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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화. 아가씨는 사기꾼이야 (250/367)


250화. 아가씨는 사기꾼이야
2022.07.20.



 
성기사가 전해준 문제는 라틸의 발목을 콱 움켜잡았고, 그 때문에 평소보다 회의실과 집무실 사이를 오래 맴돌아야 했다.

뒤늦게 안건을 들은 이들이 계속해서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는 통에 라틸은 같은 주제를 도돌이표처럼 또 듣고 듣고 계속해 들었다.

결국 일이 끝났을 때는 이미 저녁 식사를 마치고도 산책까지 했을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가도 되려나.’

기르골에게 아이니가 대적자인지, 대적자의 검은 왜 그녀에게 있는 건지 물어보려 했는데. 라틸은 대충 오늘의 일거리를 끝냈을 즈음 시계를 보며 고민했다.

후궁이라면 그냥 저녁이라도 찾아가도 되는데. 기르골은 어쨌건 대외적으로는 윌랑 왕자의 호위인지 시종인지 하여튼 그런 거였다. 정확히 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이럴 때 그를 찾아가도 될까?

대답은 짜증이 가득한 윌랑 왕자의 표정과 혐오감뿐인 눈동자가 떠오르자 바로 나왔다.


‘될 거야.’

잠깐의 고민 끝에 라틸은 긍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손님들이 머무는 건물로 찾아갔다.

윌랑 왕자는 라틸이 찾아가든 안 찾아가든 싫어할 사람이니, 그렇다면 찾아가서 번거롭게 해주고 싶었다.


“폐하. 오셨습니까.”

라틸이 윌랑에서 온 사절단이 사용 중인 건물로 다가가자, 지나다니던 사절단이 얼굴을 알아보고 다들 인사해왔다.


“그래.”

라틸은 그들에게 간단하게만 답례하면서 계속 걸어갔다.


“왕자님은-.”

“왕자를 찾아온 게 아니니 신경 쓸 일 없다 해라.”

왕자의 시종 같은 이가 다가와 슬그머니 말을 걸었지만, 라틸은 일부러 건조하게 대답할 뿐 쳐다보지도 않았다.

마침내 전에 기르골에게 꽃다발을 준 곳에 도착하자, 라틸은 그제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전에 그자를 찾으십니까, 폐하?”

일전에도 라틸을 따라 이곳에 온 적이 있던 호위가 물었다.


“그래.”

라틸이 대답하자 호위는 얼른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 방을 쓴다고 들었습니다.”

전에 라틸이 기르골에게 꽃다발을 건네는 걸 보고 일부러 방 위치를 알아둔 모양이었다.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쪽으로 걸어갔다.

방문 앞에 도착한 라틸은 짧게 숨을 들이마시고서 똑똑 문을 두드렸다.

누구냐는 질문도 없이 방 안쪽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와 아가씨.”

그 아가씨 소리에 호위의 표정이 다시 굳었지만, 라틸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자 기르골이 화분 50개를 늘어놓고 거기에 물 주는 모습이 보였다.

기르골은 43번째 화분에 물을 뿌리더니 굽혔던 허리를 펴면서 라틸에게 알려주었다.


“저 문 뒤에서 아가씨 호위가 구시렁거리고 있어. 아가씨는 너무 얼굴만 본대.”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순애보 이미지는 물 건너갔구나. 사실 순애보 이미지를 꼭 가지고 있을 필요도 없지만.’

기르골이 환히 웃으면서 “내 성격이 나빠 보여, 아가씨?” 하고 묻자, 라틸은 호위의 안전을 위해 얼른 말을 돌려 본론을 꺼냈다.


“아이니 황후가 대적자의 검을 가지고 있다던대.”

“소문이 느리네.”

“진짜야?”

“우리 제자님 물건이 될 뻔했는데. 다른 사람한테 가서 아쉬워?”

“진짠가 보네.”

기르골은 45번째 화분에 물을 쫄쫄쫄 따랐다.

라틸은 근처에 있는 소파에 슬며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그가 작업을 끝내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기르골이 마지막 화분에 물을 다 주자, 라틸은 조금 기대감을 가지고 물어보았다.


“내가 사디란 걸 알았으니까. 이번엔 대적자 편들지 않을 거지?”

전에 와서 꽃다발도 줬고, 충격받으라고 일부러 사디일 때 한 말과 도미스일 때 한 말까지 해주었다. 그러니 심경에 변화가 좀 오지 않았을까?


“내기할까?”

그러나 기르골은 뭐든 쉽게 갈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가 물뿌리개를 내려놓으며 묻자 라틸은 작게 끙 소리를 냈다.

내기 진짜 좋아하네, 저 뱀파이어.


“무슨 내기?”

“꽃을 뜯어먹으면 입에 향기가 남아, 아가씨. 알아?”

“보통은 모르겠지.”

“누가 향기를 가장 오래 머금고 있는지. 어때?”

“차라리 빨리 꽃 뜯어먹는 사람이 이기는 내기로 하지그래?”

“그러면 아가씨가 지잖아.”

왜 이런 내기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라틸은 일단 제안을 받아들이고서, 호위에게 꽃다발을 여러개 빨리 가져오라 지시했다.


“꽃다발이요?”

호위는 ‘그걸 전부 다 저 하얀 머리에게 주시려고요?’라는 뉘앙스로 되물었으나, 라틸이 빨리 가져오라고 재촉하자 마지못해 나갔다.

잠시 뒤. 호위는 급조한 것치고는 그럭저럭 예쁜 꽃다발을 한가득 가져왔다.

손이 모자란지 다른 이들까지 꽃다발을 들고 왔다.

그들이 물러나자 기르골이 꽃다발 하나를 집으며 “시작.”이라 말했고, 곧 천천히 꽃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라틸은 꽃을 먹지 않고 기르골을 쳐다보기만 했다. 기르골이 그 모습을 이상하게 쳐다보았지만 라틸은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입에 향기가 어떻게 남을진 모르겠지만, 라틸은 기르골처럼 꽃을 잘 먹을 수 없었다.

한 잎 정도라면, 아니 두 잎이나 세 잎까지는 그래도 억지로 먹겠지만 그 이상 가면 표정이 구겨지고 오만상이 지어질 것이다.

꽃잎 먹기를 좋아하는 기르골은 그걸 보고 기분이 상할 게 분명할 터. 정공으로 내기에서 이길 자신이 없으니, 속임수를 쓸 생각이었다.

효과가 있었는지, 기르골이 꽃다발을 세 개 정도 먹다가 고개를 기웃하며 물었다.


“아가씨는 안 먹어?”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던 라틸은 소파 안쪽에서 기르골 가까이로 이동했다.

라틸이 이상하게 이동해오자 기르골은 눈썹을 치켜떴다.

그의 눈썹이 내려오기 전. 라틸은 소파에서 느려빠진 용수철처럼 슬그머니 무릎을 펴 그의 입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도로 내려왔다.



“!”

그 상태로 슬쩍 기르골의 눈치를 보니, 그는 이런 걸 예상치 못한 듯 완전히 돌이 되어 있었다.

눈썹을 물론 속눈썹조차 떨리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정적에 잠긴 모습은 다른 의미로 정말 사람 같지 않았다.

라틸은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기르골이 눈동자만 아래로 툭 내려 자신을 보자마자 밝게 웃으면서 둘러댔다.


“그대 향기를 내가 다 가져왔으니 내 승리야.”

스스로도 헛소리라는 걸 알았으나, 기르골을 상대하는 일이라면 약간 꼼수가 필요했다.

라틸은 심장이 두근두근해서 그의 반응을 살폈다. 먹혔……을까? 통할까?

지금까지 본 바로 기르골은 의외인 상황에 약한 것 같았다. 게다가 ‘사디’에게 빈말이지만 연애하잔 말도 했지.

그러니 어쩌면……!


“바람둥이가 됐구나 아가씨.”

먹힌 건가? 아닌 건가?


“날 흔들리게 하네.”

조마조마하던 마음이 기르골의 한숨 섞인 말에 활짝 피어났다.

라틸은 자신의 계책이 통한 데 만족해서 밝게 웃었다.


“그런데 무효야.”

그 미소는 1초도 되지 않아 다시 사그라들었다.


“어째서!”

라틸이 항의하자, 기르골은 아까 굳어 있던 게 환상이었던 것처럼 덤덤하게 대답했다.


“사기잖아.”

“애초에 종목 자체가 그대에게 너무 유리했어.”

“그러면 종목을 바꾸자 했어야지.”

“……종목을 바꿀까?”

“뭐로?”

“이름이 긴 사람이 이기는 걸로 하자.”

기르골의 입꼬리 양옆이 뚝 떨어졌다.

라틸은 시무룩해져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고서 힐긋 앞을 보니, 아까는 입을 뒤집어진 U 모양으로 하고 있던 기르골이 이번에는 웃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놀리는 건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태도로 말했다.


“걱정 마, 아가씨. 당장은 다른 데 갈 마음이 없으니까.”

“정말이야?”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어디로 갈지 모르지만.”

“뭐?”

황당해서 되묻는데, 대답보다 먼저 기르골이 코앞에 나타났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 기르골의 얼굴과 맞대게 된 것이다.

코끝이 닿을락 말락 하는 거리에 라틸이 눈을 커다랗게 뜨자, 기르골은 라틸의 코끝을 쿡 누르고서 웃었다.


“내가 어디 못 가게 아가씨가 날 계속 지켜보면 되잖아.”

“협박하는 거야?”

“아가씨 같은 사기꾼에게 대항하려면 어쩔 수가 없네.”

“…….”

“그보다 난 아가씨가 대적자의 검을 뽑은 원리가 더 궁금한데. 아가씨는 그건 안 궁금해?”

잠깐이지만 궁금하기는 했다. 살아남는 데 그리 필요한 정보가 아니라 바로 잊어버렸지만.

그래도 새삼 듣고 나니 궁금해지긴 해서, 라틸은 신중하게 질문했다.


“궁금해. 다른 로드들은 못 뽑았어?”

“못 뽑았어……라고 하기엔 시도도 해본 적이 없지. 내가 안 줬으니까.”

“내가 최초야?”

“그럼. 아가씨는 최초로 대적자라고 사기 친 로드야. 축하해.”

“!”

저놈 왜 자꾸 나를 사기꾼으로 몰아가는 거 같지? 라틸이 멍하게 바라보자, 기르골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리듯 올라갔다.


“뭐. 어쨌든 적이 됐을 때 가장 위험한 건 나지만, 당장 난 그럴 마음이 없으니 예외로 치고. 안전 때문에 이러는 거라면 다른 게 더 급하지 않아, 아가씨?”

“무슨 소리야?”

“아가씨가 조심해야 할 적이 하나둘이 아닐 텐데?”

라틸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았다. 적이 하나둘이 아니라니? 기르골과 대적자. 성기사. 이 정도 아닌가? 더 있나?

기르골이 고개를 기우뚱했다.


“설마 아가씨. 나랑 대적자 둘이서 로드를 이겼다 생각해?”

라틸은 얼른 손을 저었다.


“아니. 성기사들 있잖아. 하지만 성기사들은 이번엔 ‘우리’ 편이야. 내 밑으로 들어왔거든.”

라틸은 슬그머니 기르골도 자신의 진영에 밀어 넣고서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다행히 기르골은 그 부분을 인지하지 못했는지 넘어가 주었다.


“성기사가 아가씨 편인 건 확실해? 그 인간들은 아가씨 정체를 모르지 않아?”

그다음에 한 말이 너무 지독했지만.

라틸이 시무룩해 쳐다보자, 기르골은 좀 더 심각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뭐, 아가씨가 데리고 있는 성기사들이 평생 정체를 모르고 아가씨 편이 될 수 있다고 쳐도. 기사단이 왜 하나일 거라고만 생각해, 제자님?”

기르골이 스승 모드로 돌아왔으나, 라틸은 그가 한 말에 더욱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럼 다른 기사단이 더 있단 건가?”

“없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라틸은 칼라인의 꿈에서 본 도미스의 최후를 떠올렸다. 단둘뿐이던 칼라인과 도미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수많은 기사들.


‘그러니까, 백화랑술은 내 정체를 모르고 있으니 양날의 검이나 마찬가지고. 설령 백화랑술이 내 편으로 남는다 해도, 더 많은 적들이 있단 건가.’

 

* * *

라틸은 기르골에게 더 묻고 싶었으나, 그가 갑자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소파에 털썩 앉아 꽃을 뜯어먹기 시작하자 더 물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귀찮게 말을 굴면 그의 젠가 같은 정신머리가 톡 빠지면서 어디로 튈지 모를 것처럼 보인 탓이다.


‘기르골은 정신력이 너무 약해. 아군이 되더라도 위험한 존재 같다.’

그걸 본 라틸은, 기르골은 아군으로 만들기보다는 적이 되지 않게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군으로 들여도 큰일 날 뱀파이어 같았으니까.

어쨌든 기르골과 더 대화할 수 없는 상황이자, 라틸은 이번에는 칼라인을 찾아갔다.

칼라인은 라틸이 도미스의 염원에 대해 말해주지 않고 가버린 탓인지 평소보다 좀 무뚝뚝하게 맞이해주었으나, 라틸이 대적자 이야기를 꺼내자 최대한 사감을 누르고 정직하게 대답해주었다. 모른다고.


“저는 대적자가 제대로 대적자 노릇을 할 때 곁에 있던 적이 없습니다, 주인.”

“넌 모든 걸 다 알 것 같은 분위기인데. 의외로 아는 게 적구나, 칼라인.”

“적의 수가 아주 많았던 건 압니다.”

“그건 나도 알아.”

한숨을 내쉰 라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쩔 수 없지. 기르골이 제정신이 돌아오면 그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라틸은 칼라인의 어깨를 두드리고서 문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문을 나가 그의 후원을 지나가고 있자니, 칼라인이 뒤늦게 따라와 물었다.


“주인은. 그걸 어떻게 아는 겁니까?”

새삼 생각해보니, 자신도 모르는 걸 라틸이 대체 어떻게 아나 의아한 듯했다.


‘아아. 칼라인은 아직 기르골이 윌랑 사절단에 섞여 온 거 모르지.’

라틸은 칼라인에게 기르골 이야기를 해줘도 될까 말까 잠시 주저했다.

그러나 라틸이 결정을 내리기 전. 칼라인의 뒤에서 누군가 먼저 대답했다.


“내가 얘기해줬어.”

그 소리를 듣자마자 칼라인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나른한 표범 같은 모습에서, 진짜 뱀파이어 같은 스산한 모습으로 변했다.

칼라인은 뒤를 돌아보았고, 라틸도 칼라인의 뒤에 선 이를 보았다.

언제부터 있던 건지, 기르골이 히죽 웃은 채 화분을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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