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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화. 화가 난 도미스 (255/367)


255화. 화가 난 도미스
2022.08.07.



 


“신경 쓰이는 점이라니?”

라나문은 주저했다.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 같은데.


“말하기 곤란한 내용인가?”

“예.”

진짜 말 안 하고 싶구나. 대체 이유가 뭐길래? 라틸은 궁금해졌다. 하지만 입을 딱 다문 라나문은 절대로 말해주지 않을 태세였다.

라틸은 잠시 고민했다.

카리센에 가서 해야 할 일은 두 가지. 아이니가 대적자라 밝히는 걸 막고, 클라인에게 열쇠를 받아야 한다. 열쇠를 받으면서 설득도 해봐야 하고. 여기에 라나문을 데려가면……?

라틸이 빤히 쳐다보자 라나문은 눈을 마주치더니, 평소보다 눈썹 양 끝을 좀 아래로 내렸다.


‘불쌍해 보이려는 건가?’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픽 반사적으로 웃다가, 아차 싶어서 쳐다보자 라나문의 눈썹은 이번엔 양옆이 위로 올라가 있었다.


‘화났구나.’

라틸은 또 웃음이 나올까 봐 고개를 숙이면서 허락했다.


“알았다. 알았어.”

사실 전에 그 일 이후로 라나문과는 사이가 좀 애매했다. 어쩌면 같이 여행을 다녀오면서 풀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진짜 여행은 아니지만, 어쨌든 계속 삭막하게 지낼 순 없으니까.

* * *

준비하는 과정에서 윌랑 왕자가 찾아와서는


“제 호위와 눈이 맞으신 것 같은데요. 그러면 저는 이만 모국에 돌려보내 주십시오. 제 호위가 더 마음에 든다고 말씀하시면 될 거 아닙니까.”

라고 요구한 일이 있긴 했으나 이 일은 쉽게 해결되었다.


“내가 그댈 잡아두고 있는 게 아닌데 왕자.”

“!”

“왕자가 원한다면 언제든 돌아가게. 난 개의치 않아. 하지만 왕자가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면서 나한테 입장 밝혀 달라 하는 건 아니지.”

이렇게 말했더니 씩씩대면서 가버렸으니까. 왕자는 몹시 화난 얼굴로 돌아갔지만 라틸은 괜찮았다. 윌랑 왕자는 화난 얼굴이 더 잘 어울리니까.

문제는 기르골이었다. 라틸은 기르골을 두고 가야 할지, 다녀온다고 말해야 할지, 데려가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다.

데리고 가자니 기르골이 아이니를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고. 두고 가자니 자리 비운 사이에 뭔 짓을 할지 몰라 겁이 났다.

말하고 가자니 따라가겠다 할 것 같은데, 말 안 하고 가면 기분이 상해서 또 눈이 돌아갈 것 같았다.

결국 이 고민을 하느라 시름에 잠겨서일까. 카리센으로 떠나기 전날 밤, 라틸은 다시 도미스가 나오는 꿈을 꿨다.

* * *

마지막 꿈에서 기르골이 뭘 물어본 것 같은데. 가장 처음으로 나온 장면은 그 장면이 아니라, 도미스가 침대에서 일어나 다 식은 수프를 마시는 모습이었다.

라틸은 식은 수프를 마시면서 도미스가 속으로 생각하는 걸 들을 수 있었다.


[나와 안야의 인연은 이미 먼 옛날에, 안야가 나를 기억하지도 못하던 시절에 끊어져야 했지 않나. 왜 이렇게 집요하게 마주치게 되는 걸까. 서로 원하지 않는데…….]

그래도 수프 한 그릇을 다 비운 도미스는 이후 설거지를 빠르게 끝내고 바닥을 쓸고 청소하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왜 청소하나 했더니. 라틸은 청소가 끝나자 그 이유를 알았다.

도미스가 청소를 다 하고 나서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창문에 딱 달라붙어서 저택을 살피기 시작한 것이다. 나갔다가 또 양부와 부딪칠까 봐 걱정하는 듯했다.


[내가 빌린 집인데 나는 들어가보지도 못하다니.]

본인도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지 한탄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가진 않았다.

그러다 이 와중에 비까지 내리기 시작하자, 도미스는 넋을 놓고 비가 내리는 걸 보다가, 하늘에 번개가 번쩍이면서 ‘우르릉’ 거리는 천둥 소리가 나자 갑자기 바느질거리를 가져와 창가에 앉았다.

왜 천둥과 번개가 치자 바느질 생각이 났는진 모르겠지만.

그런데 찢어진 옷 소매 하나를 다 꿰매기도 전에 누군가 문을 쿵쿵쿵 두드려댔다.


“칼라인?”

도미스는 칼라인이 저녁 때 오기로 한 약속을 지킨 건가 싶어서 얼른 그쪽으로 나갔으나, 서 있는 사람은 양부였다. 심지어 뒤로는 덩치가 큰 부하들이 대여섯 명 서 있었다.

그걸 본 도미스는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양부의 머리 위에서 번쩍이는 번개는 안 그래도 험악한 양부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어 더욱 무섭게 만들었다.

도미스는 달아나려 했으나 집이 너무 좁았다.

양부는 도미스의 머리카락을 잡고 당겨버렸고, 도미스는 “악!” 비명을 지르며 붙잡혔다.


“갖다 버려!”

양부가 머리카락을 놓으며 외치자, 부하들은 도미스를 짐짝처럼 들어 이동했다


“칼라인! 기르골!”

도미스가 발버둥을 치면서 둘을 불렀으나 빗소리와 천둥소리에 섞여 그 외침은 라틸에게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칼라인!”

그래도 도미스가 외치고 있자니, 양부가 성큼성큼 비를 맞으면서 다가와 도미스의 귀를 찢어질 듯 세게 잡아당기고서 우악스럽게 말했다.


“네년이 들어오고부터 우리 집엔 나쁜 일뿐이었다. 네년이 나가자 좋은 일만 있기 시작했지. 그런데 네년이 다시 나타나니 또다시 나쁜 일이 생겨. 무슨 뜻인지 알겠어?”

양부가 뺨을 철썩 때리자 도미스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양부를 노려보았다.

양부는 무척 이상한 표정을 지으면서 애원하듯 말했다.


“너도 내가 싫지? 그러니 제발, 우리 제발 좀 안 보고 살자! 응? 난 정말 네가…… 네가 소름 끼친단 말이다!”

“내가 간 거 아니잖아요. 내가 항상 먼저 와 있었는데 당신들이 온 거잖아요!”

“그래도 네가 꺼져! 앞으론 우리 그림자만 봐도 꺼지라고! 알아서 피해 가! 서로 싫은데 왜 얽히는 거야!”

험악한 얼굴로 양부는 이젠 아예 패악을 질러댔다.


“두 번 다시 우리 앞에 얼굴 들이밀지 마라! 내 딸 앞길을 망치려 들면 그땐 진짜 죽여버릴 테니까!”

협박을 마지막으로 양부가 도미스의 귀를 놓자, 사람들은 도미스를 들쳐매고 그대로 이동했다. 울면서 발버둥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양부의 부하들은 도미스를 어두컴컴한 산까지 데려가 빛 한 줄기 닿지 않는 오싹한 곳에 내려놓았다.

이 주위에 머물만한 곳은 이 별장뿐이라고, 도미스가 칼라인에게 해준 말은 이렇게 자신에게 돌아왔다.

도미스를 패대기치듯 내던진 부하들은 자기들 할 일은 다 했다 싶은지 몸을 돌렸다.


“잠시.”

그러나 한 명이 가지 않고 다가오더니, 도미스의 발목을 잡고 그대로 부러뜨려버렸다.


“아!”

도미스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쳐다보자, 부하는 매정하게 변명했다.


“우리 탓하지 마라. 네가 또 돌아오면 안 되니까. 우리도 계속 이딴 짓 하는 건 싫거든. 한 번에 끝내자고.”

이런 산속에서 발 부러뜨리고 가는 건 그냥 여기서 죽으란 거나 다름없었다. 부하가 말하는 ‘한 번에 끝내자’라는 건 여기서 그냥 죽으란 말이었다.

도미스는 발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서 부하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결국 도미스의 남은 발까지 부러뜨려버렸다.

순간 라틸은 도미스의 ‘마음’에서 오싹할 정도로 빠르게, 뱀이 속삭이는 듯한 아주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들은 건 라틸 뿐인 듯 부하들은 도미스를 버려둔 채 그대로 가버렸다.

도미스는 고통에 겨워 울면서 그들의 등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절대…… 절대 용서 안 할 거야.”

평소보다 낮아진 이 목소리는 빗소리에 섞여 부하들의 귀에까지 들어가지 않았지만, 도미스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절대로 용서 안 할 거야. 파리채로 날 때린 상인. 날 속이고 배에 탄 그 애. 백작가에서 날 죽이려 한 사람들. 방금 내 다리 부러뜨린 저 사람. 절대로. 절대로 용서 안 해.”

‘도미스…… 호구 같더니. 그래도 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여기서 살아 나가는 게 우선이었다.

어느새 주위에는 나무처럼 보였는데 나무가 아닌 것들이 느릿하게 걸어 다니고 있었는데, 번개가 칠 때면 라틸은 그 나무 꼭대기에 이파리 대신 걸린 혓바닥들을 볼 수 있었다.

혓바닥은 바람이 불면 나풀거려서 보는 사람의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혀가 걸린 그 나무 같은 것들은 자그마치 키가 거의 5m는 되어 보였는데, 보기에는 끔찍했지만 해를 끼치진 않고 자기들끼리 계속 숲을 어슬렁거렸다.

그때. 흙바닥 속에서 ‘사사사삭’ 하는 소리가 나더니 뭔가 톡 머리를 내밀었다.

거대한 거미였으나,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거미가 입에 사람의 손가락을 물고 있던 것이다.

심지어 그 거미는 도미스가 더 싱싱한 새 먹이라 여겨지는지, 도미스를 보자 씹던 손가락을 퉤 뱉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데…… 그 다리 길이만 거의 1m는 되어 보였다.


“칼라인!”

그걸 본 도미스는 어째서인지 또 칼라인을 외쳤으나, 당연히 칼라인은 없었다.

거대한 거미가 다리로 도미스를 찌르는 순간까지도.

그러나 다리가 살을 파고들기 전. 도미스는 옆에 놓인 돌멩이를 빠르게 집더니 그걸로 거미 다리를 퍽 내리쳐버렸다.

그러자 위협적인 거미가 갑자기 철판을 긁는 소리가 몇 겹으로 겹쳐진 듯한 비명을 내지르더니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도미스는 이런 효과를 기대한 건 아니었는지 숨을 헐떡이다가 생각했다.


[또! 전에 백작 영지에서도 이런 일 있었던 거 같은데.]

도미스는 자기 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을 보았다.


“나…… 뭔가 이상한 힘이 있는 건가.”

그때 바스락 소리가 다시 나자, 도미스는 다른 돌멩이를 들고서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그곳에 있는 건 이번엔 괴물이 아니라 칼라인이었다. 늘 무표정하던 칼라인이 보기 드물게 놀란 얼굴로 달려오고 있었다.


“왜 이래?”

가까이 온 칼라인은 도미스의 앞에 오자마자 한쪽 무릎을 질척한 바닥에 대더니, 각기 다른 방향으로 꺾어진 도미스의 다리를 기겁해 쳐다보았다.

도미스는 자기 다리를 보는 대신 칼라인을 보며 울었다. 돌멩이를 내려놓는데, 절로 입 밖으로 원망이 새어나갔다.


“왜 이제 왔어요?”

그 말에 칼라인이 흠칫해 쳐다보자, 도미스는 다시 울면서 물었다.


“왜 항상 늦게 와요?”

“그게 무슨…….”

라틸은 여기서 도미스가 ‘내가 로드다 멍청이야!’라고 말하면서 칼라인에게 호통쳐주길 기대했으나, 도미스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한 건지도 모르는 듯 다시 울기 시작했다.

칼라인은 이상한 느낌을 받은 듯 도미스를 잠시 쳐다보긴 했으나, 방금 한 말에 대해 더 묻는 대신 현실적인 질문을 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이런 날씨에 돌아다니면 위험해.”

“양아버지가 이랬어요! 내가 내 발로 온 게 아니라!”

“!”

칼라인은 인상을 굳혔으나 다시 현실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돌아가자. 의사를 불러야지. 다리가…… 많이 다쳤다.”

칼라인이 도미스를 들어올리려 했으나 도미스는 그를 뿌리쳤다.


“갔다가 또 어떤 꼴을 당할 줄 알고요? 내가 빌린 저택에 멋대로 쳐들어와 머무르면서도 이러는데, 갔다가 또 어떨 줄 알고요?”

라틸은 도미스가 이렇게 길게 말하는 건 처음 들었다. 칼라인도 낯선 모습인 듯 잠시 주춤하다 말했다.


“로우저 씨를 내보내겠다. 안야가 아직 보호자가 필요한 것 같아 데리고 다니는 거지만, 이 정도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나을 테니.”

“양아버지만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도미스는 다리가 부러지면서 겁도 좀 줄어든 듯, 떨리는 목소리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안야도 똑같은데 뭘 어쩌라고요.”

그러나 칼라인은 도미스가 안야에 대해 나쁘게 말하자 대번에 안색이 달라져서 딱딱하게 말했다.


“안야가 네게 잘 대해주는 건 아니지만 네 양부처럼 대한 것도 아닐 텐데. 안야가 질투난단 이유만으로 둘을 같은 취급 하면 안 되지 않을까.”

말에도 타이밍이란 게 있다면 지금은 정말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양부에게 쫓기면서 계속 안야 이름을 들었던 도미스는, 안야를 두둔하는 칼라인의 말에 완전히 폭발해 버렸다.


“안야 안야 안야 안야 그놈의 안야!”

울면서 소리 지른 도미스는 벌떡 일어나더니 칼라인을 온 힘을 다해 노려보며 외쳤다.


“안야 얘기밖에 모르는 칼라인 씬 내 근처에도 오지 말아요!”

분명 다리가 부러졌을 텐데. 도미스는 어떻게 될 영문인지 아주 잘 뛰었다. 심지어 머리가 열 개 달린 괴상한 새가 달려들자 손으로 퍽 쳐서 날리고는 계속 뛰었다.


‘무의식중에 하는 건가? 본인은 모르는 거 같은데?’

도미스야 무의식중이라 치고. 라틸은 무의식이 아닐 칼라인의 지금 표정이 몹시 궁금해졌다. 이걸 봤을까? 봤으니 이제 도미스가 로드란 걸 좀 알아 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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