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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화. 나를 소중히 여겨야 했어 (253/367)


253화. 나를 소중히 여겨야 했어
2022.07.31.


라틸은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했던, 전설이나 신화에 가까운 옛날 일을 적어둔 책들을 도서관에서 한가득 가져와 방 책상에 쌓아두고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아무리 봐도 과장된 내용들이었지만, 그래도 이 가운데 진실도 있을 거란 마음가짐으로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러다 눈이 침침해서 잠시 눈두덩이를 누르고 있자니, 시녀가 새로 끓인 차를 가져와 내려놓으며 알려주었다.


“폐하. 클라인 님께서 곧 도착하실 것 같습니다.”

“곧 도착하다니?”

오면 오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 아닌가. 라틸은 손을 내리며 막 끓인 차에서 올라오는 향을 맡았다.


‘캐모마일인가?’

“클라인 님이 씩씩거리면서 평소 오시던 길이 아닌 길로 이쪽에 오시는 걸 봤어요.”

말을 마치자마자 문 너머에서 다른 시녀가 알려왔다.


“폐하, 클라인 님께서 오셨습니다.”

차를 끓여준 시녀가 ‘내 말 맞죠?’ 하는 듯 씩 웃고 돌아서자, 라틸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종을 흔들었다.

‘달랑’ 하는 맑은소리가 가라앉기도 전, 시녀가 나가기도 전에 클라인은 빠르게도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와서는 바로 입을 열었다.


“폐하. 카지노딜러인 대신관까지는 참았습니다. 그런데 이젠 인어라니. 못 참겠습니다.”

좋은 상황이 아니다 싶었는지 시녀가 걸음을 더 빨리해 얼른 밖으로 나가버리자, 라틸은 인상을 찌푸리고 클라인을 보았다.


“저는 물고기와… 물고기와…….”

클라인은 마땅한 단어가 생각이 안 나는지 거기에서 잠시 막혀 있었다. 어쨌든 부정적인 불만을 늘어놓으려는 건 확실하지만.


“진정해 클라인.”

라틸은 방금 시녀가 주고 간 찻잔을 그에게 내밀었다.


“새것이다. 마시고.”

클라인이 차를 후후 불어서 한 모금 마시자, 라틸은 그를 데리고 소파로 가 앉힌 다음 자신도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러느냐? 므라딤이 네 얼굴에 물이라도 뿌렸느냐?”

“폐하, 진짜로 그 물고기를 국서로 맞이하실 겁니까?”

물을 뿌리진 않았나 보다. 물을 뿌렸다면 ‘네!’부터 했을 텐데. 라틸은 미간을 찡그리고서 대답을 흘렸다.


“글쎄.”

“아니라고 해주세요.”

“음.”

사실 라틸은 므라딤을 국서로 맞이할 마음은 없긴 했다.

국서를 세울 마음 자체도 아직 없었지만, 국서를 당장 세우더라도 므라딤은 후보에 없었다. 라틸이 생각하는 국서의 조건에 므라딤은 맞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건 지금의 마음가짐이고, 상황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 게다가 피인어들이 ‘안 돕기로 했어’ 하고 가버릴 수도 있는 상황에서 무작정 그들에게 ‘안 돼’ 하고 단호히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클라인은 입이 너무 가벼웠다. 그에게 ‘난 인어를 국서로 맞이할 마음이 없다’라고 말했다간 이 소문이 죄다 퍼져나갈 게 분명했다. 일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던가.

결국 라틸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클라인은 충격을 받았다.


“왜 대답을 못 하십니까?”

“여러 가지로 생각할 게 많아서.”

클라인은 라틸의 미묘한 대답을, 므라딤을 국서로 맞이할 수 있단 신호로 받아들인 듯 차를 한 번에 입에 털어넣더니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너무하십니다!”

“벌써 돌아가려고?”

라틸이 덩달아 따라 일어나자, 클라인은 소파 옆으로 물러서며 단호하게 말했다.


“네! 저는 카리센에 돌아갈 겁니다.”

자기 방에 돌아갈 줄 알았지 카리센에 돌아갈 줄 몰랐던 라틸은 조금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제가 과연 폐하의 곁에 있어도 될지, 폐하가 절 곁에 두고 싶어하시는지 차분하게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이미 생각하고 온 바가 있는지, 클라인은 빠른 속도로 말하더니 ‘팩팩팩’ 하는 소리를 내며 빠른 펭귄처럼 문으로 걸어가다가 확 돌아보며 요구했다.


“제가 마음을 정리하기 전까진 절 찾지 마세요.”

클라인이 재빨리 문을 열고 사라지자 라틸은 난데없는 상황에 놀라 입을 벌리고 멍하게 섰다.


“진짜야?”

나가고 없는 사람에게 물어봐야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라틸은 문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엉금엉금 옆으로 걸어가 클라인이 앉았던 소파에 털썩 앉았다.

이게 무슨 일인지, 아직 이해가 가지 않았다.


 

* * *

다음날. 라틸은 ‘클라인이 진짜로 돌아가나?’ 싶어서 시종을 불러 지시했다.


“클라인 황자가 정말로 카리센에 돌아가는지 보고 와라.”

밤중에 와서 그런 통보를 했다지만, 역시 이렇게 뜬금없이 떠나겠다는 건 믿기지 않았다.

시종 역시 라틸의 지시가 영 어리둥절한지 눈이 커다래져서 나갔다. 시종이 나가자 이번에는 시종장이 서류를 정리하다 말고서 놀라 물었다.


“아니,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폐하? 클라인 황자가 카리센에 돌아간다고요?”

“밤중에 찾아와서 그러더라고요.”

뒤에서 서넛이 웃는 소리가 들리자, 시종장은 그를 흘겨보면서 재차 물었다.


“갑자기 왜요?”

“인어가 온 게 충격이었나 봅니다.”

“이런.”

새삼 클라인이 가엾게 여겨지는 듯 시종장은 혀를 찼으나, 채 2초를 지나지 못하고 그의 눈꼬리와 입꼬리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라틸이 황당해서 입을 벌리고 쳐다보자, 시종장은 헛기침을 하고서 둘러댔다.


“클라인 황자는 임시 후궁으로 온 거라 언제든 돌아갈 수 있지요.”

싫어하던 황자가 제 발로 떠난다니 좋아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반면 클라인 황자를 내심 지지했던 건지, 한 비서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서류의 같은 페이지만 계속 쳐다보는 게 보였다.

라틸은 시종장은 물론 서넛까지도 안색이 밝자, 둘을 번갈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표정을 관리할 생각들도 없네.’

그러는 사이, 클라인을 확인하러 나갔던 시종이 황급히 돌아왔다.


“어쩌고 있느냐?”

“마차에 짐을 싣고 있습니다, 폐하!”

라틸이 미간을 찡그리자 시종장이 웃던 걸 멈추고 이제야 눈치를 살폈다.

라틸은 입을 우물거리면서 불만스러운 표정을 유지했으나, 곧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생각할 게 있다 했으니 생각하게 둬라.”

‘지금은 클라인이 감정적으로 격해 있으니 나서서 말려 봤자 소용없겠지.’

게다가 시한폭탄 같은 이들이 하렘 주위로 진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성격이 손꼽히게 안 좋은 데다 잘 흥분하는 클라인은 어쩌면 카리센에 잠시 돌아가 있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클라인이 흥분해서 게스타나 기르골, 므라딤, 칼라인에게 덤비면 큰일이니까.

그나마 사람인 타시르도 역시 원체 성격이 좋다 보니 늘 실실 웃으며 다니고 있지만, 어쨌든 대를 거쳐 암살자로 지낸 사람이었다.

꽤 커 보이는 인내심이지만, 그게 어느 지점에서 고갈되어 클라인에게 폭발할지 모르는 상황 아니던가.

자신을 볼 때마다 활짝 웃던 클라인의 모습, 누구보다 기뻐서 속마음이 주체가 안 되던 모습을 떠올리자 라틸은 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

고민하던 라틸은 손에 끼고 있던 팔찌를 빼서 시종에게 건넸다.


“클라인에게 조심해서 가라 전하고. 이건 ‘폐하2’의 목걸이 하라 해라.”

 

* * *

클라인을 짐을 싸면서 ‘폐하2’ 인형을 캐리어 제일 안쪽에 꽉꽉 집어넣었다. 그러고서 방 안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문틈 사이로 아까 슬쩍 방 안을 엿보고 간 시종이 보였다.


“뭐 재밌다고 구경하느냐!”

클라인이 괜히 버럭 성질을 내자, 심부름을 온 시종은 억울해서 입을 우물거렸으나 일단 황제가 시킨 일은 했다.


“이걸 드리러 왔습니다. 폐하께서 ‘폐하2’ 목걸이 하시랍니다.”

시종은 ‘폐하2’가 뭔지는 몰랐으나 우선 그대로 전한 다음 물러났다.

클라인이 라틸이 보낸 팔찌를 보고 심란한 표정이 되자, 짐을 싸면서도 ‘이건 좀 아닌데’ 생각하던 바닐이 눈치를 보다 물었다.


“전하. 도로 짐 풀까요?”

잠시 눈동자가 흔들렸으나 클라인은 곧 다부지게 지시했다.


“아니. 계속 싸.”

“하지만 폐하께선…….”

“진짜 붙잡고 싶으셨다면 직접 오셨겠지.”

 

* * *

막상 클라인이 돌아간다니 싱숭생숭해서, 라틸은 그날 내내 조금 붕 뜬 기분으로 일했다.

클라인의 첫인상은 안 좋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가장 처음 궁전 안에 들인 후궁이었다. 게다가 온 힘을 다해서 호감을 보이던 사람이다 보니 이래저래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내내 이 생각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라틸은 억지로라도 생각을 클라인이 아니라 대신관 쪽으로 옮겼다.

급한 사안은 많았지만, 지금 개중에서 가장 급한 건 대신관의 정화 업무를 막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라틸은 평소보다 훨씬 늦은 시간까지 업무를 보다가, 거의 밤 8시가 되어서야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막 스푼을 들고 있자니 5경비단 단장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폐하.”

5경비단 단장은 하렘에서 근무하기에, 라틸은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불안감을 먼저 느끼고 스푼을 도로 내려놓았다.


“클라인 황자가…… 하렘 창고 열쇠를 가지고 달아난 것 같습니다.”

역시나. 그리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게다가 황당했다.


“뭐? 어디 열쇠?”

 

* * *



“정말입니까?”

집에 돌아갔다가 급히 돌아온 시종장은 빠르게 걷는 라틸을 뒤따라가며 작게 물었다. 대충 사정을 듣고 온 시종장 역시 몹시 황당한 눈치였다.


“높은 확률로 정말인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이 가져갔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왜 5경비단장은 열쇠를 클라인 황자가 가져갔다고 하는 겁니까?”

“클라인 방에 아예 편지가 있었답니다.”

시종장은 라틸이 설명하면 할수록 더욱 황당한지 눈이 동그래져 물었다.


“예? 자기가 범인이란 편지요? ……그 편지도 가짜가 아닐까요?”

하렘 내부에 있는 창고 앞에는 경비병들이 이미 출입을 막고 둘러서 있었다. 그들이 라틸을 피해 옆으로 물러나자 라틸은 굳은 얼굴로 창고 앞으로 걸어갔다.

창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라틸은 손을 뻗어 자물쇠를, 정확히는 자물쇠에 걸려 있는 팔찌를 손바닥에 얹었다. 자신이 클라인에게 보낸 그 팔찌였다. 인형 목에 걸어주라고 보낸.

그걸 보자 라틸은 불쾌해졌다. 뭐야 이건. 무슨 뜻이야?


“서넛 경. 이거 뭔 뜻 같습니까?”

“엿 먹고 두 번 다시 찾지 말란 뜻 같습니다.”

라틸이 인상을 찌푸리고 돌아보자, 서넛이 마지못해 덧붙였다.


“해석의 여지가 있긴 합니다. ……그냥 제 해석입니다.”

서넛은 무어라 더 말하려 했으나 경비병이 커다란 편지 봉투를 가져와 내밀자 입을 다물었다.


“이게 침대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폐하.”

라틸은 경비병이 건넨 편지 봉투를 황당해 받아들었다. 편지 봉투는 신년회 초대장에나 쓸 법하게 화려하고 커다랬다. 아니 커다랗다 못해 거대했다.


‘꼭 발견하라고 이걸 둔 건가.’

의심스러웠다. 별개로 경비단장이 왜 창고 열쇠를 가져간 범인으로 클라인을 짚었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봉투에 아예 클라인 이름을 써 놓고 갔으니까.

라틸은 봉투를 뜯어보았다. 딱 한 문장이 쓰여 있었다.

-폐하는 평소 절 소중히 여기지 않았죠.

라틸은 혈압이 올라와 목 뒤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궁전 내부에서 사용하는 창고는 특수한 자물쇠와 열쇠를 사용했다. 안에 국보라 할 만한 귀한 보물들이 많다 보니,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반대로 말하자면 열쇠를 잃어버리면 주인도 찾기 곤란하단 뜻이었다. 열쇠를 다시 제작하면 되긴 하지만 시간이 좀 오래 걸리는 일이니까.


“진짜 이 인간을…….”

라틸을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우선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하기로 작정하고서 서넛에게 지시했다.


“서넛 경. 대신관에게 가서, 골치 아픈 일이 생겼으니 정화 건은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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