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500년을 지난 원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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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화. 500년을 지난 원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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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화. 500년을 지난 원망
2022.07.06.
오리고기 이야기를 듣자, 전에 가짜 황제 사건 때 칼라인과 둘이서 카리센으로 가던 일을 떠올렸다. 당시 칼라인은 자연스럽게 라틸이 오리고기를 좋아한단 것처럼 챙겨주려 들었다. 이때 일 때문일까?
“오리고기?”
도미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 다른 말은 하지 않았으나, 라틸은 도미스가 짧게 떠올린 옛날 일을 알 수 있었다.
양부모 밑에서 살 적에, 양모가 아픈 적이 있었다. 그때 양부는 어디서 난 건지 오리고기를 가져와 양모에게 수프로 만들어주었다.
그때 살코기를 좀 떼 두었다가 안야에게도 조금씩 뜯어 먹였는데, 도미스에겐 주지 않았다.
도미스는 그때부터 오리고기가 무슨 맛일까 내내 궁금해하다가, 랑스터 백작가에서 일할 때 한 번 연회에서 남은 오리고기를 먹게 되었다.
그게 도미스에게 무척 맛있던 기억으로 남은 듯했다.
“그러지.”
전후 사정을 모르는 칼라인은 그렇게만 대답하고 나갔고, 도미스는 칼라인이 나가자 속으로 30을 센 다음 창문으로 달려가 칼라인이 어디까지 멀어졌는지를 확인했다.
칼라인이 더 보이지 않게 되자, 그녀는 혼자서 방방 뛰다가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다가 침대로 가 뒹굴뒹굴하며 허공을 발로 찼다.
하지만 곧 그 모든 행동은 바람 빠진 공처럼 변했고, 도미스는 기가 죽어서 침대에 축 늘어졌다.
[칼라인 님 같은 사람이랑 나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겠지.]
* * *
다시 장면이 바뀌었을 때. 도미스는 혼자 텅 빈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칼라인은?’
칼라인은 맞은편에도 조리대에도 보이지 않았다. 좁은 방 안이라 그가 이곳에 없단 건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다 도미스가 시계를 쳐다보았고, 라틸은 칼라인이 평소 오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약속을 깨는 건가?’
라틸은 대번에 칼라인의 인성을 의심했으나, 도미스는 걱정부터 했다.
[무슨 일이 생겼나?]
도미스는 주저하다가 결국 작은 별채를 나가 본채로 가보았다. 그리고 본채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도착했을 때.
유리로 된 벽 너머로 안야가 오리고기 요리를 먹는 게 보였다. 칼라인은 안야의 맞은편에서 음식을 하나하나 자르면서 먹는 걸 돕고 있었다.
‘칼라인 이 자식, 거기서 뭐 하고 있어!’
라틸은 혈압이 올랐다. 도미스도 이번엔 좀 충격을 받았는지 멍하게 서 있다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러다 라틸은 칼라인이 안야를 챙겨주면서도 인상을 찌푸리고 시계를 몇 번 확인하는 걸 보았다. 약속을 잊은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때. 덩달아 인상을 쓰면서 칼라인에게 무어라 말하던 안야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도미스를 발견하고서 입을 벌렸다.
안야는 곧장 식당에 난 문으로 나오더니 도미스에게 차갑게 물었다.
“네가 왜 여기 있지? 이런 데까지 쫓아왔어?”
그 불쾌한 목소리에, 도미스는 뒤돌아서 자신이 머무는 곳으로 달려갔다. 자기가 달아날 필요가 하나도 없는데도, 도미스는 어째서인지 달아났다.
그런데 그 모습이 안야가 데리고 다니는 사냥개들을 자극한 게 틀림없었다. 마당을 뛰놀던 사냥개들이, 도미스가 달아나기 시작하자 갑자기 쫓아 뛴 것이다.
놀란 도미스는 방향을 바꾸었고, 유약한 정신과는 전혀 다른 속도로 빠르게 뛰었다. 개들은 컹컹 짖으며 도미스를 쫓아갔지만 도미스는 놀라울 정도로 개들을 피해 잘 도망다녔다.
칼라인이 개들을 말리기 위해 중간에 개입하면서 상황은 더욱 난장판이 되었는데, 이 광경을 본 양부가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사건이 벌어졌다.
안야의 부하들까지 이쪽으로 오면서 막다른 길에 몰린 도미스가, 양부를 지나쳐 집 안으로 쏙 달아난 것이다.
양부가 방금 뭐가 지나갔냐고 황당해 묻기도 전에, 흥분한 개들은 도미스를 쫓는 데 거슬리는 양부를 깨물어버렸다.
“으악!”
“아버지!”
안야가 비명을 지르자 개들은 그제야 기가 죽어서 몸을 납작 엎드렸다.
하지만 양부는 이미 화가 날 대로 나 있었다. 그는 목에 핏줄이 서도록 고함을 지르며, 자기를 스쳐 지나간 양딸에게 삿대질했다.
“도둑이다! 도둑이야! 저 도둑년을 당장 잡아 와!”
병사들이 우르르 저택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도미스는 황급히 계단을 지나 커다란 기둥 뒤로 뛰었다.
양모를 부축하고 계단을 내려오던 기르골은 마침 그 광경을 발견하고는, 양모를 놓고 양부와 도미스 사이를 가로막으며 웃었다.
“왜 이럽니까. 그만 해요.”
“내 다리를 보게! 저년, 저년이 내 다리를 이렇게 만들었어! 누가 누구더러 그만두란 건가!”
도미스는 커다란 기둥 뒤에 숨어서 고개를 저었다. 기르골은 힐긋 도미스 쪽을 보더니, 다시 웃으면서 양부를 말렸다.
“우리 도미스 양이 선생 다리를 물어뜯을 것 같진 않은데. 입가도 깨끗하고.”
“저년이 날 방패로 삼았어! 날 개들에게 밀쳐냈다고!”
“우리 도미스 양은 기지가 뛰어나군요.”
그 말에 안야가 차갑게 “기르골.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니데요.”라고 말하자, 기르골은 항복 시늉을 하듯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아버지도 진정해요.”
이어서 안야는 양부에게도 서늘하게 말하고는, 도미스에게도 비슷한 톤으로 물었다.
“네가 왜 우리 집에 있는 거지? 설마. 계속 우릴 따라다녔어? 너…… 나한테 집착하니?”
도미스는 울먹이면서 항의했다.
“내가 먼저 여기 와 있었어! 네가 아프다고, 사용해야 한다고 해서 내가 빌려준 거야! 멋대로 와 놓고선 왜 다들 멋대로 굴어! 여기가 무슨 너희-.”
‘집이야’라는 뒷말이 나올 것 같았으나, 성큼성큼 걸어온 양부가 도미스의 입을 막아버렸다.
“어디서 버릇없게 반말이야!”
철썩 소리가 나며 얼굴이 돌아가고, 놀란 도미스가 양부를 보는 순간. 라틸은 기르골이 묘한 표정으로 양부를 보는 걸 보았다.
찰나 스쳐 지나간 기르골의 눈빛은, 그가 정신이 나가기 직전에 잠깐 반짝 들어오는 그 표정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기르골이 한 행동은 양부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도미스를 감싸 나가는 거였다. 칼라인도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칼라인은 뒤에서 들려오는 “돌아와.” 하는 명령에, 망설이다가 결국 돌아서고 말았다.
기르골은 도미스를 창고 같은 별채에 데려다주고는, 눈물을 닦아 주면서 혀를 찼다.
“볼 때마다 우는 아가씨네. 왜 이렇게 울 일이 많을까. 응?”
도미스가 끅끅거리며 바라보자, 기르골은 재차 혀를 차고서 도미스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도미스가 진정하자 기르골은 그녀를 놓아 주고서, 조리대로 가더니 먹을 게 있나 없나 기웃거렸다.
잠시 뒤. 기르골은 뭘 어떻게 한 건지 금세 수프를 만들어 와서 도미스에게 건넸다.
그러다가 도미스가 식사를 다 해갈 즈음. 먹는 모습을 내내 빤히 바라보던 기르골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울보 아가씨. 로우저 씨가 죽으면 아가씨가 안 울까?”
* * *
“…….”
도미스는 안 울지 모르겠지만 라틸은 안 울 자신이 있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라틸은 주섬주섬 베개를 챙기고서, 침실을 나가 하렘으로 갔다.
그리고 칼라인의 방에 들어간 다음, 웃으면서 반겨주는 그의 등짝을 베개로 펑펑펑 두드렸다.
“주인?”
“요 얄미운 주둥이. 요 얄미운 주둥이.”
“주인? 잠시만, 주인. 왜 그러는지부터-.”
“오리고기를 누구 입에 먹인 거야, 이 거짓말쟁이. 오리고기를 했으면 후딱 나한테 갖고 와야지 누구한테 떠먹이고 있어? 응?”
베개로도 모자라 라틸이 등짝을 찰싹찰싹 두드리자, 칼라인은 어리둥절해서 그걸 다 받아주다가 뭔가를 떠올렸는지 희미하게 웃었다.
그걸 본 라틸은 더욱 속이 뒤집어져서 입술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두 손가락으로 집어버렸다.
“뭘 잘했다고 웃어?”
“…….”
라틸이 입술을 놓아주고 흘겨보자, 칼라인은 라틸을 안아 침대에 데려가더니 자기 무릎에 자연스럽게 앉히고서는 달려오느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뒤로 넘겨주었다.
“그게 생각난 겁니까.”
“말해봐. 오리고기는 왜 옆으로 샌 거야? 왜 내 입이 아니라 뜬금없이 딴 사람 입으로 들어갔어?”
“처음부터 2인분을 만들었습니다.”
“뭐야?”
“만들고 있는데, 안야 양이 배가 고프다고 했죠. 그래서 양을 더 많이 해서 따로 그릇에 담았습니다.”
“근데 왜 나한테 안 왔어!”
“안야 양의 팔이 부러져서요. 안야 양이 아파서 별장에 머무른다고 한 게, 사실은 팔 때문이었습니다.”
“!”
이걸 화를 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어 라틸이 우물거리는 사이. 칼라인이 조금 걱정스럽게 물었다.
“안야 양에 대해서도 기억이 납니까, 주인?”
“도미스가 당한 것만 기억나.”
“…….”
라틸의 말에 칼라인은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리는 듯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칼라인에게 단호하게 말해주었다.
“도미스는 네 성격에 반한 게 아냐. 네 얼굴에 반한 거야. 확실하게 구분해 두도록 해.”
칼라인이 입술을 움찔하더니, 광대를 슬쩍 올리고 턱에 힘을 주었다. 이쪽은 진심으로 한 말인데. 칼라인에겐 그게 웃기기만 한 듯했다.
라틸은 칼라인을 재차 흘겨보고서 일어선 다음, 카펫에 떨어진 베개를 도로 줍고서 방문으로 걸어갔다.
“이대로 가십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쉬다 가지 않으시고요?”
칼라인이 침대에 나른하게 옆으로 눕더니, 거만한 표범 같은 태도로 유혹했지만 라틸은 흥 코웃음을 치고서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그러다가 다시 문을 연 다음 그에게 전생과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단 걸 알려주었다.
“쉬어갈 남자가 그대 하나만이 아니라서.”
방긋 웃은 라틸이 문을 쾅 닫자, 안쪽에서 작은 신음이 들려왔다.
‘이제 어쩌지?’
칼라인 방에서 나온 라틸은 복도 어중간한 지점까지는 거침없이 나아갔으나, 거기서부터는 잠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칼라인에게 달려온 건 당시에 너무 열이 받아서였다. 다른 후궁에게 갈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막상 여기까지 오고 나니, 이대로 방에 돌아가기도 아쉬웠다.
‘요즘 다른 후궁들한텐 잘 가보지 못했으니까…….’
게스타와 타시르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라틸은 몇 시간 전에 보았지만 거의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헤어졌던 타시르에게 가기로 결정했다.
‘서운했을지도 몰라. 그땐 기르골에게 빨리 가야 해서 별생각 없이 넘겼지만, 그건 내 사정이잖아.’
타시르 방에 가서 자고 있다고 하면 그냥 돌아가고, 아니면 타시르 방에 들어가자.
결심을 한 라틸은 곧장 타시르의 방으로 걸어갔다.
“폐하!”
다행이라 해야 할지, 타시르도 타시르의 시종도 깨어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타시르의 시종은 라틸을 보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손을 이상하게 허우적거렸다.
“저, 폐하. 폐하. 저희 소단주님은 지금. 폐하. 그러니까…….”
“혹시 내가 들어가면 안 될 상황인가?”
그 허둥대는 모습이 너무 이상해 라틸이 묻자, 타시르의 시종은 얼굴이 벌게져서는 횡설수설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아니, 그러니까 지금 소단주님이 이상한…….”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서 빤히 내려다보는 그때. 문 안쪽에서 “들어오셔도 됩니다, 폐하.”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히얼란이 울상을 짓고 문을 열었고, 라틸은 ‘왜 저러지?’ 생각하면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가 안고 간 베개를 떨어뜨렸다.
“그게……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