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신앙과 세속의 입장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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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화. 신앙과 세속의 입장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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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화. 신앙과 세속의 입장 차이
2022.05.29.
쇼드 폴리에까지 사디가 죽었단 소문이 나진 않았을 거야. 그 소문은 여기 돌아와서 들었겠지. 그런데 쇼드 폴리에서 깽판을 부리고 있단 건…….
‘쇼드 폴리에서 헤어졌으니까 쇼드 폴리에서 죽었다고 생각하나?’
라틸은 수배서에 그려진 기르골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침 일과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이동하면서도 라틸은 그 생각에 너무 몰두해서, 몇 번이나 제 발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오늘 점심은 닭고기와 토마토를 함께 조려 만든 요리입니다, 폐하.”
“석류와 자몽을 섞어 얼음을 넣은 음료수입니다, 폐하.”
음식을 차려주며 하인들이 소곤소곤 말했으나 라틸의 정신은 지붕 위를 휙휙 날아다니고 있어서, 그들의 말조차 제대로 듣지 못했다.
기르골과 쇼드 폴리, 사디.
아이니 황후에 대한 것도 걱정이었다. 아이니가 자기가 대적자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그 소문이 언젠간 기르골의 귀에도 들어가겠지.
아니, 어쩌면 이미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사디가 살아 있다면 몰라도 죽었으니, 이제 기르골은 다른 대적자를 찾아 카리센에 갈 것이다. 아이니를 살펴보러.
그런데 아이니가 진짜 대적자라면? 기르골이 사디가 가짜 대적자였단 걸 알게 된다면?
이번에야말로 기르골이 진짜 대적자를 길러내려 들지 않을까? 사디란 전적이 있으니 좀 더 세심하게 보살피면서?
진짜 대적자로 길러낸 다음에는 로드인 자신을 죽이러 올 것이다.
왜 아직 기르골이 나타나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분명 ‘라트라실 황제’가 로드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나.
라틸은 자신이 로드란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이 갑자기 바뀌진 않았다. 여전히 라틸은 라틸이었고 로드로서의 강한 힘도 없었다.
이럴 때 기르골이 대적자를 앞세우고 쳐들어온다면…… 막을 수 있을까?
하염없이 이어지던 생각이 결국 입맛을 뚝 끊어버렸다.
라틸은 포크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하인에게 지시했다.
“서넛과 칼라인을 불러와라.”
* * *
마침 서넛과 칼라인은 함께 있었기에, 라틸이 보낸 하인을 따라 같이 하렘 밖으로 나왔다.
두 뱀파이어는 라틸이 둘을 콕 집어서 부른 걸 알자마자, 사적인 일로 부른 건 아니리란 걸 깨달았다.
황제는 자신이 로드란 걸 알게 된 후 로드와 나이트, 뱀파이어들에 관해 알아내고 싶어 눈을 번뜩이고 있으니, 그 일을 캐묻기 위해 부른 것일 터였다.
“칼라인 님. 폐하께 그 동물 가면…… 친구들은 안 보여주어도 될까요?”
“그들은 제멋대로지. 폐하는 아직 인간 황제로 지내고 싶어 하시고.”
“…….”
“이곳엔 대신관과 성기사들이 지내고 있다. 그들이 이쪽으로 와 지낸다면, 성기사들도 이상한 걸 눈치챌지도 몰라.”
“성기사들을 내보낼 순 없을까요?”
“지금은 그들이 폐하의 가장 좋은 가림막이기도 해. 폐하께서 자신을 드러낼 마음이 있다면 모를까, 아니라면 내칠 필요는 없다.”
“하긴. 진짜 아이니 황후가 대적자라면 성기사들을 우리가 데리고 있는 편이 훨씬 낫겠지요.”
만약 아이니 황후가 진짜 대적자가 되어 로드인 라틸과 부딪치려 든다면, 카리센 사람들은 아이니 황후의 말을 믿을 테고, 타리움 사람들은 대신관을 후궁으로 둔 로드가 어디 있냐며 아이니 황후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여길 것이다.
다른 나라들도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을 내리지, 정말로 라틸이 로드라고 믿고 행동하진 않을 터.
이런 점에서 성기사들과 대신관은 좋은 방패이긴 했다.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두 뱀파이어는 마침내 황제가 있다는 방 앞에 도착했다.
노크를 한 뒤 안으로 들어가자, 붉고 긴 소파에 두 다리를 편하게 펼친 채 앉아 있는 황제가 보였다.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칼라인과 서넛이 들어오자 천천히 발을 내리면서 맞은편을 가리켰다.
서넛은 라틸이 지시한 곳에 앉으려다가 칼라인이 자연스럽게 라틸의 옆으로 가 앉자 속으로 한탄했다.
라틸은 칼라인이 옆에 앉을 줄은 몰랐던지 눈썹을 잠시 씰룩이긴 했으나, 자리를 옮기란 말은 하지 않았다.
세 사람이 나란히 소파에 앉는 것도 이상했기에, 서넛은 어쩔 수 없이 혼자 동떨어진 의자에 앉았다.
서넛까지 마지막으로 앉자, 라틸은 두 뱀파이어가 이곳으로 오는 길에 주고받던 화제를 꺼냈다.
“서넛 경은 말이 나올 때 현장에 있었으니 들었을 거고. 칼라인도 서넛이 얘기해줬으니 들었겠지?”
“아이니 황후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칼라인의 질문에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서넛을 보며 물었다.
“진짜 아이니 황후가 대적자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
그 말에 서넛은 솔직하게 대답했고, 칼라인도 동의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라틸은 그럴 줄 알았단 듯 더 캐묻는 대신 이번엔 칼라인 쪽을 보며 물었다.
“기르골은 ‘사디’를 대적자라 오해했지만 ‘사디’는 죽었지. 그러니 아이니가 대적자란 소문을 들으면 그쪽으로 갈 거야. 기르골과 아이니가 못 만나게 할 방법이 있을까?”
라틸의 질문에 서넛이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아이니 황후를 죽이면 된다’였다.
서넛은 힐긋 칼라인을 보았다. 칼라인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일순 눈빛이 차가워졌다.
하지만 그 방법을 두 뱀파이어 모두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혹시 그들의 몰인정함에 치를 떨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서넛은 칼라인이 선배이고 더 나이도 많으니, 라틸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길 바랐으나, 칼라인은 입을 꾹 다물고 ‘난 잘 모르겠네’ 하는 표정만 지었다.
“뭐야. 왜 둘 다 입을 다물어? 뭐 알긴 아는구나? 모르면 모른다 했을 거야. 그렇지?”
그 모습에 라틸이 예리하게 되묻자, 칼라인은 그제야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죽이면 됩니다. 대적자라면 어차피 죽여야 하니까요. 맞든 아니든, 미리 없애 버린다면 골치 아플 일이 없지요.”
말을 뱉으면서 칼라인이 서넛 쪽을 아주 찰나 노려보았지만, 서넛은 저 말을 자신이 하지 않았다는 데 안심하며 놀란 척 중얼거렸다.
“참 잔인한 방법이군요.”
그래도 칼라인의 눈치가 보여 동의하긴 했다.
“하지만 효과적인 방법 같습니다, 폐하.”
다행히 라틸은 충격을 받는 것 같진 않았으나 바로 반대했다.
“아이니가 진짜 대적자라면 몰라도 아직 확실한 게 아니잖아. 지금은 좀 짜증 나게 굴긴 하지만, 원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기억만 회수하면 원래대로 돌아올 건데 굳이 죽일 필요는 없어. 대적자가 아니라면.”
대적자라면 죽이겠단 건가…… 서넛은 라틸의 부드러운 거절 속에 내포된 뜻을 알아차리고 안도했다.
어떤 이는 자신을 위해 남을 해치겠단 말에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서넛은 라틸이 스스로를 최우선으로 여겨주길 바랐기에 실망할 일이 없었다.
게다가 로드들은 수천 년 동안 대적자들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했는데, 인제 와서 봐주니 어쩌니 할 처지도 아니었고.
그때.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칼라인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주인?”
* * *
오후 업무를 보면서 라틸은 칼라인의 제안을 잘 생각해보고, 지금은 그게 낫겠단 결론을 내렸다.
그 외에 달리 좋은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에 라틸은 오늘의 일과가 끝나자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대신관에게 사람을 보낸 다음 그의 방으로 찾아갔다.
가는 길에 산책하던 라나문을 마주쳤지만, 둘 다 짧게 인사만 나누었을 뿐 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라틸이 휘적휘적 걸어 가버리는 뒷모습을 보며 라나문의 표정이 굳었지만, 라틸은 그가 뒤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걸 알면서도 돌아보지 않았다.
라틸이 대신관의 방 쪽으로 가는 걸 끝까지 지켜본 라나문은, 몹시 불쾌해져 이를 꽉 다물고 돌아섰다.
반면 대신관은 라틸이 자신의 방으로 오자, 기뻐서 한달음에 방문까지 뛰어 나왔다.
“오늘은 웬일로 제게 오신 겁니까?”
라틸이 미리 올 거란 이야기를 해 두었기에, 테이블에는 두 사람 몫의 식사가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대신관은 라틸을 테이블로 이끌면서 연신 밝은 미소를 흘려댔고, 부탁이 있어 찾아온 라틸은 그 모습에 조금 찔려서 일부러 밝게 감탄했다.
“와. 내가 좋아하는 음식만 가득하네!”
“네. 요리사에게 폐하께서 좋아하는 음식으로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꼭 그러진 않아도 돼, 자이신. 좋아하는 음식은 내 방에서도 먹을 수 있으니까.”
“저도 마찬가진걸요.”
처음 식사 자리는 분위기가 좋았다.
라틸은 그의 방에 새로 생긴 운동 기구들을 보면서 저게 뭔지 물었고, 대신관은 신이 나서 각 운동 기구의 효능을 설명해주면서 라틸도 같이 운동했으면 좋겠다고 권했다.
“폐하는 자세도 바르고 골격도 좋으니까, 조금만 운동하셔도 효과가 좋으실 겁니다.”
“지금도 운동은 많이 하고 있어.”
“제가 스케줄을 짜드리면 어깨가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넓어지게 할 수 있는데요! 종아리도 더욱 두껍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음. 글쎄. 난 지금 내 정도가 딱 적당하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폐하는 지금이 딱 적당하시죠. 하지만 무릇 근육이란, 늘 성장하길 기다리는 가녀린 풀과 같아서요.”
“음. 글쎄. 내 근육은 아닐 거야. 걔는 쉬고 싶어 해.”
대신관이 운동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이 하얀 달빛처럼 변해서 너무 신이 나 하는 바람에, 라틸은 간식을 먹을 때까지도 본론을 꺼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다 마지막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이 나오고, 대신관이 아이스크림을 먹느라 잠시 입을 다물자 라틸은 얼른 이곳에 찾아온 목적을 꺼냈다.
“실은 자이신. 네게 부탁할 게 있는데.”
“스케줄을 짜드릴까요?”
“아니, 그게 아니라. 저기, 너도 아이니 황후 이야긴 들었지?”
“예. 안 그래도 하렘 궁인들이 내내 그 이야기를 하느라 떠들썩합니다. 여기에 납치됐었다 주장한다면서요?”
“어. 그거 말고 다른 얘기는 혹시 들었느냐?”
“예. 자기가 대적자라 한다면서요?”
라틸은 작은 숟가락을 휘저으면서 대신관의 눈치를 살폈다.
대신관은 아이니의 주장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대적자 화제가 나왔는데도 아이스크림을 먹는 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라틸은 조금 안심해서, 칼라인이 권하고 자신이 동의한 그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 보았다.
“그래서 말인데 자이신. 네가 ‘아이니 황후는 대적자가 아니다’고 발표해 줄 수 있을까?”
조심스럽게 부탁한 것에 비해 대답은 아주 간단하고 깔끔하게 나왔다.
“안 됩니다.”
너무 시원스러운 거절에, 라틸은 3초 정도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안 된다고 해도 좀 생각해보는 시늉은 할 거라 여겼으니까.
라틸은 인상을 찌푸렸다.
“왜?”
“저는 그 사람이 대적자가 아닌지 맞는지 모르니까요.”
“아닐 수도 있잖아.”
“어쨌든 모르는 걸 공식적으로 발표할 순 없습니다, 폐하.”
라틸은 성질이 나서 대신관이 먹던 아이스크림 그릇을 빼앗아 가버렸다.
대신관이 허공을 스푼으로 젓고서 황망해 라틸을 보자, 라틸은 자신이 너무 유치하게 굴었단 걸 인식하고 그릇을 돌려주며 물었다.
“넌 나보다 아이니 황후가 더 중요하단 건가?”
“전 당연히 폐하의 편입니다. 왜 이 결정이 거기로 튀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폐하.”
대신관은 라틸의 반응에 오히려 더욱 의아한 눈치였다.
그는 라틸이 로드란 것도, 기르골이라는 무시무시한 뱀파이어가 대적자를 찾아 헤매고 다닌단 것도 모르니 이 상황이 의아하기만 했다.
라틸도 이성적으로는 이를 알았지만, 대신관이 한마디만 해주면 당장 어려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는데 무작정 안 된다고 하자 서운했다.
라틸이 차갑게 바라보자, 대신관은 숟가락을 내려놓고서 진지하게 설명했다.
“그 사람이 대적자가 아니란 게 확실해지면 발표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걸 모르면서, 신의 이름을 걸고 거짓말할 순 없습니다.”
“아아. 그래.”
서운하기도 하고 화도 나지만, 아닌 걸 아니라 하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이런 마음을 드러내기도 뭐하자 라틸은 입을 닦고 일어서서 그대로 나가버렸다.
대신관은 내내 같이 웃고 떠들던 라틸이 화난 기운을 풀풀 날리며 가버리자 당황해서 따라가려 했으나, 따라간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주저하며 서 있다가 결국 ‘쾅’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자 풀썩 제자리에 힘없이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