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역시 곁에 있는 게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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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화. 역시 곁에 있는 게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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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화. 역시 곁에 있는 게 좋아
2022.05.01.
“자이신?”
라틸은 창틀을 잡고 머리를 내밀었다.
“왜 여기 있어?”
이른 아침이었고 햇살이 사방을 뒤덮었는데도 어둑한 느낌을 주는 신비로운 시간대였다.
까마득히 낮은 정원에 홀로 서서 이곳을 올려다보는 대신관은 신전 그림 속 등장인물처럼 보였다.
햇살 아래에서 보드라워 보이는 대신관의 보라색 머리카락은, 도미스의 꿈속에 등장한 그 보라색 얼굴의 보라색과는 아예 느낌부터 달랐다.
라틸은 보라색 얼굴 때문에 일어났던 보라색에 대한 찝찝함이 대신관을 보자 대번에 가라앉았다.
‘신이 대신관을 사랑한다면, 그 이유 중 최소한 50%는 저 얼굴 때문일 거야. 무조건 얼굴 때문이라 하기엔 애가 무지막지하게 착하기도 하지만.’
그 감탄사가 다 사라지기도 전. 눈이 마주치자 대신관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복식 호흡으로 외쳤다.
“폐하!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요!”
‘눈치는 좀…… 많이 없지만.’
“올라와서 말해!”
* * *
정원에서 여기까지 올라오는 시간이 있기에, 라틸은 얼른 욕실로 들어가 세수부터 했다.
물기를 닦고서 침실로 나오자 딱 맞게도 시녀가 대신관의 방문을 알렸다.
“들어오라고 해.”
라틸이 수건을 내려놓는 것과 거의 동시에 대신관이 안으로 들어섰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라틸은 시녀에게 차를 가져오라 할까 말까 고민하며 물었다. 이 시간에 달려와서 할 말이라면 평범한 이야기는 아닐 것 같았다.
쩌렁쩌렁 고함을 지른 걸 보면 위급한 일도 아닐 것 같지만.
“실은…… 불길한 기운이 느껴져서 달려왔습니다.”
대신관은 순순히 대답하고서 라틸의 눈치를 살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게 라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진 않으려나 걱정하는 사람처럼.
“그런데 지금은 괜찮네요.”
“불길한 기운?”
근데 그 이야기를 창문 밖에서 외치려 했다고? 라틸은 당황해서 대신관을 보다가 고개를 빠르게 젓고서 물었다.
“그게 어떤 기운인데?”
자신이 로드란 이야기를 들어서인가. 대신관은 별 의식 없이 말하는 것 같은데. 듣는 쪽에선 괜히 신경이 쓰였다.
“말로 설명하긴 좀 애매한 기분입니다. 하지만 안심하세요, 폐하. 지금은 괜찮거든요!”
“언제부터 괜찮아졌는데?”
“제가 폐하와 대화하기 전…… 한 이삼 분 전쯤부터요.”
침대에서 일어나 씩씩거리다가 창가로 가 대신관을 발견하고 얘기를 나누었지. 그럼 내가 깨어나자마자 그 ‘불길한 기운’이 안 느껴지게 된 건가.
라틸은 더욱 찝찝해져서 대신관을 힐긋 보았다.
대신관은 불길한 기운보다는 라틸의 방에 온 게 더 신경 쓰이는지,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좋아하고 있었다.
“사나흘 동안 자리를 비울 거라고 하시더니. 딱 시간에 맞춰서 돌아오셨네요.”
“시간 맞춰 오려고 애 좀 썼지.”
“네. 폐하께서 없을 때 병간호를 하러 이곳에 두 번 왔습니다. 돌아가면서 왔거든요. 그때랑은 기분이 아주 다르네요.”
대신관은 신이 나서 털어놓았지만, 라틸은 덩달아 반응해줄 심적 여유가 없었다.
자신이 깨어나자마자 불길한 기운이 안 느껴졌다는 건, 혹시 그 불길한 기운이 꿈과 관련된 걸까, 싶어서.
‘아니야. 예전엔 안 그랬잖아. 이전에도 꿈을 계속 꿨지만, 자이신이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온 적은 없었어.’
그럼 꿈 내용? 오늘은 꿈 내용이 너무 난폭해서 그런가? 꿈속에서 도미스는 처음으로 신비한 힘을 사용했고, 마지막엔…….
‘안 죽었겠지?’
하여튼 평소보다 좀 더 들쭉날쭉했는데. 이 일 때문에 불길한 기운이 나온 걸까?
라틸은 머리를 굴렸지만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만약 도미스가 꿈속에서 안 좋은 일을 겪을 때마다 진짜로 내게서도 불길한 기운이 나온다면…… 혹시 도미스가 각성할 때 나도 각성하고 그런 건 아니겠지?’
만약 그런 거라면 더이상 도미스의 꿈을 꾸면 안 된다. 라틸은 각성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꿈을 꾼다고 각성하는 게 아니라면, 도미스의 과거를 보는 쪽이 앞으로의 일들에 도움은 될 것 같아서 걱정이었다. 과거의 실수나 잘못을 통해 지금을 다듬을 수 있을 테니.
“폐하?”
라틸이 팔짱을 끼고서 심각한 표정을 짓자 대신관이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아니. 악몽을 꿔서 좀 싱숭생숭해.”
“악몽이요?”
“내가 죽는 꿈을 꿔서.”
“꿈은 반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죽는 꿈을 꿨으니 오히려 건강하실 겁니다.”
그런 말도 있긴 하지. 하지만 방금 꾼 건 내 꿈이 아니니 그렇지.
라틸은 속으론 대신관의 말이 소용없다고 여기면서도 겉으로는 ‘그래 그래’ 하고 웃다가 안락의자에 편안하게 몸을 기대면서 부탁했다.
“안 좋은 꿈 때문에 지금 기분이 영 찝찝한데, 자이신. 좀 신경을 돌릴 만한 이야기 없을까?”
“전 말주변이 없어서요. 운동을 하는 게 어떨까요? 몸을 움직이면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실 겁니다, 폐하.”
“막 일어났는데 무슨 운동이야.”
“막 일어났을 때 하는 운동이 묘미죠.”
라틸이 입꼬리를 일부러 내리자, 대신관은 이마를 긁적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럼 폐하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 드릴까요?”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의 일들?’
“어!”
라틸은 급격히 흥미가 동해서 안락의자에서 내려와 대신관의 팔을 잡고 침대로 끌었다.
대신관이 쭈뼛거리며 침대에 앉자, 라틸은 그와 마주 보고 편안하게 앉아 눈을 빛냈다.
“나 없으면 뭐 하고 놀아?”
대신관은 라틸과 빤히 얼굴을 보는 상황이 부담스러운지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대답했다.
“그냥 평소와 같습니다. 폐하는 하렘에 잘 오시지 않으니까, 별로 다를 것도 없고요.”
“그럼 평소엔 뭐 하는데?”
“음…… 보통은 제각각 노는데, 가끔씩 타시르 님이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이번에도 타시르 님이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해서 한 차례 작은 소란이 있었어요.”
‘역시 타시르가 하렘 내에서 중심인물 같은 건가. 유일하게 말썽도 안 일어나고.’
“무슨 이상한 행동?”
“하렘에 있는 사람들을 물고기로 비유했다면서 표랑 그림을 작성해 돌렸습니다. 왜 그랬는진 모르겠지만.”
‘그놈의 물고기. 결국 다른 후궁들한테도 했구나.’
대신관은 뭐가 생각났는지 입술을 꿈틀거렸다.
“칼라님 님은 어젯밤에야 그걸 봤는지, 타시르 님을 밤중에 죽이려 드셨죠. 사실 제가 볼 땐 그렇게 나쁘지 않았는데요.”
“칼라인을 뭐라고 써뒀는데?”
“흡혈 오징어요.”
라틸은 입술을 엄지로 누르고서 턱에 힘을 주었다.
흡혈 오징어가 나쁘지 않다고 표현하는 대신관이 너그러운 건가, 많고 많은 물고기 중에 굳이 칼라인에게 ‘흡혈’ 글자가 붙은 물고기를 닮았다 한 타시르가 감이 좋은 건가.
‘그러고 보니 타시르랑 라나문에게 식사 예절이랑 춤을 가르쳐주기로 했지.’
라틸은 쇼드 폴리에 다녀오면서 완전히 잊었던 일들이 서서히 기억났다.
게스타에게서 수상한 점을 발견했던 일도.
쇼드 폴리에서 피인어들을 보고 자신이 로드란 걸 알게 되는 둥 온갖 이상한 일을 겪다 보니 그 모든 걸 다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게스타는 그리핀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 혹시 서넛이나 칼라인과 한패일까?’
“폐하?”
라틸이 생각에 빠져서 눈썹을 찡그린 채 가만히 있자, 대신관이 조심스럽게 라틸을 불렀다.
“이제 괜찮아지셨으면 저는 돌아가 볼까요?”
라틸이 혼자 생각에만 잠겨 있으니, 자신이 방해될지도 모른다 여기는 눈치였다.
“아. 아니. 됐다. 여기까지 온 김에 같이 식사하고 가지.”
그러나 라틸이 그를 붙잡자, 대신관은 함박웃음을 짓고서 사양하지 않고 그렇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자이신. 팔이…… 더 단단해진 거 같은데?”
“아, 티가 나는군요. 요즘은 상체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
“보여드릴까요?”
“아, 아니. 괜찮아.”
라틸은 대답하면서도 더 탄탄해진 대신관의 팔이 신기해 이리저리 눌러보다가 기분이 이상해졌다.
자신이 로드란 말을 듣고서도 이상하게 여긴 부분이긴 한데. 왜 자신은 대신관에게 전혀 나쁜 느낌이 들지 않을까? 뱀파이어 로드라면서.
“자이신.”
“폐하께서 제 근육을 만지고 계시니 노력한 보람이 느껴집니다.”
“넌 날 보면 기분 나쁘거나, 혹시 그런 느낌이 나느냐?”
“아니요?”
“그래…….”
‘역시 각성을 안 하면 문제 될 일은 없는 건가. 대적자가 덤비지만 않는다면?’
* * *
“기르골 님!”
기르골이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화단 앞에 쪼그려 앉아 삽으로 흙을 헤집던 자이오르가 반갑게 달려 나왔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넌 가을에 무슨 삽질이야?”
기르골은 손을 휘휘 저어서 반가워하는 자이오르를 진정시키고는, 겉옷을 벗어 건네며 물었다.
“사디는?”
“제자님 말씀이시죠? 안 왔는데요?”
자이오르는 기르골이 건넨 코트를 받으면서 고개를 기웃했다.
“같이 떠나신 거 아니었나요?”
둘이 같이 가놓고 왜 나한테 사디를 찾느냔 투였다.
기르골은 미간을 찡그렸다.
“안 왔다고?”
“네.”
자이오르가 다시 한번 대답하자, 기르골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하긴. 내가 업고 오지 못했으니 시간이 좀 걸릴지도.”
“그럼요.”
자이오르가 무슨 소리인지도 모른 채 무조건 맞장구를 치자, 기르골은 하품하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사디가 오면 깨워.”
* * *
당장 하렘으로 달려가 게스타를 부른 다음에 차례차례로 묻고 싶은 질문이 한가득이었으나, 라틸은 인내심을 발휘해 참았다.
사흘간 자리를 비웠으니 그동안 밀린 일거리를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라틸은 대신관과 아침 식사를 하자마자 방으로 돌아가 이를 닦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바로 집무실로 갔다.
“오셨습니까, 폐하.”
하지만 집무실 안에서 서넛을 보았을 때는 라틸도 감정이 순간 확 부풀어 올라서 무슨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서넛은 평소처럼 라틸의 책상 뒤쪽에 서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겸연쩍게 웃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라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서 서넛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최근에 이미 쇼드 폴리에서 만났는데. 서넛의 말처럼 정말로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느낌이었다.
그가 멜로시 영지에 틀어박혀서 올라오지 않고 버티던 일을 생각하면 화가 나는데, 그가 실종되었단 소식을 들었을 때를 떠올리면 무사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여러 가지로 복잡한 심경에 라틸은 입을 열기 힘들었다.
시종장은 굳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드는 대신 조용히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너무 늦게 왔다.”
라틸은 가까스로 한마디를 뱉고서 서넛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쩐지 두 팔을 벌려서 서넛을 꽉 끌어안고 싶었으나, 그는 자신의 기사이지 후궁이 아니기에 그러진 않았다.
서넛은 팔을 움찔하다가 라틸이 어깨를 두드리자 싱겁게 웃었다.
“폐하가 그리웠습니다.”
“그리운 사람이 이렇게 늦게 옵니까?”
“폐하도 제가 그리우셨나 봅니다.”
시종장의 눈이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으나, 라틸도 서넛도 그 반응을 살필 여력이 없었다.
라틸은 서넛이 그냥 이렇게 서 있는 게 마음이 들어서, 익숙한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오랫동안 보고만 있었다.
서넛도 시선을 피하는 대신 라틸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은 후에야 라틸은 시종장의 눈길을 느끼고서, 헛기침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서넛은 얼른 펜을 꺼내 잉크를 묻혀 라틸에게 건넸다.
라틸은 펜을 쥐면서 서넛에게 작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이젠 다른 데 가면 안 된다. 계속 내 근처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