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오리 얘기가 여기서 나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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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화. 오리 얘기가 여기서 나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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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화. 오리 얘기가 여기서 나왔구나
2022.07.03.
도미스에 관한 꿈을 꾸려는 노력이 먹혀든 걸까. 눈을 떴을 때, 라틸은 도미스가 가장 좋아하는 하녀 안야의 얼굴을 발견했다.
‘다시 도미스 기억이다.’
“안야 씨.”
도미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라틸은 하녀 안야의 얼굴이 눈물로 젖어 있고, 주위가 저택 내부가 아니란 걸 알아차렸다. 이곳은 밖이었다. 밤이었고.
“도미스. 정신이 들어?”
“어떻게 된 거예요?”
“내가 묻고 싶은 거야.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앨리가 죽은 게 나 때문이라고…… 내 돈이랑 보석을 다 훔쳐갔어요. 날 계단 아래로 떠밀고…….”
“그래서 그냥 가라 했구나.”
“뭐가요?”
“네 의붓동생이랑 같이 온 사람 중에 하나. 널 구한 다음 날 부르러 왔어. 돌아오지 말고 떠나라길래 무슨 소린가 했더니. 이래서 그랬나 보다.”
도미스는 의붓동생과 온 사람이 자신을 구했다고 하자 대번에 기르골을 떠올렸다. 라틸 역시 기르골일 것 같았다. 이 시기의 칼라인은 재수가 없었으니까.
도미스는 안야의 부축을 받아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생각보단 상처가 깊지 않아서 다행이야. 진짜 놀랐는데.”
“절 구한 사람한테 감사 인사라도…….”
“거기까지 가다가 너 멀쩡한 거 보면. 그 X 같은 새끼들, 너한테 또 해코지하려 들걸? 괜히 찔리니까 널 어떻게 몰아갈 줄 알고?”
“하지만…….”
“어차피 네 의붓동생 아니었으면 앨리 친구들이 널 노리지도 않았잖아? 그쪽 집안 사람들은 그냥 죄다 잊어버려. 그게 나아.”
몸을 일으킨 안야는 도미스의 손을 잡더니 저택과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택 밖으로 나가는 길로.
“안야 씨? 안야 씨는 왜 여기로……?”
그에 당황한 도미스가 우물거리자, 안야는 이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다는 듯 망설이다가 털어놓았다.
“사실 난 랑스터 백작가에서 벌어지는 실종 사건을 조사하러 왔어. 왕립 수사관이야.”
“네?”
도미스는 당황해 되물었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하녀 안야가 보여주었던 수상쩍은 태도를 몇 가지 대번에 떠올렸다.
처음 경비병이 안야에게 하녀 자리에 도미스를 데려가달라 했을 때, 자기도 위험한 저택 하녀 일에 지원하면서 도미스가 지원하는 건 싫어했던 것. 하녀장이 내건 규칙을 무시하고 몰래몰래 밤에 돌아다니던 것 등등.
그냥 다소 반항적인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다 이유 있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나랑 같이 가자, 도미스. 처음엔 네가 좀 귀찮았지만 지금은 동생처럼 생각하고 있어. 내가 왕궁에서 일할 수 있게 추천장을 써줄게. 딱딱하고 격식도 까다롭지만 대우는 훨씬 나아.”
* * *
화면은 또다시 바뀌었고, 다음 장면은 보기 거북하지 않았다. 도미스는 좋은 옷에 깨끗한 앞치마를 걸치고, 한겨울인데도 따뜻한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일을 하다가 “네 언니가 너 찾는다.”라는 말을 듣고 밖으로 나가면 안야가 과자나 사탕, 초콜릿 같은 걸 들고 서 있었다.
‘둘이 더 가까워졌네.’
보기 좋은 모습이구나…… 생각하면서도 라틸은 의아해졌다. 이 안야는 역할이 뭐지?
라틸이 보는 도미스의 기억은 도미스가 집어둔 것처럼 중요한 장면들뿐이었다. 하지만 언니 안야와의 일들은 얼핏 보아선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이 기억을 보여주는 이유가 있을 텐데. 그게 대체 뭘까?
‘알고 보면 언니 안야가 대적자인 거 아냐? ……아니겠지. 칼라인 꿈속에 나온 대적자랑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 보이는데, 얼굴이 아예 다르잖아.’
그러다가 한 번 더 장면이 끊기는가 싶더니, 도미스가 하녀장과 마주 선 장면이 나타났다. 이 하녀장은 그 수상한 백작가의 하녀장과 다른 사람으로, 아주 따뜻한 인상의 여자였다.
“클레렌드 대공의 후계자가 떠날 때까지 휴가를 쓴다고?”
“네…….”
“그 사람들이랑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네…….”
[바쁜데 미안해요, 하녀장님. 하지만 클레렌드 대공 후계자는 내 동생인데. 그 애가 여기로 온단 이야기를 듣고서 머물 수는 없어요.]
라틸은 도미스가 자신이 사용하는 듯한 방을 떠올리자, 그 이미지를 함께 느꼈다. 도미스는 의붓동생이 이곳에 온단 소식을 듣자, 동생이 돌아갈 때까지 아예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을 예정인 듯했다.
‘그래. 그게 낫겠다.’
라틸도 도미스의 생각에 동의했다. 하지만 하녀장은 이보다 더 좋은 제안을 해주었다.
“마음을 바꾸진 않을 거 같고, 어쩔 수 없네. 알았어.”
“감사합니다.”
“대신.”
“네.”
“유리별장에 가 있어. 기껏 휴가 잡아 놓고 방에 있지 말고.”
“네?”
“유리별장이라고, 궁정인들이 빌려 쓸 수 있는 예쁜 별장이 있어. 원래는 어느 공주님이 쓰시다가…… 아아, 유례는 됐고. 하여튼 그런 데가 있어. 넌 아직 일반 직급이라 빌릴 수 없는데, 내 이름으로 빌려줄게. 거기서 쉬다 와.”
* * *
‘그래도 도미스가 여기선 좋은 사람들이랑 어울렸구나.’
라틸이 감탄하는 사이 또다시 장면이 바뀌었고, 이번에는 정말 유리별장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건물이 나타났다.
천장과 벽의 상당 부분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집 안에서도 자연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그런 건물이었다.
‘집 예쁘네. 나도 이런 거 하나 만들까.’
그런데 도미스가 그곳 별장에서 한창 혼자 돌아다니면서 즐거워할 때였다. 뒤에서 무언가 소리가 났다. 놀란 도미스가 확 고개를 돌리자, 허리까지 올라오는 꽃더미 사이로 칼라인이 보였다.
놀란 도미스가 멍하게 바라보자 칼라인 역시도 여기서 도미스를 만날 줄 몰랐던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두 사람 다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는데, 그 사이로 불어오는 찬 바람이 목덜미에 닿자 도미스는 간지러워서 어깨를 움찔했다. 간지러운 건 목덜미인데 이상하게 그 기분은 심장까지 번져갔다.
왜 여기에 있냐고 묻지도 못하고 도미스는 주저하며 눈꺼풀을 떨구었다. 바삭거리면서 손에 닿는 꽃들이 도미스의 기분을 붕 뜨게 만들어주었다.
용기를 낸 도미스가 시선을 들었을 때도 칼라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몸은 좀 괜찮나.”
“기르골한테 고맙다고 전해줘요.”
조용히 있을 때는 미묘하게 일렁이던 분위기는, 둘이 입을 여는 순간 쨍하고 얼어버린 유리처럼 깨져버렸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라틸은 칼라인의 표정을 보고 그렇게 느꼈다.
“기르골?”
칼라인의 질문에 도미스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작게 웅얼거렸다.
“그쪽도 알고 있는 거 같지만…… 기르골이 날 구해줘서요. 거기…… 저택에 있을 때요.”
칼라인의 표정이 차갑고 서늘해지자 도미스는 고통을 느끼고 소맷자락 끝을 꽉 움켜잡았다. 라틸은 도미스의 슬픔을 느꼈다. 그녀는 ‘저 사람은 왜 날 이렇게 싫어하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지.”
이윽고 칼라인이 차갑게 대답했으나, 분위기는 여전히 살벌했다. 도미스는 한참만에야 칼라인이 이곳에 있는 게 이상하단 걸 깨닫고 물었다.
“그런데 칼라인 씨는 여기에 왜…….”
“기르골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와서 실망했나 보군.”
“네? 아니, 그게 아니라, 이 부근에 안 계셨잖아요. 원래.”
“왕궁에 가는 길이었는데. 안야가 몸이 좋지 않아져서 쉴 곳을 찾고 있었다. 이 부근에 쉴 만한 저택이 있다고 들어서.”
도미스는 칼라인이 말한 저택이 자신이 머물고 있는 유리별장이란 걸 깨닫고 황급히 거절했다.
“아, 안 돼요. 여긴 제가 빌려서 쓰고 있어요.”
칼라인이 ‘네가 무슨 재주로?’라는 시선으로 내려다보자, 도미스는 얼굴이 벌게졌다.
“왕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빌려 쓰는 곳이에요. 지금은 제가 빌려 쓰는 거니까, 그, 칼, 라인은 오면 안 돼요.”
도미스는 안야와 엮이고 싶지 않았고, 양부도 보기 싫었다. 양모는 그리웠지만 양부의 괴롭힘과 안야의 무시를 참아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안야의 이름을 걸면 자신이 동생을 너무 질투하는 티가 날까 봐 도미스는 칼라인의 이름을 내세우며 거절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칼라인은 도미스의 말에 표정이 더욱 싸늘해지더니, 거의 비웃는 수준으로 조롱했다.
“클레렌드 대공의 후계자가 오는 걸 고작 너 혼자서 막겠다고? 공작이 사용하고 있다 해도 자리를 비켜야 할 텐데?”
“!”
그 말에 도미스의 눈이 커다래지자, 칼라인은 아까는 재수없게 비웃어 놓고선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자기가 더 표정이 굳어서 돌아섰다.
“걱정 마라. 내가 보기 싫다는데 굳이 여기 와 지낼 생각 없으니.”
‘꿈에서 깨면 칼라인을 혼내줘야겠어.’
자기가 재수 없게 굴었던 기억이 돌아오면 화내도 좋다 했으니, 원하는 대로 해주어야겠다. 라틸은 씩씩거리면서 칼라인을 향해 쫌스럽다고 외쳐댔다.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유독 칼라인을 신경 쓰더라니. 도미스는 칼라인이 저러고 돌아서자, 그새 쪼르르 달려가더니 말을 바꿨다.
“여기 머물러도 돼요. 근처에 다른 머무를 데는 없어요.”
“내가 오는 게 싫다면서.”
“그쪽이 싫은 게 아니라…….”
‘안야랑 양부가 싫은 거다, 칼라인 이 멍청이야!’
칼라인이 빤히 내려다보자 도미스는 저 싸가지 없는 놈이 뭐가 좋다고 얼굴에 열이 올라와서는 또 시선을 내리깔았다.
라틸은 자기 가슴을 퍽퍽 내리쳤다. 실제론 손도 못 움직였지만 기분상 그랬다. 자신이 전생에 이런 호구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저…… 칼라인 씨. 여기 머물러도 좋으니까…… 하루에 30분씩만 절 찾아와줄 수 있어요?”
“찾아오다니? 넌 다른 데 간단 건가?”
“같이 있긴 싫어서…….”
“!”
“별장 끝에 방 두 개짜리 작은 건물이 따로 있어요. 전 거기에 있을게요.”
* * *
다시 화면이 바뀌자, 도미스가 아름다운 유리별장 본관을 놔두고 좁아터진 창고 같은 곳에서 요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정확히는, 라틸이 볼 수 있는 건 도미스의 손과 칼, 도마 정도였지만.
도미스는 샐러드와 간단한 수프를 만든 다음 테이블에 2인분을 차려 놓고 식탁 앞에 앉았다.
안야는 이미 이곳에 들어와 지내는 것 같으니, 칼라인이 약속을 지키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라틸은 칼라인이 약속을 깨면 머리통에 알밤을 세 대 때릴 거라 맹세했으나, 다행히 칼라인은 약속을 지켰다.
“난 배가 고프지 않은데.”
재수 없긴 매한가지였으나, 그래도 칼라인은 딱 30분. 도미스의 맞은편에 앉아 그녀가 식사하는 걸 바라봤다.
다시 장면이 바뀌었을 때, 두 사람은 다른 요리를 앞에 두고 있었고, 이번에도 칼라인은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았으나 도미스를 기다리긴 했다.
다음날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고, 또 다음날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 때마다 도미스는 칼라인을 점점 더 의식했다.
‘도미스가 칼라인을 먼저 좋아했구나.’
그러다가 다시 장면이 바뀌었을 때. 도미스 앞의 음식은 거의 비고, 칼라인 앞의 음식은 여전히 그대로일 때. 반복되던 일상이 조금 바뀌었다.
“내일은 요리를 해두지 마라.”
칼라인이 몸을 일으키며 말한 것이다.
“내일은 안 오는 건가요?”
도미스가 실망해서 묻자, 칼라인은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가 요리를 잘해.”
도미스는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서 멍하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칼라인이 자랑한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러다가 도미스는 ‘내가 요리를 못한다고 돌려서 흠잡는 건가?’ 하고 갑자기 울적해 했다.
칼라인은 그 모습을 보다가 짧게 혀를 차더니 좀 더 풀어서 자기 의도를 설명했다.
“내일은 내가 요리해주겠단 거다.”
“아!”
“좋아하는 요리가 있나?”
도미스는 칼라인이 풀어서 얘기를 했는데도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멍하게 우물거리다가, 갑자기 놀랍도록 기분이 확 좋아져서 대답했다.
“그럼 오리고기 요리…… 먹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