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4화. 예상대로, 예상 외 (254/367)


254화. 예상대로, 예상 외
2022.08.03.


다음날. 라틸이 없는 입맛을 내어 꾸역꾸역 아침 식사를 하고 집무실에 앉아 있자니, 어제 늦게 다시 궁전에 들어왔다가 나간 시종장이 평소보다 좀 피곤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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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침이에요.”

라틸이 퀭한 눈동자로 인사하자 시종장은 ‘진심이신가?’ 하는 표정이 잠시 되었다. 물론 진심이 아니었다. 그냥 아침 인사일 뿐.

반면 시종장은 라틸의 곁으로 오자마자 바로 건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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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카리센에 서신을 보내야 합니다.”

어제는 너무 황당한 데다 난데없이 불려 나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는데. 밤사이 생각했더니 더 큰일이다 싶은지 표정이 심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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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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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요. 세상에 어느 후궁이 모국에 돌아가겠다며 창고 열쇠를 가지고 달아난단 말입니까. 엄연히 도둑질입니다.”

다시 생각해도 다시 기가 막힌지 시종장의 언성이 슬쩍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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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가져간다고 써놨잖아요.”

라틸이 클라인을 조금 두둔하는 것처럼 말했으나 시종장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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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마찬가집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라틸은 덤덤하게 책상을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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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대체 왜 열쇠를 가져갔을까요? 왜 자기가 가져간다고 티를 내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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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상관없습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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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알고 싶습니다, 사블레 후작.”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라틸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편하게 기댔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라틸도 클라인의 이번 행동이 몹시 어이없었다.

하지만 시종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라틸은 이 일로 클라인이 곤란해지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라틸이 보기에, 클라인은 진짜로 열쇠를 가져가고 싶어서 가져갔다기보다는, 라틸이 자신을 데리러 오길 바라고 가져간 눈치였으니까.

그래도 시종장이 옆에서 자꾸 카리센에 항의해야 한다고 구시렁거리자, 라틸은 결국 보다 못해 그 이야기를 더 꺼내지 말라고 아예 말해버렸다.

시종장은 바로 입을 다물었으나 불만스러운 눈빛까지 없애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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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일부터 합시다.”

라틸은 얼른 서류를 꺼내 시종장의 그런 눈빛을 외면했다.

어쨌든 라틸도 아무 생각 없이 클라인만을 생각해서 이러는 건 아니었다. 나름대로 머릿속에 계산이 있었다.

며칠 전. 성기사는 아이니 황후가 ‘대적자의 검’을 가지고 있어서 그걸 뽑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백화는 ‘아이니 황후는 대적자가 아니다’라고 발표해 버렸다.

그럼 어떻게 될까. 아이니 황후는 자신이 대적자라는 걸 사람들에게 확인시키기 위해 모두가 보는 앞에서 검을 뽑겠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와서 검을 뽑는 것도 이상하니 분명 그쪽에서 뽑을 터. 대신 뽑기 전에 사절단을 보내지 않을까? 사람을 보내서 뽑는 걸 보라고?

라틸은 자신이 거기에 직접 가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 아이니가 검을 뽑은 뒤 자신도 따라서 뽑아버려서 아이니는 대적자가 아니라고 계속 우길 수 있고, 카리센에 간 김에 클라인을 만나 창고 열쇠도 돌려받고 대화도 좀 나눠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카리센에 따지는 건, 최소한 아이니가 대적자의 검을 뽑을 거란 말을 전할 사절단이 올 때까진 참아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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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는 그 황자님께 너무 무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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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사블레 후작은 클라인을 너무 싫어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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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편 그 시각.

한때 동물 가면 쓴 이들과 함께 지하성에서 지냈던 틀라와 아낙차는, 그곳을 무사히 탈출해서, 지금은 아낙차의 친정인 쇼버 후작가 근처에 와 있었다.

원래 틀라와 아낙차는 지하성을 탈출하자마자 기르골을 찾아다녔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르골과 대적자를 한편으로 두면 다시 상황을 역전시켜서, 동물 가면들에게 복수하고 양지로 올라가 이전 같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기르골을 찾는 건 생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었고,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 일이었다.

모자는 기르골이 갈 만한 곳을 다 찾고, 지하성 근처 역시 샅샅이 뒤졌지만 그래도 기르골을 찾지 못하자 점차 지쳐갔다. 그러다가 기운이 다 빠질 즈음. 보다 못한 아낙차가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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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르골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러다가 동물 가면 중 하나에게라도 걸리면 큰일이다. 그자를 찾기 전에 일을 망칠 수도 있어. 차라리 내 가문으로 가서 일을 도모하자.”

그래서 지금 이곳 근처에 와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앞으로 와서 보니, 틀라는 안으로 들어가기가 겁이 났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두려워 도망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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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어머니가 혼자 다녀오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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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급하게 달아날 일이 생기면? 너와 내가 길이 엇갈릴 텐데, 그게 더 문제 아니니?”

아낙차의 설득으로 저택 근처까지 왔으나, 틀라는 여전히 자신없는 눈치였다.

아낙차는 너무 아들을 몰아붙였다가 그가 완전히 시무룩해질까 봐 우선 자신이 먼저 저택 앞을 지키고 선 경비들에게 다가갔다.

경비들은 하품을 하다가 아낙차의 얼굴을 알아보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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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낙차 님이십니까?”

경비들은 아낙차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자결했단 이야기, 살해당했단 이야기, 병사나 충격으로 죽었단 이야기, 지금도 잘살고 있다는 이야기 등등.

그런데 눈앞에 아낙차가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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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아낙차는 경비의 안내를 받아 바로 저택 안으로 들어갔고, 틀라는 얼굴을 다 가릴 만큼 커다란 모자가 달린 망토를 눌러 쓰고서 그 뒤를 따라갔다.

경비는 모자로 얼굴을 다 가린 사람이 궁금한지 한 번씩 힐긋거렸지만, 대놓고 아낙차에게 누구냐고 묻진 않았다.

그 사이. 아낙차는 응접실에 도착했다. 쇼버 후작도 마침 연락을 받고서 황급히 계단을 뛰어내려오는 중이었다.

경비가 인사하고 물러나자, 쇼버 후작은 눈시울이 뻘겋게 변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딸을 안고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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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낙차! 살아 있었구나!”

아낙차는 아버지를 안고 나란히 앉아 자신이 보고 겪은 일들에 관해 이야기해주었고, 후작은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이야기들을 다 들었다.

그러다가 틀라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로 나오자, 내내 조용히 있던 틀라가 천천히 자신이 쓰고 있던 모자를 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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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손자의 얼굴이 나타나자, 쇼버 후작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아낙차 쪽을 홱 돌아보았다. 어떻게 틀라가 여기에 이러고 있냐는 눈으로.

조금 전에 아낙차에게, 죽은 틀라가 적들의 손에 의해 부활했단 이야기를 들었으면서도 다 까먹어버린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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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온 틀라.”

이에 아낙차가 평소보다 더 다정하게 아들을 부르자, 틀라는 순순히 아낙차에게 머리를 기댔다. 아낙차는 아들의 손을 꽉 쥐고서 원통하단 눈으로 후작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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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절 유난히 싫어하더니. 황제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저도 몰랐어요, 아버지. 아버지가 우릴 좀 도와주세요.”

울먹이는 아낙차를 보다가 후작은 가슴이 아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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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뭘 하면 될까.”

 

* * *

라틸이 인상을 찌푸리고서 책상 앞에 앉아 열심히 뭘 적고 있자니, 비서 하나가 조심스럽게 들어와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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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카리센에서 사절단이 왔습니다.”

요즘 카리센과 여러 가지로 안 좋은 일이 있었다 보니, 인상을 찌푸린 황제에게 보고하기 곤란한 눈치였다.

그러나 인상을 쓰고 있던 라틸은 오히려 카리센 이야기를 듣자 반색하고 “그래?” 하고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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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라틸은 속으로 외치면서 일어섰다.

비서는 황제가 왜 좋아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했으나, 라틸은 이미 일어서서 복도로 나가고 있었다.

라틸이 빠른 걸음으로 사절단들이 도착해 대기하는 곳으로 가자, 서넛과 시종장도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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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인 황자 일일 겁니다. 황자가 원래 성격이 그러니 이해해달라 하겠죠.”

라틸은 시종장이 툴툴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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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닐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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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복도와 회랑을 지나 커다란 홀 안에 들어가자, 카리센에서 온 사절단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러다 라틸이 들어서자 사절단은 조금씩 떨어져 서서 인사를 올렸다.

라틸은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황제의 자리로 걸어가며, 덕담을 생략하고 대번에 본론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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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로 왔는가.”

그러자 사절단 대표 같은 이가 두 걸음 앞으로 나오더니 꾸벅 인사를 올리고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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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리움의 황제께서 데리고 있는 성기사단 단장이, 카리센의 황후를 두고 한 말에 대해 황후 폐하께서 몹시 화가 나셨습니다.”

라틸은 다 알면서 모른 척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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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을?”

대표는 황제가 다 알면서 모른 척한단 걸 알면서도 무심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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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니 황후께서는 대적자가 아니란 선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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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그거 말인가.”

라틸은 이제야 기억났단 것처럼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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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의견일 뿐인데. 뭘 그리 신경 쓰고 그러나.”

아이니 황후가 하면 몰라도, 그 말을 뱉은 자의 황제가 할 법한 말은 아니었다. 대표는 황제의 태도에 화가 났지만, 꾹 참으며 보고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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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황후께선 대적자들이 대대로 사용해온 검을 공개적으로 뽑아 보이겠다 하시면서, 타리움에서도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 봐도 좋다 하셨습니다.”

일이 정확히 라틸이 생각한 그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라틸의 입꼬리에 미소가 올라오자, 사절단 대표는 괜히 불안해졌다. 왜 웃는 거지?

* * *

라틸이 웃은 이유는 타리움 사람들도 처음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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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직접 가시겠다고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몇몇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라틸이 갑자기 직접 아이니 황후가 ‘대적자의 검’ 뽑는 광경을 보고 오겠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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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폐하께서 직접 가실만한 일이 아닙니다.”

시종장은 당황해서 뭘 제대로 말하지 못하다가 가까스로 라틸을 말렸다.

사실 시종장 입장에선 누가 대적자여도 별로 상관도 없었기에, 굳이 그런 걸 라틸이 며칠을 걸려 보고 오려 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라틸이 생글생글 웃는 걸 본 시종장은 곧 라틸의 의도를 반은 알아맞히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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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인 님을 보러 가시려는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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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는. 이대로 카리센에 항의하면 클라인 입장이 난처해질 거잖아요. 대화를 나눠보고 싶어요.”

라틸이 드물게 강하게 밀어붙이는 일이라 결국 공식적으로 타리움에서 카리센으로 사절단이 갈 때 황제가 합류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공식적인 방문이기에, 라틸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가짜가 오고 말고 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카리센에 방문할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라틸이 예상하지 못한 일이 하나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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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도도해서 웬만해선 먼저 찾아오는 일이 없는 라나문이 웬일로 직접 라틸의 방까지 와서는 이런 부탁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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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도?”

왜? 라틸이 의아해 묻자, 라나문은 애매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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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신경 쓰이는 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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