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반 이상 사라질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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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화. 반 이상 사라질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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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화. 반 이상 사라질지도
2022.07.24.
같은 대치 상태인데, 한 사람은 웃고 있고 한 사람은 긴장해 있었다.
어느 쪽이 우위에 있는지는 그들의 표정에서부터 드러났다.
이대로 두었다간 칼라인이 다칠 것 같자, 라틸은 일부러 중간 지점으로 걸어가며 둘을 말렸다.
“그만.”
하지만 큰 소용은 없었다. 라틸이 굳이 중간에 끼어든 게 무색하게도, 둘은 라틸의 위쪽으로 뛰어오르며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
그 움직임에 가만히 있던 라틸의 머리카락까지 흔들렸다.
라틸은 놀라 위를 쳐다보았다. 바로 위쪽에서 부딪치는가 싶던 이들은 옆으로 이동해 싸워대고 있었으나, 눈 깜짝할 사이 수십 번씩 오고 가는 맹렬한 움직임은 다 파악하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게 뱀파이어들의 싸움인가.’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속도에 라틸은 마른침을 삼켰다.
누가 이기고 있는 건지도 잘 구분하기 어려웠으나, 그래도 집중하면 중간중간 부분부분 싸움의 장면은 볼 수 있었는데, 볼 때마다 칼라인이 얻어맞는 건 확실했다.
기르골은 치사하게도 들고 있던 화분으로 칼라인을 자꾸 때리고 있었다.
‘뛰어들어야 하나?’
라틸의 눈동자가 기르골이 칼라인에게 부딪쳤다가 한 번씩 떨어지는 순간을 예리하게 탐색했다. 몇 번이나 라틸은 주먹을 쥐었다가 펼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뛰어들 만한 순간은 여러 번 있었으나, 두 뱀파이어의 속도가 너무 빠르니 문제였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라틸이 둘 사이에 뛰어들면 둘 모두에게 얻어맞을 것 같았다.
‘난 사람 몸이잖아. 저 사이에 끼어서 양옆으로 맞으면 죽을 건데.’
결국 생각 끝에 라틸은 활을 가져와서 화살에 시위를 쟀다. 라틸은 활보단 검을 사용하는 쪽이었으나, 귀족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활을 쏠 줄 알았다.
어차피 저 둘을 공격할 것도 아니고. 심지어 활이 날아온다 해도 뱀파이어들이니 알아서 피하겠지. 피하다가 싸움을 멈추는 것. 그게 목적이다. 라틸은 시위를 당겼다.
그런데 활을 날리기 직전. 한 발에 성인 한 명을 통째로 쥐고 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새 두 마리가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나더니, 기르골과 칼라인을 각기 집어 다른 방향으로 던져버렸다.
“!”
저건 또 뭔가 싶어 쳐다보자, 새 두 마리의 정확한 중앙 지점에 게스타가 인상을 찌푸린 채 서 있었다.
그 양손에는 꼭두각시 조종 줄 같은 게 들려 있었으나, 실은 모두 중간에 잘려 있고 매달린 인형은 없었다.
그 이상한 모습으로, 게스타는 청순하고 가련한 표정에 어울리지 않는 낮고 어두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만들 하세요…… 폐하께서 놀라시잖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라틸은 게스타에게 더 놀랐다. 당황해서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자기에게도 숨겨둔 정체가 있다는 신호를 은밀히 주긴 했지만, 아니, 최근엔 아예 대놓고 주긴 했지만, 그래도 ‘로드 쪽이겠지. 그럼 적은 아니네.’ 수준에서 그쳤는데. 대체 저 거대한 새들은 뭐란 말인가.
라틸은 멍해졌으나, 기르골은 흥미가 가는 듯 칼라인을 더 공격하는 대신 밝게 웃으며 말했다.
“동창회 하는 기분인데?”
게스타는 인상을 썼다.
“이게 동창회라면 그쪽은 다른 학교 학생일 텐데요.”
게스타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거대한 새들이 이번에는 위협적으로 칼라인과 기르골의 주위를 맴돌았다. 발톱만 움직여도 사람의 목 정도는 우습게 부러뜨릴 수 있을 흉포한 기세로.
기르골은 웃으면서 손을 내렸다.
“걱정 마. 난 지금 조용히 지내는 중이라.”
게스타가 칼라인을 보자, 칼라인 쪽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더 싸울 것 같지 않자 게스타는 그제야 손을 내렸다.
게스타가 손을 내리자 거대한 새 두 마리 역시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폐하. 왜 저자가 여기 있소?”
그러나 한 궁전 안에 사이 안 좋은 이들을 엇갈리게 배치한 부작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험악한 목소리에 돌아보자 이번에는 므라딤이 험악한 눈으로 기르골을 보고 있었다.
넌 대체 어디서 온 거냐. 어디 있다 온 거야. 왜 하필 지금 왔는데! 라틸은 혈압이 올라서 속으로 항의했다.
기르골은 사람 속이 뒤집히는 와중에 느긋하게 웃었다.
“맞네. 동창회.”
가까스로 가라앉혔던 분위기가 다시 날이 서기 시작했다.
게스타가 손을 올리자 사라졌던 거대한 새들이 이번에는 세 마리로 늘어나 나타났고, 칼라인 역시 뱀파이어다운 분위기로 돌입했다.
므라딤의 머리카락은 바람도 안 부는데 혼자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그의 주위로 물방울 같은 것들이 방울방울 고이기 시작했다.
숫자는 더 늘어났지만, 이 늘어난 이들이 모두 다 기르골 한 사람을 적대하는 모양새. 그러나 이 와중에도 기르골은 여유롭게 웃고만 있었다.
저 셋이 기르골을 제압해도 문제, 기르골이 저 셋을 제압해도 문제, 넷이 싸우다가 난전이 벌어져도 문제인 상황에 라틸은 더는 참지 못하고 활시위를 당겨 정확히 그들 중앙을 향해 쏘았다.
‘핑’하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조그만 화살 하나가 네 사람의 중앙 지점 바닥에 박혔다. 첨예하게 대치하던 이들이 드디어 라틸 쪽을 돌아보았다.
라틸은 정색하고서 명령했다.
“그만하고 다들 돌아가.”
그러나 지시를 따르기는커녕, 기르골은 가엾어 죽겠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너무 앙증맞은 무기 같아, 아가씨.”
라틸이 발끈하기도 전에 칼라인이 이를 내밀었다. 거기에 기르골이 재밌어 죽겠다는 듯 웃으며 화답하려는 찰나. 라틸은 이번에는 기르골이 안고 있는 화분을 향해 활을 쏘았다.
퍽 소리가 나며 화분에 금이 가자, 내내 웃고만 있던 기르골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빠져나갔다.
금이 간 물병 밖으로 물이 새어나가듯 서서히 웃음이 사라지는 모습에, 라틸은 활을 내리면서 다시 한번 명령했다.
“다들 돌아가.”
기르골이 말을 들을지 안 들을지 자신할 수 없는 데다 자꾸 웃음기가 빠져나가는 얼굴 때문에 좀 무서웠지만, 그래도 내색하진 않았다.
자기는 로드를 직접 못 죽인다는 기르골의 말을 믿고 행동하는 거였다. 원리는 모르겠지만 본인 입으로 그렇다니까.
“…….”
“…….”
“…….”
“…….”
잠깐의 침묵 후. 칼라인이 제일 먼저 손을 내리면서 순순히 대답했다.
“예.”
그가 원래의 섹시한 용병왕 모습으로 돌아오자, 게스타도 천천히 손을 내렸고 새 두 마리의 모습도 사라졌다.
“남은 하나도 넣어, 게스타.”
그걸 본 라틸이 추가로 덧붙이자, 남은 새 한 마리도 사라졌다.
므라딤 역시 이 상황에 혼자 날뛸 수는 없는지, 서늘하게 기르골을 노려보면서도 기운을 눌렀다. 흔들리던 머리카락이 점점 차분하게 가라앉은 걸 보면 확실했다.
다행히 기르골도 실실 웃더니 “알았어. 알았어.” 하고 중얼거리면서 화분을 꼭 끌어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새어나가는 흙을 막았다.
가장 분위기를 늦게 눌렀으나, 가장 먼저 돌아서서 가버린 것도 기르골이었다. 그가 사라지자 다른 이들도 흩어졌다.
칼라인과 게스타는 라틸과 함께하고 싶어 했으나, 라틸은 고개를 저어 다들 돌아가란 암묵적인 명령을 내렸다.
넷 모두 사라지자 라틸은 그제야 활을 내리고서 화살을 풀고 식은땀을 닦았다.
‘다 모여 있다 보니 위험해.’
다른 이들은 그래도 통제가 되는데. 기르골이 섞이는 순간 모든 게 망가져서, 다른 이들까지 통제하기 어려워진다.
문제는 그 원흉인 기르골을 다른 곳에 보내면, 그 나름대로 역시 신경이 쓰인다는 점이었다. 거기서 뭘 할지 모르니까.
* * *
“…….”
눈을 감은 채 그림처럼 기도하던 대신관이 갑자기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운동할 때도 마찬가지지만, 대신관은 기도할 때 집중력이 몹시 강했다.
그런 대신관이 갑자기 기도 도중 눈을 뜨자, 옆에서 시중을 들던 백화가 그게 이상하게 여겨져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대신관은 미간을 찌푸리고서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악한 기운이…… 나타났다가 사라졌습니다.”
“악한 기운이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요.”
백화는 고개를 기우뚱하다가 감탄했다.
“과연 대신관님은 대단하십니다. 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거든요.”
대신관의 수행사제 겸 시종인 구벨은 ‘자랑이다’라고 생각했으나, 굳이 자기 생각을 표현하진 않았다.
대신관은 백화의 칭송에도 표정 변화 없이 일어나 천천히 창가로 걸어갔다.
이윽고 창밖을 빤히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 이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대신관은 제자리에 붙어선 채 걱정스러운 얼굴로 구벨을 돌아보았다.
“구벨. 폐하께서 날 보기 싫다 하면 어쩌지?”
* * *
기르골을 포함해 위험하기 짝이 없는 후궁들을 어떻게 통제해야 할지, 여기에 참여하려고 드는 므라딤은 또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라틸은 고민에 잠겨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막 씻고서 잠자리에 들려 하니, 시녀가 다가와 알려주었다.
“폐하. 대신관님께서 오셨습니다.”
“대신관이? 이 시간에?”
“네.”
라틸은 시계를 보았다. 밤 10시 30분. 대신관이 평소 찾아올 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라틸이 악몽을 꾸고 싶지 않을 땐 그를 밤에 부르기도 했지만, 요즘은 일부러라도 도미스의 기억을 보려 하고 있었기에 그런 일도 점점 줄고 있었고. 그런데 무슨 일일까?
“들여보내 줘.”
“예.”
시녀가 나가자 교대하듯 대신관이 안으로 들어왔다.
라틸은 웃으면서 그를 맞이하려다가 대신관이 눈치 보는 걸 발견하고서 의아해졌다.
“왜 그러느냐?”
평소답지 않은 태도에 호기심이 들어 묻자, 대신관은 라틸의 눈치를 연신 살피면서 물었다.
“전에 제가 폐하 부탁을 거절한 일로…….”
“응?”
그런 일이 있었던가, 생각하자마자 그런 일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일은 결국 백화가 나서주어서 해결된 지라, 라틸은 이미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일이었다.
결정적으로 아이니는 결국 진짜 대적자가 맞았고. 물론 아니라고 몰아갈 생각이긴 하지만.
어쨌든 자신은 이미 잊고 있던 일을, 정확히는 잊어버릴 수 있던 일을 대신관은 아직까지 쩔쩔매며 눈치를 보자, 라틸은 괜히 미안해졌다.
“그땐 나도 감정이 격해져서.”
“중요한 일이었습니까?”
“어? 아니, 중요한 일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일이었다 할 걸 그랬나. 중요한 일이 아니라 하고 보니까 내가 굉장히 쪼잔한 사람이 된 거 같은데?’
하지만 중요한 일이었다고 하면 대신관이 계속 눈치를 볼 것 같아서, 라틸은 자신이 그냥 쪼잔한 사람이 되기로 하고 웃었다.
“그보다 이 시간엔 무슨 일로 왔어? 그 일 얘기하러 온 건 아닐 테고.”
라틸은 일부러 톡톡 침대 옆자리를 두드렸다.
“오랜만에 옆에서 자려고?”
“그럴까요?”
이런 데는 절대로 빼지 않는 대신관이 얼른 옆에 다가오자, 라틸은 낄낄 웃으면서 옆으로 이동해 누웠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신관들 규범이 뭔지 진짜 한번 확인하고 싶다.”
“꽤 복잡한 편입니다.”
“그럴 거 같아. 그런데 정말은 무슨 일로 왔어?”
라틸은 대신관의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꼬다가, 기르골이 하던 행동이었단 걸 깨닫고 손을 도로 내렸다.
대신관은 베개를 바르게 정돈하고 누우면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하렘 안에 뭔가 사악한 것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폐하.”
아무렇게 흘릴 수 없는 말을.
라틸은 흐뭇하게 웃고 있다가 표정이 굳었다. 아니, 얘는 그걸 어떻게 안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전에 호수에서 나온 이상한 것 때문에?”
“아니요. 오늘 기도 중에 갑자기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예리하네.’
“괜찮으시다면 제가 한 번 전체적으로 정화 작업을 해도 될까요,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