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말할 때마다 신경 쓰이네2022.03.23.
“폐하! 황후 폐하, 황후 폐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집무실 안으로 쏟아진 목소리에, 하이신스는 책장을 옆으로 넘기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황후가 돌아와?”
비서는 황급히 황제의 책상 앞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예, 국경을 통과한 다음 마차를 갈아타고 이쪽으로 오고 계십니다. 내일 아침쯤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다가 공작이 함께 오나?”
“국경을 통과할 땐 공작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중간에 합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이신스는 이마를 찌푸렸다. 그는 아이니가 달아났다고 의심하고 있었기에, 그녀가 제 발로 이런 타이밍에 돌아왔단 게 이상하게 여겨졌다.
“심경에 변화가 온 건가. 왜 갑자기 돌아온 거지?”
하지만 다가 공작도 몰랐던 아이니의 속내를, 하이신스가 알 리 없었다. 이는 다음 날 아침. 아이니와 마주 서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이군, 황후.”
“네. 오랜만이군요.”
“수척해졌소. 대책 없이 가출하더니. 고생을 좀 했나 보군. 준비라도 하고 가지 그랬소.”
“폐하께선 건강히 잘 지내신 것 같군요. 안타깝게도.”
“난 대책 없이 가출해 고생길을 가진 않았거든.”
비서들은 황제와 황후가 서로를 향해 날 선 대화를 나누는 사이. 자리를 비켜주어야 할지 꿋꿋하게 남아 있어야 할지 알 수 없어 자기들끼리 연신 눈짓을 주고받았다. 다가 공작은 아이니와 함께 오지 않았으나, 하이신스와 아이니 두 사람만으로도 집무실은 불편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그러다 하이신스가 ‘나가 봐라’는 손짓을 해주자, 비서들은 앞다투어 밖으로 나갔다. 단둘만 남자 하이신스는 의자를 눈으로 가리키며 권했다.
“앉지.”
아이니가 드레스 자락을 ‘탁’ 털고 앉아 허리를 꼿꼿하게 펴자, 하이신스는 자신도 책상 앞으로 가 앉았다. 하이신스는 아이니를 보았고, 아이니는 책상에 늘어선 책과 서류들을 훑었다. 하이신스는 그녀가 자신의 서류들을 보는 게 마음이 들지 않아서, 내용이 조금이라도 드러난 서류 위에 빈 종이를 하나하나 얹으며 입을 열었다.
“난 그대를 좋아하진 않지만.”
“!”
“그대가 쉬운 마음으로 가출할 사람은 아니라 보거든? 한데 어렵게 갔다 왜 이리 쉽게 돌아왔지?”
“알아버려서요.”
“알다니?”
“전생에 내가 누구였든, 이번 생엔 카리센의 황후란 걸.”
소소한 작업을 끝낸 하이신스는 손을 내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전생? 이번 생?
“사색하러 다녀왔나? 신전 같은데?”
아이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순간 재밌게 여겨져 웃음을 터트렸다.
“그보단 큰 데 다녀왔지요. 그리고 자꾸 저더러 가출했다고 하시는데요, 폐하.”
갑자기 아이니가 일어서는 바람에 하이신스는 눈살을 찌푸리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저는 가출했던 게 아닙니다.”
벌떡 일어선 아이니는 앞을 슬프게 바라보며 한 템포를 쉬고는 단호하게 중얼거렸다.
“납치당했던 거지요.”
하이신스는 바로 따라 일어섰다.
“납치라니?”
분명 제 발로 달아난 거라 여겼는데. 납치? 영 믿기지 않았다. 다가 공작이 진즉부터 주장한 이야기라지만. 하지만 진짜라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가 아이니를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사실이오?”
“흑사신단 용병단에 납치되어 있었습니다.”
아이니의 덤덤한 설명에 하이신스의 눈이 더욱 커다래졌다. 흑사신단 용병단이라면 분명……?
* * * 기르골이 라틸을 업고서 달리는 동안, 라틸은 온몸에 힘을 뺀 채 그에게 기대어서 경치를 구경했다. 사실 너무 빠른 속도로 휙휙 지나가다 보니 세세한 경치는 감상하기 힘들었지만, 시선을 멀리 해서 보면 높은 산과 하늘이 맞닿아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굉장해. 말보다 네가 더 빨라.”
게다가 그 커다란 산마저도 금세 지나간 기르골이 대번에 강까지 건너자 라틸은 신이 나서 칭찬했다.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데, 제자님.”
“왜?”
“대접도 말처럼 받고 있으니까.”
라틸이 뒤에서 히죽 웃었으나 기르골은 라틸을 업고 있었기에 그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이후로도 기르골은 순식간에 산 하나를 넘었고, 라틸은 그가 또다른 산으로 들어가는 걸 보며 ‘한숨 잘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정말로 잠시 졸았던 걸까. 다시 눈을 떠보니, 어느새 밤이었다. 라틸은 까맣게 보이는 나무들 사이사이로 노란 달이 드러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는 걸 멍하게 바라보다 문득 쓸쓸해졌다. 저 나무들 어딘가에 칼라인이 있을 것만 같아서.
‘많이 놀란 모양이었지.’
버림받을까 걱정하던 모습은 아직도 생생했고, 이제는 좀 의아했다. 칼라인은 도피하러 후궁이 된 거 아닌가?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간절하게……? 더 이어지려던 생각은 기르골이 갑자기 멈추어서는 바람에 덩달아 끊어졌다.
“왜?”
라틸은 질문을 던지면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어느새 멀지 않은 곳에 목적지가 보이자 탄성을 뱉었다.
“저기구나!”
와본 적이 없으나 보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드넓게 펼쳐진 땅에 갑자기 시커먼 공동이 잘못 떨어뜨린 커다란 잉크 자국처럼 있었으니까. 말로 들었을 때는 ‘신기하네’ 생각했고, 괴물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긴장했는데. 실제로 보니 생각보다 더욱 오싹한 모양새였다.
‘서넛은 왜 여길 혼자 온 거야? 나한테 도움이 되고 싶었으면 와서 말을 하고 제대로 조사단을 데려가던가.’
라틸은 성질이 나서 기르골의 등에서 내렸다. 게다가 저 오싹한 모양새도 모양새이지만…….
“저길 어떻게 들어가?”
생각보다 공동을 둘러싼 사람들 숫자가 많았다. 밤인데도 주위가 훤히 다 보일 정도로 수많은 횃불이 공동 주위에 설치되어 있고, 빛이 닿는 곳마다 다양한 차림의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모인 사람들이 다들 제멋대로 서서 친한 몇몇끼리만 어울리는 걸 보면, 한 팀은 아닌 듯했다. 라틸과 같은 장면을 내려다본 기르골은, 내내 라틸을 업고 오느라 팔이 저린지 자기 어깨를 주물거리며 중얼거렸다.
“용병이랑 모험가들을 고용한 모양이네.”
“어떻게 알았어?”
“옷차림. 무기라거나. 서 있는 자세 같은 거.”
‘오래 살아서 그런가. 이런 거 잘 아는구나. 그냥 봐서는 나이가 별로 티 나진 않는데.’
“왜 그렇게 봐 아가씨?”
“아니야.”
‘그보다 쇼드 폴리 국왕은 내 도움 제안을 거절하면서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다더니. 이게 자기들이 알아서 하는 거야? 용병들이 자기 나라 용병만 있지도 않을 텐데?’
라틸이 속으로 혀를 차고 있자니, 기르골이 중얼거렸다.
“돈 좀 썼겠는데.”
라틸은 쇼드 폴리 국왕에게서 신경을 끄고 물었다.
“들어갈 방법은? 있어?”
“잠시.”
기르골이 언덕의 이쪽 끝과 저쪽 끝을 오가며 저 사이로 들어갈 방법을 찾는 동안, 라틸은 사람들이 혹시 여기를 쳐다볼까 봐 몸을 낮추고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르골은 눈대중을 마치고 돌아와 알려주었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몰래 들어갈 인원수가 아닌데, 아가씨? 아무래도 거리를 안 두고 들어가고 있는 거 같아.”
“거리를 안 두고 들어가다니?”
“줄지어서 들어간다고. 손에 손잡는 식으로. 실제로 잡은 건 아니고.”
라틸은 눈에 힘을 줘 공동을 쳐다보았지만, 밤눈이 좋은 편인데도 저 시커먼 공동 내부는 전혀 볼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비효율적으로 간대?”
“선발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봐.”
그 선발대가 혹시 서넛은 아니겠지. 라틸은 괜히 걱정되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서넛은 쇼드 폴리에 오더라도 몰래 왔을 테고, 타리움의 근위기사단장이 남의 나라 탐사 선발대로 갔을 리는 없단 건 알지만 그래도 초조했다.
“어쩌지? 이봐, 스승. 좋은 방법 있어?”
라틸이 기르골을 흔들자, 기르골은 잠시 생각하다가 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있어. 근데 아가씨가 선호하는 방법은 아닐 거야. 피를 많이 보거든.”
꿍꿍이가 있는 말 같았으나, 라틸은 그와 농담 따먹기를 할 여유가 없었다.
“그럼 내 방식대로 하자. 내 방식은 피 안 봐.”
라틸의 제안에 기르골은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대답했다.
“그러지. 뭔데? 혹시…… 황제 이름을 팔려고?”
라틸은 그가 자신의 진짜 정체를 거론하자 괜히 찔려서 얼른 부정했다.
“아니.”
“그럼?”
라틸은 대답 대신 언덕 위에 다시 납작 엎드려서 공동 주위를 살폈다. 마치 무언가 찾아볼 게 있다는 것처럼. 기르골은 그 모든 과정을 침착하게 기다려주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시간이 좀 오래 지난 뒤에야 라틸은 마침내 사람들과 좀 떨어져 선 남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둘.”
“아는 사이야?”
“아니. 계속 지켜봤는데. 남들이랑 안 어울리고 겉돌고 있어.”
기르골이 ‘그래서 어쩌라고?’란 눈으로 쳐다보자, 라틸이 목소리를 낮추어 명령했다.
“기절시켜서 데려와.”
“왜?”
기르골은 좀 놀란 것 같았다. 라틸은 그가 약간 머리를 들려 하자, 나란히 엎드리도록 당긴 다음 속삭였다.
“우리가 저 사람들 행세를 해서 들어가자. 그러면 되잖아?”
그러고서 옆을 보았는데…… 기르골은 몹시 혼란스러워 보였다.
“왜?”
말하다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더니 반주에 맞춰 춤을 춘 다음 관람료를 내라 요구하는 다람쥐라도 본 표정이라, 라틸은 기르골을 당기던 손을 슬그머니 놓았다. 기르골은 그래도 라틸의 눈동자를 계속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계속 생각한 건데, 아가씨.”
“뭘?”
“뭐라 해야 하나. 아가씨 혹시…….”
혹시? 혹시 로드냐고 물어볼 건가? 혹시 황제냐고 물어볼 건가? 찔리는 게 많은 라틸은 ‘혹시’란 말에 긴장해서 얼른 정면을 보았다.
“태어날 때 정의감은 무거워서 두고 태어났을까?”
다행히 기르골이 뱉은 건 라틸이 두려워한 그런 종류의 말은 아니었다. 놀리는 말에 발끈한 라틸은 “내가 뭘.” 하고 항의하다가, 생각해보니 더 열이 받아서 빈정거렸다.
“그대도 정의감이 그리 커 보이진 않아.”
기르골은 씩 웃고서 인정했다.
“그건 나도 알아, 아가씨. 하지만 난 대적자가 아니잖아?”
뭐야. 진짜로 내가 로드 같다고 의심하는 건가. 라틸은 긴장해서 아무 말이나 둘러댔다.
“내가 식시귀 살려준 거 기억나지 않아?”
말을 하면서도 좀 억울하기도 했다. 아니, 저 남녀 용병인지 모험가인지를 죽이자 한 것도 아니고. 그냥 기절시킨 다음 저 사람들 행세를 하자고 한 건데,
‘그거 가지고 정의감 얘기까지 나와야 하나? ……나오는 게 맞나?’
기르골은 입을 다물고 씩씩거리는 라틸을 보다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기억나.”
그 뒤 기르골은 더 짙게 웃었으나, 뒤따른 말은 웃으면서 흘리기 어려웠다.
“근데 아가씨. 정의감 있는 사람이 사람 먹는 식시귀를 살려주라 하진 않아.”
“내가…… 못돼먹었단 말이야?”
“아니, 아가씨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많아. 아가씨가 못돼먹었단 건 절대 아니지. 가치관의 차이겠지.”
“그럼? 뭐가 문젠데?”
“아가씨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많겠지만, 아가씨처럼 생각하는 대적자는 없었거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