따라가던 라틸은, 복도 반대편에서 아이니가 시녀들을 데리고 신관 쪽으로 다가가는 걸 보았다.
신관은 자기 뒤쪽 위 계단에 선 라틸을 보지 못했으나, 신관에게 다가가던 아이니는 라틸을 제대로 보았다.
하지만 찔리는 행동을 하는 건 아닌지, 아이니는 라틸을 향해 가볍게 인사했을 뿐 허둥대지 않았다.
“이쪽으로 오게.”
“예, 황후 폐하.”
아이니가 가짜를 데리고서 어딘가로 가는 모습을, 라틸은 난간에 기댄 채 물끄러미 구경했다.
왜 가짜를 데려가는진 모르겠지만 저걸로 대적자의 검을 어떻게 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면 사실 라틸과는 별 상관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속마음을 들어보니, 저 가짜는 공작의 명령으로 누군가를 속이려는 눈치였지, 아이니와 한패가 아니었으니까,그러면 저 가짜 고위 신관이 속이려는 건 아이니인가?
라틸이 생각을 하느라 제자리에 서 있기만 하자, 서넛이 “폐하.” 하고 작게 불렀다
라틸은 거기까지 생각을 하자 더 고민하길 멈추고 계단을 내려가며 아이니를 불렀다.
“아이니 황후.”
“무슨 일이지요?”
아이니는 고위 신관을 데려가다가, 라틸이 아주 작게 불렀는데도 바로 돌아서며 물었다. 라틸은 손가락으로 고위 신관을 가리키며 히죽 웃었다.
“가짜 같은데요. 왜 데려가는진 모르겠지만.”
라틸로서는 충동에 가까울 정도로 발휘한 호의였다. 5분도 되기 전 서넛과 아이니를 죽일 거냐 말 거냐 말한 사람이 발휘할 수 있는 선에서는 꽤 큰 호의.
그러나 아이니는 라틸이 헤움을 죽이라 명한 일로 이미 라틸을 강하게 불신하고 있었다.
“가짜?”
아이니는 잠시 라틸의 말을 되풀이하고는, 곧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은 것처럼 웃었다. 그 모습은 여전히 기품이 있었으나 상대에 대한 불신이 웃음에서부터 뚝뚝 떨어졌다.
아이니는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 험한 소리를 할 만큼 정신력이 뭉개지진 않았는지, 라틸의 앞까지 다가와 조곤조곤하게 물었다.
“나도 헤움처럼 죽기를 바라시나 봅니다, 타리움의 폐하께서는.”
아주 찰나 라틸을 무시무시한 눈으로 쳐다본 아이니는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갔다.
가짜 고위 신관은 라틸 쪽을 한 번 힐긋 보면서 ‘저 황제가 어떻게 알았지?’라고 생각했지만, 아이니가 라틸의 말을 듣지 않고 가자 낄낄 속으로 웃으면서 따라갔다.
“거기 일이 여기에 영향을 미치네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습니다, 폐하.”
“아닙니다.”
라틸은 혀를 차고서 돌아섰다.
* * *
“라트라실 황제가 한 말은 너무 마음에 안 담아두길 바라네.”
아이니 황후의 인자한 말에 가짜 고위 신관은 괜찮다고 소탈하게 웃었다.
속으로는 진땀이 났지만, 다행히 그를 가짜라 여긴 이는 그 황제 하나뿐인 듯했다. 대체 무슨 수로 자신이 가짜란 걸 알아봤는진 모르겠지만.
그는 신전에서 실제로 몇 년간 견습 생활을 하다가 뛰쳐나온 것이라, 제법 신관 흉내를 잘 냈던 것이다. 이 사기꾼은 아직 한 번도 사기 치다가 걸린 적이 없었다.
황후의 서재에 들어서자, 사기꾼 신관은 아까보다는 좀 더 허리를 펴고서 물었다.
“공작님이 말씀하시길, 황후 폐하께서 몇 가지 질문을 할 테니 거기에 제대로 대답하라 하셨습니다.”
아이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기꾼 신관이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서 물었다.
“물어보시지요, 황후 폐하.”
아이니는 목 언저리를 손으로 짚으며 물었다.
“나한테 혹시 이상한 게 씌었나?”
“이상한 거라니요?”
“그걸 내가 묻는 거네.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으니, 하여튼 이상한 게 씌인 건 아닌지.”
사기꾼인 고위 신관은 다가 공작이 한 말을 떠올렸다. 다가 공작은 아이니 황후가 자신에게 이상이 있는지 묻거든, 다 멀쩡하다고 말해주라 했다. 그러면 된다고.
“겉으로 보기엔 괜찮지만……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시킨 대로 아이니를 살피는 시늉을 하다가 다가 공작의 뜻을 그대로 따랐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황후 폐하.”
이후 사기꾼은 황후에게 큰돈을 한 번, 한 시녀를 통해 다가 공작에게 한 번, 이렇게 두 배로 받은 다음 히죽히죽 웃으면서 황후의 방 밖으로 나갔다.
이제 그는 몇 년 동안 어디 다른 나라로 가서 지내면 될 거였고, 이후에 다시 돌아왔을 땐 모든 게 정리되어 있을 것이었다.
비록 그의 사기 행각이 사회에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하고 이대로 끝이라 하더라도, 돌아올 때면 최소 공기는 맑아져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신이 나서 걸어가던 가짜 고위 신관은 아까 그를 향해 ‘가짜’라고 대놓고 말했던 타리움의 황제를 다시 마주치고서 움찔했다.
무슨 수로 타리움 황제가 아무도 알아본 적 없는 그의 사기행각을 알아냈는진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리 좋지 않은 상대였다.
그래도 억지로 미소를 지으면서 인사를 하고 있자니, 계단 위에 서서 두 팔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황제가 갑자기 싱글 웃으면서 말했다.
“자꾸 사칭하는 거 안 좋다.”
사기꾼은 꾸벅 인사를 하면서 지나가려다가 “네?” 하고 되물었다.
황제는 아까보다 좀 더 맑게 웃으면서 알려주었다.
“자꾸 사기 치는 거 안 좋다고. 나이멀리.”
어떻게 내 본명을……? 사기를 칠 때 늘 가명을 쓰는 가짜 신관은 당황해서 황제를 보았으나, 황제는 그새 다른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가짜 신관은 괜히 오싹해져서 서둘러 그 자리를 피했다.
* * *
그 시각.
클라인은 이 옷을 입었다 벗었다 걸쳤다 도로 벗길 반복하면서, 벌써 두 시간 째 한 자리에 머무르질 못하고 있었다.
바닐이 달려와서 ‘타리움 사절단에 폐하께서 포함되어 있다’라고 알려준 탓이었다. 클라인은 자기가 가져온 열쇠가 큰 효과를 발휘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기쁘기도 잠시. 그는 라틸이 떻게 나올지를 모르다 보니, 겁이 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바닐. 폐하가 화를 내실까?”
“안 내실 거라 생각하셨어요?”
“많이 내진 않으시겠지?”
“일단 옷부터 입으세요.”
“폐하가 나더러 꺼지라면 어떡하지?”
“뭘 어떡해요, 카리센에서 꺼지면 타리움에 가는 거죠.”
“그런가?”
“일단 옷 입으시라니까요.”
그러나 이 허둥거림이 끝나기 전. 먼저 라틸이 도착했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공포스럽게 울렸다.
“전하. 타리움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클라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허둥거렸다. 오라고 열쇠를 들고 왔지만 진짜 올 줄은 몰랐다 보니 난감했다.
“전하! 옷 입으시고요!”
바닐은 문으로 달려가려는 클라인을 붙잡았고, 둘은 서둘러 화사한 옷을 차려입었다. 클라인은 거울 속에 완벽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자, 그제야 허둥거리던 걸 멈추고 우아하게 걸어가 문을 열었다.
하지만 황제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폐하는?”
클라인이 당황해 묻자 근위병은 황제가 기다리다가 돌아갔다고 말했고, 클라인은 그 말을 듣자마자 높은 신분 손님들이 사용하는 층을 향해 황급히 뛰기 시작했다.
악시안이 쫓아오지도 못할 정도로 빠르게 달려간 그는 마침내 문을 열고 자기 침실로 들어가려는 황제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더욱 속도를 내어 뛰다가, 황제가 방에 들어가려는 순간. 문틈을 거의 가로막듯이 섰다.
황제가 쳐다보자 그는 숨을 헐떡이며 울상을 지었다.
“저 안 보고 싶으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