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서넛의 절망과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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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화. 서넛의 절망과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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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화. 서넛의 절망과 희망
2022.06.22.
칼라인은 라틸에게 오다가 흠칫하더니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같은 뱀파이어인데도 기르골과는 완전히 느낌이 다른, 야성적이면서도 서늘한 녹색 눈동자가 조금 조금씩 움직이며 방 안을 훑었다.
냄새 맡기에 몰두한 육식 동물처럼 그가 코를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자, 라틸은 그게 신기해 머리를 옆으로 까딱까딱 따라 움직였다.
‘뱀파이어들은 냄새를 잘 맡나……? 기르골 냄새가 나는 건가? 난 아무 냄새도 못 맡겠는데. 피 냄새는 잘 맡게 됐지만.’
의아해 보고 있자니, 마침내 칼라인이 냄새 맡길 멈추고 중얼거렸다.
“좀 불쾌한…… 느낌이 납니다, 주인.”
그러면서 다가온 칼라인은 놀랍게도 기르골이 앉았던 딱 그 자리를 찾아냈다.
칼라인이 거기에 얼굴을 들이밀고서 또 냄새를 맡자, 라틸은 신기해서 작게 손뼉을 쳤다.
“우와. 뱀파이어들은 다 그렇게 개 코야?”
“개 코…….”
칼라인은 라틸의 표현에 잠시 주춤하다가 대답했다.
“인간들보다야 다 코가 밝은 편입니다. 하지만 제가 유난히 코가 밝은 편이기도 합니다, 주인.”
이윽고 그는 주위를 의심스럽게 보다가, 활짝 열린 창문을 발견하더니 그쪽으로 다가갔다.
창틀을 손으로 짚은 그는 아래와 옆을 샅샅이 살폈으나, 이미 기르골은 가고 없는지 라틸을 돌아보며 물었다.
“누가 다녀갔습니까?”
라틸은 칼라인이 혼자 냄새만으로 기르골 이름까지 알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면 진짜 신기할 거 같은데.
“향수 냄새가 너무 진해서 좀 헷갈립니다.”
하지만 칼라인이 뒤이어 중얼거린 소리에, 라틸은 민망해져서 표정을 구겼다.
기르골을 헷갈리게 하려 뿌린 향수에 칼라인이 낚이다니.
하긴. 냄새를 뒤덮으려고 몇 개를 번갈아 뿌린 다음 한 통은 아예 들이부었으니 당연히 냄새가 과하겠지만.
라틸은 대답 대신 뚱하게 물었다
“아리탈이 누구야?”
칼라인은 바로 알아듣고서 눈이 험악해졌다.
“기르골이 다녀갔군요.”
“아리탈이 누구야?”
화가 났는지 칼라인이 이를 내밀자 뾰족하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라틸이 그걸 손으로 잡아보자, 칼라인은 입을 벌린 상태로 굳어버렸다.
“여보세요. 아리탈이 누구냐니까요.”
라틸은 칼라인이 약간 악어 같다고 생각하며 손을 뗐다.
이가 자유로워지자, 칼라인은 미간을 찡그리고서 라틸에게 타박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날카롭습니다, 주인. 손을 다칠지도 모릅니다. 아리탈은 이전 로드 중 하나의 이름입니다.”
“기르골이 나를 그렇게 불렀어.”
“미쳐서 그럽니다.”
단호하게 기르골을 평가한 칼라인은 기르골이 앉지 않았던 쪽 의자로 다가가 앉으며 물었다.
“기르골은 어떻게 온 겁니까?”
“윌랑 왕자 뒤에 붙어 왔어.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기르골에게 물어보긴 힘들 테고. 그 왕자에게 물어봐야겠군요.”
‘기르골에게 물어보긴 힘들다고?’
“있지 칼라인. 자존심 상해 하지 말고, 하나만 물어봐도 돼?”
“물어보시지요, 주인.”
“네가 기르골이랑 싸우면 어떻게 돼?”
“제가 집니다.”
“그건 나도 알아.”
라틸의 단호한 말에 칼라인이 자존심이 상한 듯 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은, 어느 정도 버티다 져?”
라틸이 이를 무마하기 위해 다음 말을 했으나, 칼라인은 더욱 자존심이 상했는지 아예 대답하지 않았다.
라틸은 대답을 유추할 수 있었다.
‘금방 지는구나. 오래 버티지도 못하나 봐.’
그 표정이 너무 싫었던 걸까. 라틸의 눈치를 보던 칼라인은 슬그머니 후배 방패를 내밀었다.
“서넛보단 제가 강합니다.”
‘눈물 날 것 같다. 저걸 자랑이라고. 내 편은 다 약하네…….’
* * *
라틸이 무시무시해 보였던 자신의 두 측근 뱀파이어가 알고 보니 좀 약한 게 아닌가, 하는 오해를 하고 충격을 받은 그때.
서넛은 피인어들을 호수로 안내하고 있었다.
인어로 위장한 피인어들이 줄지어 서넛을 졸래졸래 따라가는 모습을, 하렘에서 일하는 궁인들은 넋을 놓고 구경했다.
그들은 당장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연락을 해서, 인어들이 줄 서서 걸어가는 걸 봤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들이 단순한 호기심에 인어들을 바라는 것과 달리. 산책하다가 이 광경을 본 클라인은 조금 충격을 받았다.
“저거 뭐야. 저거 인어 아냐? 인어가 여길 왜 와?”
바닐은 옆에서 “인어라니요? 전하, 여기에 무슨 인어가-.” 있냐고 웃으면서 대꾸하다가, 뒤늦게 인어 무리를 보고 놀라 말을 바꿨다.
“인어네요!”
악시안도 이번에는 제법 놀라서 눈을 평소보단 조금 크게 떴다.
“신기하군요. 하렘에 오는 걸 보니 손님으로 오는 건 아닌데…….”
안 그래도 가장 앞에 선 인어가 너무 아름답게 생겨서 기민하게 안 좋은 감을 받았던 클라인은, 깜짝 놀라 물었다.
“저 인어들도 후궁으로 온다고?!”
“인어들은 아니고, 인어는 올 것 같은데요. 인어도 후궁으로 들이다니. 폐하께선 편견이 없으신가 봅니다.”
태연한 악시안의 대답에 클라인은 바락 소리 질렀다.
“지금 이게 편견 문제야?”
악시안이 어리둥절해 보자, 클라인은 주먹을 쥐고 자신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텅텅 두드렸다.
“물에서 가장 매력적인 건 나라고! 그런데 지금 인어들이 오면 내가 어떻게 돼!”
그 버럭 외치는 소리에, 악시안은 ‘언제부터 우리 황자님이 물에서 가장 매력적이었나?’ 생각했으나, 일단 결론에는 수긍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책을 세워야겠습니다.”
클라인은 대번에 계책을 냈다.
“인어는 아랫도리가 징그럽다고 하자. 흐물흐물하고.”
“본 적 있으십니까?”
“없어! 그냥 우기는 거야.”
그러나 악시안이 대답하기 전, 바닐이 걱정스럽게 반박했다.
“근데 전하. 그 소릴 듣고 폐하께서 더 호기심을 가지면 어쩌지요? 근데 막상 까보니 너무 멀쩡하면…….”
“어쩌면 역으로 아름답게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황자님.”
“나보다?!”
“오해 살 발언은 자제해 주시지요. 저는 인어는커녕 황자님 아랫도리도 본 적이 없으니까요. 비교하지 못합니다.”
클라인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뱀파이어인 서넛과, 소리에 엄청나게 예민한 피인어들은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서 다른 의미로 입술을 깨물었다.
서넛은 민망해서 몇 번이나 헛기침을 했으나, 피인어들은 자기들끼리 사람은 들을 수 없는 주파로 소곤거리면서 연신 피식거렸다.
서넛은 그들이 자랑스럽게 웃어대는 걸 보며, 클라인의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으리란 걸 알아차렸다.
서넛은 덩달아 실망해 어깨를 시무룩 떨구다가, 옆에 선 피인어 지배자 므라딤을 힐긋 보았다.
므라딤은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고 가슴을 내밀고 있었다. 그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서넛은 기분이 나빠져서 차갑게 말했다.
“이렇게 말도 없이 와선 안 됐습니다.”
그러나 므라딤은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어째서? 이번 로드는 철저하게 자신에 대해 감추는 전술을 쓰고 있기에 거기에 맞춰준 것뿐이네, 나는.”
자신이 서넛에게, 그리고 황제의 후궁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물론 이 피인어 입장에선 그들을 고려할 이유도 없었지만.
“글쎄요.”
“사실이라네. 그러니 우리도 정체를 밝히지 않고 빌어먹을 인어로 위장해 오지 않았나.”
인어 이야기가 나오자 므라딤의 얼굴에 처음으로 불쾌해하는 기색이 어렸다.
곁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티투 역시 입을 삐쭉이며 덧붙였다.
“인간 맞춤형이죠. 인어들은 이미지 메이킹을 잘해놔서 인간들이 좋아하니까요.”
최소한 이 피인어들은, 국서니 후궁이니 하는 문제보다는 자기들이 인어로 위장한 걸 더 신경 쓰는 게 분명했다.
그러면 국서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할 수 있지 않을까. 딱히 다른 이유가 있어서 국서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라면?
서넛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어느새 호숫가에 도착한 걸 알아차리고 멈춰 서서 물었다.
“국서 이야기는 왜 한 겁니까?”
“자연스럽게 접근하려면 그게 가장 좋지 않나.”
“그냥 힘을 합치자고만 했어도 자연스러웠을 겁니다.”
“뱀파이어들은 고리타분하군.”
“므라딤 님이 갑자기 국서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폐하께서 곤란해지셨습니다.”
“어째서?”
대답을 하려다가 서넛은 근처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말을 멈추고 주위를 보았다.
호숫가에 도착한 피인어들이 호수 주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흩어져 서서는 알 수 없는 소리를 뱉으며 호수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왜 저러나 싶어 계속 보고 있자니, 놀랍게도 호수에서 물방울들이 방울방울 위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궁인들은 그 영롱하고 신비로운 모습에 탄성을 뱉었다.
확실히 신기한 장면이긴 했으나, 서넛은 그 광경을 계속 보는 대신 목소리를 더 낮추어 므라딤에게 마저 따졌다.
“어째서냐고요? 폐하는 지금 국서를 들일 생각이 없으시니까요.”
그러나 방울이 된 호수 물이 이번엔 위로 솟구치는 바람에, 서넛은 또 말을 멈추어야 했다.
다시 돌아보자, 호수에 담겨 있던 파란 물들이 마치 손잡이가 호수에 박힌 커다란 우산처럼 변해 있었다.
그 우산 모양 물은 일정한 간격으로 계속해 흘러갔고, 그 아래로 우산 손잡이 부근에 동그란 통로를 만들었다.
커다란 배수관처럼 생긴 그 통로 안쪽으로는 물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몇몇 피인어들이 그 통로 안으로 가장 먼저 들어가자, 다른 피인어들도 차례대로 그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나중에는 므라딤과 서넛의 곁에 있던 티투까지 안으로 들어가자, 호숫가에 홀로 남은 건 므라딤뿐이게 되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서넛과 므라딤에게 몰리자 서넛은 입을 다물었다.
므라딤 역시 시선을 느꼈는지, 더 이야기하는 대신 빙그레 웃고서 그의 눈엔 아직 너무 어린 뱀파이어 나이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우리도 먼 길을 오느라 지금 좀 지치긴 했거든. 쉬고 오겠네.”
므라딤이 호수로 들어가며 한 번 몸을 털자, 그의 다리가 보석처럼 아름다운 지느러미로 변했다.
사람들이 탄성을 뒤로하고, 므라딤은 자신도 그 물의 통로로 들어갔다.
마지막 피인어까지 사라지고 나자, 파랗게 올라갔던 물의 우산이 휙 접히더니, 순식간에 평범한 물줄기로 변해 호수에 찰싹 떨어졌다.
그 바람에 대량의 그 바람에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고, 호수 근처에 서 있던 서넛은 피할 새도 없이 옷과 머리가 물에 흠뻑 젖었다.
서넛은 눈가에 묻은 물기를 한 손으로 훔치면서 므라딤이 사라진 호수를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기분이 나쁜데. 한편으로는 안심도 되었다.
이번에는 나이트가 둘이고 피인어들도 이쪽에 합류했다.
대신관과 성기사들 역시, 비록 황제의 정확한 정체를 모르고서 붙은 거긴 하지만 한편이 되어 주었다.
적과 아군 사이를 오가던 피인어들과 늘 적이었던 성기사들이 아군이 된 것이다.
어쩌면…… 이번에는 이쪽이 이길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