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엘프…… 그래 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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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화. 엘프…… 그래 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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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화. 엘프…… 그래 엘프!
2022.04.06.
서넛은 대체 라틸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었기에 이런 결론이 나왔냐고 묻는 표정이었다.
그는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라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냥 물어보면 서넛이 인정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저 단단한 입꼬리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라틸은 서넛의 목걸이에 묻어 있는 티투의 피를 슬그머니 소맷자락으로 닦으면서 빠르게 털어놓았다.
“보통 사람들은 피인어 말을 못 알아듣는대.”
서넛은 몰랐는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럴 만도 했다. 서넛 역시 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말을 잘 알아들었으니,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모를 수밖에.
“근데 난 알아들을 수 있어. 그리고 이건…… 나도 잘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인데. 티투가 그러더라. 내 눈이 무섭대.”
“그건 아닙니다. 폐하가 눈이 무섭다니요. 폐하 눈은 또랑또랑합니다.”
“그뿐만이 아니야. 이전에도 좀 이상한 일들이 있었어. 아니길 바라서 모른 척했지만.”
“이상한 일들이라니요?”
차마 사람들의 마음이 약해질 때면 속마음이 들린단 이야기는 할 수 없어서. 라틸은 잠시 주저했다. 대신 라틸은 그리핀을 팔았다.
“그리핀도 날 찾아와서 로드라고 불렀어.”
“그리핀이……!”
“내가 아니라니까 미안하다고 가긴 했지만.”
“…….”
“그리핀이 다른 사람들한테 안 보일 때 나한텐 보였어. 그리고 사악한 존재가 만지면 검게 변하면서 깨진단 돌이 있는데, 내가 건드리니까 깨졌어. 검게 변하진 않았지만.”
“폐하.”
“애초에 오빠랑 엄마가 내 자리를 차지하려던 것도 날 로드라 의심해서였다며.”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서넛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 맥 없는 시선에 서넛은 고통까지 느꼈다.
라틸은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더니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폐하? 뭘 하시려는 겁니까?”
“이거 봐, 서넛.”
힘없이 중얼거린 라틸이 책상을 내려치는 순간. ‘빠득’ 소리를 내며 책상이 반으로 갈라지자, 서넛은 마음이 아파 다가가려다가 도로 후진해 앉았다.
“어떻습니까?”
라틸의 말투가 평소 기분이 가벼울 때처럼 돌아오자, 서넛은 생각보단 라틸이 상황을 차분하게 받아들이고 있단 걸 깨닫고, 자신도 침착하게 대답했다.
“박수를 쳐야 할 것 같습니다.”
“나 원래 안 이랬는데. 점점 힘이 세지고 있어.”
“그럼 그때 제 가문 보검도…….”
“맞아.”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서넛의 곁으로 다가가 옆에 앉았다.
서넛은 반사적으로 옆으로 물러나려다가 라틸이 째려보자 무릎에 힘을 주어서 버텼다.
“죄송합니다. 그런 장면을 보고 나니 자꾸 몸이 뒤로 가집니다.”
“이 상황에서까지 놀릴 겁니까?”
“기회는 올 때마다 잡아야지요.”
서넛의 입꼬리가 삐딱하게 올라가자 라틸은 희한하게도 마음이 안정이 되었다.
뭐랄까. 그래도 자신이 로드여야 한다면, 서넛도 한패라서 다행인 느낌.
그 나이트라는 게 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피인어 지배자가 ‘로드의 나이트’라고 표현할 걸 보니 일단 한패가 확실하지 않을까?
“내가 로드인 거…… 맞습니까?”
라틸이 다시 묻자 서넛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이렇게 됐는데도 말 안 해 줄 겁니까? 차라리 말해주는 게 속 편할 텐데요. 경도 나도.”
서넛을 입술을 달싹이지만 무어라고 말을 하지 못했다.
라틸은 답답해졌지만 서넛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긴 했다.
무조건 부정하기엔 라틸이 너무 많은 증거를 가져왔다. 지금 부정하면서 제대로 된 반박을 하지 못하면 라틸은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해 신뢰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수긍하자니, 그래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서넛은 보통 이렇게 중요한 일들은 칼라인에게 상담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는 게 많이 없었기에 자신이 이런 문제에서 결정을 내린 적이 드물었다.
그리고 칼라인이 말해주길, 보통 로드가 자신이 로드란 걸 알게 되는 때는 각성하면서라 했다.
그러나 라틸은 아직 각성을 하지 못했다. 여러가지로 힘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지만 칼라인에게 들은 바로는 그건 진정한 각성이 아니었다.
“대답을 안 해주는구나. 또.”
라틸이 다시 반말로 돌아오자, 서넛은 심장에 찬물을 넣고서 흔드는 고통을 받았다.
라틸의 한숨 소리가 자잘한 유리 부스러기들처럼 그의 마음에 박혔다. 그래도 서넛은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그대가 그렇게 망설이면 망설일수록 나는 내 말이 맞단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서넛 경.”
“죄송합니다.”
만약 서넛이 라틸을 위해 이곳에 왔다가 잡힌 게 아니라면 라틸은 분명 그에게 차가운 소리를 더 뱉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넛이 자신을 확실히 위한다는 건 알기에 라틸은 그를 더 흔들지 않기로 했다.
라틸은 서넛이 두 손을 꽉 잡고서 침울하게 머리를 숙이자 더 무어라 재촉하지 못하고서 몸을 일으켰다.
“알았습니다. 이 문젠 나중에 하고. 일단 여기서 나가죠.”
서넛이 몸을 일으키자 라틸은 벽으로 걸어간 다음 거기에 대고 티투가 알려준 대로 그의 이름을 두 번 불렀다.
“티투 티투.”
하고 보니 ‘이게 뭔가’ 싶어 좀 허탈해졌으나, 제대로 된 방법이 맞긴 하는지 곧 들어온 문이 열리며 티투가 들어왔다.
라틸은 서넛에게 티투를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따라가요. 밖으로 데려다줄 겁니다.”
서넛은 라틸 곁으로 오다가 그 말에 포함된 뉘앙스를 읽고서 놀랐다.
“같이 안 가실 겁니까?”
“난 같이 온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하고 나갈 겁니다.”
“같이 온 사람이라니요?”
‘같이 온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티투가 인상을 구겼다.
서넛은 티투가 갑자기 표정을 일그러뜨리자 더욱 의아해 라틸을 바라보았다.
“아 뭐. 따지자면 사람은 아니지만…….”
“칼라인 님입니까?”
“아닙니다.”
라틸은 조금 주저하다가 털어놓았다.
“기르골입니다.”
서넛의 눈이 커다래졌다. 라틸이 왜 그자와 함께 있냐는 표정.
그는 입을 뻐끔거렸다. 그런데도 말하지 못하는 건 라틸이 ‘내가 로드야?’라고 물었을 때 대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라틸은 서넛이 왜 저러는지 대번에 이해했으나, 사정을 설명해주는 대신 침착하게 말했다.
“기르골이 뭐 하는 뱀파이어인진 경도 알죠? 안 부딪히는 게 나을 겁니다. 먼저 나가요.”
그러고서 티투를 보았다. 그에게 서넛을 데리고 나가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
그런데 옆을 보니 뜻밖에도 티투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왜 이래?”
라틸이 황당해서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추자, 티투는 황망한 목소리로 물었다.
“로드이십니까?”
“다 들었구나.”
“들렸습니다.”
“……다 들었으면 너도 알겠네. 나도 모른다.”
라틸은 솔직하게 대답하고서 서넛을 끌어다가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일단 서넛 경부터 데려다줘. 기르골이 서넛 경을 본다면 기분 나빠 할 거 같으니.”
“예.”
로드란 존재에 대해 호감이 있는 걸까. 티투는 아까 라틸을 피인어 지배자에게 데려갈 때와 달리 싹싹하게 대답하더니, 얼른 앞서갔다.
“나이트, 이쪽으로 오시지요.”
서넛은 티투를 따라가지 않고서 라틸을 계속 바라보았다.
“얼른 갑니다.”
라틸이 그렇게 말해주어도 서넛은 주저했다.
“기르골과 다니는 게 위험하지 않을까요?”
“뭐가 위험합니까. 내가 로드인지 아닌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 확실한지 아닌지 내가 물어도 대답 안 해주면서.”
라틸이 짜증스럽단 듯 인상을 구기며 손가락으로 아무 길을 가리키자, 서넛은 그제야 티투를 따라 갔다.
“티투. 기르골이 없는 쪽 문으로 가. 뒷문 같은 거!”
라틸은 서넛과 티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다가 자신은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 * *
엘프가 누구를 말하는 건지 좀 헷갈리긴 하지만 일단 자신과 함께 온 동료는 한 명 뿐이기에, 기르골은 순순히 피인어들에게 투항했다.
하지만 피인어들은 안심하지 못했다. 애초에 기르골이 무기 없이 그들을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투항이라고 해봐야 별거 없었다.
“이쪽으로 와라!”
기르골은 피인어들에게 손목이 묶인 채 순순히 그들을 따라갔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어서, 오히려 끌고 가는 피인어들이 더욱 긴장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에는 사디를 뱀파이어 나이트가 있는 방으로 보낸 므라딤이 옥좌에 한쪽 몸을 기울여 앉아 있었다.
므라딤은 기르골을 보자마자 얼굴이 구겨져 몸을 바로 했다.
“기르골…… 네놈……!”
“안녕, 아가.”
기르골이 반갑게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해도 므라딤의 얼굴은 분노로 더욱 벌게졌다.
“네놈……!”
므라딤이 분노하거나 말거나 기르골은 이 안에 있을 그의 동료 ‘엘프’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사디가 보이지 않자 그의 고개가 비딱하게 기울어졌다.
“없는데.”
이윽고 혼자 작게 중얼거린 그는 므라딤에게 시선을 고정하고서 물었다.
“아가야. 내 제자님 어디 갔어?”
므라딤은 그가 자꾸 자신을 아가라 부르자 화가 나서 수염까지 후들후들 떨다가 ‘제자님’ 소리에 가까스로 진정했다.
그는 기르골이 대적자들의 스승 노릇을 한단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기르골은 그 이상한 여자를 자기의 제자, 즉 대적자로 여기고 여기로 데려왔단 뜻.
하지만 그가 볼 때 그녀는 절대로 대적자가 아니었다. 물론 엘프도 아니었지만.
므라딤의 근육 속에 한 줄기 희망이 솟아났다. 설마…… 저 미친 뱀파이어. 대적자를 잘못 찾아낸 건가? 몇천 년 만에 드디어?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므라딤은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표정이 기분 나쁜지 기르골이 미간을 찡그리지만, 므라딤은 기쁜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가 기르골을 증오하는 건 그가 단순히 자신을 아가라고 불러서가 아니었다. 자신들이 로드를 편들 때마다 기르골 저 미친놈이 저지른 짓거리들.
그의 손에 죽은 동족이 몇이고 그의 손에 부상 입은 동족은 몇이던가.
‘네놈의 그 길고 긴 생도 드디어 끝나려나 보다, 기르골.’
므라딤은 속으로 서늘하게 생각했으나 절대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래야 계속 저자가 제 무덤을 팔 테니까.
“대답을 안 하네. 설마…… 거짓말한 건가?”
하지만 기르골도 바보는 아니어서 므라딤의 표정을 보자 대번에 의심을 드러냈다.
므라딤은 입꼬리를 비딱하게 올리고서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제자란 게 엘프를 말하는 건가?”
그 여자가 절대로 엘프가 아니란 건 껍데기만 봐도 알지만, 저 미친 뱀파이어를 속이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므라딤의 눈동자가 증오로 타오르는 그 순간.
마침 기르골을 찾아온 라틸이 커다란 홀 안으로 들어서다가 심상치 않은 구도와 기르골의 팔을 묶은 수갑을 보고 “어?” 하고 눈썹을 치켜떴다.
기르골과 므라딤은 갑자기 나타난 여자를 쳐다보았다가, 동시에 다시 서로를 보았다.
기르골은 확실하게 하기 위해 사디가 나타나자 대놓고 물어보았다.
“저 아가씨를 엘프라고 한 거 맞겠지?”
“그래. 저…… 엘프.”
므라딤이 기르골을 속이기 위해 정색하고 대답하자, 기르골은 자신이 제대로 찾아온 게 맞는구나 싶어서 라틸을 바라보며 안도해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므라딤은 비웃었고, 라틸은 난데없이 공개적으로 놀림받은 기분에 얼굴이 벌게졌다.
‘뭐야. 저 피인어 왕, 아깐 내가 절대 엘프가 아니라더니 왜 저러고 있어?’
하지만 여기서 그 부분에 반응하면 더 부끄러워지리란 걸 알기에, 라틸은 엘프라는 말은 무시하고서 기르골에게 차갑게 말했다.
“그만 돌아가자. 여기서 뭐 해?”
“엘프가 납치당했다고 들어서 따라왔지. 내가 아는 아가씨는 엘프뿐이라.”
“뒤에 말 순서가 좀 바뀌었다? 일부러 바꾼 거야?”
기르골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자신의 손을 감싼 손목을 들어 보였다.
“따라왔더니 저 피인어들이 이렇게 해놨어, 아가씨. 내가 아가씨 구하려고 수갑까지 찼다고.”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그쪽으로 다가간 다음 자신의 단도를 꺼내 수갑 사이의 고리를 퍽 찍어버렸다.
검집 날이 아니라 검집 끝으로.
그러자 ‘뚝’ 소리가 나며 수갑은 뚝 끊어졌고, 피인어들의 눈동자는 밤송이만큼 거대해졌다.
“됐지?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