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네가 범인일 줄이야.2022.03.16.
라틸이 바라본 방향에 있는 건 칼라인이었다. 평소와 같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칼라인. 눈이 마주치자 희미하게 웃는 칼라인. 그 모습은 평소처럼 그저 멋지고. 듬직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라틸은 그 외모의 아찔함과 실망감을 동시에 느꼈다. 칼라인이 왜 대신관을 계단에서 밀었는지 이유는 알 수 있었다.
‘칼라인은 뱀파이어니까.’
대신관과 둘은 상극이니 위협이 됐겠지. 하지만 자신의 후궁인 칼라인이 자신의 또 다른 후궁이자, 보호하기 위해 데려온 대신관을 밀었다는 게 몹시 실망스러웠다.
“…….”
라틸이 말없이 칼라인을 바라보자 옆에서 시종이 “폐하?”하고 불렀다. 더 칼라인을 보며 모두 그가 범인이란 걸 알겠지. 그건 원하지 않는다.
“해산.”
라틸은 더 추궁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벌써?]
[아니, 난 폐하가 뭐 하신 건지 모르겠어.]
[범인을 알아서 그만두시는 거야 아니면 경고를 하신 거야?]
[칼라인 님을 쳐다보지 않으셨나?]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와 속마음이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뒤얽혀 귓가로 쏟아졌다. 궁인들은 정말 이게 끝인가 머뭇거렸으나, 라틸이 정말로 먼저 홀을 빠져나가자 자기들도 조심스럽게 그곳에서 나갔다. 라틸은 하렘 밖으로 곧장 걸어갔다. 일직선으로.
“주인.”
하필 칼라인이 뒤에서 다가와 불렀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주인?”
그가 좀 더 앞으로 오더니 걸음을 맞추며 옆에서 나란히 걸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주인. 왜 그럽니까?”
하지만 재차 묻는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에, 라틸은 결국 입술을 열었다.
“바쁜 일이 있어서.”
그나마도 ‘네 기억을 봤다. 네가 범인이더라?’는 말은 나오지 않아서, 라틸은 적당히 둘러대고 걸어갔다. 라틸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떠나자 칼라인은 더 따라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황제의 차가운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최근까지도 다정하던 황제가 갑자기 냉랭하게 나오자, 오래 산 그조차도 혼란스러웠다. 황제는 그를 감정적으로 만드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이기에 더욱.
“풋.”
이 와중에 누군가는 뒤에서 대놓고 비웃는 소리를 낸다. 돌아보자 클라인이 엄청나게 깐죽이는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노골적이고 과장된 비웃음을 띤 채.
“황자님. 우리 저쪽으로 가요……. 네? 얼른.”
겁먹은 바닐이 클라인 황자를 데리고 도망가자, 칼라인은 다시 황제가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 * * 상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단 건 업무를 보는 데 최적화된 능력이었나보다. 라틸은 집무실에서 일하는 내내 몇십 번이나 그 생각을 했다. 이전에는 몰랐으나, 관리들은 평소엔 라틸을 상대로 자기 의견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의견이 있어도 죄다 돌려 말하거나,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넘어갔던 것이다. 이전에는 그렇더라도 알 도리가 없었는데. 오늘은 그들이 꺼내지 못한 의견까지 다 들을 수 있다 보니, 관리들이 어물어물 넘어가도 라틸 쪽에서 먼저 운을 띄워줄 수 있었다. 그러면 관리들은 안도해서 자기들 생각을 솔직하게 밝혔고, 일 처리는 훨씬 수월해졌다. 하지만 빨라진 업무 속도와 달리 라틸은 여전히 심란했다. 업무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폐하. 목욕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래도 어찌어찌 하루를 보내고 따뜻한 물에 푹 몸을 담그려는 찰나. 작은 종에서 ‘딸랑’ 예쁜 소리가 났다. 라틸은 욕실로 걸어가다가 홀린 듯 멈추어섰다.
“폐하. 칼라인 님이 찾아왔습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시녀의 목소리조차 종소리와 연결된 것 같았다. 라틸은 욕실 문을 지그시 쳐다보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들어오라 해.”
지금 같은 기분으로는 칼라인을 만나고 싶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칼라인과 타시르는 안 그래도 평민 출신이란 이유로 다른 후궁들에 비해 평가를 박하게 받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찾아온 칼라인을 돌려보낸다면, 안 좋은 소문까지 날지도 몰랐다. 라틸은 목욕을 도와주려 대기하던 시녀에게 나가보라 손짓하고 자신은 소파로 가 앉았다. 칼라인은 시녀가 나가는 것과 거의 동시에 들어왔다. 들어온 칼라인은 바로 다가오는 대신 라틸과 눈을 맞추고 잠시 서 있었다. 라틸 역시 소파에 기댄 채 그를 같이 쳐다보았다. 라틸의 눈이 욱신거릴 정도가 되어서야 칼라인은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제게 왜 갑자기 화를 내신 건지 알고 싶어 왔습니다.”
“화를 냈단 건 아나 봐.”
“모를 수가 없지요.”
칼라인은 절대로 눈을 돌리지 않는다. 라틸은 그가 자신을 원망하듯 바라보자, 솔직하게 말해줄까 말까 망설이다가 전자를 선택했다.
“범인을 추궁하다가. 네가 범인이란 걸 알아버렸다.”
놀라거나 찔려 할 거라 여겼으나, 칼라인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놀란 기색도 없었다.
“안 놀라네.”
거기에 오히려 라틸이 더 놀라 묻자, 그는 덤덤히 대답했다.
“그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절 쳐다보시기에, 그럴 거란 짐작은 했습니다.”
“그래. 머리 좋구나. 그러면 내 화가 바로 안 풀릴 것도 알겠지. 머리 좋으니까. 돌아가.”
라틸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나 칼라인은 돌아가기는커녕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한쪽 무릎을 굽혀 의자에 앉은 라틸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라틸은 휙 고개를 돌려 자신이 다른 쪽을 봐버렸다.
“주인. 절 안 보실 겁니까. 이렇게 계속?”
하지만 칼라인이 반칙 같은 목소리를 사용하자, 라틸은 말까지 무시하진 못했고, 한숨을 내쉬고서 물었다.
“혹시 클라인 부적이 없어진 것도 네가 한 짓이야?”
전에 라나문이 봤다고 했을 땐 믿지 않았다. 칼라인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있는 뱀파이어 같았다.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 건가.]
칼라인의 속마음을 통해, 그가 대답하기에 앞서 대답을 알아낸 라틸은 팔에 머리를 올려두고 눈을 질끈 감았다.
“맞습니다.”
칼라인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라틸은 당황스러웠다. 절대로 안 그럴 것 같은 사람, 아니, 뱀파이어가 저런 짓들을 했다니. 이젠 황당하다 못해 곤혹스러울 정도였다.
“왜 그랬어?”
“암투 때문은 아닙니다. 종족 때문입니다.”
[그 황자의 부적도, 대신관도 내겐 해로우니까.]
그의 속마음이 부연 설명을 덧붙이자 라틸은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칼라인은 계속 말을 이었다.
“부적은 부적만 노린 거고. 대신관도 죽일 마음은 없었습니다. 겁을 줘서 쫓아낼 생각은 했지만요.”
[거기서 떠밀어도 안 죽는다고 말씀드리면 더 화내시겠지. 둘을 진짜 죽이려 했으면 벌써 죽였을 거라던가…… 이런 말을 하면 주인이 더 혐오할까.]
칼라인의 목소리와 속마음이 번갈아 라틸을 들쑤셨다. 라틸은 이마를 짚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심란했다. 칼라인 본인의 말마따나, 자신은 자신대로 그들 곁에 있기 괴로우니 나름대로 대책을 세운 것 같아 무작정 화를 내기도 그런데, 그렇다고 용서하기도 난감했다.
“주인.”
[주인. 날 좀 봐줘요. 그렇게 날 피하지 말아요.]
칼라인에게서 들려오는 애절한 속마음에, 라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거리다가 결국 손을 저으며 명령했다.
“일단 돌아가.”
“주인이 화났는데 돌아가라고 하시면…….”
“화를 풀고 싶으니 돌아가라는 거다. 나도 생각을 좀 정리해야 하니까.”
* * * 칼라인이 돌아간 뒤. 라틸은 시녀가 준비한 목욕물에 목욕했다. 하지만 자진 않았다. 라틸은 목욕을 하자마자 뜬금없이 산책을 하겠다며 방을 나왔고, 그 길로 곧장 자신의 비밀 장소로 간 다음 ‘사디’의 모습을 하고 궁전을 빠져나갔다. 마음이 혼란해서 잠도 못 자겠고, 심장이 이상하게 뛰어서 자꾸 초조하고 불안하니, 아예 다른 사람 모습으로 있고 싶어서였다. 다른 사람 모습이 되면 고민으로부터 좀 더 멀어진 기분이니까. 그렇게 거리로 나오자, 라틸은 그냥 이참에 기르골까지 만나서 쇼드 폴리에 대해 물어보기로 했다. 상대의 속마음이 훤히 들리는 이런 날이니, 기르골 속마음도 좀 들여다보고. 그런 ’사디‘의 모습을 칼라인이 궁전 지붕 위에서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단 걸, 라틸은 알지 못했다. * * * 누군가의 속마음을 읽는 능력이 생겼다지만 저 지붕 꼭대기에서 쳐다보는 속마음까지는 읽기 힘들다. 라틸은 칼라인이 자신을 지켜보는 걸 모르고 기르골에게로 바로 뛰어갔다. 이번에도 그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 누구인지 모르겠는 부하가 문을 열어줄 거라 생각했으나, 단단한 문을 노크하기도 전에 모습을 드러낸 건 그 부하가 아니라 기르골이었다. 라틸은 기르골을 보러 오면서, 그가 자신의 손가락을 핥았는데 제대로 대화할 수 있을지 잠시 걱정했으나, 막상 얼굴을 보자 말이 잘 나왔다.
“어떻게 알았어? 노크도 안 하고 왔는데?”
“아가씨랑 나는 운명인가 봐.”
“소리가 들렸구나.”
“들어올래?”
하지만 기르골이 집 안을 가리키며 권했을 때는 저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무서워서 싫어.”
“밤중에 날 보러온 건 우리 제자님인데.”
“여기까진 안 무서워.”
라틸의 이중적인 대답에 기르골은 문가에 기대서더니 라틸을 놀려댔다.
“그럼 여긴 왜 왔지? 다음 수업 전까지 무서움을 떨치려고? 공포 체험 이런 건가?”
“물어볼 거 있어서.”
“호기심이 공포를 이긴 거야?”
어느 지점이 그리 즐거운 건지 기르골이 혼자서 웃음을 터트렸다.
“굉장해. 계산 하난 확실한 제자님이네.”
어찌 보면 빈정대는 말 같기도 했으나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라틸은 기르골을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에게서 속마음이 들려오지 않았단 걸 깨달았다. 설마. 여기까지 오는 동안 능력이 다시 원래 수준으로 내려갔나?
“그래, 뭐가 궁금해서 이 밤중에 찾아왔어?”
“쇼드 폴리로 수업 가자 했잖아.”
“가려고?”
“그 안에 뭐가 있어? 안에 괴물이 있는 거야?”
“……그거 물어보려고 이 시간에 왔어?”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 기르골은 라틸이 고개를 끄덕이자 혀를 차더니 웃으면서 시계를 다시 넣었다.
“호기심이 많은 제자님이네. 근데 정확히는 나도 몰라. 뭔가 있는진 가봐야 알지. 괴물이길 바라고 있지만.”
“그럼 로드란 존재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줄 순 없어?”
“아가씨가 아는 거랑 크게 다르진 않을걸.”
역시 여기 오는 동안 속마음 읽은 효과가 떨어진 게 분명하다고, 라틸은 이 지점에서 확신했다. 기르골이 쇼드 폴리 이야기에 ‘모른다’고 대답할 때는 솔직하게 말하는 기색이었는데. ‘로드에 대해 잘 모른다’고 대답할 때는 대답을 피하는 기색이 뚜렷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대답에도 그의 속마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저자의 속내도 한번 읽어보고 싶었는데. 아쉽긴 하지만 큰 볼일이 있어 온 건 아니었기에, 라틸은 순순히 대답하고 돌아섰다.
“이 밤중에 깨워놓고 그냥 가려고?”
그런데 막상 가려고 하니, 기르골이 아까보다 좀 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그냥 안 가면?”
라틸이 떨떠름하게 묻자, 그는 한 손가락을 갈퀴처럼 구부려 자기 목덜미 옷깃을 잡아당기며 도발했다.
“호기심 많다며. 원한다면 뱀파이어의 몸에 대해 탐구할 기회를 줄 수 있는데.”
라틸은 잠시 멍하게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가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지 장난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저렇게 나오자 적어도 며칠 전 보았을 때. 손가락에 흐르는 피를 핥을 때보다는 훨씬 편하게 느껴졌다. 일부러 그걸 의도하고서 저러는진 모르겠지만.
“제자님?”
그러다 기르골이 윙크까지 하자, 라틸은 픽 웃고서 돌아섰다.
“방금 그 미소 뭐야 아가씨? 그거 비웃음이야?”
“…….”
“아니지? 부끄러운 웃음 그런 거지? 설마. 가소로워서 웃는 거야?”
기르골이 계속 쫓아오며 물어대자, 나중에는 아예 크게 웃음이 터져 나오기까지 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은 사이좋은 연인, 혹은 사랑을 시작하기 전의 연인처럼 보였으나 밤중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라틸도, 기르골도 본인들도 자기들이 얼마나 사이가 좋아 보이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먼발치에서 내려다보는 칼라인을 제외하고는.