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너도 인상 깊었지만 다른 일이 좀 더……
(238/367)
238화. 너도 인상 깊었지만 다른 일이 좀 더……
(238/367)
238화. 너도 인상 깊었지만 다른 일이 좀 더……
2022.06.08.
쫓겨난 기르골은 태연히 수도 번화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머릿속은 아직도 혼란에 가득 차 있어서, 다른 생각들이 들어오기 힘들었다.
진짜 대적자가 셋인 걸까. 검이 고장 난 걸까. 아니면 자신이 그 사이에서 무언가…… 잘못된 정보를 안 걸까.
‘확실히 검은 셋 다 뽑았다.’
‘대적자의 검’은 얼마든지 도로 가져올 수 있었으나, 일부러 그 황후에게서 가져오지 않았다.
황후는 지위가 있으니 쉽게 다른 나라로 이동하지 못한다. 즉, 언제든 여기로 찾으러 올 수 있다. 그러니 우선은 가지고 있게 두고 행보를 살피고 싶었다.
황후를 찾아가기 전. 황제 부부의 근처에서 일하던 시종 하나를 부하로 만들었기에, 황후와 관련된 정보는 계속 보고받을 수 있으니까.
‘왜 셋인 걸까.’
멍하게 걸어가고 있자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 남자가 병사들에게 두 팔을 잡혀 질질 끌려가는 게 보였다.
“아니, 아니에요! 전 알현실에 가지도 못했다고요! 정신 차리고 보니 수도 외곽에 있었어요! 방금 왔어요! 진짜예요!”
그 사람이 외쳐대는 소리를 들으며, 기르골은 태연히 근처 가게에서 커피를 사 손에 들었다.
‘일단 집에 한 번 더 가보고. 또 사디가 없으면…… 라나문에게 가봐야 하나. 아니. 아니. 아니다. 그놈은 너무 게을러.’
그 의욕 없고 나태한 대적자는, 자기 외에도 다른 대적자가 있다면 시큰둥하게 “잘됐네.”라고 말할 게 분명하다.
그러고는 있는지 없는지 모를 그 조그마한 정의감조차도 포근한 이불 안에 넣고 안심할 거다. 그러면…….
‘로드 후보. 황제에게 가봐야겠군.’
도미스를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야 하는데. 한편에 텁텁하게 걸리는 얼굴이 있어, 기르골은 덜 마신 커피를 쓰레기통에 넣어버렸다.
* * *
그 시각.
라틸은 라틸대로 칼라인과 마주 앉아 대적자가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대적자를 어떻게 찾을지를 의논하고 있었다.
“제가 주인 곁을 떠나 잠시 떠돌아다닐 때 찾은 목록입니다.”
칼라인은 라틸에게 자신이 입수한 명단을 보여주었다.
“신전에서 예언에 나온 날짜를 계산해, 대적자일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모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신전에서 지낸 아이들 이름입니다.”
라틸은 목록을 살피다가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아이니 황후도 목록에 있네. 신전에서 지내진 않았다 되어 있지만.”
‘하긴. 칼라인 일에 관련되면 감정이 이성을 누르는 것 같았지만, 기본적으론 똑똑한 사람 같았어.’
아무 증거도 없이 무작정 자신이 대적자라고 우기진 않을 거다. 뭐가 있으니 우겼겠지.
“음?”
그러다 라틸은 전혀 의외인 이름을 하나 더 발견했다.
“라나문?”
뜻밖에도 거기에 라나문의 이름도 있었다. 라틸은 ‘이게 뭐냐’는 눈으로 칼라인을 보았다.
하지만 칼라인은 라나문의 이름을 보면서도 아주 덤덤했다.
“신전에 갔던 사람들 이름은 다 적은 겁니다. 하지만 아마 그자는 대적자일 확률이 낮을 겁니다.”
“그건 왜?”
“그자는 정의감이 안 보이니까요.”
“왜 애한테 그래? 라나문도 정의로울 수도 있잖아. 예를 들어…… 음. 예를 들면…… 음. 뭐가 있지.”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라틸이 입을 다물자 칼라인이 ‘거보세요’ 하는 듯 다시 고개를 내렸다.
미안해 라나문. 난 최선을 다했어. 라틸은 속으로 중얼거리고서 다시 목록을 살폈다.
* * *
점심때 틈을 내서 칼라인과 대화한 라틸은 저녁 때 역시 칼라인을 만나서 대적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대적자는 정의감이 깊은 성격이지만 절대로 헷갈리면 안 됩니다. 여기서 ‘정의로운 성격’이 인간들이 흔히 생각하는 ‘착한 성격’이 아닙니다.”
“그럼?”
“대적자가 최우선으로 하는 건 ‘다수의 사람’입니다.”
“다수의 사람?”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킬 수 있단 겁니다. 예를 들자면, 천 명을 구하기 위해 백 명이 서 있는 다리 줄을 끊어버리기도 하죠.”
라틸은 잠시 멍해졌다.
“역시 내가 대적자 아닐까?”
이쪽은 진지한 질문인데. 칼라인은 뭐가 그리 웃긴지 웃음을 터트렸다.
라틸은 민망해져서 부루퉁하게 물었다.
“근데 예시가 너무 구체적이다?”
“실제 있던 일입니다.”
“!”
“후손을 위해 현재의 사람들을 없앤 적도 있죠. 희생해야 할 그룹에 자기가 포함되어 있어도 마찬가집니다.”
정의롭게 미쳤단 건가. 대적자의 보살핌을 받으려면 일단 다수 그룹에 포함되어야 하나 보다.
라틸은 놀라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해보니 나랑은 좀 다르네. 난 다수를 우선하는 게 아니라, 나한테 소중한 걸 우선하거든. 내 친구들, 내 가족, 내 나라 사람들, 내 신하들.”
이것도 저것도 좋은 건 아니겠지만, 라틸은 혀를 찼다. 어쨌든 대적자란 인간들도 장난이 아니구나.
하긴. 저렇게 극단적이니 내내 로드에게서 승리를 쟁취했겠지만.
대적자들은 저렇게 살아왔는데, 꿈속에서 보는 도미스는 어떤가. 남한테 피해라도 입힐까 달달 떨면서 늘 자기가 손해 보고 살지 않던가.
“성격에서 밀리고 있잖아…….”
뱀파이어들을 조종하는 호구라니. 뱀파이어를 조종한다는 데도 왜 이렇게 약해 보일까.
“그 대적자 이야기는 기르골이 해줬어?”
기르골 이야기에 칼라인은 조금 흠칫했지만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그렇구나. 음. 둘은 나이가 많으니까.”
“…….”
“아, 미안해. 나이 얘기 싫어하지? 나이가 많아서?”
라틸이 깐죽거리자 칼라인은 아예 대답을 회피하고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입가가 딱딱하게 굳은 게 역시 싫은 눈치였다.
라틸은 낄낄 소리 없이 웃다가 허공에 대고 라나문의 이름을 적었다.
“일단 목록에 올라온 사람들은 하나하나 확인해 봐야겠다. 라나문부터.”
“그자는-.”
“정의감이 없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해야지.”
라틸의 단호한 말에 칼라인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그러다 라나문이 정말 대적자면요?”
“응?”
“주인은 그자를 죽일 수 있습니까?”
정말 라나문이 대적자라 여기기보다는 라틸이 나이로 놀려댄 복수를 하는 것이었다.
라틸도 이를 알기에 대수롭지 않게 웃고서 그 질문을 넘겨 버렸다.
“왜 그런 질문을 해, 우리 라나문 서운하게. 넌 라나문이 자기가 선 다리 밧줄을 끊어서라도 다른 사람을 살릴 것 같아?”
* * *
“라나문. 네가 다리 위에 서 있는데, 뒤에서 막 좀비 떼가 달려온다고 생각해봐.”
내내 자신을 피하던 라틸이 갑자기 찾아와서 심각하게 질문하자 라나문의 눈에 황당한 기색이 어렸다.
“그걸 물어보러 오신 겁니까?”
“하하. 설마.”
맞다.
칼라인에게는 ‘그럴 리 없다’라고 했지만, 말하고 나니 그래도 확인해 보고 싶어서였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라나문이 겉으로는 게으르고 자기중심적인 미남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속마음은 이타적일지도.
“해봐, 일단.”
“……했습니다.”
“네 뒤에는 좀비떼가 오고 있고, 다리 건너편에는 먼저 달아난 사람들이 한…… 스무 명? 그쯤 있어.”
“위치를 바꾸면 안 됩니까? 꼭 그런 가정을 해야 합니까?”
역시 얘는 아닌 거 같은데.
“……일단 그 위치로 상상해 봐.”
라나문은 라틸의 질문이 영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으나 이번에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했습니다.”
“좋아. 그러고 또 상상해 봐. 네 속도가 느려서-.”
“전 달리기를 잘합니다. 몇 초면 다리를 건넙니다.”
“다리를 다쳐서 느려졌어. 그래서 좀비들을 따돌리고 다리를 건너갈 수 없어. 네가 다리를 다 건널 때쯤엔 다른 좀비들도 다 같이 건너편에 도착해.”
라나문이 반듯한 미간을 조금 구겼다.
“왜 그렇게 부정적인 말만 하십니까?”
“아, 하여튼. 그런 상황이야. 그러면 넌 어떻게 할 거야?”
“그때쯤엔 전 죽었을 텐데 선택권이 있습니까?”
“아니, 건너편 사람들이라도 살리기 위해 다리 줄을 끊을 거냐고.”
라틸은 질문을 하고서 좀 초조해서 라나문을 보았다.
물론 고작 이 질문만으로 대적자를 가려낼 수 없단 건 알았다. 대적자를 가려내려면 기르골이 가진 그 검. 그 검이 필요하단 것도.
하지만 여기서 라나문이 대적자답지 않은 대답을 하나 해준다면, 마음이 좀 편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라나문이 생각보다 대답을 바로 하지 않자 라틸은 괜히 긴장이 됐다.
뭐야…… 라나문. 너 생각보다 희생적인…….
“전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
“저라면, 일단 최대한 달릴 겁니다. 살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하고 멈춰서 다리 줄을 끊는 게 아니라요.”
“건너편 사람들이 다 죽는데?”
“제가 뛸 동안 그 사람들도 뛰겠죠.”
말을 한 라나문이 조금 걱정이 되는지 라틸을 보았다.
“혹시 제가 나쁘다고 생각하시는-.”
라틸은 고개를 빠르게 젓고서 라나문의 손을 확 잡았다.
“아니! 전혀!”
“!”
“맞아. 살려고 발버둥 쳐야지. 맞아.”
라틸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 역시 우리 라나문은 대적자가 아니야. 얘가 얼마나 자기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는데?
* * *
그렇게 라나문에게 만족한 대답을 얻은 라틸은 신이 나서 하렘을 나가 본궁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하렘 근처를 거의 다 나갔을 때쯤. 누군가 뒤에서 라틸을 따라왔다.
몰래 따라오는 소리는 아니고, 그냥 뒤를 따라오는 소리였다.
라틸은 문 앞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게스타가 부드러운 연두색 스웨터 차림으로 허겁지겁 뛰어오고 있었다.
안 그래도 보드라운 인상의 게스타가 그런 옷차림으로 달려오자, 라틸은 저도 모르게 멈춰 섰다.
“왜 그래, 게스타?”
게스타가 코앞으로 오자 라틸은 얼른 물었다.
게스타는 숨이 찬지 허리를 숙이고서 숨을 골랐다.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그의 등을 라틸이 아프지 않게 두드려주었다.
숨을 고르자 게스타는 허리를 들고서 라틸을 새싹 같은 눈으로 보았다.
“무슨 일 있어?”
라틸이 재차 묻자, 게스타는 서운한 듯 커다란 눈을 그렁그렁하게 뜨다가 라틸에게 물었다.
“폐하는…… 왜 제겐 관심을 안 주세요?”
“어?”
라틸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해졌다.
“너한테 관심을 안 주다니?”
‘갑자기 무슨 관심?’
게스타의 표정이 더욱 울적해졌다. 비에 맞은 고양이처럼 그가 커다란 눈으로 바라보자 라틸은 괜히 자책하게 되었다.
뭔지 모르지만 내가 잘못한 거 같아.
“폐하는 제 생각을 전혀 안 하세요?”
그러다 게스타가 재차 묻자 라틸은 이제야 떠올렸다. 맞아. 그러고 보니 게스타. 아주 수상한 행보를 보였지.
쇼드 폴리에 가면서 까먹었다가 돌아와서 다시 생각나긴 했는데. 이후 게스타에게 갈 때 타시르와 대신관이 따라오면서 못 물어봤다.
문제는 그 후에 다른 것들이 펑펑펑 터지면서 또 까먹었단 거지만.
설마. 게스타는 라틸이 자신에게 뭔가를 물어주길 기다리고 있던 걸까?
‘아니, 그보다 내가 할 말이 있던 건 어떻게 안 거야? 그때 분명 자는 척을 하고 있었잖아? 내가 자는 척하는 걸 알고 게스타도 일부러 그런 모습을 보인 건가?’
하긴.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지만.
“미안. 잊고 있었어.”
라틸이 솔직하게 대답하자 게스타의 눈이 밤톨처럼 동그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