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죽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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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화. 죽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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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화. 죽었다니!
2022.05.22.
사블레 후작이 찾아와 소식을 전해주었을 때, 아트락시 공작은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하지만 라나문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그는 너무 놀라서 들고 있던 찻잔까지 떨어뜨리고 벌떡 일어섰다.
시종장이 전해준 소식은 그만큼 뜻밖이었다. 라나문의 목이 부러지다니.
“설마. 죽……은 건가?”
아트락시 공작이 덜덜 떨며 묻자 사블레 후작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다행히 폐하께서 바로 대신관님을 불러와 치료해주셔서 지금은 아주 멀쩡하십니다.”
그제야 아트락시 공작은 소파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하지만 손은 여전히 달달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크게 다쳤다가 치료받으신 거라 며칠은 누워서 쉬셔야 한답니다.”
“어쩌다 그런 건가?”
“그게 저도 잘…….”
아트락시 공작은 무릎을 짚고 비틀비틀 일어났다.
“일단 가보지.”
* * *
라틸은 누운 라나문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다가, 그가 미간을 조금이라도 찌푸리거나 몸을 들썩일 때면 가슴에 손을 토닥거리며 물었다.
“불편한 데가 있느냐?”
라나문은 물어보면 곧장 눈을 뜨고서 눈을 맞추고 희미하게 괜찮단 대답을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신성력으로 외상을 회복한 다음 쉬게 하는 건 체력의 문제이지 부상의 문제는 아니었으나, 라틸은 그를 병자처럼 대했다.
아직까지 라나문이 고꾸라져 있던 모습이 충격적으로 뇌리에 박힌 탓이었다.
라틸은 라나문을 토닥거리다가 그가 잠든 것 같자 이불을 끌어올려 잘 덮어주고서 밖으로 터덜터덜 걸어나갔다.
“괜찮으십니까?”
서넛이 걱정스레 물었으나 대답할 기운도 없어서, 라틸은 손만 젓고 긴 회랑으로 들어갔다.
처음 라나문이 창백한 얼굴로 누운 걸 발견했을 때. 라틸은 정말로 그가 죽은 줄 알고 기겁해서 대신관을 불러오라고 미친 듯이 소리질렀다.
그때 정신없는 와중에 짧은 환영이 세 번 나타났다 사라졌다. 셋 다 너무 빨리 사라져서 제대로 보진 못했으나, 그리 좋은 환영은 아니었다.
자신의 손에 피에 젖은 누군가가 안겨 있었으니까. 그리고…….
“폐하? 정말로 안색이 나쁘십니다.”
“놀라서 그럽니다. 괜찮아요.”
본능적으로 라틸은 알 수 있었다. 그게 각성의 순간이었단 걸.
지금 자신의 각성이 아니라, 먼 과거의 순간, 어디쯤의.
공개 집무실 안에 들어가자마자 라틸은 책상에 앉아 쫓기는 것처럼 펜과 종이를 꺼내 쥐었다.
경쟁이라도 하듯 속도를 내어 보고서를 읽고 서명을 하는 둥 갑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라틸을, 서넛은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30분 정도가 그렇게 지났을 즈음.
라틸은 펜을 탕 소리가 나게 내려놓더니 갑자기 책상에 엎드려 얼굴을 파묻었다.
“폐하!”
“만약 그런 게 각성이라면…….”
“예?”
“난 안 할 겁니다.”
자신이 안고 있던 그 피 묻은 사람과 환영을 통해서도 느껴지던 고통.
그게 각성 후 벌어진 일이든 각성 직전 벌어진 일이든 각성과 관련된 거라면……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 * *
라틸이 하루에 서너 번씩 라나문을 찾아가며 간병하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라나문이 병상에서 내려올 때쯤 카리센 사절단이 도착했다.
하이신스의 편지를 받은 라틸은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미리 알고 있었기에, 차분하게 접견실로 가 사절단을 맞이했다.
“좋지 않은 소식으로 오게 되어 죄송합니다, 폐하.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카리센의 황후께선 한동안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지요.”
“그래. 가출했단 이야기를 들었지.”
“……가출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다가 공작은 늘 납치당한 거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황후께서 돌아오셔서 실제로 납치당했었다 말씀해주셨습니다.”
“부녀가 사이가 좋군.”
“……황후께선, 자신을 납치한 이들로 흑사신단 용병단을 지목했습니다.”
“어쨌든 돌아왔으니 다행이다.”
자기들의 황제가 미리 언질을 주었단 걸 모르는 카리센 사절단은, 라틸이 흑사신단 이야기가 나오는데도 태연히 대꾸하자 당황해 서로를 힐긋거렸다.
그들은 당연히 황제가 이쯤에서 놀라 진짜인지 물을 줄 예상했던 것이다.
게다가 라틸이 하는 말은 은연중에 ‘난 너희 말을 전혀 믿지 않지만, 그래도 가출했다 돌아왔으니 다행이네’ 하는 뉘앙스가 읽혔다.
사절단 중엔 다가 공작 일파도 있고 아닌 이들도 있었으나, 그렇다 해도 다들 같은 카리센의 사람들이었다.
남의 나라 황제가 자신들의 황후를 가출했다 돌아온 철부지처럼 취급하자, 그들은 기분이 상해 표정이 굳었다.
“흑사신단은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고 각 나라에 지부를 두고 있지만, 본사는 타리움에 있지요. 황후께서 말씀해주신 납치 장소 역시 이곳 본사입니다.”
“…….”
“수사를 하기 전에 타리움의 폐하께 양해를 구해야 할 듯해 미리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라틸이 황후를 철부지 취급한단 건 그들의 오해였다.
라틸은 황후가 원래는 아주 멀쩡한 사람이란 것도, 지금 왜 갑자기 이상하게 구는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고 해서 칼라인의 부하들을 아이니의 거짓 주장에 맞춰줄 이유는 없었다.
“그 나라에도 지부가 있다면 그 나라에서 조사를 하던가 해야지. 내 나라에서 일하는 용병들이 거기까지 가서 아이니 황후를 납치했다고? 게다가 납치한 다음 한 일이 며칠 지나서 풀어준 거라고?”
라틸이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하는 투로 웃자, 사절단의 표정이 더욱 싸늘해졌다.
서넛과 시종장은 집무실 안에서는 이 일을 두고 씩씩거리기만 하던 라틸이 순식간에 백 년 묵은 너구리처럼 굴자 웃음을 참기 위해 각기 다른 방향을 보았다.
“카리센의 황후께선 함부로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오해가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 흑사신단을 수사할 수 있도록 부디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폐하.”
“글쎄.”
라틸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리자 사절단이 놀라 라틸을 보았다.
라틸은 속으로 생각했다. 왜 그래? 너희 중 반 정도도 아이니의 말을 안 믿으면서.
하지만 아이니 황후의 말을 믿건 안 믿건, 저들이 여기서 그걸 드러내진 못할 것이다. 아이니는 카리센의 황후이고 이곳은 타리움이었으니.
“믿기지 않는군. 수도에 있는 흑사신단 용병들은 누구를 납치할 틈도 없이 바빴거든. 수도에 나타난 ‘식시귀’를 잡느라.”
“식시귀요?”
“음. 황후가 정말 흑사신단 본부에 잡혀 있었다면 그 일을 알겠지. 계속 본부를 비워놨으니. 비워둔 본부에 황후가 어떻게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본부를 비운 덕에 황후께서 탈출하신 걸지도 모르지요.”
“그렇더라도 바로 수사에 협조해 주긴 어렵겠는걸. 없어지긴 카리센에서 없어져 놓고, 납치는 뜬금없이 타리움에서 당했단 말이 바로 받아들여지진 않아서.”
“흑사신단은 여러 나라를 오갑니다. 카리센에서 납치해 이쪽으로 데려왔다면 가능한 일이지요.”
“글쎄. 황후는 이미 전례가 있지 않은가.”
“전례라면…….”
“흑사신단에서 가져간 게 있다면 황후의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닐까 싶은데.”
라틸이 아이니 황후가 카리센에서 칼라인을 계속 쫓아다닌 일을 둘러서 말하자, 사절단은 얼음처럼 굳었다.
“짐은 카리센을 우호국으로 여기고 있지. 카리센의 황자는 짐이 가장 총애하는 후궁이기도 하고.”
“!”
“하지만 용병왕 역시 짐의 후궁. 먼 나라에 사는 황후가 아무 증거도 없이 무작정 우긴다 해서 내 후궁의 부하들을 거기로 보낼 순 없다.”
“그러면 아예 수사를 막으시겠단 겁니까. 수사를 하지 않으면 증거를 찾지 못 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렇지. 그러니 수사를 하고 싶다면 수사관을 이쪽으로 보내라.”
“!”
덧붙인 라틸은 빙긋 웃고서, 그들이 이제 대적자 이야기를 꺼내길 기다렸다.
예상대로 그들은 몇 마디를 더 했으나, 라틸이 또렷한 증거나 정황 없이 용병들을 보내줄 것 같지 않자 대적자 관련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니 황후가 대적자일지도 모른단 이야기였다. 아직 확실한 게 아니기에, 그들은 그게 황후의 주장이라 알리는 대신 그런 ‘정황’이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여기서 라틸이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 하나 나왔다.
“하여, 비슷한 정황이 있는 타리움의 특사 사디 경의 기록을 보길 청합니다, 폐하.”
“사디?”
“예. 사디 경은 카리센에서 좀비와 식시귀를 물리치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셨지요. 대적자에겐 몇 가지 특징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사디 경이 거기에 해당되는지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서넛이 뒤에서 자세를 바꾸는 기척이 들리자, 라틸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저 사절단들은 자기들이 대적자를 노리는 뱀파이어 나이트 앞에서 대적자 얘기를 꺼냈단 걸 평생 모르고 살겠지. 알게 된다면 기겁하겠고.
사절단들은 라틸의 이런 마음을 알 수 없기에, 타리움 황제가 설마 이런 일까지 거절하랴 싶어 단호한 시선을 보냈다.
아이니 황후의 주장이야 나라 간 자존심 문제인데다 실제로 증거가 없지만, 사디가 대적자인지 확인하겠단 건 나쁜 일도, 자존심을 걸 일도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수많은 이들이 사디의 솜씨를 목격했으니, 이번에는 증거를 가져오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라틸의 대답은 “안 되겠는데.” 였다.
전자는 거절을 예상했으나 후자는 거절을 예상하지 못했기에, 사절단은 놀라 라틸을 보았다.
앞선 청이야 그렇다 쳐도 특사의 기록을 달란 청까지 거절하다니. 정말로 타리움의 황제는 카리센과 사이가 틀어지고 싶은 걸까?
“사디는 짐의 비밀 특사다. 모든 정보가 기밀에 붙여져 있지.”
“그러면 몇 가지 정보만 알려주시길 청합니다.”
“그럴 필요 없을 거다. 사디는 이미 죽었거든.”
“!”
* * *
“정말이야?!”
“그런가 봐.”
“사디 경이라면 그…… 식시귀를 한 번에 물리쳤단…….”
“그러니까…….”
“아이니 황후는 너무 뜬금없는데. 확실해?”
“그게…….”
자이오르는 야채 가게에서 비싸지만 맛있는 가라다의 배추를 사는 게 좋을지, 아니면 조금 가격이 싸지만 먹을 만한 밀로의 배추를 사는 게 좋을지 심각하게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고민하는 내내 주위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이 심상치가 않았다.
자이오르는 양손에 배추를 쥐고서 그 소리를 듣다가, 황급히 두 개 다 장바구니에 넣고는 계산대로 뛰어갔다.
장바구니를 끌어안고 그가 달려간 곳은 미로 저택의 한 방이었다.
자이오르가 달려가자, 소파에 누워 있던 기르골이 천천히 눈을 뜨고서 그를 질책하듯 쳐다보았다.
“시끄러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기르골 님. 제가 방금 엄청난 얘기를 듣고 왔어요!”
자이오르의 바구니에서 떨어진 배추가 기르골의 얼굴에 덮이자, 그는 황급히 벽으로 달아났다.
천만다행으로, 기르골은 상체를 일으키긴 했으나 그리 화난 얼굴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지?”
“사디 말입니다. 제자님이요!”
“도착했대?”
“죽었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게 무슨 소린지 자이오르가 말하려 했을 땐 이미 기르골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가세요?”
자이오르가 황급히 외쳤지만 문이 열려 있을 뿐. 자이오르는 기르골이 뛰쳐나가는 모습조차 보지 못했다.
힘없이 덜렁거리는 문을 바라보다가 자이오르는 머쓱하게 중얼거렸다.
“아직 더 말할 거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