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동시에 도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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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화. 동시에 도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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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화. 동시에 도착하다
2022.06.12.
뭘 물어봐야 하지? 음. 그런데 쟤가 그리핀이랑 무슨 대화를 했더라?
라틸의 눈동자가 흔들리자, 게스타는 자신이 라틸에게 잊혔단 걸 깨달았는지 눈이 2mm 정도 더 커졌다.
“일단…… 들어가자. 여기 서서 말할 내용은 아니니까.”
라틸은 다시 몸을 돌려 이번에는 게스타의 방으로 갔다.
“혹시 네 시종도?”
“모르고 있어요…….”
“그럼 심부름 보내자.”
게스타가 시종에게 도서관에 가서 책을 15권 찾아 달라고 보내자, 라틸은 ‘15권이나?’라고 생각했지만, 그 이야기를 하는 대신 소파로 가 털썩 앉았다.
게스타는 문을 단단히 닫고서 라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가 맞은편에 앉자, 라틸은 “음.” 하고 말문을 열었다.
“일단 넌 내 적은 아니다. 그렇지?”
사실 이건 라틸이 게스타에 대한 일을 우선순위에서 뒤로 미룬 원인이기도 했다.
자신이 대적자라는 게 확실했다면 게스타를 촉을 세워 경계했을 텐데. 일단 게스타는 그리핀과 대화했고, 그리핀은 유명한 로드의 편이라지 않은가.
그러다 보니 인지하지도 못한 새 순서가 뒤로 밀린 게 분명했다. 아마도.
“예. 아닙니다.”
“칼라인이랑 한패야?”
무슨 차이인진 모르겠지만 게스타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말을 정정해주었다.
“한배를 타고 있어요.”
“그 배가 내 배고?”
게스타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틸은 그의 보기 좋게 혈색 있는 뺨을 곁눈질했다.
“뱀파이어는 아니지?”
일단 아닌 것 같긴 한데.
“아니에요…….”
“그럼 어떤 거지?”
“폐하의 편이에요…….”
“구체적으로는? 그건 답이 아닌 거 같은데.”
“궁금하세요?”
“그럼!”
대답하고 활짝 웃다가, 라틸은 이토록 긴장감 없는 대답이 있나 싶어 도로 입을 다물었다.
게스타가 그리핀과 대화할 땐 그에게 깨어 있단 걸 들킬까 봐 심장이 조마조마했는데. 자신이 로드란 걸 알게 되어서인가…… 왜 이렇게 긴장이 안 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오빠 친구가 뱀파이어란 걸 알게 된 순간, 이젠 더 놀랄 일이 없어서일지도.
“…….”
어쨌든 이 부실한 긴장감은 게스타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라틸이 우물거리자 게스타의 눈이 처량한 강아지처럼 변했다.
산책하러 뛰어나갔다가 폭우를 맞고 뛰어 돌아온 강아지 표정이다.
라틸은 어쩐지 자신이 게스타를 의심하지 않은 게 큰 잘못처럼 여겨졌다. 보통의 경우 이건 잘못이 아니겠지만.
“정말이야, 게스타. 네 정체가 뭐지?”
자신이 뱉고서도 너무 무게감 없게 들리는 질문에 라틸이 속으로 재차 자책하는 사이.
게스타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더니, 천천히 머리를 들고서 속삭였다.
“안 말씀드릴래요.”
“왜? 알려주려고 온 거 아니었어?”
“폐하께서 궁금해하셨으면 좋겠어요. 저에 대해서요…….”
의심받고 싶단 건가. 얘도 이상한 걸 좋아하는구나.
라틸은 ‘네 정체는 이상한 애 같아’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꾹 누르고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좀 더 궁금해해 볼게.”
‘얘 의외로 관심받는 걸 좋아하네.’
* * *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게스타는 이번에도 또 뒤로 밀리고 말았다.
라틸은 ‘게스타의 정체가 뭘까?’ 생각하면서 일을 하긴 했으나, 침실에 돌아가자 또 그 일을 까먹었다.
“너!”
그리핀이 창틀에 와 있는 모습 때문이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응접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라틸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외치고서, 문을 닫아건 다음 창가로 달려갔다.
그리핀은 창틀에 배를 대고 납작 엎드려 있다가, 라틸이 다가오자 동그란 눈을 그렁그렁하게 뜨더니 날개를 펼치며 절하는 시늉을 했다.
[로오드으! 내가 왔습니다요!]
라틸이 창문을 열어주자, 그리핀은 짧은 두 다리로 얼른 방 안에 들어오더니 라틸의 주변을 한 바퀴 날면서 사자 꼬리로 연달아 라틸의 얼굴을 두드렸다.
라틸은 자꾸 입에 들어가는 사자 꼬리를 퉤 퉤 뱉어댔으나, 그리핀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즐거워 보였다.
그리핀은 나중엔 라틸의 얼굴 바로 앞에서 정지 비행을 하며 부담스러울 정도로 라틸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그게 이상해 라틸이 묻자, 새의 눈가가 사람이 웃는 것처럼 휘어졌다.
[로드를 이리 보니 너무 좋습니다요. 로드, 로드. 내가 기억나십니까? 내가 기억나지요?]
“전에도 한 번 내 방에 왔었지.”
[그 전에 말입니다.]
“아니.”
라틸의 즉답에 그리핀은 안타깝다는 듯 부리를 벌려 숨을 켁 토해내고는, 라틸의 침대로 올라가 깃털을 고르며 말했다.
[로드는 나를 참으로 아꼈지요. 로드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댔어요. 기억납니까요?]
“아니.”
[기억나면 알 겁니다요. 우리가 얼마나 즐겁게 지냈는지. 로드, 로드는 말이요, 내 머리를 이렇게 이렇게 쓰다듬어 줬습니다요.]
새가 날개로 허공을 쓰는 흉내를 내기에 라틸은 다가가서 원하는 대로 머리를 쓸어보았다.
그리핀은 좋은지 끼룩끼룩 웃더니, 라틸의 다리를 베고 배를 내밀고 누웠다.
그 격의 없는 행동을 보다가 배를 쓸어주자, 새는 또 좋다고 웃어댔고 라틸은 궁금해졌다. 그러니까…… 내가 얘를 타고 날아다녔단 거지?
그 손길을 느꼈는지 그리핀이 웃던 걸 멈추고 놀리듯 물었다.
[왜 자꾸 날개를 만지십니까요, 로드? 제 날개가 마음에 듭니까요?]
작은 부리를 제멋대로 움직이는 꼴이 귀여워서, 라틸은 그리핀의 부리 끝을 손가락으로 몇 번 찌르다가 물었다.
“내가 널 언제부터 탈 수 있어?”
몸이 다 크려면 250년이 걸린다고 했지. 이번에도 그렇게 말하려나, 생각하면서.
그런데 그리핀은 이번엔 250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충격받아 벌떡 일어났다.
“어? 왜?”
[로드는 그렇게 커다랗고 저는 이렇게 앙증맞은데. 저더러 태워 달라굽쇼?]
“어?”
로드가 그리핀을 타고 다닌 거 아닌가?
[로드. 양심을 좀 갖추십쇼. 로드 태우고 가다간 내 척추뼈가 다 박살 나요.]
“!”
* * *
다음날.
평소처럼 식사를 마친 라틸은 자신이 게스타에 대해 또 까먹었단 것도 잊은 채 그리핀의 역할이 뭔지 고민했다.
기르골은 그리핀이 춤추는 것 말곤 하는 게 없다 했지. 어쩐지 기르골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250년 뒤에는 덩치가 큰다는 것 같지만, 그때쯤이면 과연 자신이 살아 있긴 할까?
다시 태어나도 500년 뒤인데, 250년은 진짜 너무 애매한 거 아닌가.
그럼 저 그리핀은 로드가 깨어날 땐 맨날 쪼끄만 상태란 거 아닌가.
그 불만은 집무실에 들어갈 때까지도 계속되었으나, 다행히 일을 시작하자 점점 크기가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게스타에 관한 생각과 비슷할 정도로 줄어들어 마음 한구석에 콕 박혔다.
위치로 따지자면 엄지 끄트머리 즈음에.
덕분에 라틸은 평소처럼 일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럼 아직까지 이쪽으론 이렇다 할 기현상은 없는 거네?”
“예. 몇몇 나라들에는 이상 현상이 일어나고 있지만, 타리움 쪽은 상대적으로 깨끗합니다.”
그 ‘깨끗’에는 하렘에서 일어난 사건은 안 치는 건가…… 라틸은 잠시 생각했으나 그 일은 대신관과 성기사들 쪽에서 바로 해결한 걸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본 거 아니니 큰일이 아니라 여겨지나 보다.
“그래. 다행이라 하기도 뭐하고. 그러네.”
“다행이 아닌가요?”
“한두 나라에 이상이 생기면 몰라도 전 세계에 이상이 생기는데 우리나라만 멀쩡하면, 나중에 뒷감당이 힘들잖아.”
이후 집무실에서의 오전 일과가 끝나자 라틸은 국무회의를 위해 이동했다.
회의장 근처로 가자 시종장이 단단한 파일에 클립으로 집어둔 서류를 확인하고서 알려주었다.
“오늘은 윌랑에서 사절단이 왔습니다, 폐하. 전에 폐하께서 거절하신 ‘그 일’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 일이라면…… 왕자를 후궁으로 보내겠다던……?”
“예. 폐하께서 안 받으신다니 억지로 보내진 못할 테지만 거절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진 직접 봐야 알 듯합니다.”
“불편하겠네요.”
라틸은 작게 중얼거리고서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황제가 드나드는 통로를 통해 바로 앞쪽의 연단에 올라가자 모여 서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라틸에게 허리를 굽혔다.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 사람들 틈에 조금 복식이 다른 이들이 섞여 있는 걸 알아차렸다. 저들이 윌랑에서 온 사절단이겠지.
후궁 이야기를 거절한 터라 좀 보기 꺼림칙했으나 사실 그런 감정은 상대가 더할 터. 라틸은 그 일이 아예 없었던 것처럼 웃으면서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어서들 오게.”
라틸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사절단 대표로 보이는 이도 얼른 나서서 격식에 맞춘 인사말을 뱉었다.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사절단 대표의 뒤쪽에 선 사람들에게 시선이 갔다.
라틸은 바로 그자를 알아보았다. 말을 유난히 재수 없게 하던, 사절단 뒤에 서 있었지만, 사절단 대표도 말리지 못하던 그 소갈머리 없던 사절이었다.
하지만 지난번과 달리 그 사절은 라틸과 눈이 마주치자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대표는 이를 눈치채고는 얼른 말을 꺼냈다.
“이분은 윌랑의 이이사라 왕자님입니다, 폐하.”
공격적으로 말해대던 사절의 얼굴을 기억하는 몇몇 비서들의 표정이 굳었다.
그런 분위기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대표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일찍이 카리센의 황제 폐하께서 타리움에 유학하고 가신 일이 있으시지요. 타리움은 교육으로 유명한 나라니까요. 마침 저희 이이사라 왕자님도 학구열이 무척 대단한 분이랍니다, 폐하.”
라틸은 속으로 생각했다. 뭐지 이 전조는. 왜 저런 걸 굳이 말해주지? 뒤에 뭔가…… 싫은 말이 나올 것 같은데.
“해서, 이이사라 왕자님께서는 타리움에서 수학하고 싶어 하십니다, 폐하.”
역시나. 라틸이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하는 사이. 뒤에서는 뭔가 ‘부득’ 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각도상 서넛이 있는 곳이지만 라틸은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아까부터 라틸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그 재수 없던 윌랑의 왕자가 아니었다. 라틸은 그쪽은 그냥 얼굴을 알아보는 선에서 더한 감정이 없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라틸이 눈을 뗄 수 없던 건…….
‘기르골이 왜 여기 있지?’
왕자 뒤에 밀착해 서 있는 뱀파이어. 기르골 때문이었다.
하지만 놀란 표정도 아는 눈치도 보일 수 없는 상황이라, 라틸은 일부러 그쪽은 쳐다도 보려 하지 않았다.
그래도 심장이 뛰었다. 기르골이 뭘…… 알고 왔나?
아니면 ‘황제가 로드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냥 확인하러 왔나?
그런데 혼란스러운 귓가로 갑자기 부드럽고 맑은 파도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라틸은 의아해 고개를 들었다.
소리는 라틸에게만 들리는 게 아닌지, 타리움의 관리들과 윌랑의 사절단 역시도 어리둥절해 사방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홀 전체가 갑자기 파랗게 물들기 시작하자 기이한 현상에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그 순간. 아치문이 해초처럼 변하더니, 누군가 그 푹 늘어진 해초를 거두며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