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융통성이 넘치는 성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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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화. 융통성이 넘치는 성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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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화. 융통성이 넘치는 성기사
2022.06.01.
기운이 싹 사라진 대신관은 아이스크림도 다 먹고 연무장도 한 바퀴 돌고 방으로 돌아와 덤벨도 들었지만, 내내 울적한 마음이 한구석에 틀어박혀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정신을 반쯤 흘린 채 운동을 하는 건 몹시 위험한 일이었고, 그 결과는 끔찍하게 나타났다.
“윽.”
대신관의 수행사제 겸 시종인 구벨은 신관복을 다림질하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쿵’ 소리와 신음 소리에 놀라 돌아보았다.
“대신관님!”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대신관이 자기 한쪽 팔을 잡고 끙끙대고 있었다.
바닥을 구르는 덤벨을 보니 도중에 다친 게 틀림없었다.
“괜찮으세요?”
놀라서 묻는 사이, 대신관으로 스스로 팔을 치료하고는 “응.” 하고 대답했다.
구벨은 안심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실수를 하고 그러세요.”
하지만 몸을 치료해 놓고서도 대신관은 여전히 풀죽은 모습이었다.
“살다 보면 가끔 덤벨이 안 들리는 날도 있는 거죠, 대신관님.”
그걸 본 구벨이 얼른 위로해주었지만 대신관은 고개를 젓고서 침대로 걸어가 털썩 힘없이 앉았다.
침대가 크게 출렁이자, 구벨은 당황스러워졌다. 뭐지? 대신관님이 왜 저렇게 울적해하시는 거지?
아니, 울적해하는 모습은 저녁 식사 후부터 간간이 보이긴 했다.
그래도 덤벨을 들고 나면 좀 괜찮으실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이 있으세요?”
때마침 백화가 들어왔다.
대신관은 ‘뚜둑’ 소리가 났으나 이제는 멀쩡해진 자신의 팔을 쓸면서, 솔직하게 황제와 식사할 때 있던 일을 알려주었다.
구벨을 설명을 다 듣고 나자 당황해서 말했다.
“폐하께서 왜 그런 말을 하셨을까요?”
“그냥 해드린다고 하지 그러셨습니까.”
그런 구벨과 겹쳐지는 목소리가 있었다. 구벨은 옆을 보았다. 백화가 동시에 전혀 다른 말을 한 거였다.
백화도 구벨을 힐긋 보았지만, 다시 대신관에게 말을 이었다.
“말이야 그냥 바꾸면 되지 않습니까, 대신관님.”
“말을 바꾸다니?”
“일단 아이니 황후가 대적자가 아니라고 발표를 하고. 맞는다는 게 확실시되면 ‘예전엔 아니었는데 지금은 맞다’고 하면 되는 거잖아요. 남들이 예전부터 그랬는지 지금부터 그랬는지 알게 뭐라고요.”
유연하다 못해 아예 360도로 휘어지는 백화의 주장에 구벨과 대신관은 동시에 입을 떡 벌렸다.
대신관은 이번에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신의 이름을 앞세워 그런 짓은 할 수 없다.”
“대신관님은 그러니 대신관님이 되신 거겠지요.”
성기사단장이 할 소리는 아닌 말을 뱉은 백화는, 시계를 힐긋 보더니 당장 나갈 사람처럼 몸을 약간 문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그러면 이렇게 하지요. 제가 제 이름으로 발표하겠습니다.”
“뭐? 그렇게 되면…….”
“그러면 대신관님의 명예도 지키고 폐하의 총애도 잃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백화야. 그건 거짓이 아니냐.”
대신관이 거짓말을 아예 안 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거짓말하는 사람을 경멸하거나 못돼먹은 사람 취급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거짓말을 신의 이름을 앞세워 할 수 없을 뿐이었다.
그런데 백화는 그걸 하겠다는 것이다.
“어쩌면 진실일 수도 있지요. 저는 그게 거짓인지 진실인지 모르니, 따지자면 거짓은 아니지 않을까요?”
구벨은 ‘헛소리’라고 생각했으나, 대신관을 위해 입을 다물었다.
방긋 웃는 백화가 나가자 구벨은 대신관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팔을 끌었다.
“오늘은 일찍 쉬세요, 대신관님.”
“권력자의 총애를 얻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구나, 구벨.”
“폐하께서 많이 화나셨던가요?”
“내 아이스크림을 뺏어가시더라.”
“아. 그럼 많이 화나진 않으신 거 같은데요.”
“못 들었느냐, 구벨?”
“?”
“내 아이스크림을 뺏어가셨단 말이다. 내 ‘아이스크림’을.”
그게 왜요……라고 생각했으나 구벨은 대신관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덩달아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큰일이네요.”
하지만 속으로는 조금 안심했다. 그냥 좀 서운하신 정돈가 봐.
* * *
백화가 시계를 본 이유는 라틸이 대신관에게 실망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어서였다.
아직 황제가 잠자리에 들 시간도 아니고 졸릴 시간도 아니라 판단한 백화는 곧장 황제를 찾아갔다.
다행히 황제는 아직 방에 돌아가지도 않았고 집무실에 있었다.
“폐하를 뵙고 싶습니다.”
백화의 말은 시종이 안으로 전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백화가 방 가운데로 걸어가자 근위병들이 알아서 문을 닫아주었다.
백화는 커다란 책상 앞에 피로한 얼굴로 앉아 있는 황제를 보았다.
인사를 올린 그는 ‘무슨 일로 왔느냐’는 표정의 황제에게 바로 본론을 꺼냈다.
“폐하께서 대신관님에게 어떤 부탁을 했는지 들었습니다. 그 발표는 제가 하겠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인지 황제가 미간을 모았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는데,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말을 뱉진 않았다.
대신 뭘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방긋 웃으면서 “그래.” 하고 바로 허락했다.
“그대는 현명하구나. 총명하고.”
“부디 이 일로 폐하께서 대신관님에게 서운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화나진 않았으니 염려 마라.”
서운하긴 하셨단 거로군. 백화는 라틸이 생략한 뜻을 알아듣고서 난처하게 웃었다.
* * *
백화는 세련되고 정중한 분위기에, 미간이 반듯하고 자태가 우아해 옷맵시가 좋았다.
눈이 맑은 데다 입가에는 늘 상냥한 미소를 머금었고, 성기사들 특유의 고상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가 있는 미남이었다.
이 탓일까. 시종장은 그가 황제의 앞에서 예의 바른 태도로 굴다 나갔을 뿐인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아졌다.
라나문의 라이벌들에게 발동되는 촉이 빠릿빠릿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백화가 나가자 시종장은 작게 툴툴거렸다.
“저자는 성직자인데도 야심이 너무 큰 것 같습니다, 폐하.”
게다가 잘생겼지요. 시종장은 이 말은 삼켰다. 이 말까지 하면 그가 너무 편파적인 시선을 보내는 것처럼 보일까 봐.
하지만 경계하는 시종장과 달리 라틸은 경쾌하게 대답했다.
“뭐 어때요. 야심이 크면 원하는 게 또렷해서 좋죠. 야망으로 똘똘 뭉쳐 있어도 상관없어요. 난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라틸이 “잘생겼고.”라고 아주 작게 덧붙이는 걸, 시종장은 똑똑히 들었다.
* * *
한편, 여전히 사디를 내놓으라며 애꿎은 쇼드 폴리에 분노를 토해내고 수배서를 죄다 찢으며 이동하던 기르골은, 새로운 도시로 이동했을 때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카리센 황후가?”
“그래. 자기가 대적자라 주장하나 봐.”
“대적자가 뭔데?”
“왜, 500년에 한 번씩 나타나서 세상을 구하니 어쩌니 하는 거.”
“그건 그냥 전설이지.”
“몰라, 하여튼 자기라고 주장한대.”
“진짤까?”
“황후쯤 되는 사람이 빈말을 하진 않겠지.”
“아니지, 황후쯤 되는 사람이니 그런 허풍도 떨겠지. 누가 감히 아니라고 부정하겠어?”
식당 전체에서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기르골은 머그컵을 내려놓고서 의자 등받이에 몸을 축 기댄 채,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하나하나 귀에 담았다.
그의 눈이 점차 가늘어졌다.
대적자는 사디인데. 카리센 황후가 자신이 대적자라 주장한다고?
라나문도 아니라 카리센 황후가?
그럼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도 된단 건가?
아니다. 사디는 타리움 황제의 특사이다. 사디가 카리센 황후일 리는 없다.
하지만 혹시라도…… 사디가 카리센 황후의 위장 신분이라면……?
말이 안 될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기르골의 손가락이 짜증 내는 새의 부리처럼 빠르게 까딱거렸다.
‘일단 그쪽으로 가볼까.’
* * *
카리센에도 쇼드 폴리로 갈 때만큼이나 빠르게 달려간 기르골은 카리센에 도착하자마자 국경 검문을 훌쩍 뛰어넘어 지나쳤다.
아닐 거란 이성과 실낱같은 희망이 그의 가슴 속에서 정체불명의 감정을 그려냈다. ‘끝까지 내 편이어야 한다’던 사디의 말이 그에게 저주처럼 박힌 게 틀림없었다.
마침내 기르골은 카리센의 수도에 도착했다.
그는 오랫동안 살아왔기에 어떤 식으로 굴어야 인간들 틈에 잘 섞일 수 있는지 알았다.
보통은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무시하고 지내지만, 모르는 건 아니었다.
기르골은 우선 성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식당으로 간 다음, 주문을 하면서 종업원에게 ‘황후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물었다.
반짝이는 금색 동전을 쥐여주자 종업원은 신이 나서 설명했다.
“신분 높은 분을 안다면 인맥을 통해서 잠시 뵐 수도 있긴 하겠지요. 하지만 인맥으로 보려면 웬만큼 신분이 높은 사람을 통하지 않고선 힘듭니다. 물론 나리께선 아주 부유해 보이시지만요. 어쨌든 보통 사람들은요, 알현 신청을 해서 오래 기다렸다가 만난답니다. 궁전에 인맥이 없다면 귀족이라 해도 마찬가지예요.”
종업원의 말을 들어보니, 일단 카리센 황후는 궁전에 머무르고 있는 듯했다.
게다가 그가 귀족으로 행세할 때와 그리 절차가 바뀌지도 않은 것 같았다.
종업원이 신이 나 사라지자, 기르골은 이번에는 밖으로 나가 알현실의 위치를 파악했다.
“알현을 어디서 신청하냐면 말이야-.”
기르골에게 알현실 위치를 알려준 사람은 알현을 신청하는 장소도 알려주려 했으나, 기르골은 그 부분은 듣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알현이 이루어진단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알현 대기실로 가서, 초조하게 앉아 있던 사람 중 하나를 밖으로 불러내 수도 끄트머리에 버려두었다.
“어? 여기 어디야? 내가 왜 여깄어?”
당황한 사람이 횡설수설하게 둔 기르골은 대기실로 돌아간 다음, 자기가 그자인 척 태연히 의자에 앉았다.
대기실 문은 문 없는 아치 형태여서, 알현실 안쪽이 훤히 다 보였다.
기르골은 알현실 저 너머로 보이는 두 개의 커다란 황금 옥좌를 바라보며 저 위에 사디가 있을까…… 생각했다.
“루만!”
마침내 자신이 위장한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나자, 기르골은 우아하게 일어나 알현실로 들어갔다.
아치문을 넘어가 붉은 융단을 따라 걸어가자 옥좌에 앉은 이들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기르골이 붉은 융단에 그어진 초록줄 앞에서 알아서 멈춰 서자, ‘여기서 멈추시오’라고 말해야 할 시종이 잠시 당황해 그를 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르골은 우두커니 선 채 카리센의 황후의 얼굴을 낱낱이 살폈다. 사디일까?
“…….”
아니다. 얼굴도 냄새도 다르다.
한 가닥 기대를 품고 온 기르골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녀는 사디가 아니었다. 그럼 정말 사디는 죽은 건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지?”
그런 기르골에게, 황제가 의아해하며 질문했다.
기르골은 몹시 실망했으나, 여기까지 온 김에 해야 할 일은 해보기로 했다.
자신이 대적자라 주장한다던 황후에게 검을 뽑아보게 하는 것.
“제게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가 있답니다.”
난데없는 조상 이야기에 황제와 황후는 둘 다 의아한 표정이었으나, 알현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기에 막진 않았다.
기르골은 거친 속상함을 누르고 온순해 보이도록 웃으며, 허리춤에 찬 검을 검집째 조심스럽게 풀어 옆에 선 시종에게 건넸다.
기르골이 검집에 손을 댈 때부터 경계태세를 하던 근위병들은, 기르골이 검집을 시종에게 건네자 약간 경계를 풀었으나 여전히 긴장한 채였다.
시종이 어리둥절해서 검집을 받아 들자, 기르골이 공손하게 부탁했다.
“높고 귀한 분이 이 검을 뽑아준다면, 검의 주인에게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지요. 오랫동안 기다려 이런 부탁을 드리는 게 우스울지도 모르겠지만, 제게는 나름대로 중요한 일이니 부디 황후 폐하께서 절 위해 이 검을 뽑아주시겠습니까?”
사디가 검을 뽑도록 유도할 때와는 전혀 다른 말이었으나, 원래 그때그때 멋대로 지어내는 말이기에 상관없었다.
아이니는 의아해하면서도 시종을 통해 검을 받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