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일단 운반만 해줘2022.03.20.
칼라인은 웃고 떠들면서 걸어가는 사디와 기르골을 보다가, 자신은 예전에도 이렇게 두 사람을 바라본 적이 있단 걸 떠올렸다. * * * 당시의 사디는 도미스였고, 그녀는 기르골과 나란히 앉은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연신 웃어대면서 서로 말을 나누는데, 고작 서너 번 만난 사이가 아니라 삼사 년은 알고 지낸 친구처럼 보였다. 참으로 사이좋아 보이는 모습. 하지만 바라보는 칼라인은 그 모습을 보자 자신의 마음이 썩어들어간다고 생각했다. 이건 불합리한 감정이란 걸 알지만, 웃는 도미스를 보자 기분이 더욱 나빠진 것이다. 우는 모습도 기분이 나쁘더니. 어떻게 웃는 모습까지 기분이 나쁜 거지? 칼라인은 도미스 본인에게 물어보고 싶단 충동이 들 정도였다. 넌 대체 뭐 하는 인간이길래 내게 온갖 기분 나쁜 느낌을 다 주느냐고. 그리고 그와 같은 방식은 아니겠으나, 칼라인의 옆에 선 안야 역시 도미스가 못마땅한 듯했다.
“기르골 씨는 동정심이 너무 많네요.”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하며 혀를 차는 그녀는, 칼라인 만큼이나 이 상황이 탐탁지 않게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칼라인은 자신도 저 인간 여자를 불쾌히 여기면서도, 안야가 저렇게 말하자 그것도 또 싫어서 괜히 도미스를 두둔했다.
“남들과 잘 어울리면 좋은 거지,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돕는 게 좋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뱉는 자신이 가식적으로 여겨졌으나, 안야는 그의 말에 순순히 인정했다.
“그건 그렇죠.”
기르골과 칼라인 덕에 그녀는 초대 황제로부터 영구한 영광의 자리를 약속받은 클레렌드 대공의 후계자로 자랐다.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는 어린 시절부터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높은 신분을 가지게 된 터라, 안야는 좀 오만한 구석이 있었다. 사실 안야 같은 환경에 놓인 귀족들과 비교하면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안야는 오만한 가운데에도 조금 특이한 점이 보였는데, 거만하게 남을 내려다보면서도 때때로 동정심과 정의감의 파편 같은 게 나타나긴 했다는 점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어쩔 거지?”
“뭐가요?”
“저 애가 네 의붓언니인 걸 알았잖나.”
“말이 언니지,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잖아요?”
하지만 도미스에 대한 동정심은 그녀를 ‘언니’라고 표현하는 칼라인의 물음에 바로 없어진 모양이었다. 안야가 날카롭게 도미스와 자신의 사이를 긋자 칼라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메이헴 부인이 딸로 길렀으면 자매 아닌가?”
“말도 안 돼.”
그러나 안야는 핏줄이 통하지 않으면 절대로 자매로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딱 잘라 재차 선을 그었다.
“뭐, 어머니를 위해 도와줄 순 있어요. 어머니가 마음 아픈 건 싫으니까. 하지만…… 자기 노력으로 살아갈 시도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들러붙으려는 사람은 싫어요.”
“넌 저 애와 제대로 이야기해 본 적도 없지 않나?”
“어머니한테서 보석을 받고 챙긴 걸 보면 알죠. 그 돈이면 더 안도와도 될걸요.”
휙 등을 돌린 안야는 칼라인에게 팔짱을 끼며 사랑스럽게 웃었다.
“가요, 칼라인. 화원을 보여줘요.”
칼라인은 순순히 그녀를 따라갔으나 고개는 한 번 더 기르골과 도미스 쪽으로 돌아갔고, 멀리서 환청처럼 들려오는 그녀의 웃음소리에 마음은 다시 갑갑해졌다. * * * 회상을 마친 칼라인은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은 늘 그대로구나 싶어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기르골을 ‘그런 쪽’으로 경계하진 않았다. 그는 제대로 미쳤고, 자신과 달리 로드를 존중하지 않으니까. 기르골이 뭘 알고 사디에게 저렇게 구는 건지,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건지 모르겠으나 상관없었다. 기르골의 로드를 향한 마음은 절벽에 도달할 때까지, 그리고 결국 절벽을 지나 떨어지고 말 때까지도 멈추지 못하고 질주하는 바퀴 빠진 마차나 다름없었다. 그이 사랑엔 존중이 없고 소유욕과 집착, 광기만이 가득했다. 로드가 받아줄 리 없었다.
‘그래야만 한다.’
세뇌하듯 스스로에게 속삭이면서도 기르골과 헤어진 라틸을 멀리서 쫓던 칼라인은, 갑자기 라틸이 그가 있는 방향을 정확히 쳐다보는 바람에 황급히 몸을 감추었다. * * *
‘누가 저기서 쳐다보는 거 같았는데?’
하지만 고개를 들어도 위에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도 영 찝찝해서 계속 지켜보았으나 마찬가지. 결국 라틸은 다시 궁전으로 돌아갔고, 비밀 장소로 가 가면을 벗은 다음 옷을 갈아입었다. 침실로 돌아가자 시녀들은 망토를 벗겨주고 침대를 정리해주고 머리를 다시 빗겨주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라틸은 푹신한 이불 안으로 재빨리 파고들어 갔다. * * * 그로부터 며칠간 라틸은 칼라인을 찾아가지 않았다. 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하렘 입구까지 걸어가다가도 다시 마음을 돌려 돌아갔다. 그에게 확실하게 해둘 생각이었다. 그가 또 다른 후궁을 계단에서 떠밀거나 하면 진짜로 화낼 거라고. 얼굴을 보고서 화내진 못하니, 이렇게라도 화났단 걸 전달해야 했다. 효과가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일주일 정도가 흘러갔을 무렵.
‘오늘은 타시르한테 예법을 가르쳐줘야겠네.’
라틸은 저녁 식사를 같이하면서 타시르가 부탁한 식사 예절을 알려주기로 했다. 머리가 좋으니 몇 번 안 배워도 바로 알겠지. 그 좋은 머리로 아직 못 배웠다는 게 의심스럽긴 하지만. 그런데 라틸이 타시르의 비상한 머리와 식사 예절 사이의 관계성을 떠올리며 업무를 보고 있을 때였다. 시종이 들어오더니 라틸에게 조용히 알렸다.
“폐하. 멜로시 영주가 찾아왔습니다.”
라틸은 환해서 얼굴을 들었다.
“멜로시 영주가?”
그는 황위 쟁탈전에서 가장 처음으로 라틸의 편에 선 인물이기도 했지만, 서넛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라틸은 대번에 기분이 좋아졌다. 혹시 서넛이 곧 돌아올 거란 소식을 가져왔나? 그러다가 다시 기분이 사그라들었다. 아니, 어쩌면 서넛이 ‘더러워서 집어치운다!’고 이제 기사단장직을 때려치웠단 소식을 가져왔을지도 몰라. 그런 소식을 사람을 시켜 전하기 힘드니 직접 온 거지.
“그런데 폐하. 저…… 울고 있습니다.”
걱정과 기대가 섞인 마음은, 시종의 이어진 보고에 완전히 사라졌다.
“울고 있다고?”
라틸이 놀라서 묻자 시종이 “예.”하고 대답했다. 라틸은 심장이 철렁했다. 울다니. 왜? 서넛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 시종장 역시 뒤에서 놀란 표정이었다.
“들어오라 해라. 어서.”
“예.”
시종이 나가자 바로 뒤에 들어온 멜로시 영주는, 보고처럼 얼굴이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라틸은 사람들에게 나가라 손짓하고는, 모두가 자리를 비켜주자 책상 뒤에서 일어나 영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괜찮은가? 서넛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영주가 라틸을 보자 더욱 왈칵 울음을 터트려서, 라틸은 조마조마해졌다.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왜 그러나? 말을 해야 알지!”
“폐하…… 폐하…… 우리 서넛이…….”
“서넛이 왜? 어디 다친 건가? 아파? 병이라도?”
‘뱀파이어도 병에 걸리나?’
“실종된 것 같습니다!”
영주가 울음과 섞어 외친 말에 라틸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북처럼 울렸다. 하지만 라틸은 곧 마음을 다잡고, 침착하게 영주를 빈 의자에 앉혔다.
“실종이라니? 서넛 경이 여행……갔단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냥 여행이 길어지는 건 아닐까?”
라틸은 타시르의 보고에 한 줌 희망을 품고 물었으나, 영주는 대번에 부정했다.
“그 애는 여행을 간 게 아닙니다, 폐하.”
“아니라고?”
“예. 쇼드 폴리에 나타났단 공동을 조사하러 간 겁니다. 남들에겐 여행이라 했지만요.”
라틸은 정말로 당황했다.
“서넛 경이 거길 왜?”
그 안에 괴물이 있단 걸 아니까. 그리고 서넛이 그러지 않았던가. 자기는 딱 한 번 뱀파이어에게 물린 약한 뱀파이어라고.
“모르겠습니다. 말하기론…….”
영주가 말을 하다 말고 라틸의 눈치를 보자, 라틸은 마음이 급해져서 얼른 말하라고 그의 등을 두드리고 싶어졌다.
“말하게. 전부.”
“자기가 거기 다녀오는 게 폐하께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만…….”
“!”
영주가 다시 흐느끼기 시작하자, 라틸은 마른세수를 하고서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이 상태로 돌아가긴 힘들겠지. 며칠 쉬었다 가게. 서넛 경은 내가 찾아볼 테니.”
* * * 영주는 영지로 돌아가 아들을 기다리고 싶었으나, 황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황제의 말처럼 너무 많이 울어서 눈앞이 잘 보이지 않은 탓이었다. 눈꺼풀은 퉁퉁 부어서 깜빡이기도 힘들었고 숨쉬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머리도 어질어질한 것이 탈수증세가 오는 듯했다. 영주는 하루라도 쉬었다 가기 위해 황제의 비서에게 안내를 받아 회랑을 어렵게 걸어갔다. 그런데 걸어가고 있자니 멀리서 그를 지켜보는 오싹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쪽을 보자 칼라인이 보였다. 그의 정체를 아는 영주는 희미하게 묵례했으나, 칼라인은 인사를 받아주지도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그 빤한 시선에서, 영주는 그가 자신에게 볼일이 있단 걸 눈치채고 비서에게 말했다.
“위치를 알려주면 내가 알아서 가겠다. 몇 번 머문 적이 있으니. 머리가 아파서 좀 돌아다니다 가고 싶군.”
비서가 영주에게 방 위치를 알려주고 가자, 영주는 칼라인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칼라인은 영주를 고요히 기다리다가, 그가 손이 닿는 지점에 오자 대번에 낚아채어 멱살을 잡고는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끌고 갔다. 칼라인은 아무도 없는 곳에 가자 영주를 놓아주고는 이를 무섭게 드러냈다.
“왜 그런 얘길 폐하께 한 거지?”
그 얘기를 듣자마자 영주는 멈췄던 눈물을 다시 왈칵 쏟았다. 왜 황제에게 그 이야기를 했냐고?
“우리는 나이트를 모시는 가문일 뿐이라 당신들 세계에 대해 잘 알진 못하지.”
“?”
“하지만 로드가 가장 강력하고 위대란 존재란 건 들어 아네.”
“!”
“내 아들은 강해. 아주 많이. 그런 서넛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그 애를 구할 수 있는 건 그보다 강한 폐하밖에 없지 않나.”
영주는 자신을 매섭게 쳐다보는 칼라인을 노려보며 엉엉 더 크게 울었다.
“자네에겐 그냥 나이트일 뿐이겠지만 내겐 자식이네. 아무리 강해도 그냥 내 자식이라고!”
하늘이 무너진 듯 우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칼라인은 결국 더 추궁하지 못하고 몸을 돌려야 했다.
“폐하께 부담이 되지 마라. ……내가 찾으러 갈 테니.”
* * * 칼라인은 그 길로 곧장 방으로 돌아가 외출할 준비를 시작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어차피 요즘 라틸은 그에게 오지도 않으니. 그러나 문이 열리자마자 방 안을 좋은 향기가 가득 채웠고, 그는 들어온 이가 황제란 걸 알아차리고 황급히 몸을 돌렸다.
“주인?”
라틸은 내내 칼라인을 피해 다니다가 지금 오니 좀 머쓱한 듯 가까이 오지 않고 물었다.
“물어볼 게 있는데.”
그러다 시선이 칼라인이 싸던 짐가방에 닿자, 그는 가방을 뒤로 감추었다.
“물어보십시오.”
“뱀파이어 속도로 쇼드 폴리에 빨리 다녀오면 며칠 걸리지?”
칼라인은 라틸이 자신에게 서넛을 구해오란 명령을 할 거라 생각하고서 솔직하게 대답했다.
“왕복 이틀입니다. 하지만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니…… 시간이 더 걸리겠지요.”
“알았어.”
그러나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아서며 이렇게 말했다.
“아, 짐은 도로 풀어.”
“예?”
놀라서 되물었으나 라틸은 이미 나간 후였다. * * * 칼라인의 예상과 달리 라틸은 서넛을 구하러 직접 갈 생각이었다. 정확히는 기르골과 함께.
‘훈련하러 다녀오자고 쉽게 말할 정도였으니. 기르골은 괴물들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을 거야.’
일주일은 절대로 안 되지만, 사흘이면 괜찮았다. 하지만 라틸은 이전과 같은 실수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기에, 떠나기에 앞서 후궁들을 모두 부른 다음 자신이 사흘에서 나흘간 부재할 걸 알리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알려주었다. 나는 아픈 것으로 해둘 거다, 너희는 평소처럼 생활하되 돌아가면서 내 병문안을 와라, 한시가 급한 안건이 생기면 다 같이 회의한 다음 국서용 인장을 사용할 수 있게 해두겠다, 인장을 찍기 전엔 아트락시 공작과 재상, 시종장과 토론하도록 해라, 그들에게도 내 부재를 알려 두겠다 등등. 칼라인은 라틸이 지시를 내릴 동안에는 조용히 있었으나, 이후 라틸을 따로 찾아가 말렸다.
“위험합니다. 제가 다녀오는 게 낫습니다.”
하지만 라틸은 이미 자신이 가기로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아니. 내가 가는 게 낫다.”
‘로드든 대적자든, 하여튼 나는 그 둘 중 하나란 거잖아. 그러면 내가 가는 게 가장 안전하겠지. 숨겨진 힘이 어디에 있긴 있을 테니.’
* * * 이후 라틸은 밤을 새워서 안건을 처리한 다음, 아트락시 공작과 시종장, 재상을 불러서 후궁들에게 한 말과 같은 말을 하고 자신은 기르골을 찾아갔다. 기르골은 저택에서 화단을 가꾸고 있었는데, 라틸을 보자 훈련을 하러 온 줄 알고 반갑게 맞이하려다가, 라틸이 든 손가방을 보고 눈썹을 올렸다.
“그건 뭐지, 제자님?”
설명할 시간도 부족해서, 라틸은 일단 두 손부터 올렸다.
“쇼드 폴리로 가자. 왕복 사흘 잡아서.”
“뭐? 아가씨. 가는 데만도 그 정도는 걸려. 빨리 가도.”
“그래도.”
“그래도, 가 아니라니까? 그리고 그 엉거주춤하게 올라온 손은 뭐야?”
“안고 가줘.”
“!”
“업고 가도 좋고.”
라틸의 당당한 요구에 기르골은 진심으로 당황해서 입을 뻐끔거렸다.
“아니, 뭐 이런 대적자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