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왜 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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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화. 왜 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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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화. 왜 울어?
2022.06.19.
라틸은 당황해서 벌떡 일어났다.
어쩌지? 만나야 하나? 어떡해? 근데 기르골은 내가 사디란 걸 바로 알아볼 수 있나?
칼라인한테 ‘사디’를 만났을 때 어떻게 알아본 건지 물어볼걸! ‘사디’가 됐을 때 냄새가 바뀌는지 아닌지.
후회했지만 이미 기르골은 방문 앞에 있었고, 칼라인은 저 멀리 하렘에 있었다.
라틸은 서둘러 화장대로 달려가 서랍을 열고 향수를 손에 잡히는 대로 다 꺼내 몸에 뿌렸다.
‘아냐.’
그걸로도 불안해서, 아예 한 통은 뚜껑을 따서 몸에 들이붓자 온몸에서 과한 향이 풍겨왔다.
옷도 축축해졌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기르골이 자신을 알아보느냐 못 하냐의 문제에 비한다면.
라틸은 향수를 도로 서랍에 대충대충 채워 넣은 다음, 안락의자로 달려가 앉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들여보내라.”
문 열리는 소리가 꼭 지옥문 같다고, 라틸은 초조하게 생각했다.
그래도 그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고서, 라틸은 근엄한 황제인 양 심각하게 카펫만 쳐다보았다.
문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라틸은 근엄한 황제가 카펫을 노려보진 않을 거란 생각에 자연스러운 척 고개를 돌렸다.
‘나는 황제다. 나는 황제다. 게다가 로드다. 무시무시한 로드…… 젠장. 그런데 나보다 쟤가 더 나쁜 놈 같지 않나?’
기르골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오다가, 그런 라틸을 보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그 미소엔 적대적인 면이 보이지 않아서 라틸은 그나마 조금 안심했다. 다행이야. 내가 ‘사디’란 걸 알고서 온 건 아닌가 봐.
그러면 윌랑 왕자 일로 온 걸까?
아니. 아니지. ‘라트라실 황제’를 로드라 의심하긴 했으니, 그 일로 온 게 아닐까?
그런데 쟤는 무슨 수로 윌랑 왕자를 따라온 거야?
혼란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서 라틸은 침착하게 물었다.
“무슨 일로 왔지?”
지나치게 근엄한 척하느라 목소리가 평소보다 두 톤 정도 낮아져 있었으나, 라틸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기르골은 대답에 앞서 공손하게 한 손을 배에 붙이고 인사를 올렸다.
“라트라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 평범하고 예의 바른 인사에, 라틸은 ‘어라’ 싶어졌다.
뭐지…… 뭘 알고서 온 건 아닌가? 로드가 맞는지 아닌지 확인차 한 번 와본 건가……?
그러나 안심하자마자 기르골은 웃으면서 다가와 나지막하게 말했다.
“기억났어, 아가씨. 우리가 어디서 처음 만났는지.”
기르골의 입가에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 섬뜩한 웃음에 라틸은 순식간에 석화되어 버렸다.
‘다 알고서 왔구나! 그냥 로드라서 온 것도 아니야. 내가 사디란 걸 알고 있어!’
와서 안 걸까, 알고서 온 걸까. 알았다면 어떻게 안 걸까. 향수를 퍼다 부었는데. 지금 향수 냄새가 사방을 진동하는데, 그 사이로 냄새를 맡은 건가?
혼란스럽지만 라틸은 애써 표정을 관리하고서 ‘얘가 무슨 소리지?’ 하는 듯 능청맞게 눈썹을 치켜떴다.
“무엄하군. 그게 무신 소리냐.”
발음이 조금 새긴 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기르골은 그런 라틸이 귀엽다는 듯 물끄러미 보더니, 다시 조용조용하게 물었다.
“아가씨가 살아 있다는 데 안심해야 할까. 아가씨가 날 속인 데 화를 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우리의 재회를 기뻐해야 할까. 응?”
조곤조곤 말하는가 싶던 기르골은, 어느새 라틸의 귓가에 대고서 속삭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아주 듣기 좋았고, 그가 말을 할 때 새어 나오는 미약한 바람은 간지러울 정도로 부드러웠으나 라틸은 소름이 돋았다.
목울대가 움찔하면서 어깨가 말려 들어갔다. 대체 이 상황에 뭘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막막한 기분에 머리만 팽글팽글 돌아가는데, 그럴수록 머리 속은 하얗게 질려갔다.
그러다가 기르골이 귓가에서 입을 떼는 순간. 라틸은 지체없이 그를 공격했다. 그의 어깨를 쥐고 곧장 발로 옆구리를 가격했다.
그러나 기르골은 피하지도 않고서 그냥 맞아가며 라틸의 다리를 붙잡아 버렸다.
“음.”
자기도 미간을 찡그렸다 펴는 걸 보니 아프긴 한 모양인데. 그래도 기르골은 라틸의 다리를 잡고 놓지 않았다.
설마 맞으면서까지 붙잡을 줄은 몰랐던지라, 라틸은 빠져나가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었으나 기르골은 굉장히 힘이 좋았다.
그는 라틸의 한쪽 다리를 잡은 채 건너편 일인용 소파로 이동했고, 라틸은 선택권이 없이 한 발로 통통 튀면서 따라갔다.
소파 앞에 도착하자, 기르골은 라틸을 거기 앉게 하고는 자기 손이 수갑이라도 된 것처럼 라틸의 양 손을 꽉 깍지끼고서 웃었다.
“내가 무서워?”
“!”
“그러면 안 되는데. 혹시 아가씨, 내가 무서워?”
이게 공격을 받더니 미친 건가. 멋대로 의자에 앉혀 놓고서는 그가 던지는 뜬금없고 맥락 없는 질문에 라틸은 당황스러워졌다.
게다가 질문을 하면서 기르골이 얼굴을 코앞에 가져다 대는데, 그 모습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천사처럼 잘생겨도 저렇게 웃으면 무섭구나. 라틸은 난데없는 깨달음에 마른침을 삼켰다.
기르골은 여전히 라틸의 두 손을 잡은 채 마구 웃어 대다가 재차 물었다.
“대답해봐 아가씨. 내가 무서워?”
질문을 던지는 눈동자는 희번득했다. 라틸은 기르골의 눈동자가 맛이 간 걸 알아차렸다.
그걸 깨닫자 라틸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솟아났다. 대적자가 아니면 로드를 못 죽인다고 안 했나? 그런데 이 뱀파이어. 왜 이렇게 강하지?
내가 각성을 아직 못 해서 그런가? 각성 전 로드는 기르골보다 약한가? 하지만 그런 거라면 기르골이 늘 각성 전에 로드들을 죽이면 됐잖아.
그러나 기르골은 로드를 직접 죽이지 않았고, 꼭 대적자를 사이에 끼웠다. 그 이유는 뭘까?
제한이 있어서? 아니면 이게 놈에겐 다 즐거운 게임일 뿐이라?
머리를 굴리면서도 라틸은 당당하게 허세를 부렸다.
“그럴 리가. 너 같은 건 허섭스레기 인걸.”
사실은 붙잡힌 다리 한 짝도 못 빼고 있었으나, 그래도 움츠린 티를 내지 않았다.
말하고 나니 너무 과하게 표현했나 싶었으나,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라틸은 기르골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는 오히려 슬슬 진정되는 눈치였다.
‘왜 진정되는 거지? 허섭스레기라 했는데, 왜 진정하는 거지?’
라틸의 의구심이 풀리기 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시녀가 문 너머에서 보고했다.
“폐하. 칼라인 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기르골과 라틸이 서로 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소곤소곤 말하며 싸웠기에, 시녀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그녀는 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듯했다.
라틸은 대답에 앞서 기르골을 보았다.
기르골은 칼라인 이름을 듣자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곧 라틸에게서 손을 떼고 라틸의 소파 손잡이에 걸터앉았다.
이 상황에 옆에 앉는다고? 라틸이 도끼눈을 뜨고 보았으나, 기르골은 비키지 않았다.
라틸은 칼라인을 들여보내라 하지도, 말라 하지도 못하고서 기르골을 경계하듯 빤히 쳐다보았다.
반면 기르골은 칼라인 이름은 안중에도 없단 듯 라틸에게 아까처럼 묻기만 했다.
“정말 내가 안 무서워?”
라틸이 대답 대신 빤히 보기만 하자, 기르골은 한 손을 라틸의 목 뒤로 뻗어 머리카락 한 가닥을 잡고 자기 손가락으로 꼬며 물었다.
“왜 날 속였어?”
“내가 그댈 속인 게 아냐.”
“?”
“그대가 날 속인 거지.”
“음.”
라틸은 시야 구석진 곳에서 연신 돌아가는 창백한 손이 신경쓰였으나, 애써 모른 척하고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난 내가 대적자인 줄 알았어. 그대 때문에. 그러니 이건 다 그대 탓이다.”
라틸이 무조건 우기고 보자, 기르골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무 우겼나 싶어서, 라틸은 이번에는 조금 방향을 바꾸었다.
“새 대적자는? 찾았어?”
기르골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라틸의 머리카락을 놓아주고서 빈정거렸다.
“날 버리고 갔으면서. 무슨 상관이지?”
‘무슨 상관이냐고? 큰 상관이 있으니까 묻는 거지. 자기도 알면서.’
“이번엔 대적자 편 하지 말고…… 내 편 하면 안 돼?”
라틸의 대답에 기르골이 한쪽 입꼬리만 올렸다.
“날 속여놓고서?”
다행히 그는 기분이 나빠 보이지도 않았고, 아까처럼 눈에 이상한 기미가 감돌지도 않았다.
라틸은 주저하다가 그와 사디의 약속을 걸고넘어졌다.
“내 편 되기로 했잖아. 어떤 상황이 와도.”
기르골의 손가락이 잠깐 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가 그 약속을 한 건 사디 양인데.”
기르골은 느긋하게 웃으면서 거짓말했다.
“내가 그 약속을 한 건 사디 양이지. 그쪽이 아닌데.”
라틸은 ‘그게 나잖아’라고 말하기 위해 기르골을 보았으나, 한발 앞서 기르골이 먼저 라틸의 턱을 두 손가락으로 잡고 올리며 물었다.
“증명할 수 있어? 같은 사람이라고?”
라틸은 어이가 없어졌다. 기가 막혔다. 자기가 먼저 알아내 놓고서는 이제 와서 나한테 증명해보라고?
‘놀리는 거 같은데.’
라틸이 빤히 노려보자, 기르골이 조르듯 목소리를 흘렸다.
“응? 증명해봐. 그러면 약속 지킬게.”
그의 입꼬리가 가면처럼 올라가자, 라틸은 그가 자신을 손바닥 위에 놓고 가지고 놀려는 게 확실하단 생각에 불쾌해졌다.
그러나 무어라 대꾸하려던 순간. 라틸은 그가 울고 있단 걸 알아차렸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본인은 모르는 눈치였다.
뭐지? 왜 울지? 이게 뭔가 싶어서, 라틸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그의 눈물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러나 뺨에 손이 닿기 전.
라틸은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르골이 갑자기 정색하더니 뒤로 확 몸을 뺐다.
라틸의 손은 허공에 닿아 멈추었다.
라틸이 쳐다보자, 기르골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나랑 아직 얘기하기 싫구나, 아리탈.”
아리탈? 아리탈은 누구야?
라틸은 그가 자신을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자 의아해졌으나, 기르골은 더 말하는 대신 이번에는 아주 슬픈 표정으로 라틸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눈동자 속 까만 동공이 점점 커다래지는 게, 또다시 맛이 가려 하고 있었다.
‘뭐야 얘. 멘탈이 젠가 같잖아.’
그때. 다시 밖에서 “폐하?” 하는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커다래지던 기르골의 동공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자, 라틸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뭐지. 사디로 만날 땐 거의 항상 제정신 같았는데. 지금은 왜 저렇게 오락가락하는 거지?’
꽃을 뜯어먹으면서 쫓아오는 둥 이상한 면이 보이긴 했어도, 책임감 있게 이것저것 가르쳐주려 하긴 했는데.
‘아…… 아니야. 생각해보니 처음 만났을 때도 일관적으로 이상하긴 했어. 꽃도 뜯어 먹고, 갑자기 고백이나 해대고. 식시귀를 잡아 와서 없애보라 하고 피도 빨아 먹고.’
생각은 기르골이 창가로 걸어가면서 끊어졌다.
라틸은 벌떡 일어났다.
이번엔 또 뭘 하려는 건가 싶었으나, 기르골은 창문 앞에 서더니, 힐긋 반만 뒤를 돌아보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다시 올게. 어떻게 증명할지, 이번엔 먼저 생각해 놔, 제자님.”
뭘 증명해? 자기 입으로도 이미 제자라 부르고 있으면서!
라틸은 어이가 없었으나 기르골은 말을 남기자마자 이미 사라져 있었다.
“폐하?”
세 번째로 시녀가 문 너머에서 부르자, 라틸은 제자리로 돌아가며 중얼거렸다.
“들어오라 해.”
긴장감에 손바닥이 가려워졌다.
증명을 못 하면, 다른 대적자를 찾아서 날 죽일 방법을 찾을 거란 뜻인가?
약속을 안 지키면 대체 뭘 어떻게 하겠단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