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하고 싶어 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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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화. 하고 싶어 했던 것
2022.07.13.
아이니의 파랗게 질린 표정을 시녀들은 오해했다. 그녀들은 황후가 목 이야기를 듣고 공포에 질린 거라 여기고는 얼른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면서 위로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황후 폐하. 이젠 없는걸요.”
“그래도 찝찝하시면 방은 바꾸시는 게 어떨까요?”
아이니는 손을 내젓고서 비틀비틀 일어났다. 옷장 앞으로 간 그녀는 덜덜 떨면서 문을 열었다. 상자째 텅 비어 버린 걸 보자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황후 폐하?”
그제야 시녀들도 무언가 이상한 걸 느끼고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왜 그러세요?”
“황후 폐하. 궁의를 부를까요?”
하지만 그녀들은 차마 황후가 헤움 황자의 목을 직접 가지고 있었다고 믿고 싶지 않은 듯, 그런 생각은 하면서도 표현을 피했다.
아이니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가까스로 물었다.
“목은…… 어디로 갔느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니는 분노를 꾹 눌러 참고서 다시 물었다.
“목은 어디로 갔냐고 물었다.”
시녀 하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가까스로 대답했다.
“지하감옥에 가둬둔 좀비들을 황제 폐하께서 처리한다 하셨는데, 거기에 가져갔을 겁니다.”
아이니는 벽을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반동으로 몸을 앞으로 밀어낸 그녀는 무작정 앞을 향해 돌진했다. 지하감옥으로 가서 헤움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하감옥 근처에 갔을 때. 이미 그곳에선 매캐한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입가를 천으로 막은 하인들이 시커먼 재를 가득 담은 포대를 찝찝한 표정으로 운반하는 게 보였다.
“황후 폐하.”
그러다 아이니를 발견한 하인들이 서둘러 일을 멈추고 인사하는 걸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아이니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포대를 가리켰다.
“저 안에…… 저 안에…….”
“괴물들을 태우고 나온 재입니다, 황후 폐하.”
아이니의 표정이 하얗게 질리자, 하인 하나가 황후를 위로하기 위해 얼른 덧붙였다.
“모든 작업이 다 끝났으니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말이 끝나는 순간. 아이니는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다시 깨어났을 때. 아이니는 걱정스러운 표정의 루이스를 보았다. 그녀가 아이니의 손 하나를 두 손으로 잡고서 울먹이는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니는 몸을 일으킬 힘도 없어서 그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대체 어디서부터 뭐가 꼬이기 시작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헤움을 너무나 사랑했는데. 칼라인을 보는 순간 갑자기 홀린 듯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전생의 기억이 깨어나면서 그를 향한 마음은 너무나 깊어졌고, 나중에는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헤움이 자신의 친구를 죽였을 거란 의심과 맞물리면서 아이니는 헤움을 향한 마음을 억지로 떨치려 했다. 칼라인은 마침 거기에 딱 어울리는 상대였다.
그러나 전생 기억이 이토록 생생한데도 칼라인은 자신은 도미스가 아니라 한다. 로드는 환생을 거듭하기에, 기억이 있건 없건 그녀가 현재 로드가 아닌 게 도미스가 아니란 증거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이 대적자란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아직 칼라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고 이 마음은 애증처럼 변해갔다가 후회로 변하길 반복했다.
자신이 도미스가 아니라면 이런 마음이 왜 있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와중에 자신이 현생에서 사랑한 헤움까지 사라지자 심장이 미어질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칼라인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전생 기억이 없었더라면. 그러면 괴물이 되어 나타난 헤움일지라도 다시 가까워질 수 있었을까?
후회해보지만 돌이킬 수 없단 게 너무나 괴로웠다.
“황후 폐하.”
루이스가 말을 걸지만 대답할 여력도 없어서 아이니는 고개만 저었다.
“나중에 얘기하자.”
그러나 루이스는 목소리를 낮추어 다시 그녀를 불렀다.
“황후 폐하. 실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이니가 고개를 돌리자 루이스가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헤움 황자님이 황후 폐하께 꼭 전해달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다들 괴물이 한 말이라고 귀담아듣지 않았지만요.”
“전해달라니?”
“황후 폐하에게 ‘무언가 붙어 있다’라고 했어요.”
“뭐가?”
“거기까진 저도 잘…….”
* * *
아이니에게 헤움 황자의 마지막 말을 전한 루이스는 이후 궁전을 나왔을 때 다가 공작을 찾아가서도 그 이야기를 전했다.
“쓸모없는 황자 같으니라고.”
다가 공작은 헤움 황자가 죽었단 이야기를 듣자 화가 나서 탁자를 쾅 내려쳤다.
‘아이니를 위해 죽어달라 했더니, 고작 그렇게 사라져?’
다가 공작은 이를 갈았다. 사람들 앞에서 아이니가 헤움을 죽이게 하려 했는데. 그가 이렇게 허망하게 가 버렸으니 계획이 첫 단추부터 틀어져 버린 거나 다름없었다.
물론 아이니가 ‘대적자의 검’이란 걸 가지게 되었고 하이신스가 못 뽑는 그 검을 사람들 앞에서 직접 뽑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대적자란 건 잘 알렸지만.
그렇더라도 계획이 일그러지는 건 좋지 않은지라 다가 공작은 이마를 짚고 눈살을 찌푸렸다.
루이스는 그런 공작을 살피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황후 폐하께 뭔가 붙어 있다니. 안 좋은 게 아닐까요? 고위 신관을 불러서 한 번 봐달라 부탁해봐야…….”
“안 된다.”
다가 공작의 단호한 말에 그녀의 말은 끝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혹시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가 공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명색이 대적자인데, 위험한 게 붙었겠느냐. 그런 게 있더라도 알아서 이겨낼 거다. 내 딸은 강해.”
“…….”
“너는 황제와 아이니가 혹시라도 사이가 좋아지지 않게 잘 보도록 해라.”
“예, 공작님.”
* * *
햇살이 창문에 비스듬하게 들어와 타시르의 얼굴 반쪽을 평소보다 유난히 환하게 만들었다. 라틸은 옆으로 누운 채 한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만가만 더듬어 보았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가 손가락 아래에서 뚜렷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 형태를 손안에서 느껴보고 있자니 라틸은 싱숭생숭해졌다. 그러다가 손을 치우자 손바닥 뒤에 가려졌던 눈이 드러났다.
손을 올릴 때는 분명 눈을 감고 있었는데. 손을 치우자 타시르가 눈을 뜨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눈웃음을 짓더니 라틸의 손을 자기 입술에 가져가 손바닥 위에 한 번 부비고서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난 순애보 황제라 기록되긴 글렀구나, 하는 생각.”
라틸이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말에 타시르가 한번 짧게 웃었다.
라틸은 그가 웃는 걸 가만히 보다가 그의 품 안에 머리를 묻고 가만히 있었다.
타시르는 그게 의아한지 라틸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다가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
“갑자기 이렇게 잘해주시니 불안한데요.”
“뭐가?”
“제 시종이, 저는 사랑하는 여자를 곁에서 돕기만 하다가 나중에 행복을 빌면서 떠나주는 로맨스 소설 남자 조연 같다고 한 적이 있어서요.”
“뭐야?”
라틸이 웃음을 터트리자 타시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라틸을 좀 더 자신에게 가까이 붙였다.
라틸은 그의 가슴에 머리를 올리고서 타시르가 수제작으로 만들었단 꼬리털을 쥐고 끄트머리로 그의 목덜미를 문질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넌 날 사랑하지도 않잖아?”
“갑자기 잘해주시니 그러지요. 그리고 사랑은 합니다.”
“좀 가벼울 뿐이지.”
“그렇죠.”
라틸이 그의 옆구리를 간질이자 타시르는 움찔 몸을 움직이다가 라틸을 팔째 꽉 끌어안아 버렸다.
가벼운 말과 달리 끌어안은 힘은 강했고, 그에게서 나는 좋은 향기와 곁에 온전히 자신의 사람이 있다는 포근함은 안정적이고 편안했다.
사실 따지자면 타시르는 암살 집단으로 알려진 곳의 수장이니 아주 위험한 남자이기도 한데.
주위에 뱀파이어니 피인어니 하는 이들이 있어서인가. 그의 곁에 있으면 긴장하지 않게 되어서 좋은 것 같았다.
클라인도 물론 곁에 있으면 편안하지만 타시르와 클라인은 느낌이 아주 달랐다.
클라인은 그 생각 없는 행동이 귀엽고, 함께 있으면 같이 활력이 도는 반면, 타시르는 분명 후궁 중 제일 가벼운 성격인데도 의지가 되었다.
“이래서 다른 후궁들이 널 좋아하는 걸까.”
‘따지자면 라나문 쪽도 다른 종족은 아니지만. 걔한테는 뭔가 자꾸 눈치를 보게 된단 말이지.’
“왜 그럴까.”
“뭐가 말입니까?”
“……아니. 아니다.”
타시르가 라틸의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넣어 문지르자 다시 수마가 몰려왔다.
그러나 라틸은 밖에서 들려오는 엄청난 물소리에, 반쯤 감았던 눈을 도로 깜짝 놀라 번쩍 떠야 했다.
“무슨 소리야?”
“물소리 같던데요.”
“그건 나도 안다. 근데 여기서 물소리 날 일이…….”
피인어 므라딤의 모습이 떠오르자, 라틸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무슨 사고를 치려고?’
* * *
예상대로 밖으로 나와 보니 호수에 들어갔던 피인어들이 우르르 밖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신기해서 자기들을 쳐다보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는 태도들이었다.
개중 가장 앞줄에 있던 므라딤은 머리카락에서 물기를 짜고 있었는데, 라틸을 발견하자 대번에 가까이 다가왔다.
“좋은 밤 지내셨소, 폐하.”
므라딤을 보자 타시르 옆에 있으면서 잠시 현실에 포근하게 내려앉았던 마음이 다시 바람에 휩쓸리듯 훌쩍훌쩍 위로 올라갔다.
라틸은 아무도 모르도록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했다.
어차피 일할 시간이 다 되어 가니 슬슬 타시르 방에서 나오긴 해야 할 때였다.
라틸은 회중시계를 품 안에 집어넣고서, 제일 현실 같지 않지만, 현실인 곳으로 돌아와 므라딤을 보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인어 왕과는 나눌 말이 있었지. 잠시 같이 걸을까?”
* * *
“호수 안쪽에 이상한 것들이 돌아다니는 걸 아시오, 폐하?”
“이상한 것들?”
“흑마법사가 불러낸 존재들 같았소. 그런데 적의는 안 보이더군. 그냥 물고기처럼 흘러 다니고 있었소.”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단둘만 걷게 되자 므라딤은 신비롭고 위험한 이야기를 바로 꺼냈다. 흑마법사 운운하는 걸 보니 이 피인어는 라틸이 로드란 걸 알고 온 눈치였다.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에게 내내 궁금했던 이야기를 물었다.
“정말로 여기엔 왜 온 건가?”
국서로 받아달라며 이곳에 왔을 때. 므라딤은 괴물들을 처리하는 걸 돕기 위해 힘을 합치고 싶다고 둘러댔다. 그러나 라틸은 므라딤의 이 말을 바로 믿지 않았다.
단순히 힘을 합치기 위해서라면 굳이 국서로 오겠단 말은 안 했을 텐데. 상대는 그러지 않았으니까.
므라딤은 굳이 숨기는 대신 솔직하게 대답했다.
“폐하께서 로드란 걸 알게 되었소.”
‘역시 알고 왔구나. 짐작하던 거지만.’
“그때 찾아왔던 엘프가 폐하인 것도 알고 있소.”
“그건 잊어버려.”
라틸이 단호하게 말하자 므라딤이 한 번 씩 웃었다. 그 반짝이는 청년 같은 모습에, 라틸은 그에게 몇 살이냐고 묻고 싶어졌지만 분명 어마어마한 대답이 돌아올 듯해 관두었다.
“어쨌든 내가 로드란 걸 알고 왔다면 내 편이 되고 싶단 거. 맞나?”
“당연하지 않소. 이번에야말로 우리의 염원을 꼭 이뤄 봅시다.”
라틸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하고서 므라딤을 보았다.
“염원이라니? 무슨 염원?”
“당연히 세계 정복 아니겠소.”
라틸은 눈을 깜빡이다가 기겁해서 “어?!” 하고 되물었다.
“진짜야?”
“농담이라오.”
“깜짝이야.”
“그건 농담이 맞고. 그리고 ‘우리의 염원’이란 부분도 좀 정정하긴 해야겠소.”
“왜?”
“내가 항상 로드의 편이었던 건 아니지만, 생각해보면 로드들마다 성격도 바라는 것도 제각각이었거든. 그러니 그대가 ‘도미스’란 이름을 쓸 때의 염원이 지금의 염원은 아닐 수도 있지 않소.”
라틸은 므라딤의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다가, 뜻밖의 이름에 멈칫했다.
“도미스의 염원? 그런 게 있었어?”
칼라인은 ‘로드로서 뭘 해야 하냐’고 묻는 라틸에게 자신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대적자가 오니 그냥 싸움만 했다고.
“칼라인은 그런 말 없던데.”
“칼라인이 알면서도 모른 척 한 건지, 아니면 진짜로 몰라서 말 안 한 건진 모르겠지만 전대 로드가 하고 싶어 한 게 있긴 했소.”
“그게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