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6화. 이젠 널 봐도 아프지 않다 (256/367)


256화. 이젠 널 봐도 아프지 않다
2022.08.10.


기르골이 도미스의 양부를 죽여주겠다고 했던가? 하여튼 그런 말을 하길래 진짜 죽여주는 줄 알았는데. 조금 아쉽다.


‘기르골. 공수표를 날리다니.’

역시 아무리 기르골이라고 해도 그 정도로 미치진 않은 건가? 하긴. 그 양부가 도미스를 지독히도 괴롭혔지만 기르골을 괴롭힌 건 아니지. 계속 돌아다녔으니 일행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테고.

어쩌면 도미스보다 양부와 더 친했을지도 몰라. 가능성은 적어 보이지만 당시에는.


‘어쨌든 내가 본 기억은 양부한테 욕먹고 맞은 기억밖에 없어서 그런가. 기르골이 진짜로 죽여줘도 별로 충격은 안 받을 거 같아. 이미 지나간 일이니 내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되겠지만.’

그런데 도미스는 기르골과 대체 왜 틀어진 걸까? 싸움은 맨날 칼라인이랑 했는데. 왜 틀어지기는 기르골이랑 틀어진 건지 이해가 안 가.

안야가 ‘가지 마!’ 했을 때 무시하고 간 건 기르골이고 말을 들은 건 칼라인이었잖아.

라틸은 베개를 안고서 멍하게 생각에 휩쓸려 다니다가, 구름이 옆으로 흘러가며 창문으로 햇살이 들이치자 눈이 부셔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제야 잠이 싹 달아나며 지난 밤 꿈의 여운도 가셨다. 그 끔찍한 꿈에 여운이라니, 어감이 참 이상하지만.

라틸은 시계를 보았다. 어느새 아침 8시였다. 카리센으로 출발하는 날이니, 슬슬 일어나야 했다.


‘괴물들이 도미스를 무서워하는 건 이상하지 않아. 식시귀가 된 헤움도 날 무서워하는 거 같았으니까. 하지만 다리는 어떻게 그렇게 나았을까?’

그러나 이동 준비를 하면서도, 라틸은 꿈속에서의 일이 떠올라서 자꾸 멍하니 서 있게 되었다.


‘도미스가 사람 같지 않은 힘을 발휘하고 스스로 그걸 인지해서 그런가. 제발 다음에는 좀 구박 좀 안 당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 * *

준비를 마친 라틸은 편안한 옷차림으로 마차에 올라탔다가 선객을 보고 깜짝 놀랐다.


“라나문?”

라나문이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걸 타고 가려고?”

분명히 라나문 마차가 따로 있는 걸 확인했는데…….

라틸이 ‘왜 얘가 여기 타고 있지?’ 싶어서 보자, 라나문은 얼음 같은 표정으로 오히려 되물었다.


“제가 함께 가서 싫으십니까?”

“넌 애가 왜 맨날 과하게 해석을 해. 그냥 물은 거야.”

라틸이 헛웃음을 뱉자 라나문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폐하와 함께 가고 싶었습니다.”

카리센에 가는 건 다른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라 했으니, 마차를 타고 함께 이동하고 싶단 건가.

라틸은 의자에 엉덩이를 주춤주춤 붙이면서 라나문의 표정을 살폈다. 쟤가 안 그렇게 생겨서 실없는 소리를 자주 해서……. 빈말이겠지?

하지만 라틸은 곧 라나문이 빈말을 한 거라도 상관 없단 결론을 내렸다.


‘나도 빈말하면 되지. 한다고 돈 드나? 어쩌면 예의인데.’

“나도 너와 함께 가고 싶더라.”

그러고서 같이 빈말을 하며 웃어주자, 라나문은 라틸을 빤히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빈말을 잘하시는군요.”

“저기요. 먼저 하셨습니다, 그쪽이.”

그게 황당해서 라틸이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으나, 라나문은 오히려 라틸의 말을 또 걸고넘어졌다.


“수긍하시는 걸 보니 빈말이 맞았군요. 알겠습니다.”

라나문이 책을 펼쳐 무릎 위에 얹는 걸 보며 라틸은 혀를 내둘렀다. 뭐야 쟤. 생각보다 똑똑하잖아? 말에 함정도 파고.

이상하게 궁중 암투 표적이 잘 되길래 겉은 냉랭해도 속은 무를 줄 알았더니…… 안까지 꽉꽉 잘 얼었네. 라틸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그 소리가 들리진 않았을 텐데. 시선을 느낀 걸까. 라나문이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왜 그렇게 빤히 보십니까?”

라틸은 솔직하게 거짓말했다.


“잘생겨서.”

라나문은 코웃음을 쳤으나 라틸은 이번에는 아까처럼 속지 않고 한 주장을 밀고 나갔다.


“이건 진짠데. 빈말 아니었다.”

다행히도 라나문은 이번엔 믿어주었다. 아주 재수 없는 방식으로.


“압니다.”

“그런데 그 ‘흥’ 하는 소리는 뭐야?”

“너무 자주 듣는 말이라. 감흥이 없나 봅니다.”

맞는 말 같긴 한데 진짜 재수 없게 표현하는구나. 라틸은 인상을 찌푸리고서 반듯반듯한 라나문의 이목구비를 보다가, 충동적으로 물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라나문.”

“예. 물어보십시오.”

“네 자신의 단점이 뭐라 생각해?”

‘없다고 말할 것 같아. 없다고 말하면 다른 마차 타고 가라고 해야지.’

라나문이 대답하지 않자 라틸은 옳다구니 싶어 히죽 웃었다.


“설마 없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있습니다.”

“뭔데?”

성격 같은 거 말하겠지 뭐. 라틸은 실실 웃으면서 라나문을 놀리듯 바라보다가,


“향기 없는 꽃이란 점이겠죠.”

뼈 있는 말에 웃던 걸 멈추고 시선을 회피했다.


‘내가 자기랑 동침하지 않는다고 저러는구나.’

 

 

* * *

며칠 동안 그런 일상이 반복되었다. 라나문은 가끔은 자기 마차에 갔고 가끔은 라틸의 마차로 왔다.

라틸은 귀찮고 번거로워서 한 마차에서 나오질 않았으나 라나문은 누구보다 게을러 보였으면서도 꼭 마차 두 개를 번갈아 오갔다.

그렇다고 해서 와서 재잘재잘 수다를 떠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나중에는 라틸이 그게 이상해서 직접 묻고 말았다.


“넌 기껏 와 놓고 왜 말이 없느냐?”

라나문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동생이 조언을 해줬습니다.”

“조언? 무슨 조언?”

“전 입을 다물고 있을 때 가장 낫다고요.”

그 말을 끝으로 라나문이 또 입을 다무는 바람에, 라틸은 역시 평소처럼 그의 얼굴만 구경하면서 이동해야 했다.

동생의 조언이 사실이었는지, 말을 하지 않을 거란 핑계였는지는 끝까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카리센 국경을 드디어 지났을 즈음. 라틸은 라나문이 베개를 들고 자신의 마차로 왔을 때 슬쩍 또 물어보았다.


“그런데 라나문. 질문 하나 해도 되느냐?”

“늘 그렇듯, 하십시오.”

“정말로 왜 따라오는 거냐? 신경 쓰인단 건 뭐고?”

자신이야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라나문은 별로 여행을 좋아할 타입은 아닌 것 같은데. 실제로 며칠간 지켜본 바로도 여행을 좋아하는 것 같지 않고.

그런데도 굳이 따라가는 이유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나 때문인가?’란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으나, 감이 왔다.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닌 것 같다는 감이.

라나문은 가끔씩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서 심각한 표정을 짓는데, 바로 그런 표정 때문이었다. 굉장히 깊고 어려운 일을 떠올리는 표정이었으니까.

라틸이 무릎 위에 올린 책을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자, 오는 내내 봐도 아름다운 눈동자가 드러났다.

라나문은 그 상태로 대답했다.


“클라인이 걱정됩니다.”

‘거짓말.’

“진심으로 걱정하는 거야? 그 이유만으로 먼 카리센까지 따라왔다고?”

“가짜로 걱정하진 않지요.”

“진짜로 다른 볼일이 있는 거 아니고?”

“아닙니다.”

“그럼 카리센에 가거든 둘이 한 방에 넣어줄까? 계속 붙어 있을래? 할 말 천천히 하게?”

“사실 전혀 걱정되지 않습니다.”

라나문이 말을 싹 바꾸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리자, 라틸은 그 모습을 구경하다가 소리 없이 웃었다.

라나문 역시 책에 시선을 내리깐 상태에서 아주 희미하게 입꼬리만 올려 따라 웃었다.

* * *



“거의 수도에 다 도착해 갑니다, 폐하.”

마차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라틸은 알겠다고 문을 톡톡 두드리고서 하품을 한 다음, 다른 좌석을 향해 다리를 쭉 뻗었다.

지금은 마차 안에 라틸 하나뿐이었고 옆에는 아무도 없다 보니, 편하게 있을 수 있었다.

그 상태로 라틸은 깜빡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맞은편에 라나문이 앉아 있었다.


“언제 왔어?”

라틸은 다리를 내리면서 잠긴 목소리로 묻다가 창밖을 보았다. 어느새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더 잘 걸 그랬나, 생각하면서 라틸은 하품을 하다가 라나문을 보았는데, 웬일로 라나문은 책을 보지 않고 라틸 쪽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받다가 방긋 웃으면서 라틸이 “왜?” 하고 묻자, 라나문이 드물게도 자기에 대해 먼저 털어놓았다.


“저는 남들보다 감정이 좀 감정 기복이 적은 편입니다.”

“그래 보여.”

차가운 성격이라 생각했지, 아예 감정 기복이 적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라나문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폐하와 있으면 평소보다 감정 기복이 좀 심합니다.”

라틸은 라나문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나, 듣다가 황당해서 눈썹을 치켜올렸다. 지금이 심한 거라고?

그러나 말하는 라나문은 꽤 진지한 표정이었다. 실제로 자신의 상태를 좀 신기해하는 것도 같았는데, 라틸은 그게 더 신기했다.

평소의 라나문과 지금의 라나문 사이에 차이가 전혀 없어 보이는데. 대체 뭘 신기해하고 있는 거지, 쟤는?

감정 기복이 심해져서 이 정도면 평소엔 거의 인형 수준 아닌가?

마차가 완전히 멈추는 바람에 라틸은 더 생각하길 멈추고서 하품을 했다.


“폐하. 도착했습니다.”

기사의 알림을 받고 밖으로 나가자, 서넛이 옆에서 대기하고 서 있다가 라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냥 내리는 게 더 빠를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서넛을 잡고 내리면서 보니, 하인신스가 직접 맞이하기 위해 시종 몇몇을 데리고 나와 있었다.

라틸은 예전에 왔을 때보다 그를 대하는 게 한결 편해진 걸 깨닫고 놀랐다.

처음 그의 결혼식에 올 땐 진짜 딱 죽기 직전의 심정이었고, 그다음에 올 때는 하이신스를 볼 때마다 열불이 터져 나가려 했는데.

그래도 시간이 많이 흐른 덕일까. 아니면 언제 어디서 폭발할지 모르는 미친 작자를 자주 봐서 그런가. 아니면 뱀파이어니 흑마법사니 인어니 하는 이들이 뚝뚝 나와서 그런가. 하이신스를 봐도 화나진 않았다.

스스로의 상태를 알아챈 라틸은 방긋 웃고서 그쪽으로 걸어갔다.


“하이신스 황제. 잘 지냈습니까?”

그러고서 밝게, 오랜 친구에게 하듯 묻자 하이신스는 찝찝한 눈으로 라틸을 보며 역시 미소지었다.


“오랜만입니다.”

하지만 하이신스는 그 뒤에 작은 말을 덧붙였다.


“뭔 짓을 했기에 내 동생이 오자마자 술고래가 된 걸까.”

 

 


“부작용일 거야. 뭘 잘못 삼켰거든.”

“잘못 삼키다니?”

“입 열고 확인해 봐. 그 안에 내 창고 열쇠 있어.”

“!”

“혼내줘. 내가 먹인 게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튄 거니까. 난 진짜…… 인내심 발휘해서 참고 온 거다.”

실제로는 다른 이유로 왔지만 라틸이 일단 우기자, 하이신스가 옆에서 “그 말썽쟁이가 또.” 하고 낮게 중얼거렸다. 자국에서도 주기적으로 말썽을 부리는 모양이었다.

그때. 하이신스의 안내를 받아 성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우측 대각선 방향에 있는 어두운 복도에 갑자기 빛이 들어왔다.

그 방향을 보자, 아이니 황후가 자기 사람들을 데리고 천천히 나오고 있었다.

여러모로 아이니 황후를 보기가 애매했던 라틸은 얼른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 방패처럼 휘둘렀다.

그런데 아이니 황후가 다가오기 전. 라틸의 옆에 있던 라나문이 먼저 “음?” 하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아는 사이인가? 라틸이 쳐다보자, 라나문이 정말로 콧잔등을 찡그리고서 아이니를 쳐다보고 있었다.

라틸은 아이니와 라나문을 번갈아 보다가 작게 물었다.


“왜 그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