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역시 네가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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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화. 역시 네가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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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화. 역시 네가 아니었어!
2022.07.17.
“전대 로드는 환생하고 싶지 않아 했소.”
뜻밖의 말에 라틸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정말이야? 아니…… 왜?”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뭐 환생을 계속해서 나쁠 건 없지 않나?
“환영받고 싶다 했소.”
그러나 므라딤의 설명에 라틸은 조금 납득했다.
“아…….”
도미스는 여기저기 쫓겨 다니고 자주 울었다. 아픈 기억이 많으니, 힘겹게 살다 보면 그렇게 생각할 것도 같았다.
“그럴 만하지.”
“전대 로드에 관해 아시오?”
“조금. 외롭고 고생을 많이 했더라고.”
“그렇소? 내가 만났을 땐 동료들이 이미 많아서. 그랬던 건 몰랐소.”
그러나 므라딤의 이어진 설명은 라틸이 알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동료들이 많았어?”
늘 배신만 당하던 도미스가? 라틸이 얼떨떨해 묻자 므라딤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틸은 조금 안심해서 중얼거렸다.
“다행이네.”
앞으로 꿀 도미스의 기억 뒷부분은 조금 희망적인 모양이다. 하지만 다시 라틸은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기웃했다.
“그럼 누구한테 환영받고 싶단 거야?”
“본인이 환영받고 싶단 게 아니오.”
“응?”
“우리 같은 이들 말이오. 인간이 아닌 이들.”
“!”
“밝은 곳에서 살고 싶어 나오지만 나올 때마다 쫓겨가는 게 가엾다 했소.”
라틸은 눈을 끔뻑거렸다. 도미스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하긴. 착하니까 그런 말을 할 사람 같긴 하다. 이쪽 입장에선 너무 착해서 호구 같을 정도지만.
“하지만…….”
너희는 사람을 죽이잖아? 그러나 라틸은 도미스의 사상에 완전히 공감할 수 없어서 뒷말을 우물거렸다.
물론 자신 역시 식시귀를 죽여 보란 기르골의 제안에 ‘아직 사람을 안 해쳤으니 싫다’라고 대답하긴 했다. 그렇더라도 도미스만큼 박애적인 포용력을 발휘할 정도는 아니었다.
므라딤은 라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아들었단 얼굴로 미소지었다.
“영혼이 같다고 기억이 같진 않지. 전대 로드 생각이 다 옳은 것도 아니고,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도 아니오. 그저 그랬다 말하는 거지.”
“…….”
“어쨌든 전대 로드는 환생하고 싶지 않아 했소. 이걸 위해 당시 대적자와 뭔가 거래를 했지.”
라틸은 여기서 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인간 외 종족들도 환영받았으면 좋겠단 게 왜 자신이 환생하지 않는 결론으로 간 거지?
게다가 대적자와 거래라니. 도미스는 결국 대적자 손에 죽지 않았나? 그런데 무슨 거래를? 언제?
“뭘 거래했는데?”
“나도 모르겠소. 거래를 할 거라고만 했으니.”
어깨를 으쓱한 므라딤은 라틸을 빤히 보다가 덧붙였다.
“하지만 실패한 모양이오. 성공했다면 현재 로드가 여기 있진 않겠지.”
“그러게.”
라틸은 인상을 찡그렸다. 혹시 자신이 도미스의 기억을 볼 수 있는 건, 심지어 골라서 편집된 기억을 볼 수 있는 건, 도미스가 한 짓인가? 환생한 자신이 자기 염원을 이어서 해주길 바라서?
‘꽤 가능성 있어 보이는데? 기르골 반응을 봐. 나 이전엔 전생을 기억한 로드들이 없었다잖아.’
“로드. 그리고 그거 아시오?”
멍하게 생각에 잠겼던 라틸은 므라딤의 의미심장한 부름에, 또 뭔가 있나 싶어 긴장해 옆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므라딤이 씩 웃었다.
“자연스럽게 내게 말을 놓으셨소, 로드.”
“!”
* * *
‘므라딤은 기르골이 여기 있는 건 모르나 봐. 다행이라 해야 하나. 전에 보니까 사이가 어마어마하게 나쁘더니만.’
므라딤이 머리카락을 말려야겠다면서 다른 곳으로 갑자기 가버리자, 라틸은 난데없이 끊긴 대화에 당황해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므라딤은 피인어니까 사람들과는 뭔가 달라도 다를 거란 걸 떠올리고서, 황당한 기분을 누르고 자신 역시 방향을 틀어 칼라인에게 걸어갔다.
그런데 칼라인은 방 안에 없었다.
‘아침부터 어딜 갔지?’
대신관이라면 아침 훈련을 갔겠지만, 칼라인은 딱히 그런 취미도 없어 보였는데. 의아한 기분에 몸을 돌리던 라틸은.
“주인.”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어느새 칼라인이 라틸의 바로 뒤에 딱 붙어 서 있었다.
“너…… 진짜 인기척이 없구나.”
라틸이 심장을 쓸며 묻자 칼라인이 입꼬리를 미약하게 올렸다.
“그래서 평소엔 일부러 소리를 내면서 다닙니다.”
“그래라. 놀라라.”
여전히 심장은 쿵쿵 뛰고 있었으나 라틸은 적당히 손을 내렸다. 그러나 라틸이 손을 내리자마자 그 위치 가까이 칼라인의 얼굴이 다가왔다.
쑥 다가온 얼굴에 라틸의 심장이 다시 뛰었으나, 칼라인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서 불만스레 물었다.
“다른 남자 품에 쉬러 가시겠다더니. 다 쉬고 놀러 오셨습니까?”
‘코가 왜 이렇게 밝아?’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
“물어볼 거라니요?”
라틸이 주위를 둘러본 다음 작게 “전생 일로.” 하고 말하자, 그리 달갑지 않은 화제인 듯 칼라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라틸은 그 변화를 모른 척하고서 물었다.
“혹시 도미스가, 뭐 원하던 게 있었어?”
“저입니다.”
“말고는?”
칼라인은 고개를 저었다. 라틸은 목에 힘을 주었다. 뭐야. 칼라인도 모르던 목표였나? 그걸 므라딤이 알았다고?
그것도 좀 이상하지 않나? 의아했다. 하지만 므라딤이 거짓말을 했다고 여기기엔, 그것도 역시 이상했다. 이런 걸 므라딤이 거짓말해서 뭐에 쓴단 말인가.
게다가 므라딤은 로드들의 성격이나 가치관이 매번 달랐다는 걸 확실하게 짚어주었다. 라틸이 도미스의 염원을 계속 이어나가기를 딱히 바라는 눈치도 아니었다.
“주인?”
“므라딤, 그 피인어 수장이 그러던데. 도미스가 염원하던 게 있대. 그걸 위해서 당시 대적자랑 뭘 거래했다던데. 뭘 거래했는지 알겠어?”
칼라인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도미스가…… 원하던 게 있다고요?”
라틸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충격받은 표정이 되었다.
“진짜 모르고 있었나 보네.”
라틸이 중얼거리자 칼라인은 얼떨떨하게 바라보다가 다급히 물었다.
“그게 뭡니까?”
“별건 아니고…….”
라틸은 솔직하게 대답해주려다가 주저했다. 막상 말하려고 보니, 도미스가 칼라인에게 자기 염원을 비밀로 했는지 알 것 같아서.
칼라인은 도미스를 만나고 싶어서 500년을 기다렸다. 그런데 거기에 대놓고 ‘도미스는 환생 안 하고 싶어했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주인.”
라틸이 애매하게 말을 끊자 칼라인이 애원하는 목소리로 불렀다.
“나 일할 시간. 회의 있다.”
그 표정은 확실하게 동정심을 자극했지만, 라틸은 넘어가지 않고 휙 돌아서서 가버렸다. 칼라인은 눈 깜짝할 사이 라틸의 옆으로 다가와 다시 애원했다.
“주인.”
라틸은 아예 뛰어서 달아나버렸다.
* * *
아이니는 침대 등받이에 커다란 베개를 놓고 기대어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야 할 것들이 몇 개 있었으나, 여러 가지로 심란해서 몸을 움직일 기력조차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단 생각에 억지로 침대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때마침 밖에서 루이스가 “황후 폐하.” 하고 다급히 그녀를 불렀다.
“들어와라.”
루이스는 들어오다가, 아이니가 일어서려는 걸 보고 다가와 얼른 부축해주었다. 아이니는 루이스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일어나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들어올 때 루이스의 목소리가 다급한 걸 떠올리고 한 질문이었다.
역시나, 루이스는 아이니가 균형을 잡고 스스로 서자 손을 놓고서 얼른 대답했다.
“타리움 소식이 왔습니다.”
“타리움? 사절단을 보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답이 와?”
“아니요, 그 일이 아니라, 다른 일입니다.”
“다른 일이라니?”
루이스의 표정이 굳자 아이니는 체념조로 웃었다.
“괜찮으니 말해라. 여기서 더 충격받을 내용도 없으니.”
“성기사단 백화랑술의 기사단장이, 황후 폐하는 대적자가 아니라고 자기 명예와 이름을 걸고 말했답니다.”
루이스의 말을 듣고도 아이니는 충격받진 않았다. 하지만 기가 차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이가 없군.”
“그러니까요.”
“우리 쪽에서도 발표해라. 이쪽에 ‘대적자의 검’이란 게 있다고. 사람들 앞에서 뽑아 보일 테니, 원한다면 타리움에서 와도 좋다고. 그러면 누구 말이 옳은지 알게 되겠지.”
아이니의 덤덤한 지시에 루이스는 신이 나서 “네!” 하고 외치고는, 존경하는 눈으로 아이니를 바라보았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에 아이니는 눈살을 찌푸리고서 일부러 다른 방향을 보았다.
“전 황후 폐하 같은 분을 모시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최고의 영광이에요.”
루이스는 좋은 사람이었고 자신을 진심으로 따랐지만, 아이니는 역시 시녀들 중 죽은 레들러가 가장 좋았다.
우정이라고 할 수 있는 걸 보내준 건 레들러뿐이었다. 루이스가 자신에게 보내는 감정은 우정이라고 하기엔 부담스러운 무언가가 느껴져 곤란했다.
하지만 곧 아이니는 루이스가 보내는 이 맹목적인 충성심을 유용하게 사용할 방법이 떠올랐다.
“루이스.”
“네, 황후 폐하.”
“은밀하게 심부름을 하나 해야겠다.”
“네, 황후 폐하.”
“고위신관을 한 명 몰래 데려와다오.”
“고위신관이요?”
“헤움이 내게 뭔가 붙어 있다 했다지. 그가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 한 번 확인해 봐야겠어.”
아이니는 자신이 칼라인을 보자마자 갑자기 전생이 기억난 일과 그를 미치도록 사랑하게 된 일을 떠올렸다.
아직도 그 감정은 유효했고, 차갑게 내쳐진 후에도 그녀는 칼라인을 사랑했다. 여전히 그를 떠올리면 온 마음이 어지러웠다.
하지만 칼라인의 주장처럼 자신이 도미스의 환생이 아니라면…… 그런 감정이나 기억이 자신에게 있는 건 분명 이상한 일. 헤움의 충고를 따라봐서 나쁠 건 없었다.
그러나 루이스는 아이니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해주겠지?”
아이니가 재차 묻자 그녀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으나, 역시 난처한 기분은 그대로였다.
다가 공작님이 괜히 이상한 소문이 돌면 안 되니까, 황후 폐하가 신관 부르는 걸 막으라 했는데.
루이스는 등 뒤에서 초조하게 손가락 살을 눌렀다. 아예 안 부르자니 아이니가 실망할 것 같은데. 다가 공작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다 보니 곤란했다.
* * *
카리센에서 아이니가 ‘카리센 황후는 대적자가 아니다’는 백화의 주장을 전해 들었을 무렵.
좀비를 없애는 문제로 카리센에 갔던 성기사 역시 임무를 마치고 타리움 수도에 도착해 회의실에 있었다.
“……해서, 우선은 좀비들을 죽인 다음 성수를 채워 불에 태우는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라틸은 성기사의 보고를 차분히 듣고서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처리하는 건 보고 왔는가?”
“아닙니다.”
“그래.”
하이신스도 고민이 많겠네. 라틸은 재차 고개를 끄덕이고서 성기사를 치하했다.
“고생이 많았다. 당분간 푹 쉬도록 해라.”
말하고 나니 성기사는 따지자면 신전 소속인지라, 무언가 따로 보상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라틸이 보상을 할지, 한다면 어떻게 할지를 두고 아직 판단을 내리기 전. 성기사가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폐하. 하나 더 이상한 걸 보았습니다.”
“이상한 거라니?”
“카리센 황후가 자신을 대적자라 주장하면서-.”
“그 이야긴 들었다. 사절을 보내 대놓고 말했거든. 그대가 카리센에 떠난 후에 그 사절단이 왔지.”
“아. 그렇군요. 하지만 그 일은 아닙니다. 관련은 있지만요.”
“다른 일이 또 있다고?”
“예.”
라틸이 말해보라 손짓하자, 성기사가 과거를 자세히 떠올리려는 듯 미간을 조금 찌푸리고서 말했다.
“대적자들이 사용하는 검이 있다더군요. 카리센 황후가 자기에게 그게 있다면서 웬 검을 뽑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다른 사람들은 그 검을 못 뽑더군요.”
내내 조용히 있던 시종장이 놀라 끼어들었다.
“정말인가?”
“그게 진짜 대적자의 검인진 모르겠지만, 일단 황후 외 다른 이들이 못 뽑긴 했습니다. 게다가 웬 뱀파이어가 황후의 근위병들을 공격했고요.”
사람들은 뜻밖의 소식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라틸 역시 좀 놀랐다. 대적자의 검은 기르골이 가지고 있지 않나? 그런데 아이니 황후가 뽑았다니?
“그 검이 어떻게 생겼지?”
“전체적인 검신은 하얀색인데 금색 테가 여기저기 둘려 있었습니다. 오래된 티가 나지만 검날은 녹슬지 않고 깨끗했지요.”
“그건 너무 흔한 모양인데.”
“아. 검집에 두 개 손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손이 반대 방향에서 검집을 쥐는 모양으로요. 굉장히 정교했는데…… 더 자세히는 못 보았습니다.”
라틸은 조금 더 놀랐다. 성기사가 설명하는 검 모양은 기르골이 가지고 있던 검과 똑같았다. 일단 생김새는.
그런데 그걸 왜 아이니가 가지고 있지?
‘기르골이 이미 아이니를 만난 건가? 내 편이 되도록 회유하고 뭐고 할 것도 없는 상황이었나? ……찾아가 봐야겠어.’
* * *
보고를 들은 라틸은 업무를 마치면 기르골에게 찾아가보기로 결심했으나, 아무래도 할 일이 많은지라 그 업무가 바로 끝나지 않았다.
덕분에 그 일을 먼저 들은 건 라나문 쪽이었다. 회의실에 아트락시 공작도 있었던지라, 공작이 바로 제 아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공작은 대적자가 자신의 아들이라 알고 있었기에 무척 놀라서 달려와서는, 성기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부 다 빼지 않고 해주었다.
라나문은 아버지의 말을 심각하게 듣다가, 아트락시 공작이 “이게 무슨 뜻 같니?”라고 묻자 천천히 입술을 뗐다.
“이상하군요.”
“그래. 이상하지. 너는 네가 대적자라 하는데, 거기선 자기가 대적자라 하고 있으니.”
“그 검. 저도 본 적 있습니다.”
“본 적이 있다고?”
“대적자의 스승이란 자가 가져와서 뽑게 했거든요. 그런데 그 검을 카리센 황후가 뽑았다면…….”
“역시 내 아들은 대적자가 아니구나!”
아트락시 공작은 안심해서 그만 진심을 털어놓다가, 라나문이 서늘하게 쳐다보자 얼른 진중한 아버지의 표정을 꾸며냈다.
“아비는 네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긴단다.”
“마음에도 없는 소릴 잘하시네요.”
“하하. 사랑해, 아들.”
“…….”
라나문은 공작의 가식적인 애정 표현을 흘려들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했다. 절대로 대적자 임무를 하지 않을 거라 부정하긴 했으나, 사실 한편에서는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대적자가 맞다는 걸.
그런데 갑자기 다른 대적자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