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이번엔 로드 편에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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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화. 이번엔 로드 편에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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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화. 이번엔 로드 편에 붙는다
2022.04.10.
놀란 건 피인어들만이 아니었다. 기르골 역시 끊어진 수갑을 보며 놀란 듯하더니 순수하게 감탄했다.
“우리 제자님, 힘 센데?”
“그냥 수갑이잖아.”
왜 저렇게들 놀라는 건가 싶어 라틸이 괜히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기르골은 “그냥 수갑?”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이 어쩐지 피인어들을 조롱하는 것 같아서 라틸은 ‘내가 말실수를 한 건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로 피인어들은 좀 화난 얼굴들이었다.
라틸이 다시 기르골을 보자, 그는 자유를 찾은 자신의 손을 이리저리 훑어보면서 알려주었다.
“피인어들은 봉인과 감금 실력이 뛰어나, 제자님. 수갑 역시 저들의 자랑거리야.”
근데 그 자랑거리를 내가 한 번에 부순 거구나. 부순 데서 멈추지 않고 ‘그냥 수갑’이라 해버렸으니, 피인어들이 저렇게 노려보는 거야.
라틸은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서 “몰랐어.”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몰랐다고 말한다 한들 피인어들의 부서진 자부심이 돌아올 리 없단 걸 알기에, 라틸은 지배자 피인어에게 다가가 얼른 화제를 돌려버렸다.
“저기, 우리는 여기에 이상한 공동이 나타났단 말을 듣고 탐험하러 온 거지 인어분들, 아니, 죄송. 피인어분들하고 싸우려고 온 게 아니거든요.”
옆에서 기르골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지 바람 빠지는 미소를 짓자 라틸은 그를 슬쩍 놀려보았다.
기르골은 미안하다고 자기 입술을 두어 번 두드린 다음 얼른 정색했다.
라틸은 다시 피인어들의 지배자를 보며 부탁했다.
“싸우고 싶어서 온 게 아니니 그만 나가게 해주세요.”
이 말을 하면서도 라틸은 이 지배자가 ‘아까 찾겠다던 사람은 찾았나?’라고 말할 경우에 대비해 몇 가지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지배자는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래?”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되묻더니 갑자기 동굴 벽으로 걸어가 벽에 귀를 대고 서기만 했다.
뭐지…… 자기가 상처받았단 걸 표현하는 건가. 라틸은 순간 지배자의 저 넓은 등짝을 토닥토닥 위로해주어야 하나, 의심했다.
그러나 지배자의 표정이 아주 묘하게 변하는 걸 본 라틸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하긴. 갑자기 자기 등을 내밀고 위로해 달란 피인어라니, 이상하잖아.
잠시 뒤. 동굴 벽에서 귀를 뗀 지배자는 라틸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무도회에서 춤을 추기 천 신사처럼 허리를 숙이며 한 팔을 구부리고 인사했다.
“어…… 예.”
얼결에 라틸이 따라 인사하자 지배자는 빙그레 웃고서 대답했다.
“그쪽 엘프의 말이 맞지. 싸우러 온 게 아니라면 싸울 필요는 없어. 그렇지?”
“그럼요.”
라틸은 얼른 대답했으나 기르골은 협조해주지 않았다.
“여기 피인어들을 다 사냥하고 가면 실력이 훨씬 향상될 거야, 아가씨.”
라틸은 그의 옆구리를 아프지 않게 퍽 치고서 웃으면서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인어가 있을 줄 알았으면 안 왔어. 난 인어를 사랑한단 말야.”
“피인어라고 해, 아가씨. 이 피인어들은 인어랑 사이 안 좋아.”
“난 피인어를 사랑한단 말야.”
기르골은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지만, 라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진중하게 지배자를 바라보며 ‘난 이놈과 달라요’라는 걸 어필했다.
다행히 지배자는 기분 나빠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마음에 들면 하나 잡아갈까? 키우게?”
기르골의 말에 대번에 표정이 험악해졌으나, 라틸이 그의 입을 틀어막자 가까스로 지배자는 다시 화를 가라앉히는 듯 보였다.
라틸은 그에게 꾸벅 사과를 한 다음 돌아가는 길을 물었고, 지배자는 고맙게도 순순히 설명해주었다.
* * *
폭풍처럼 두 사람이 다녀간 뒤. 문이 닫히자마자 피인어들은 벽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귀를 댔다.
그들은 벽을 통해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피인어들은 그들이 무사히 아주 먼 곳까지 가는 걸 확인하자 얼른 벽에서 귀를 뗐다.
그중에는 슬린도 있었는데, 슬린은 유독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있다가 지배자 므라딤에게 항의했다.
“기르골은 왜 보내준 겁니까, 지배자님? 지배자님이 힘을 다 드러내면 기르골을 없앨 수 있었는데요.”
다른 피인어들도 조심히 지배자를 바라보자, 지배자는 미끄러지듯 옥좌 위로 올라가 옆으로 편안하게 눕고서 꾸짖었다.
“죽일 순 있겠지. 너희까지 같이 죽겠지만.”
“!”
“내가 기르골을 죽이고 싶어하는 건 복수하기 위해서인데, 복수하기 위해서 있는 동족까지 다 죽이란 거냐.”
“그건 아닙니다.”
슬린이 기가 죽어 황급히 사과하자, 므라딤은 혀를 몇 번 차다가 눈을 빛내며 웃었다.
“어차피 두어도 기르골 저놈은 곧 죽는다. 염려 마라.”
“무슨 말씀이신지…….”
“기르골이 자기 제자로 착각하고 있는 아까 그 엘프라던 여자. 뱀파이어 로드가 맞다.”
슬린과 피인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여자가 뱀파이어 나이트와 대화하는 걸 티투가 들었다더군. 뱀파이어 나이트는 티투가 다른 길로 내보내줬단다.”
“그 여자가 진짜 로드라고요?”
슬린은 아직도 그 말을 믿지 못해 되물었으나, 므라딤은 혼자 웃느라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는 껄껄 소리를 내면서 옥좌 손잡이를 주먹으로 두드렸다.
“기르골이 로드를 대적자로 착각했으니, 이번에야말로 그놈이 망하는 꼴을 보겠구나!”
크게 웃던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자 보석을 엮어 만든 것 같던 인어의 꼬리가 순식간에 사람의 다리로 변했다.
므라딤은 슬린이 가지고 있던 단도를 꺼내 자신의 수염까지도 거울을 보지 않고 한번에 깎아 버렸다.
그러자 사자의 갈기처럼 풍성하던 수염은 싹 사라지고 순식간에 사람들이 상상 속에서 구현한 것처럼 신비로운 물의 정령 같은 얼굴이 드러났다.
오랜만에 지배자의 아름다운 외모를 본 피인어들은 작게 비명을 지르면서 꼬리지느러미로 박자를 맞춰 동굴 바닥을 두드렸다,
슬린은 놀라 물었다.
“어디 가시려는 겁니까, 지배자님?”
므라딤은 인간 세상에 나갈 때가 아니면 절대로 수염을 깎지 않는다.
인간 세상에서는 그의 사자 갈기 같은 수염은 너무 눈에 띄기 때문이었다.
그런 므라딤이 수염을 깎았다는 건 멀리까지 외출하리란 뜻.
므라딤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느릿하게 웃었다.
“기르골 죽는 꼴은 내 눈으로 봐야지.”
“그럼……?”
“우리는 이번에 로드 편에 붙는다.”
“!”
지배자의 아름다움에 취해 비틀거리던 피인어들이 동시에 조용해졌다.
므라딤은 기르골을 향한 원한을 차갑게 드러내며 슬린에게 지시했다.
“뱀파이어 나이트는 우리를 한패로 끌어들이러 온 거였으니 로드가 누군지, 어디 있는지 알려주려 할 거다. 티투에게 잘 물어둔 다음 돌아오라 해라.”
“네!”
* * *
서넛은 무사히 빠져나갔을까?
내가…… 뭔가 많은 걸 알아 버렸으니 서넛은 이제 돌아오려 할까?
라틸은 발을 옮기면서 멍하게 생각했다.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해서 이쪽에게 질렸단 게 아니란 건 알았다.
‘도움이 되기 위해 이런 데 올 정도라면 여전히 날 위하는 마음이 있긴 할 거야. 대체 어떤 점에서 날 위하려던 건진 모르겠지만.’
동굴을 따라 계속 걸어가고 있자니, 자꾸만 서넛 생각이 났다. 그가 돌아올 거란 기대, 그런데 아직도 안 왔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
나중에 그 생각은 점점 로드에 대한 생각으로 바뀌어서, 라틸은 자신이 로드라면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졌다.
로드라고 해서 세상을 위해 죽어줄 마음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세상을 지배하고 괴물들을 부리고 싶은 마음도 없다.
라틸은 그냥 이대로 평화롭게 지내고 싶었다. 후궁들을 데리고서. 좋은 황제가 되어서.
로드라도…… 이게 가능한 걸까? 로드가 악을 불러온다던데 정말일까?
그래도 도미스처럼 세상에 해 한 방울 안 끼치고 살아가던, 가엾고 착하고 여린 아이도 로드가 될 수 있단 걸 알아버려서인가.
그걸 보고 나니 적당히 성질도 있고 필요할 땐 잔인할 수도 있는 자신이 로드일 수 있단 가능성이 이전보단 수월하게 받아들여졌다.
‘뭐, 아직 도미스가 로드라고 100% 확신한 건 아니지만…… 가능성은 제일 높잖아.’
“사디 양.”
그렇게 멍하게 걸어가고 있자니 뒤에서 기르골이 라틸을 불렀다.
돌아보자 그가 빙그레 웃으면서 라틸을 다시 고쳐 불렀다.
“피인어가 인정한 공식 엘프가 됐네.”
“!”
그냥 예쁘다거나 아름답다거나 뭐 그 정도의 칭찬이라면 넘어가겠는데.
‘엘프는 그야말로 미의 집약체 같은 존재잖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그런데 기르골이 저렇게 불러대자, 누가 봐도 놀리는 거라 라틸은 얼굴에 열이 화끈 올라와 그를 노려보다가 목소리를 낮추어 협박했다.
“그 이야긴 꺼내지도 마.”
“왜. 잘 어울리던데. 아무도 아가씨 외양을 설명조차 안 했어. 엘프. 이 단어만으로 다들 아가씨를 떠올리고 알아들었거든.”
“하지 말라니까?”
“스스로가 부끄러워?”
라틸이 그의 귀를 꽉 깨물려는 시늉을 하자 기르골은 얼결에 피했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곧 뭐가 그리 재밌다고 웃으면서 라틸의 팔짱을 꼈다.
“누가 날 물려고 한 거 처음이야, 아가씨.”
“아 그래. 보통은 그대가 물기만 했을 테니.”
“그러니까.”
라틸이 그를 째려보고 있자니, 기르골은 흐뭇하게 웃고서 속삭였다.
“근데 아가씨. 숨은 한 번 더 참아야 할 것 같은데.”
“어?”
질문을 하자마자 전에 들었던 그 거대한 비눗방울이 깨지는 소리가 났고, 라틸은 알아서 코와 입을 틀어막고서 기르골에게 딱 달라붙었다.
그가 희미하게 몸을 떨며 웃는 듯했지만, 라틸은 눈을 감고 숨을 참느라 그의 상태를 확인하진 못했다.
그렇게 몇 초 후. 숨이 너무 가빠온다 싶을 즈음. 다시 물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고 라틸은 얼른 숨을 들이쉬고서 눈을 떴다.
기르골도 라틸을 놓아주자. 라틸은 가파른 바닥에 기대어 숨을 헐떡이며 머리카락에서 물기를 짜냈다.
“저 물은 대체 어디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거야? 젠장.”
“일종의 함정이겠지. 외부인을 차단하기 위한.”
라틸은 머리카락을 쥐어뜯듯 물기를 꽉꽉 짜내면서 바닥에서 굴러떨어지지 않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고 보니 안쪽은 좀 평지에 가까운 곳도 있고, 평지가 아니어도 비탈이 심하지 않은데. 오히려 출입구 쪽이 더 가파른 것 같았다.
아니, 가파른 정도가 아니라 거의 절벽에 가까울 정도여서, 라틸은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발에 힘을 꽉 주고 균형을 잘 잡았다.
그런데 물기를 짜내면서 보니 기르골이 몇 시간 전처럼 라틸은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라틸은 젖은 머리카락을 내려놓고서 기르골의 눈앞에 대고 다시 손을 흔들었다.
“왜 그댄 내가 머리카락을 짤 때마다 그렇게 볼까?”
기르골은 그제야 제정신이 돌아온 듯 눈썹을 잠깐 올리는가 싶더니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과연 머리 말리는 모습이 엘프 같구나, 생각했어.”
“!”
라틸이 화나서 노려보았으나, 기르골은 아무렇지 않게 라틸을 부축해 일어나는 걸 돕고는 뒤로 돌아갔다.
“아가씨가 앞서가. 발이라도 헛디디면 내가 받아야지.”
“안 그래. 난 균형 감각이 빼어나니까!”
“다행이네. 하지만 내가 더 좋을 테니 앞서가.”
그러나 막상 라틸을 앞세워 놓더니 출입구 부근에 다 닿았을 즈음. 기르골은 “잠시.” 하고 말하고서 라틸을 지나 자기가 앞으로 갔다.
“왜 그래?”
“분위기가 안 좋아.”
“분위기?”
기르골이 앞서갔고, 라틸은 영문을 모른 채 따라갔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라틸도 기르골의 말뜻을 이해했다.
공동 밖에는 수많은 병사들이 창을 들이밀고서 겹겹이 안쪽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