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계속 욕먹고 있는 칼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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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화. 계속 욕먹고 있는 칼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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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화. 계속 욕먹고 있는 칼라인
2022.04.24.
아이니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이었다.
“손님들이 오십니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라틸은 상념에서 깨어나 도미스의 시선에 집중했다.
‘하도 꿈을 꾸다 보니 이젠 이런 기술까지 생기네.’
라틸은 커다란 짝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가면을 쓴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오는 모습을 구경하며 생각했다.
‘가면무도회인가? 옛날 사람들도 이런 걸 했구나.’
그런데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을 때였다. 우르르 몰려온 손님들이 우르르 또 어딘가로 달려가자 뒤에서 누군가 종을 흔들었다.
도미스가 다른 하녀들과 함께 돌아서자, 하녀장이 평소보다 좀 더 격식 있는 복장을 차려입고서 종을 들고 있었다.
“모두 이리로.”
하녀장은 하녀들을 손님들이 다니지 않는 안쪽의 복도로 데려가더니, 복도 벽에 이 열로 기대어 서게 한 다음 자신은 그사이를 돌아다니며 딱딱하게 충고했다.
“이미 한 번 한 얘기지만 아주 중요하니 이번에 한 번 더 하겠다. 절대로. 절대로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어선 안 된다. 알겠나?”
“…….”
“그리고 반드시 2인 1조로 다녀야 해. 한 명이 멋대로 없어져서 2인 1조가 안 된다면 당장 숙소로 돌아와 내게 알리도록 하고.”
‘왜 저런 말을 하지?’
라틸은 의아했다. 다른 하녀들 역시 궁금하긴 마찬가지인 얼굴이었다.
[규칙을 어기면 죽을지도 몰라.]
심지어 도미스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안야 씨가 오늘은 제발 규칙을 어기지 말아야 할 텐데……. 차라리 안야 씨가 나랑 한 조가 됐으면 좋겠어. 내가 계속 따라다니면 되니까.]
하지만 하녀장은 도미스의 바람과 달리 다른 하녀와 도미스를 한 조로 짝지어 주었다.
그 하녀 역시 도미스와 한 조가 된 걸 못마땅해하는 눈치였지만, 두 사람에겐 선택권이 없는 듯했다.
“도미스.”
“네, 하녀장님.”
“다시 한번 말하지만, 누가 말을 걸어도 절대로 대답하지 마라.”
“예?”
“넌 최근에 장기 투숙 손님들과 좀 트러블이 있었잖니.”
“아…… 네.”
그래도 하녀장이 도미스의 입장을 그나마 헤아려 주어서 다행이라고, 라틸은 속으로 생각했다.
‘하녀장이 내거는 조건들이 좀 꺼림칙하긴 한데. 그래도 여기서 별일이 생기진 않을 거야. 도미스는 나중에 칼라인과 친해진 다음에 죽으니까.’
* * *
좋게좋게 생각하고 나니 어느새 연회장 안이고 도미스는 커다란 탁자 위에 새로 가져온 음식들을 하나하나 내려놓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손바닥 크기의 작은 접시나 잔들이 있고, 거기에 각각의 요리들이 얹어져 있어서 손님들이 오가며 그릇을 가져가는 구조 같았다.
‘맛있겠다.’
라틸은 연한 색을 입힌 작은 유리그릇에 신기하게 생긴 과일과 아이스크림이 들어간 걸 보며 허기를 느꼈다.
그런데 웨건에서 그릇을 반 정도 옮겨 담았을 때였다.
“도미스 양.”
뒤에서 누군가 도미스를 불렀다. 이름을 부른 건 누군지 알고 부른단 뜻이기에, 도미스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가 더 놀랐다.
뒤에 서 있는 건 벗은 가면을 한 손에 들고 있는 의붓동생 안야였다.
“도미스 양. 할 말이 있는데.”
그새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온 건지 안야는 이전에 막무가내로 시비를 걸 때보다는 한결 차분해진 모습이었는데, 사과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오. 엄마한테 혼났나?’
라틸은 조금 안심했지만, 곧 안심할 일이 아니란 게 생각났다.
“…….”
도미스는 손님인 안야와 대화를 할 수 없는 상황 아니던가.
예상대로 도미스는 주저했지만 곧 몸을 돌려 다시 하던 일을 반복했다.
“도미스 양. 내가 부르잖아.”
그래도 안야는 한 번 더 참고 불렀지만, 도미스는 이미 이 성에서 오래 지내면서 규칙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단 걸 알고 있었기에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게다가 하녀장이 딱 잘라서 도미스에게 충고하지 않았던가. 손님과 트러블이 있었단 걸 알지만, 그래도 대답하지 말라고.
“도미스 양. 화내려는 거 아니니까 대답 좀 하지 그래?”
“…….”
“전에 일. 사과하고 싶어서 그래. 생각해보니 내가 혼자 섣부르게 판단하고 혼자 화낸 거 같아서.”
“…….”
“계속 무시할 거야?”
도미스는 심장이 쿵쿵 뛰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제 할 일을 했고, 차분하게 도미스를 설득하려 했던 안야는 점점 더 표정이 굳어갔다.
‘아이고.’
라틸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니, 쟤는 다른 날도 있는데 왜 하필 오늘 사과하겠다고 저래서 일을 꼬이게 하냐…….
“도미스. 도미스. 도미스. 도미스. 도미스.”
일은 더더욱 꼬였다.
이젠 사과고 뭐고 화가 났는지, 도미스가 음식을 다 내려놓고 돌아서는데도, 안야가 도미스를 따라다니면서 이름을 불러대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문에 다른 손님들이 근처에 모여들기 시작하자, 도미스와 한 조로 일하던 하녀는 ‘너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이야?’ 하는 표정으로 도미스를 노려보았다.
“도미스. 진짜 계속 날 무시할 거야? 이게 마지막 기회야. 여기서 또 날 무시하면 나도 이젠 더 시도 안 해.”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내내 무시 받은 안야가 마지막 경고를 날리자, 도미스의 심장이 울렁였다.
하지만 도미스는 결국 또 안야에게 대답하지 않았고, 웨건을 끌고서 부엌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였다. 안야의 옆에서 고개를 요란스럽게 기우뚱거리던 보라색 가면을 쓴 사람이, 갑자기 도미스에게 얼굴을 확 들이밀었다.
가만히 서 있을 때도 유달리 시선을 붙잡을 정도로 찝찝한 구석이 있던 가면이었는데, 이 탓에 도미스는 놀라서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아.”
작게 탄식하면서.
그러자 연회장 안에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방 안의 풍경이 한 번 크게 꿀렁인 것이다.
마치 이 연회장이 커다란 그릇 안에 비친 세상인데, 누군가 그 세상에 대고 후 크게 입김을 불어서 세상이 물결과 함께 흔들리는 것처럼.
그 순간. 누군가 도미스의 팔을 잡는가 싶더니, 안아 든 채 어딘가로 빠르게 뛰었다.
놀란 도미스는 버둥거렸지만, 그녀를 안은 사람이 “나야, 아가씨.”라고 속삭이자 조용해졌다. 기르골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대답은 할 수 없어서 도미스는 기르골의 어깨만 꽉 붙잡다가, 하녀장이 2인 1조로 있으라 한 일을 떠올리고서 기르골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안 돼. 놈이 아가씨를 봐 버렸어.”
하지만 기르골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 뛰어갔고, 라틸은 사각지대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된 연회장 안쪽에서 짧은 비명을 들었다.
* * *
기르골은 도미스를 하녀들이 머무는 방까지 데려온 뒤에야 놓아주며 말했다.
“이제 얘기해도 될 거야, 아마.”
그는 도미스가 입을 열면 안 된단 상황을 아는 듯했다.
도미스는 기르골의 팔을 잡고서 무어라 말하려 했다.
그러나 아까 너무 놀라서인지, 이번에는 말을 하려고 해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도미스는 몇 번 시도해도 말이 나오지 않자, 울상을 짓고서 손가락으로 계단을 가리켰다. 다시 내려가야 한단 것처럼.
하지만 기르골은 다시 내려가지 않았고, 도미스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하, 하녀장님이, 무조건 둘이 같이 있으라고 그랬어요. 연회장에서 절대로 손님들 말에 대답하지 말라 했고요. 여기 올 때까진요. 근데 연회장에 나랑 한 조였던 하녀를 두고 왔어요. 걔가 비명을…… 분명히 비명을…….”
“하녀장은 뭐가 위험한 존재인지 모르니 다 조심하라고 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
“그게 아니라 걔가 위험, 위험해요. 여기는 규칙이 중요해서 안 지키면…….”
“안야한텐 내가 잘 얘기해둘게, 아가씨. 아가씨가 일부러 무시한 게 아니라고. 걔가 자아가 비대하지만 머리는 안 나쁘니까 얘기하면 이해는 할 거야.”
하지만 눈치가 좋은 것 같은 기르골은 연회장에 돌아가서 파트너를 구해야 한단 소리는 쏙쏙 못 알아들은 척 피해갔다.
도미스가 팔을 잡고 흔들어도 마찬가지. 기르골은 오히려 닫힌 방문을 열어 주더니, 안쪽으로 들어가라고 팔을 뻗으며 권했다.
“혹시 모르니 안에 들어가 있어, 아가씨. 그게 안전할 거야.”
“기르골 씨, 다른 하녀가-.”
기르골은 정말로 딱 도미스 외에는 관심이 없는지 문을 닫고 그대로 가버렸다.
도미스는 3초 정도 멍하니 서 있다가 마음을 굳게 먹고 문을 다시 열었다.
기르골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혼자라도 그곳에 가 볼 생각으로.
그러나 고작 3초가량 망설였을 뿐인데, 기르골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긴 복도를 지나가야 계단을 내려갈 수 있는데, 그 복도에 없었다.
도미스는 혼란스러워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역시 기르골이 보이지 않자, 마음을 굳게 먹고 복도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연회장 안에만 안 들어가면 될 거야. 앨리는 나랑 한 조였으니 내가 확인해야 해.]
‘그냥 있지.’
라틸은 속으로 생각했지만, 도미스는 겁쟁이면서도 책임감이 강한지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그런데 두 개째 계단을 지나 다리 위 난간을 지나는 순간. 갑자기 맞은편에서, 연회장에서 본 그 보라색 가면을 쓴 사람이 나타났다.
도미스는 황급히 멈춰 섰으나 보라색 가면은 대번에 도미스를 찾아내고는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윽. 가면 무늬 하고는.’
기괴한 무늬를 새긴 가면을 쓴 이가 달려오자 그 모습은 별거 아닌 듯한데도 소름이 돋았다.
하녀장이 신신당부한 것도 있는 데다 기르골이 굳이 그 자리에서 도미스를 데리고 도망친 일도 있기에, 도미스 역시 얼른 뒤돌아서 그자를 피해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보라색 가면은 눈 깜짝할 사이 도미스의 앞으로 다가왔다.
‘으악!’
라틸이 비명을 지르는 사이. 도미스는 의외로 반사 신경이 좋은지, 놀라 비명을 지르면서도 보라색 가면을 잡고 확 벗겨냈다.
하지만 보라색 가면 안쪽의 얼굴도 보라색인 걸 본 도미스도 이번엔 참지 못하고 더욱 크게 비명을 질렀다.
‘도미스! 때려! 때려! 때려!’
라틸은 속으로 마구 외쳐댔으나, 달려든 쪽은 보라색 가면이었다. 그자가 손을 뻗더니 도미스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 것이다.
[널 죽여야지. 널 죽이면 로드가 기뻐할까? 널 죽여서 로드에게 칭찬받아야지. 치잉차아아안 받아야지.]
히죽히죽 웃으면서 중얼대는 보라색 얼굴은 끔찍할 정도였다.
‘네가 목 조르는 애가 로드다 이 미친 새끼야!’
도미스의 감각을 그대로 느끼는 라틸은 덩달아 숨이 꽉 막혀서 속으로 아는 욕을 총동원하다가, 나중에는 화가 나서 칼라인까지 욕해댔다.
그로도 억울해서 기르골까지 욕하던 순간. 괴로워하던 도미스가 보라색 얼굴 쪽으로 손을 뻗기 시작했다.
보라색 얼굴은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 웃기만 했지만, 도미스는 계속해서 얼굴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손이 얼굴에 닿는 순간.
도미스가 알아듣기 힘든 말을 외치며 보라색 얼굴을 잡고 그 힘으로 발에 힘을 주어 상대를 걷어찼다.
용감한 행동이었지만, 라틸은 검술을 오래 익혔기에 도미스가 가까스로 내지른 이 일격이 유효타는 아닐 거라 확신했다.
발에 무언가 닿긴 했지만, 상대를 완전히 날린다는, 유효타의 그 느낌이 없던 탓이다.
그런데 별로 세게 맞지도 않은 보라색 얼굴이 갑자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도미스는 자유로워진 목을 잡고 기침을 하면서 끊겼던 숨을 황급히 들이마셨다.
그 순간에도 보라색 얼굴은 혼자 계속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선 순간.
혼란에 가득 찬 얼굴로 물러난 보라색 가면이 갑자기 하늘을 쳐다보며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더니 펑 가루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이건가? 이게 각성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