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0화. 몸도 마음도 모두 (229/367)


230화. 몸도 마음도 모두
2022.05.11.



16551132521104.png

“뭐지 이 근위 기사? 폐하. 뭡니까, 이 근위 기사. 용기? 지껄여대는 말을 보니 용기는 이미 넘쳐나 보이는데?”

클라인은 서넛을 향해 빈정거리고는, 라틸이 자신의 팔을 놓을세라 반대편 손으로 라틸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16551132521104.png

“들어가요, 폐하. 물기 안 닦고 오래 나와 있으면 감기 걸립니다.”

라틸은 발을 잠시 들어 올리긴 했으나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16551132521117.png

‘어쩌지?’

라틸은 난처해져서 서넛과 클라인을 번갈아 보았다.

16551132521117.png

‘이대로 가기엔 서넛에게 묻고 싶은 게 많은데. 피인어들이 그를 나이트라 부른 거. 나이트란 존재가 뭔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내가 로드라면 뭘 해야 하는 건지 그런 것들.’

16551132521104.png

“폐하.”

라틸이 주저하자 클라인이 간절한 목소리로 라틸을 불렀다.

라틸은 더욱 곤란해졌다.

16551132521117.png

‘어쩌지.’

하지만 답은 사실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로드에 관한 문제는 미래가 걸린 중요한 일이고 빨리 정보를 알아내 해결해야 한다.

반면 클라인과 온천을 하며 즐겁게 노는 건 내일 해도 모레 해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클라인이 중요하지 않단 건 아니다. 그와 물장구를 치며 노는 게 급하지 않을 뿐.

16551132521117.png

“클라인.”

결정을 내린 라틸이 클라인을 부르자, 클라인은 자기 팔을 숨기듯 끌어안고서 홱 돌아섰다.

16551132521104.png

“가려고 부르는 거죠?”

16551132521117.png

“미안해.”

16551132521104.png

“…….”

16551132521117.png

“정말 미안. 내일 다시 목욕하자. 아니, 목욕하잔 게 아니라. 하여튼 내일 내가 네 방으로 가마, 클라인.”

라틸은 클라인의 팔을 가볍게 만지며 화를 풀어주려 했으나, 그는 이미 단단히 골이 나 있었다.

16551132521117.png

‘저러다 또 짐 싸는 거 아냐.’

슬며시 걱정되긴 했으나, 라틸은 결국 클라인의 등을 몇 번 두드리고서 옷을 갈아입으러 탈의실로 들어갔다.

16551132521117.png

“서넛 경? 클라인은요?”

그러고서 나왔을 땐 대기실에는 서넛뿐이었고, 클라인은 보이지 않았다.

16551132555204.png

“먼저 나갔습니다.”

16551132521117.png

“온천으로?”

16551132555204.png

“밖으로요.”

16551132521117.png

“뭐? 옷은 어쩌고요? 대기실에 클라인 옷이 있던데.”

16551132555204.png

“수영복 위에 망토만 걸치고 나갔습니다. 근데 아마 괜찮을 겁니다. 날이 많이 춥진 않으니까요.”

많이 안 추운 거지 어쨌든 추운 날씨잖아? 게다가 클라인은 뜨거운 물 안에 들어갔다 나와서 한참 몸에 열이 올라 있을 텐데.

라틸은 황당해서 서넛을 보았으나, 서넛은 쥐 수염만큼도 클라인을 걱정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16551132555204.png

“가시지요, 폐하.”

라틸은 서넛을 따라 나가며 걱정스럽게 클라인의 방 쪽 방향을 바라보았으나, 어두운 길에 커다란 나무 하나만 스산하게 흔들릴 뿐이었다.

16551132555237.jpg

 

* * *

클라인이 울면서 방 안으로 들어오자, 클라인이 없는 틈에 방 안을 다 뒤집으며 대청소 중이던 하인들이 전부 다 행동을 멈췄다.

16551132582292.jpg

“황자님!”

바닐은 하인들에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지시하다 말고서 놀라 달려갔다. 얼마나 다급하게 뛰어갔던지 슬리퍼 한 짝이 벗겨졌지만 그래도 바닐은 멈추지 않았다.

16551132582292.jpg

“황자님. 얼굴이 왜 이러세요? 볼 건 얼굴밖에 없는 분인데, 얼굴이 왜 이렇게 퉁퉁 부었어요?”

16551132521104.png

“내가…… 그자를…… 진짜…… 그자를 죽이지 않으면…….”

16551132582292.jpg

“아이고 발이야! 아이고 발이야!”

16551132521104.png

“?”

16551132582292.jpg

“죄송합니다, 황자님. 발에 가시가 박혔나 봐요.”

바닐은 클라인이 험한 말을 하기 전에 일부러 큰 소리를 내서 말을 막고는, 하인들 쪽을 보며 호통쳤다.

16551132582292.jpg

“다들 나가봐! 황자님 우시잖아!”

하인들이 꾸벅 인사하고 나가자, 바닐은 얼른 클라인을 챙겨 침대에 데려가 앉히고는 차가운 물수건을 가져와 눈가를 닦아주었다.

16551132582292.jpg

“누구 죽일 거란 얘기, 때릴 거란 얘기, 가만 안 둘 거란 얘기는 제발 우리끼리 있을 때 해주세요. 네?”

16551132521104.png

“내가 지금 그런 걸 따질 여력이 없다!”

16551132582292.jpg

“듣는 사람은 그런 거 안 따져요. 여력이 없어도 말은 가려서 하셔야 해요, 전하.”

16551132521104.png

“…….”

16551132582292.jpg

“무슨 일이신데요?”

바닐은 닦아도 닦아도 클라인의 눈물이 그치질 않자, 새 수건에 물을 묻혀 가져왔다.

클라인은 새 수건을 받아 눈가를 찍찍 문지르면서 훌쩍였다.

16551132582292.jpg

“폐하와 좋은 시간 보내실 거라고 손바닥만 한 수영복 들고 뛰어가셨잖아요. 설마! 폐하께서 그거 보고 뭐라 하시던가요?”

16551132521104.png

“폐하는 내 수영복에 관심을 두시지도 않았어. 다른 데 정신이 팔려서!”

16551132582292.jpg

“그런데 왜 우세요? 누굴 죽이고 싶단 건데요?”

16551132521104.png

“서넛.”

아주 의외인 이름은 아닌지라, 바닐은 긴장해 올라간 어깨를 조금 떨구었다.

그사이, 악시안도 하인들에게 클라인이 운단 이야기를 듣고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악시안이 눈으로 바닐에게 ‘무슨 일이야?’하고 묻자, 바닐은 자신도 아직 모른다고 고개를 젓고서 재차 클라인에게 물었다.

16551132582292.jpg

“서넛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요? 네? 그자가 전하께 뭐라 했습니까?”

16551132521104.png

“폐하와 오랜만에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폐하가 날 보고 완전히 홀리셨어. 마침 물안개도 피어올랐고. 너도 알겠지만 나는 옷을 걸쳐도 멋지지만 벗으면 더 멋지니까.”

클라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리던 라틸을 떠올리자 더욱 열분이 나서 괜히 가엾은 손수건만 꽉 쥐어짰다.

16551132521104.png

“나는 폐하를 끌어안았고 폐하는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서-.”

16551132582292.jpg

“그런 얘긴 안 해주셔도 돼요.”

16551132521104.png

“서넛 그 새끼가 끼어들어서 폐하를 데려갔어!”

버럭 소리 지른 클라인이 이번에는 미친 듯이 방 안을 빙빙 돌기 시작하자, 바닐은 황자가 분노로 미쳤을까 봐 진심으로 걱정되었다.

하지만 카리센에 있을 때도 클라인이 화를 풀기 위해 연무장을 열심히 뛴 적이 있던 걸 떠올리자, 바닐은 안심해서 다시 클라인을 달랬다.

16551132582292.jpg

“서넛 경이 거기서 왜 나오는데요? 온천에 들어왔단 거예요?”

16551132521104.png

“대기실에 있다가 폐하가 뭘 마시러 나가자마자 혀를 살살 굴려서 폐하를 데려갔다.”

상황을 지켜보던 악시안은 따뜻한 물을 찻잔에 부으며 중얼거렸다.

16551132582292.jpg

“서넛 경이 폐하를 데려간 게 아니라 폐하가 서넛 경을 따라간 거 아닙니까. 폐하를 감히 이리저리 움직일 사람은 없는데요.”

16551132521104.png

“악시안!”

저 눈치 없는 새끼가 또! 바닐이 버럭 외치자, 자기 입을 자체적으로 봉인한 악시안은 막 탄 차를 클라인에게 가져다주었다.

뜨거운 찻잔을 들게 되자 클라인은 그제야 멈춰 서서 가장 가까이 있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16551132521104.png

“이게 다 서넛 그 못된 놈이 간사하게 혀를 놀려서 그런 거다. 한 번이면 나도 급한 사정이구나, 하고 넘어가. 근데 세 번. 벌써 세 번째라고!”

16551132582292.jpg

“정말 나쁘네요.”

바닐이 동의하자, 클라인은 “그렇지?” 하고 큰 소리로 되묻고는 마시지 않은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이를 갈았다.

16551132521104.png

“그놈하곤 같은 지붕을 두고 살 수 없어.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다. 죽이든 살려서 쫓아내든, 폐하 곁에 못 오게 할 거라고!”

바닐은 클라인을 말려도 소용이 없단 걸 알기에, 그러면 안 된단 말은 하지 않았다.

사실 바닐이 볼 때도 클라인이 서넛에 한해서라면 충분히 화날 만하기도 했다. 황자의 말처럼 벌써 세 번째 아닌가.

결국, 바닐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한숨을 내쉬고서 애원했다.

16551132582292.jpg

“뭘 하시든 남들 보는 앞에서만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 * *


16551132555204.png

“클라인 황자가 신경 쓰이십니까?”

라틸이 본궁으로 돌아가면서 아홉 걸음마다 뒤를 돌아보자, 서넛이 옆에서 물었다.

16551132521117.png

“내가요? 전혀.”

16551132555204.png

“그럼 누굴 자꾸 돌아보시는 겁니까?”

16551132521117.png

“당연히 온천입니다. 따뜻했으니까.”

16551132555204.png

“그럼 제가 따뜻하게 해드리겠습니다……라고 거짓말을 더하고 싶은데.”

16551132521117.png

“!”

16551132555204.png

“전 그걸 못 하네요.”

16551132521117.png

“!”

라틸이 이번에는 뒤가 아니라 옆을 보자, 서넛이 무심하게 웃으면서 자신의 손을 라틸을 향해 슬쩍 내밀었다.

라틸은 주저하다가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보았다. 칼라인만큼은 아니지만 확실히. 차가운 손이었다.

16551132521117.png

“칼라인이랑 서넛 경 사이에도 온도 차이가 나는 거 같은데. 이건 왜 그런 겁니까?”

16551132555204.png

“전 아직 완전하지 않아서 그럽니다.”

자연스럽게 서넛이 걸어가자, 라틸은 얼결에 그의 손을 잡고서 같이 걸어가게 되었다.

손을 잡고 걸어갈 마음은 없었기에 라틸은 손을 이제나저제나 뺄까 타이밍을 엿보았으나 쉽지 않았다.

16551132521117.png

“완전하지 않단 건 무슨 소립니까?”

16551132555204.png

“말 그대로입니다.”

16551132521117.png

“그럼 칼라인은 완전한 겁니까?”

16551132555204.png

“그분은 완전합니다.”

16551132521117.png

“왜요?”

대화를 느리게 나누다 보니 어느새 둘은 라틸의 침실 앞에 도착했다.

응접실 안에 있던 시녀들은 자기들끼리 조용하게 수다를 떨다가, 목욕하러 간 황제가 너무 빨리 돌아오자 놀라 일어섰다.

16551132521117.png

“잠시 나가 있거라.”

시녀들이 각자 흩어지자, 라틸은 서넛에게 소파에 앉으라 하고는 자신은 창가에 걸터앉았다.

16551132521117.png

“아까 하던 말. 계속해봅니다.”

16551132555204.png

“폐하께선 제게 무얼 묻고 싶으셨습니까?”

16551132521117.png

“피인어들이 그러던데. 그대가 ‘로드의 나이트’라고.”

16551132555204.png

“…….”

16551132521117.png

“칼라인이 내가 로드라고 확인해줬습니다. 그러니 이젠 대답 피하지 말아요.”

16551132555204.png

“……맞습니다.”

16551132521117.png

“정확히 그게 뭡니까?”

일부러 서넛과 거리를 두고 앉은 건데. 서넛은 굳이 일어서더니 라틸의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옆에 앉거나 서는 대신, 그는 라틸의 앞에 기사들이 충성 서약을 할 때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서 손을 뻗었다.

라틸이 그 위에 손을 올리자, 서넛은 손등에 닿을 듯 말 듯 입을 맞추고서 대답했다.

16551132555204.png

“이런 겁니다.”

 

16551132726875.png

 

16551132521117.png

“그냥 단어 그대로…… 기사?”

16551132555204.png

“모든 로드는 자신만의 나이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이트는 로드가 나타나는 시기에 맞춰서 태어납니다. 나이가 많을 때도 있고 적을 때도 있지만 거의 또래입니다.”

16551132521117.png

“태어날 땐…… 사람입니까?”

16551132555204.png

“아주 어릴 땐 자신이 나이트란 걸 모릅니다. 자라다가 잠깐 급사하는데-.”

16551132521117.png

“급사한다고요?”

라틸이 놀라 되묻자, 서넛은 ‘쉿’ 하고 자신의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떼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16551132555204.png

“그때 자신이 누구인지 자각하게 됩니다.”

라틸은 서넛의 목 옆에 손을 대보았다. 아주 느리지만 서넛은 심장이 뛰고 있었다.

16551132521117.png

“혹시…… 나도 죽었다 깨어나야 각성하는 건 아니지?”

16551132555204.png

“저는 잘 모릅니다.”

16551132521117.png

‘맞을 수도 있단 건가!’

16551132555204.png

“하지만 아마 아닐 겁니다. 로드를 죽일 수 있는 건 대적자밖에 없다 하는데, 각성 전에 자결한 로드는 있다니까요.”

16551132521117.png

“아아.”

라틸은 힐긋 뒤돌아 높디높은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저기서 뛰어내리면 각성하는 게 아니라 그냥 죽는 거구나.

16551132521117.png

“계속 말해 봅니다.”

16551132555204.png

“나이트란 걸 자각하는 것과 동시에 사명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로드를 위해 태어난 존재란 걸 알게 되는 거죠.”

16551132521117.png

“그럼 서넛 경은…….”

날 지키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 했던 게 진짜 말 그대로 그 뜻이었구나. 과장이나 비유, 이런 게 아니라 진짜 말 그대로.

16551132521117.png

“경도 피를 마십니까?”

16551132555204.png

“안 마십니다. 아마 전 완전한 나이트가 아니라 그럴 겁니다.”

16551132521117.png

“완전한 나이트는 어떻게 되는데요?”

16551132555204.png

“로드가 각성하면 저도 완전해집니다.”

16551132521117.png

“각성하지 않으면…….”

16551132555204.png

“이 상태일 겁니다.”

라틸은 장난 많고 능글맞은 오빠 친구가 갑자기 자신을 위해 태어난 존재라 고백하자 몹시 당황스러워졌다.

16551132521117.png

“날 위해 태어났다면서 그럼 왜 맨날 날 놀린 겁니까?”

라틸이 스스로 바보 같다고 여기면서도 질문하자 서넛이 웃긴 말을 들은 것처럼 크게 웃었고, 라틸은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쌌다. 그렇지. 이건 지키는 거랑 관계없지.

16551132521117.png

“아니 진짜 좀. 이거 이상해서.”

라틸은 머리카락을 괜히 문지르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펴길 반복했다.

칼라인이야 갑자기 뚝 떨어진 신비로운 존재라서, 뱀파이어라고 해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지는 게 있었는데.

서넛은 어릴 때부터 성장하는 걸 보아 와서인가. 저런 식으로 말하자 몹시 어색하고 민망하기만 했다.

16551132555204.png

“뭐가 이상합니까?”

16551132521117.png

“그…… 날 위한 나이트라고 했는데…… 그럼 서넛 경은…….”

16551132555204.png

“괜찮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라틸은 꿈속에서 칼라인이 자신을 나이트라고 칭했던 걸 떠올렸다.

그렇다면 칼라인은 도미스의 나이트였을 건데…….

칼라인은 도미스를 사랑했다. 꿈속에서 지켜본 바로는 아직 별 도움도 안 되고 얼굴도 잘 안 보이지만 어쨌든, 마지막엔 사랑했다.

그러면 혹시 서넛도……?

16551132555204.png

“폐하? 왜 아무 말도 안 하십니까?”

라틸은 입술을 괜히 씹으면서 발을 꿈지럭거렸다.

서넛에게 ‘나이트는 다 로드를 사랑하냐. 너도 나 사랑하냐’고 묻고 싶은데.

왜 이런 질문은 하기가 민망할까. 내내 다른 질문은 잘 했는데.

하지만 서넛의 맑은 적색 눈동자에 대고서 이 질문을 하려니 영 심장이 꽈배기처럼 꼬이는 듯하고 입이 막혔다.

그래도 가까스로 얻은 기회인지라, 라틸은 창피를 무릅쓰고 물어보았다.

16551132521117.png

“혹시 나이트가 로드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친다는 게, 사랑도 포함한 겁니까?”

16551132555204.png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